소개
당 건부 연간(874~879), 운암사는 황명으로 두촨산에 세워졌다. 오늘날 쓰촨성 장유시 우두진에 해당하며, 세 봉우리를 등진 산허리에 자리한다. 사역은 동서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동원은 불교 승려가 살며 수행하는 선림이었고 서원은 도교의 도관이었다.
남송 순희 8년(1181), 절 안에 비천장을 세웠고 원 지정 연간(1341~1368)에 다시 수리했다. 비천장은 전각 안에 놓인 팔각 탑 모양 목조물로, 중심 수직축을 따라 회전하는 전륜경장이다. 경장은 본래 종교 경전을 보관하는 시설이다. 운암사는 이 형식을 빌려 몸체와 상부 누각 사이에 도교 신들의 목조상을 배치해 봉안했다. 작은 전각들이 층층이 올라가고 회랑으로 이어지며, 처마 아래에는 공포, 복도 가장자리에는 난간이 있다. 이를 통틀어 ‘천궁누각’이라 부른다. 비천장을 수용한 비천장전은 사역 서쪽에 있다.
두촨산 정상에는 동악사 같은 사당이 있었고 봉우리 사이는 쇠사슬로 이어졌다. 명 만력 연간, 용안부 관리 주중렴이 정상에 올라 등산객이 쉴 정자가 없음을 보고 자신의 녹봉을 내놓았다. 그는 오계에서 목재를 사서 장인에게 정자를 짓게 했다.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절벽을 내려다보는 정자는 ‘초연’이라 이름 붙였다. 주중렴은 세 봉우리의 석축도 정비하고 동서의 세 사당을 수리했다. 부역이 주민의 생업을 해치지 않고 장인들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작업하도록 완공을 서두르지 않았다.[1]
명말의 전란 속에서 비천장은 살아남았다. 정상의 초연정은 오래되어 무너졌다. 강희 7년(1668) 봄, 장유 출신 거인 양정걸이 비용을 내어 수리하고 도사 원진에게 일을 맡겼다. 용안부의 선비 함기미는 목재를 마련했고 현지인 장거는 장인을 모았다. 정자는 그해 가을 완공됐다. 산정의 동악정전도 가운데 들보가 썩어 수리가 더 시급했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두 공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이에 모금 문서와 탁발로 자금을 모았으며 장영, 여인목과 산의 관리인 장통 등이 함께 힘을 보탰다. 동악전 공사는 강희 11년(1672) 4월에야 끝났다.[2]
강희 연간 후반, 주장이 장유 지현으로 재직할 때 정상의 동악묘는 다시 퇴락하고 있었다. 산에서 오래 지낸 승려 요연은 병으로 떠나려 했으나 주장이 남아서 수리를 이끌어 달라고 만류했다. 요연은 산에서 나무와 흙을 구하고 장인을 지휘했다. 정상의 동악묘 수리가 끝나자 요연은 주장에게 경위를 돌에 새길 글을 부탁했다.[3] 산허리 운암사 서쪽의 비천장전도 관리가 소홀해진 적이 있었다. 들보가 기울고 기와가 갈라졌으며 새와 쥐가 깃들고 비천장의 목조 신상도 훼손됐다. 절에 사는 한 승려가 수리를 서원했다. 가진 돈이 없어 산에서 땔감과 물을 나르며 공사비를 헤아렸다. 당시 비천장은 여전히 밀어서 돌릴 수 있었다.[4]
옹정 13년(1735), 산허리 운암사의 대웅전이 중건됐다. 중앙 불감의 대좌에는 여섯 나한 장면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 둘은 ‘불재심두’와 ‘지상신루’이다. 인물과 배경은 고궁박물원 소장 청대 궁정화가 냉매의 『나한도』 화첩과 매우 비슷하지만 세부는 다르다. 여러 목조 장면에는 화첩보다 피어오르는 구름이 더 많고, 화첩의 흰 수염 노인에 해당하는 인물은 목조에서 젊은 남자로 표현됐다.[5]
1964년 고건축 전문가 나철문이 비천장을 촬영해 목조 구조의 모습을 남겼다. 1970년대에도 한 사람이 밀어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원촨 지진 전부터 비천장전에는 빗물이 새고 가구가 변형되는 문제가 생겨 비천장 몸체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더는 회전하지 않았다.[6]
2008년 5월 12일 원촨 지진으로 운암사 건물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산정의 동악전 등이 무너지고 비천장전 벽도 손상됐다. 장유시 문물관리소장과 운암사 문물관리소장을 겸하던 장민은 사무실 책임자 온검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건물을 하나씩 조사하고 촬영한 뒤 성과 국가 문물 당국에 보고했다. 그날부터 직원들이 교대로 비천장전과 유물 창고를 지켰다. 5월 18일 새벽의 여진으로 벽체 붕괴가 심해졌다. 그날 오전 장민은 직원들을 이끌고 비천장전과 전륜경전에 보관하던 도교 목조 인물상 72점을 산 아래로 옮겼다. 송·원·청대의 이 조각들은 관리소가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7]
지진 뒤 수리할 때 지반을 다지고 가구를 바로잡아도 비천장은 원활히 돌지 않았다. 아래쪽 회전축을 조사하기 위해 작업자들은 지지대와 강철 케이블로 몸체를 고정하고 잭 다섯 대로 약 5톤의 구조물 전체를 들어 올렸다. 34센티미터 올릴 때마다 수준기로 균형을 확인했고 25센티미터를 올리는 데 34개월이 걸렸다. 들어 올린 뒤에는 옛 윤활유가 두꺼운 찌꺼기로 굳어 활주부를 막았음을 발견했다. 찌꺼기를 제거하고 새 윤활유를 넣자 비천장이 다시 돌았다. 2018년 6월, 3년 넘게 이어진 공사가 완료됐다고 발표되었으며 복원된 비천장은 세 사람이 밀어 회전시킬 수 있었다.[8]
역사 문헌
『장유현지』
云岩寺在图山。唐乾符间敕建,分东西二院,东禅林,西道观。后遭兵乱,院宇荒废,僧了然重修。
운암사는 도산에 있다. 당 건부 연간에 황명으로 건립하여 동서 두 원으로 나누었다. 동쪽은 선림, 서쪽은 도관이다. 뒤에 전란으로 건물이 황폐해지자 승려 요연이 중수했다.
飞天藏在窦图山。宋淳熙八年建,元至正中重葺。明季兵火,惟此独存。
비천장은 두도산에 있다. 송 순희 8년에 건립하고 원 지정 연간에 중수했다. 명말의 전란 때 이것만 홀로 남았다.
上人手中无一钱,搬柴运水寒岩前。花龛突如插天半,巨锥一举千灯悬。忆昔开堂始南宋,飞阁断自淳熙年。嵌空枘凿呈巧制,蚁孔曲斗难针穿。五丁神力不易到,经声雷动刚风旋。逮元至正乃重葺,糢糊彩凤犹高骞。额书尚题梓州守,藓甲蚀笔蛟龙缠。厥后梁益屡劫火,灵光古殿仍巍然。穴中鸟鼠阅人久,木寇金毁神无完。虹梁半欹鸳瓦裂,谁与举废悭前缘。云岩上人矢愿力,土木穷算盈十千。不日不月规缔造,好事肯令他人专。自言经营惨淡处,对佛𫖯首忧如煎。十年身住心不住,奔轮无恙推虚船。法云低晕白毫现,慧日高铸黄珠圆。铜瓶倒垂收塔影,贝叶细帙供香筵。巴西妇孺齐合掌,此举不朽堪流传。搜寻古碣乏剩字,琉璃碑嫩生秋烟。他年只恐锡飞去,怅望野鹤空摩天。
상인은 손에 한 푼도 없이 찬 바위 앞에서 땔감과 물을 나른다. 화려한 감실은 하늘 중턱에 솟고 큰 축이 천 등불을 매단다. 남송에 처음 열렸으니 높은 누각은 순희 때부터다. 빈틈과 장부의 교묘함, 개미구멍 같은 구멍과 굽은 공포에는 바늘도 통하기 어렵다. 다섯 거인의 힘조차 미치기 어렵고 경 소리는 우레, 거센 바람은 돈다. 원 지정에 중수하여 흐릿한 봉황 그림도 높이 난다. 편액에는 아직 재주 태수의 글이 있고 용 같은 필획은 이끼가 갉았다. 이후 양·익의 땅이 여러 전화를 겪어도 옛 전각은 영광전처럼 우뚝 남았다. 구멍에는 오래 새와 쥐가 살고 신상은 훼손되어 온전한 것이 없다. 무지개 들보는 기울고 기와는 갈라졌으니 누가 폐허를 일으킬까. 운암의 상인은 서원하여 토목비 수만을 헤아린다. 날마다 계획하며 좋은 일을 남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고심한 경영을 말하며 부처 앞에 고개 숙이고 마음을 태운다. 십 년 몸은 머물러도 마음은 쉬지 못하나 바퀴는 무사해 빈 배처럼 밀린다. 법운은 낮고 백호는 나타나며 지혜의 해는 황금 구슬을 빚는다. 거꾸로 매단 청동 병에 탑 그림자가 비치고 가는 패엽 경전은 향탁에 놓인다. 파서의 아낙과 아이가 합장하니 이 일은 영원히 전할 만하다. 옛 비석을 찾아도 글자는 드물고 유리 비석에 가을 안개가 인다. 훗날 석장이 날아갈까 두려워, 외로운 학이 하늘로 가는 것을 쓸쓸히 바라본다.
『두도산 초연정기』
余少读吕氏春秋,考天下九山,心窃慕之。长而逐坐车马,足迹所至,得躐九山之槪。然皆富于宫阙楼观,且在名都巨邑,为名公贤士所品题,而其迹始昭显。若夫奇伟秀绝,本于大块之生成者,不过王屋、太华、太行、孟门四山而己。始知古今胜地,多不符所载,以山之得名在人也。江油虽蜀西僻壤,治北有窦图山,山之高,著于绵、剑,双峰峭拔,巍然如阙,路盘绕而上,穷右峰之顶,有东岳祠,左峰梯迳不通,祠前横铁索以渡,香火之盛,甲于一方,而古碑无可稽。惟飞天藏钟磬,有宋元年号。铁锁桥之设,俗传子明所创,无乃以踪迹怪异,神其说以欺人耳。故登临者,至望仙台见险,至石门见奇。迨夫蹑巉岩,距虎豹,攀附而升,元览𥄳槪,握兹山之上游者,在岱宇之南,索桥之西焉。
젊어서 『여씨춘추』를 읽으며 천하 아홉 산을 살펴 마음으로 사모했다. 자라 수레와 말을 타고 다니며 대부분을 보았다. 그러나 궁궐과 누각이 많고 큰 도시에 가까우며 명사들이 칭송해 이름난 곳이었다. 자연이 낳은 기이하고 빼어난 모습으로는 왕옥·태화·태행·맹문 네 산뿐이었다. 명승이 기록과 다른 경우가 많고 산의 이름은 사람에게 달렸음을 알았다. 장유는 촉 서쪽 외진 곳이지만 현 북쪽 두도산은 면·검에 이름 높다. 쌍봉은 문루처럼 솟았다. 굽은 길을 따라 오른쪽 정상에 가면 동악사가 있고, 왼쪽에는 계단이 없어 사당 앞에 쇠사슬을 걸어 건넌다. 향화는 지방에서 가장 성하지만 옛 비석은 상고할 수 없다. 비천장의 종과 경쇠에만 송·원 연호가 있다. 자명이 쇠사슬 다리를 만들었다는 속설은 기이한 행적으로 신비를 꾸며 사람을 속임이 아닌가. 망선대에서 위험을, 석문에서 기이함을 본다. 그러나 바위를 밟고 호랑이·표범 같은 절벽을 지나 매달려 올라 전경을 얻는 곳은 사당 남쪽, 사슬 다리 서쪽이다.
客至靡不徜徉眺望,而无亭舍止息,以抒不穷之趣,未免阙然于中。乙酉孟冬,龙安司理朱公奉檄视邑,至旬月为窦篅之游,税驾履巅,爽瞻而叹曰:山乎山乎!山不负人,而人可负山乎?乃度地势,谋为宇,顾私心计之,而未告人也。再逾月,仍往一观,筹其费,捐俸金若干许,市木午溪,授匠作亭。亭之高,翼然独耸,四望群山,如在杯案。外夹栏栅,俯临千仞,又于三峰甃砌严整,东西三祠一时并葺。工始于腊初,落成于是岁七月。公不忍以官役夺民,且欲匠上缓图自善,故不务欲速如此。工竣之日,公具奠白神,集乡大夫、属吏䜩于亭,名其亭曰超然。问记于余。余惟山之来,无亭而亭成。于今日,无论榱甍薄汉,丹雘连云,即长泓带卷,万山屏列,娑萝倒悬,虹梁偃卧,远树笼烟,平川幂翠,景物映发,依依在目。
손님은 모두 경치를 즐기지만 쉴 정자가 없어 흥취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을유년 초겨울, 용안 사법관 주공이 명을 받아 현을 살폈다. 한 달쯤 뒤 두촨을 유람하여 정상에서 외쳤다. ‘산아! 산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지세를 보고 건물을 꾀하고 속으로 비용을 헤아렸으나 알리지 않았다. 한 달 남짓 후 다시 와서 비용을 정하고 녹봉을 내어 오계에서 목재를 사 장인에게 정자를 맡겼다. 날개 편 듯 홀로 솟아 사방 산이 탁자 위에 놓인 듯했다. 난간 밖으로 깊은 벼랑을 굽어보았다. 세 봉우리 석축을 정비하고 동서 세 사당을 함께 고쳤다. 글은 섣달 초에 시작해 칠월에 끝났다고 기록한다. 공은 부역으로 민생을 빼앗지 않고 장인도 천천히 잘 만들기를 바라 서두르지 않았다. 완공일에는 신에게 제사하고 고을 선비와 속관을 불러 잔치하며 초연이라 이름하고 내게 기문을 청했다. 산은 오래 정자가 없다가 오늘 생겼다. 높은 마룻대와 빛나는 채색 외에도 굽은 깊은 물, 병풍 같은 산, 늘어진 나무, 무지개 들보, 안개 낀 먼 숲과 푸른 평지가 눈앞에서 서로 빛난다.
于斯时也,揽山川之清晖,慕仙人之遐举,则天籁清,尘想绝,浩浩乎直欲御风乘气,以游于无穷,而物我形骸,不在胸襟之内矣。公之为是亭也,岂特赋诗吊古,酾酒放歌己哉?
산천의 맑은 빛을 보고 신선의 먼 길을 생각하면 자연의 소리가 맑아지고 속념이 사라진다. 바람을 타고 무궁으로 가 몸과 나, 사물의 구별조차 마음에서 벗어날 듯하다. 공이 정자를 지은 뜻이 어찌 시를 읊고 옛일을 생각하며 술 따르고 노래하는 것뿐이겠는가?
公文章有藻誉,为治宽平,议狱惟缓。莅任以来,急公恤隐,远迩颂德。暇日绎左国杜诗,洒洒自适。然则超然之趣,盖得诸心而托诸亭也。他日好奇之士,列窦篅于九山,不以公重耶?公江右变福人,弱冠举于乡,讳仲廉,字中甫,察吾其别号云。
공은 문장에 명망이 있고 정치는 너그럽고 공평하며 재판은 신중하다. 부임 이후 공무에 힘쓰고 백성의 숨은 고통을 돌봐 원근에서 칭송한다. 여가에는 『좌전』·『국어』와 두보의 시를 읽으며 자유롭게 즐긴다. 초연의 흥취를 마음에서 얻어 정자에 맡긴 것이다. 후세 호사가가 두촨을 아홉 산에 넣는다면 공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은 강우의 변복이라 적힌 곳 출신으로 젊어 향시에 급제했다. 이름은 중렴, 자는 중보, 호는 찰오다.
『당대 초연정 및 동악전 중수기』
余尝读坡公超然亭记,而知身游物外,无往而不自得,然未见其地之超然也。县东北十五里许,有图山者,昔唐彰明主簿窦子明,羡其风云所摅,山川所带,幽岫穷崖,人兽两绝,弃官修炼于此,脱蜕崖间,故以窦冠山名。双峰并峙,左崖建窦真宝殿,右崖建东岳行宫。自宋元迄今,两岸天堑,无路可通。相传云子明系铁绳二条,以通人迹,跨鲸鲵于海市,驾虹霓而蜒蜿,传虽诞而实奇。坪下有飞天,藏元真观、化主殿、清虚观、三清观、炳灵宫。由此而登,花鸟送人,名曰境入蓬壶。再登,人从隙过,名曰人间天上。三登,人与云遇,名曰碧云洞天。四登,山如刀截而复断,名曰升仙桥。陟巅四望无际,山水齐观。春淡冶如笑,夏苍翠如滴,秋明净如妆,冬惨淡如睡,诚山之超然者也。
소동파의 『초연정기』를 읽고 세속 밖에 살면 어디서든 자족함을 알았으나 그런 땅은 못 보았다. 현 동북 십오 리쯤 도산이 있다. 당의 창명 주부 두자명이 구름과 산천을 사랑해 관직을 버리고 사람과 짐승 없는 절벽에서 수련하다 탈화했다 하여 두를 산 이름에 붙였다. 두 봉우리가 나란히 서 왼쪽에는 두진보전, 오른쪽에는 동악행궁이 있다. 송원 이래 양쪽은 길 없는 천험이다. 자명이 철승 두 줄을 걸었다고 하는데, 신기루 속 바다짐승을 타고 구불거리는 무지개를 건너는 듯하다. 설화는 허황하나 실경은 기이하다. 아래에는 비천장, 원진관, 화주전, 청허관, 삼청관, 병령궁이 있다. 오르면 꽃과 새가 맞는 ‘경입봉호’, 다시 틈을 지나는 ‘인간천상’, 구름과 만나는 ‘벽운동천’, 칼로 잘린 듯한 ‘승선교’에 이른다. 정상은 산수가 끝없다. 봄은 웃듯 부드럽고 여름은 물들 듯 푸르며 가을은 단장하듯 밝고 겨울은 잠들듯 어둡다. 참으로 초연한 산이다.
万历时,龙安司理朱讳仲廉,登眺其间,见长烟一空,皎月千里,心旷神怡,惜无止息处,因建斯亭,想有鉴于坡公而名之欤。越世已久,倾圮更甚。余读书览九山胜槪,觉兹山不减太行、孟门,登临其地,蕊珠紫府,或不是过,心欲继朱公而修葺之。适道人元真,深合余意,因捐赀令其经营,托龙安生咸其美,采木东山之阳。里人张举,命匠鸠工,始于康熙七年春,及秋,事竣,见东岳正殿中梁朽烂,其功似急于亭,但所费尤大,力难兼举,因挟疏持钵。有龙安民张荣、藩邑生余人牧,并山主蒋通等,力为肩任。考道经云:广乘之山,天之东岳也,主岁星之首,居九五青天之内。兹山虽不足以比隆,使行宫整饬,操出生入死之柄,持福善祸淫之权,其应如响,畴敢吝惜,而功弗立见焉。
만력 때 용안 사법관 주중렴이 올라 맑은 하늘과 천 리 달빛에 기뻐했으나 쉴 곳 없음을 아쉬워해 정자를 지었다. 동파를 본떠 이름했을까. 오래 지나 크게 무너졌다. 나는 아홉 산을 읽고 이 산도 태행·맹문에 못지않다 여겼다. 궁전이 하늘 궁궐 같아 주공의 뜻을 잇고 싶었다. 도사 원진이 공감하여 돈을 내고 맡겼으며 용안 생원 함기미에게 동산 남쪽에서 나무를 구하게 했다. 마을의 장거가 장인을 모아 강희 7년 봄 착공해 가을에 마쳤다. 동악정전 중량이 썩어 정자보다 급했지만 비용이 커서 함께 못 했다. 모금문과 발우를 들고 다녔고 용안민 장영, 번읍 생원 여인목, 산주 장통 등이 맡았다. 도경은 광승산을 하늘의 동악이라 하고 세성의 머리를 주관하며 푸른 하늘의 구오 자리에 있다고 한다. 이 산은 못 미쳐도 행궁을 정돈하면 신이 생사와 길흉을 맡아 착함에 복, 악함에 화를 주니 응답이 메아리 같다. 누가 아끼며 어찌 공이 곧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康熙十一年四月告成,似与太行、孟门无异。所不若者,宫阙楼观,不获为名公贤士所品题耳。余不敢谓一笠之盖,可几获福,然山不在高,有仙则名,福非神作,抑人之自为作也。后之继志者,当有感于斯言。
강희 11년 4월 완공하니 태행·맹문과 다르지 않았다. 못 미치는 것은 궁궐 누각이 명사에게 품평받지 못함뿐이다. 작은 덮개 하나로 복을 얻는다 감히 말하지 않는다.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나고 복은 신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만든다. 뜻을 잇는 이가 이 말을 새기기 바란다.
『두도산 동악묘 비기』
篅山之绝顶,有杰阁焉,飞甍四起,层崖高张,要必凭灵爽以为之主宰。山不必神,而神能神之。山之有岳殿,由来旧矣。其神主东方,判生死,延寿算,龙绵梓剑之民,奔走络绎,当首春时,吹笙鸣钹,婆娑而飨之,日以千百计,而不虞庙之日即于倾圯也。了然上人住锡有年,病且休矣,行将拂衣而去。余闻而固留之,谓夫檀邦之供养,云水之护持,孰如上人?及今不改修,谁与改修者?上人辞益力,然而邑宰不能留也。无己,则请诸岳神,则其所以留上人者,必最亲且切。乃上人病果起,年愈高而貌加丰,疑默相然。上人虽欲不改修焉,而不可得已。采木于山,范土于穴,布置岳体,指挥匠石。工将告竣矣,朱门洞戺,绛节高居,帝敕云开,鬼呼星循,而后登绝𪩘者,若美发之刺于簪而见其髻也。
촨산 꼭대기에 훌륭한 전각이 있고 사방 처마가 높은 벼랑 위로 솟는다. 반드시 영험한 힘이 주재하리라. 산이 신령하지 않아도 신이 영험하게 한다. 악전은 오래되었다. 그 신은 동방을 맡아 생사를 판결하고 수명을 늘린다. 용·면·재·검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 초봄마다 생황과 징을 울리고 춤추며 날마다 백천 명씩 제사하지만 사당의 퇴락은 생각하지 못한다. 요연 상인은 오래 살았으나 병들어 떠나려 했다. 내가 듣고 붙잡았다. 신도의 공양과 떠도는 승려를 돌보는 데 누가 상인만 하겠으며 지금 안 고치면 누가 하겠는가. 더욱 굳게 사양해 현령도 못 잡았다. 어쩔 수 없어 악신에게 빌었다. 신이 붙잡을 이유가 더 가깝고 절실하리라. 마침내 병이 낫고 늙을수록 얼굴이 풍성해져 보이지 않는 도움 같았다. 상인은 더는 수리를 피할 수 없었다. 산에서 나무를 캐고 굴의 흙을 빚고 장인을 지휘했다. 거의 완공되어 붉은 문과 높은 신의 깃발이 드러나니 하늘의 조서에 구름이 열리고 귀신이 달리는 듯했다. 전각이 봉우리를 장식함은 아름다운 머리에 비녀가 드러나는 듯했다.
夫人有不畏人,未有不畏鬼神者。其居家倨傲鲜腆,一人庙而徬徨赡顾,心震目骇,举生平不可告人之事,皆骈而闯伺之,措身其间,愧恧无地,心望若神之恻然哀怜,脱不测之区而丐须臾之命者屡矣。则非山之云,而神从而灵之,亦非神之必欲灵其山,而乞恩于山者之若或灵之也。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있어도 귀신을 안 두려워하는 이는 없다. 집에서 거만하고 부끄럼 없던 자도 사당에 들면 두리번거리며 심장과 눈이 놀란다. 말 못 할 평생의 일들이 몰려나와 숨을 곳이 없고 부끄러워한다. 신이 가엾이 여겨 뜻밖의 위험에서 구하고 잠시라도 살게 해주기를 바란다. 산의 구름이 신을 영험하게 함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 신이 꼭 산을 영험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비는 사람이 영험하게 여기는 것이다.
上人有徒八岁,能援索飞渡,百丈绳桥,捷如猱戏,拔崣崒之峰,登欢喜之岸,则福善祸淫之说,遍告檀越,应无不合掌称赞者,其必以是为普救之津梁也。工既成,上人乞余序以勒诸石,余因叙修庙之始末以记之。
상인에게 여덟 살 제자가 있어 백 장 길이의 줄다리를 붙잡고 날듯 건넌다. 원숭이처럼 재빨리 험봉을 넘어 환희의 언덕에 이른다. 선을 복주고 악을 벌한다는 말이 시주에게 퍼지면 모두 합장하여 칭송할 것이다. 이로써 널리 구제하는 나루를 삼으려 함인가. 공사가 끝나자 상인은 돌에 새길 서문을 청했다. 이에 사당 수리의 전말을 기록한다.
옛 사진
1980년대
조민이 『1980년대 쓰촨 장유의 두촨산』에서 공개한 사진이다. 몐양사범전과학교 관계자들이 경관 기록영화를 찍으러 방문할 때 촬영했으며 산정 사당 원경, 절벽가 건물 세부, 소나무 가지 사이의 봉우리와 사당을 담았다.
1986년(게재)
비천장의 천궁누각 옛 사진. 겹겹의 작은 누각, 난간과 목조 인물상이 보인다. Project CloudCastle가 전재했으며 원출처는 고기일 『장유현 촨산 운암사 비천장과 장전 조사 약기』, 『쓰촨 문물』 1986년 제4호로 표시돼 있다.
참고 문헌
- 고기일, 『장유현 촨산 운암사 비천장과 장전 조사 약기』, 『쓰촨 문물』 1986년 제4호, 9~13쪽.
- 황석림, 『쓰촨 장유 두촨산 운암사의 비천장』, 『문물』 1991년 제4호, 20
33쪽, 도판 100101쪽. - 무비문 수정·구배괴 편찬, 『장유현지』, 광서 29년(1903) 간본, 권7·13·24.
- 곡신춘, 『‘용면체’ 십팔나한도 두루마리를 찾아서』, 『자금성』 2024년 제6호, 48~79쪽.
- 오효령, 『800년 운암사 비천장 대수리 착수』, 『쓰촨일보』 2016년 3월 2일.
- 오효령, 『5톤 몸체를 통째로 들어 올려 800년 넘은 비천장이 다시 돌다』, 촨관뉴스, 2018년 6월 22일.
- 『국가문물국장 선제상, 쓰촨 장유 운암사 피해 현황 시찰』, 문화부 누리집, 2008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