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졸정원은 쑤저우(蘇州) 성 동북쪽, 누문(婁門)과 제문(齊門) 사이에 있다. 당·송 때에 임돈리(臨頓里) 부근에는 이미 육귀몽(陸龜蒙) 등의 택원(宅園)이 있었으나, 이 옛터들의 위치는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뿐 반드시 오늘날의 원계(園界) 안에 든다고는 할 수 없다. 원대에 이 일대에 대홍사(大弘寺)가 세워졌고, 사원은 원 말에 파괴되었다. 명 정덕 4년(1509),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왕헌신(王獻臣, 자는 경지敬止, 호는 회우槐雨)이 파직되어 쑤저우로 돌아와, 대홍사의 폐기(廢基)와 부근의 옛 땅을 이용하여 정원을 조영하였다. 고인 물을 준설하고 수목을 심으며 물을 따라 당(堂)·루(樓)·정(亭)·헌(軒)을 지었다. 가정 12년(1533), 왕헌신과 오랫동안 교유한 오문(吳門)의 서화가 문징명(文徵明, 호는 형산衡山)이 원중의 삼십일 경(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달았으며, 아울러 원기(園記)를 지었다. 원의 이름은 서진(西晉)의 문학가 반악(潘岳)의 《한거부(閒居賦)》 가운데 “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에서 취한 것이다. 왕헌신은 말하기를, 자신은 관가(官家)에서 처세하는 데 서툴어, 물러나 살게 된 뒤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정원에 물을 대어 채소를 가꾸니, 바로 이 “졸(拙)” 자로써 스스로를 비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정원은 왕씨 집안에서 겨우 한 대를 전하였다. 왕헌신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이 도박에서 정원을 서소천(徐少泉)에게 잃었다. 청초의 기록은 다만 “한 번 던져 잃었다(一擲失之)“라고 할 뿐, 뒤의 시문(詩文)에서야 이를 하룻밤의 호쾌한 도박으로 부풀려 썼다. 도박이 도대체 어떠했는지는 이제 알 수 없고, 정원은 이윽고 서씨 집안이 접수하여 여러 대를 전하였다. 숭정 4년(1631)에 이르러 정원 동부는 이미 십여 무(畝)가 황무지로 전락하였는데, 왕신일(王心一)이 이를 사들이매, 옛 정원은 이로부터 동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왕신일(王心一, 자는 순보純甫, 호는 현주玄珠)은 만력 41년(1613) 진사로, 어사(御史)를 지냈으나 아버지가 연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세에 따라 정원을 만들었다. 낮은 곳에는 못을 파고, 못에서 나온 흙으로 산을 쌓았으며, 산과 물 사이에서 집 짓기에 알맞은 곳에만 집을 지었다. 동남쪽 가산(假山)에는 영롱하고 가늘며 윤기 있는 호석(湖石)을 골라 원대의 서화가 조맹복(趙孟頫)의 산수가 지닌 수윤(秀潤)한 취향을 취하였고, 서북쪽 가산에는 누렇고 푸른빛이 도는 고박한 요봉석(堯峰石)을 골라 원대의 화가 황공망(黃公望)의 산수가 지닌 고졸(古拙)한 취향을 취하였으며, 다시 첩산장(疊山匠) 진사운(陳似雲)을 청하여 삼 년 동안 조영하게 하였다. 정원이 이루어진 뒤 이름을 “귀전원거(歸田園居)“라 하였고, 원 안에는 난설당(蘭雪堂)·함청지(涵靑池)·철운봉(綴雲峰)과 소도원(小桃源) 등의 경치가 있었다. 이는 서쪽의 졸정원과 “숲이 이어져 틈이 없어(連林靡間)” 멀리서 바라보며 여전히 하나로 이어진 정원처럼 보였으나, 이미 각자의 원문(園門)과 건축과 주인이 있었다.
명·청이 바뀌는 무렵, 만명(晚明)의 시인이자 장서가인 전겸익(錢謙益, 호는 목재牧齋)이 서씨의 정원 안에 아내 유여시(柳如是)를 위해 곡방(曲房)을 지어 주었다. 유여시 또한 강남에 이름이 높은 여류 시인으로, 세상에서 하동군(河東君)이라 일컬었다. 전(錢)·유(柳) 두 사람이 원중의 곡방에 살았으나 원의 주인은 여전히 서씨 후손이었다. 순치(順治) 초년에 원 안은 한때 영장(營將)의 숙소로 쓰였고, 뒤에 서씨 후손이 청초의 대학사 진지린(陳之遴)에게 팔았다. 진지린이 요동으로 유배된 뒤 정원은 차례로 주방장군부(駐防將軍府)와 병비도행관(兵備道行館)으로 바뀌었다. 원산(園産)은 뒤에 진씨 집안에 돌려주었고, 진씨 집안은 다시 이를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의 사위 왕영녕(王永寧)에게 팔았다. 왕영녕은 이어받은 뒤 원중의 산수를 크게 고쳐 건축을 높고 화려하게 지었으며, 남목청(楠木廳)의 주춧돌에는 승룡(升龍)을 새기기까지 하였다.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킨 뒤 왕영녕은 비록 이미 죽었으나, 원옥(園屋)은 두 집안의 관계로 인해 적몰되었고, 남목청의 주춧돌도 뜯어져 경사(京師)로 운반되었다. 강희 18년(1679), 관부(官府)가 옛 정원 안에 대당(大堂)과 중문(重門)을 더 지어 이곳을 소송상도서(蘇松常道署)로 고쳐 삼았다.
소송상도서가 폐지된 뒤 원지(園地)는 흩어져 민가가 되었다. 18세기에 원주(園主) 장기(蔣棨)가 그 일부를 얻어 다시 산을 쌓고 못을 준설하며, 당(堂)·루(樓)·각(閣)·재(齋)·랑사(廊榭)와 정대(亭台)를 지어 “복원(復園)“이라 이름하였다. 건륭 12년(1747), 쑤저우의 시인 심덕잠(沈德潛, 호는 귀우歸愚)이 이곳을 다시 노닐 때, 산이 지난날보다 더 높아지고 못물도 더 깊게 준설되었으며 당우(堂宇)는 여러 해의 수리를 거친 것을 보았다. 장기가 죽은 뒤 복원은 다시 쇠락하였다. 가경 14년(1809), 형부낭중(刑部郎中)을 지낸 해녕(海寧) 사람 사세담(查世倓, 호는 담여憺餘)이 복원을 얻어 원래 이름을 그대로 쓰며 일 년 남짓 수리하였다. 그 뒤 복원은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 오경(吳璥, 자는 식여式如, 호는 숭포菘圃)의 집안으로 넘어가 “오원(吳園)“이라 고쳐 불렸다. 함풍 10년(1860), 태평군이 쑤저우를 점령하자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이 흩어져 있던 여러 원지를 왕부(王府)로 사용하였다. 쑤저우 성이 청군에게 수복된 뒤 선후국(善後局)이 오씨에게 백은 삼천 냥을 지급하고 정원을 공유로 거두어 잠시 순무(巡撫)의 행원(行轅)으로 삼았다.
동치 10년(1871), 당시 장쑤 순무(江蘇巡撫)로 있던 장지만(張之萬, 자는 자청子靑)이 쑤저우에서 벼슬하던 몇몇 동향(同鄕) 관원과 함께 이곳에 회관을 설립할 것을 창의하였다. 그들은 원래의 정원 값에 따라 은 삼천 냥을 마련하고, 별도로 수리비 은이천 냥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팔기봉직회관(八旗奉直會館)이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그 뒤 쑤저우에 머무는 동향 관원들이 원 안에서 단배(團拜)하고 연회하니, 중부 원지가 사가(私家)의 정원에서 동향 회관으로 바뀌었다.
광서 5년(1879), 오현(吳縣) 사람 장리겸(張履謙, 자는 월계月階)이 영춘방(迎春坊)으로 옮겨 살게 되어, 주택 북쪽에 못물은 아직 맑고 수목은 아직 빽빽한 원지가 있는데 기울어 무너지려는 정대(亭台) 한두 곳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황폐하고 더러운 것을 걷어 내고 대략 수리를 더하여 “보원(補園)“이라 이름하였다. 보원은 옛 졸정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못과 수목의 흐름에서 양쪽이 원래 이어져 있었음을 여전히 알 수 있었다. 뒤에 장리겸은 문징명의 《졸정원도기(拙政園圖記)》의 옛 각본 탁본을 얻어, 글씨가 계속 사라질까 염려하여 전신지(錢新之)를 청해 다시 모각(摹刻)하여 돌에 올리게 하였다. 청 말에 이르러 중부는 팔기봉직회관이요, 서부는 장씨의 보원이며, 동부의 귀전원거는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문징명의 기(記)에 있는 삼십일 경(景)은 장리겸의 때에 이르러 이미 “옛 모습이 모두 바뀌어 다시는 징험할 수 없었다(舊觀盡改, 無復可徵)”. 그는 《보원기(補園記)》에서 감개하여 말하였다. “이 정원에 사는 자마다 번갈아 바뀌고 옮겨져, 가정(嘉靖) 이래 지금까지 거의 사백 년이니, 의상(衣裳)과 종고(鐘鼓)가 진작에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다.” 사백 년 동안 정원은 도박으로 잃기도 하고 적몰되기도 하였으며, 도서(道署)와 회관으로 고쳐지기도 하였고, 당사(堂榭)와 산수는 거듭 바뀌고 또 바뀌어, 옛 정원은 마침내 한 겹 한 겹의 담장으로 셋으로 갈라졌다. 오히려 이 세 갈래의 옛 경계가 남았으니——오늘날 졸정원의 동부·중부·서부는 여전히 각각 왕신일의 귀전원거, 옛 졸정원, 장리겸의 보원의 옛터이다.
역사 문헌
《왕씨졸정원기(王氏拙政園記)》
槐雨先生王君敬止所居,在郡城东北,分娄、齐门之间。居多隙地,有积水亘其中,稍加濬治,环以林木,为重屋其阳,曰梦隐楼,为堂其阴,曰若墅堂。堂之前为繁香坞,其后为倚玉轩。轩北直梦隐,绝水为梁,曰小飞虹。逾小飞虹而北,循水面行,岸多木芙蓉,曰芙蓉隈。又西,中流为榭,曰小沧浪亭。亭之南,翳似修竹,而西出于水澨,有石可坐,可俯而濯,曰志清处。至是水折而北,滉漾渺弥,望若湖泊,夹岸皆佳木,其西多柳,曰柳隩。东岸积土为台,曰意远台。台之下植石为矶,可坐而渔,曰钓䂬。遵䂬而北,地益回,林木益深,水益清驶。水尽,别疏小沼,植莲其中,曰水花池。池上美竹千挺,可以追凉,中为亭,曰净深。循净深而东,柑橘数十本,亭曰待霜。又东出梦隐楼之后,长松数植,风至冷然有声,曰听松风处。自此绕出梦隐之前,古木疏篁,可以憩息,曰怡颜处。又前,循水而东,果林弥望,曰来禽囿。囿尽,缚四桧为亭,曰得真亭。亭之后为珍李坂,其前为玫瑰柴,又前为蔷薇径。至是水折而南,夹岸植桃,曰桃花沜。沜之南为湘筠坞。又南,古槐一株,敷阴数弓,曰槐幄。其下跨水为杠,逾杠而西,篁竹阴翳,榆槐蔽亏,有亭翼然,西临水上者,槐雨亭也。亭之后为尔耳轩,左为芭蕉槛。凡诸亭、槛、台、榭,皆因水为面势。自桃花沜而来,水益微,至是伏流而南,逾百武,出于别圃丛竹之间,是为竹涧。竹涧之东,江梅数百植,花时香雪烂然,望若瑶林玉树,曰瑶圃。圃中有亭,曰嘉实,有泉,曰玉泉。凡为堂一,楼一,为亭六,轩、槛、池、台、坞、涧之属二十有三,总三十有一,名曰拙政园。王君之言曰:昔潘岳仕宦不达,作间居赋自广,以筑室种树、灌园鬻蔬为拙者之政。余自筮仕扺今余四十年,同时或起家至八座,登三事,而余仅以一郡倅老退林下,其为政殆有拙于岳者,园所以识也。虽然,君于岳则有间矣。君以进士高科仕为名法从,直躬殉道,非久被斥。其后旋起旋废,迄摈不复。其为人岂龌龊自守,视时浮沉者哉?岳虽漫为间居之言,而谄事时人,至于望尘雅拜,乾没势权,终罹咎祸。考其平生,盖终其身未尝𫏐去官守,以即其间居之乐也。岂惟岳哉?古之名贤胜士,固有有志于是,而际会功名不能解脱,又或升沈迁徙,不得遂志如岳者,何限哉?而君甫及强仕,即解官家处,所谓筑室种树、灌园鬻蔬,享有间居之乐者,二十年于此矣。究其所得,虽古之名贤胜士有所不逮也,而何岳之足云?所谓区区以岳自况,则聊以宣其不达之名焉耳。而其志之所乐,固有在彼而不在此者。是故高官脢仕,人所慕乐,而祸患攸伏,造物者每消息其中。使君得志一时,而或横罹灾变,其视抹杀斯世而优游余年,果孰多少哉?君子于此,必有所择矣。征明漫仕而归,虽踪迹不同于君,而潦倒抹杀,亦略相似。顾无一亩之宫以寄其栖佚之志,而独有羡于君。既取其园中景物,悉为赋之,而复为之记。嘉靖十二年癸巳九月既望,长洲文征明著。
회우(槐雨) 선생 왕군(王君) 경지(敬止)가 사는 곳은 군성(郡城) 동북쪽, 누문(婁門)과 제문(齊門) 사이를 나눈 곳에 있다. 거처에는 빈 땅이 많아 고인 물이 그 가운데 가로질러 있었는데, 조금 준설하여 다스리고 수목으로 두르고, 그 양지(陽)에 겹친 집을 지어 몽은루(夢隱樓)라 하고, 그 그늘진 쪽(陰)에 당(堂)을 지어 약서당(若墅堂)이라 하였다. 당의 앞은 번향오(繁香塢)요, 그 뒤는 의옥헌(倚玉軒)이다. 헌 북쪽이 몽은(夢隱)을 마주하여 물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으니 소비홍(小飛虹)이라 한다. 소비홍을 넘어 북으로 물을 따라 가면 언덕에 목부용(木芙蓉)이 많으니 부용외(芙蓉隈)라 한다. 또 서쪽으로 물 한가운데 사(榭)를 지었으니 소창랑정(小滄浪亭)이라 한다. 정(亭)의 남쪽은 길죽한 대나무에 가리워 있는 듯하고, 서쪽으로 물가에 나아가면 앉을 만한 돌이 있어 몸을 굽혀 씻을 수 있으니 지청처(志淸處)라 한다. 여기에서 물이 꺾여 북으로 가며 넓게 출렁이고 아득히 퍼져 바라보며 호박(湖泊)과 같고, 양쪽 언덕이 모두 좋은 나무이며 그 서쪽에 버들이 많으니 유오(柳隩)라 한다. 동쪽 언덕에 흙을 쌓아 대(臺)를 삼았으니 의원대(意遠臺)라 한다. 대 아래 돌을 심어 기(磯)를 삼아 앉아서 낚시할 수 있으니 조괄(釣䂬)이라 한다. 괄(䂬)을 따라 북으로 가면 땅은 더욱 굽이치고 수목은 더욱 깊어지며 물은 더욱 맑고 빠르다. 물이 다한 곳에 따로 작은 못을 파고 그 안에 연꽃을 심었으니 수화지(水花池)라 한다. 못 위에 아름다운 대나무 천 그루가 있어 서늘함을 좇을 수 있고,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정심(淨深)이라 한다. 정심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감귤 수십 그루가 있고 정자를 대상(待霜)이라 한다. 또 동쪽으로 몽은루의 뒤에 나아가 큰 소나무 몇 그루를 심었는데 바람이 오면 청량하게 소리가 나니 청송풍처(聽松風處)라 한다. 여기에서 빙 돌아 몽은(夢隱)의 앞에 나아가면 오래된 나무와 성근 대나무가 있어 쉴 만하니 이안처(怡顏處)라 한다. 또 앞으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과수림이 눈에 가득하니 내금유(來禽囿)라 한다. 유(囿)가 다한 곳에 네 그루 회나무(檜)를 묶어 정자를 삼았으니 득진정(得眞亭)이라 한다. 정자의 뒤는 진리판(珍李坂)이요, 그 앞은 매괴시(玫瑰柴)요, 또 앞은 장미경(薔薇徑)이다. 여기에서 물이 꺾여 남으로 가며 양쪽 언덕에 복숭아를 심었으니 도화반(桃花沜)이라 한다. 반(沜)의 남쪽은 상균오(湘筠塢)다. 또 남쪽에 오래된 회나무(槐) 한 그루가 있어 그늘을 여러 궁(弓)에 펼치니 회악(槐幄)이라 한다. 그 아래 물을 가로질러 널다리를 놓았고, 다리를 넘어 서쪽으로 가면 댓잎이 그늘지고 느릅나무와 회나무가 덮여 가리며, 날개 치켜든 듯한 정자 하나가 서쪽으로 물 위에 임한 것이 회우정(槐雨亭)이다. 정자의 뒤는 이이헌(爾耳軒)이요, 왼쪽은 파초함(芭蕉檻)이다. 무릇 여러 정(亭)·함(檻)·대(臺)·사(榭)는 모두 물을 따라 면세(面勢)를 이루었다. 도화반에서 온 물이 더욱 미미하여 여기에서 땅속으로 흘러 남으로 가 백여 보(步)를 지나 별포(別圃)의 댓잎 사이로 나오니, 이것이 죽간(竹澗)이다. 죽간의 동쪽에 강매(江梅) 수백 그루를 심었는데 꽃 필 때면 향기로운 눈이 눈부셔 바라보며 요림옥수(瑤林玉樹)와 같으니 요포(瑤圃)라 한다. 포(圃)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가실(嘉實)이라 하고, 샘이 있으니 옥천(玉泉)이라 한다. 무릇 당(堂)이 하나, 누(樓)가 하나, 정(亭)이 여섯이요, 헌(軒)·함(檻)·지(池)·대(臺)·오(塢)·간(澗)의 무리가 스물셋이니 모두 서른하나로, 이름하여 졸정원(拙政園)이라 하였다. 왕군의 말에 이르기를 “옛적 반악(潘岳)이 벼슬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아 《한거부(閒居賦)》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정원에 물을 대어 채소를 파는 것을 졸자(拙者)의 정(政)으로 삼았다. 나는 점쳐 벼슬길에 나아간 때로부터 지금까지 마흔여 년이니, 같은 시절에 혹은 백의에서 일어나 팔좌(八座)에 이르고 삼사(三事)에 오른 이도 있으나, 나는 겨우 한 군(郡)의 부수리(倅)로 늙어 임하(林下)에 물러났으니, 그 정(政)은 대개 반악보다 더 졸(拙)한 것이 있어 정원이 이를 기록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군은 반악과는 격이 다르다. 왕군은 진사(進士) 고과(高科)로 벼슬하여 이름난 법종(法從)이 되었고, 곧은 몸으로 도(道)에 순(殉)하다 오래지 않아 물러났으며, 그 뒤 곧 일어나고 곧 폐하여 마침내 물러나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사람됨이 어찌 자질구레하게 스스로를 지키며 때를 보아 오르나리는 자이겠는가? 반악은 비록 망령되이 한거(閒居)의 말을 하였으나 당세의 사람에게 아첨하여 섬겨, [권세가의 수레가 일으키는] 티끌을 바라보며 공손히 절하는 데까지 이르고 권세를 탐하여 취하다가 마침내 허물과 화를 입었다. 그의 평생을 상고하건대 대개 몸을 마칠 때까지 일찍이 잠시도 관직을 떠나 그 한거의 즐거움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 어찌 반악뿐이겠는가? 예로부터 이름난 어질고 뛰어난 선비 가운데 본래 이에 뜻이 있었으되 공명(功名)의 인연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혹은 승천(昇遷)과 귀양에 오르나리며 반악처럼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그런데 왕군은 갓 강사(强仕, 마흔)에 이르자 곧 벼슬을 풀고 집에 머물러, 이른바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정원에 물을 대어 채소를 팔며 한거의 즐거움을 누린 지 이십 년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 얻은 바를 살피건대 비록 예로부터의 이름난 어질고 뛰어난 선비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반악이 어찌 말할 만하겠는가? 이른바 소소(區區)히 반악으로 스스로를 비유함은 다만 그 뜻대로 되지 않음의 이름을 펼치고자 함일 따름이다. 그의 뜻이 즐기는 바는 본래 저곳에 있고 이곳에 있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은 사람이 부러워하고 즐기는 바이나 화환이 그곳에 엎드려 있어, 조물자(造物者)가 늘 그 가운데서 소식(消息)을 [주관]한다. 만일 왕군이 한때 뜻을 얻고 혹 갑자기 재변(災變)을 당하였다면, 이 세상에서 지워져 여유롭게 남은 해를 보냄에 견주어 과연 어느 것이 많고 어느 것이 적겠는가? 군자(君子)는 여기에서 반드시 택할 바가 있다. 징명(徵明)은 망령되이 벼슬하다 돌아와 비록 종적이 왕군과 같지는 않으나 낙도(潦倒)하여 [세상에] 지워짐 또한 대략 서로 비슷하다. 다만 일 무(畝)의 집조차 없어 깃들여 편안할 뜻을 맡기지 못하므로 홀로 왕군을 부러워할 뿐이다. 이미 그 원중의 경물(景物)을 취하여 모두 부(賦)를 지었고, 또 이를 위해 기(記)를 짓는다. 가정 12년 계사(癸巳) 구월 기망(旣望), 장주(長洲) 문징명이 짓다.
《귀전원거기(歸田園居記)》
余性有邱山之癖,每遇佳山水处,俯仰徘徊,辄不忍去。凝眸久之,觉心间指下,生气勃勃。因于画事,亦稍知理会。辛未以先府君年高,弃官归田,敝庐之后,有荒田十数余亩,偶地主求售,余勉力就焉。
나는 성정(性情)에 구산(邱山)의 버릇이 있어, 좋은 산수를 만날 때마다 오르나리며 배회하곤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오래도록 응시하면 마음속과 손끝에서 생기가 왕성함을 느꼈다. 그로 인해 그림 일에도 조금은 이치를 알게 되었다. 신미(辛未)에 선부군(先府君)이 연로하시므로 벼슬을 버리고 전(田)으로 돌아왔는데, 내 집 뒤에 황무지 십수여 무(畝)가 있어 우연히 지주(地主)가 팔기를 구하므로 내가 힘닿는 대로 이를 얻었다.
地可池则池之,取土于池,积而成高,可山则山之。池之上,山之间,可屋则屋之。肇于是岁之秋,落成于乙亥之冬,友人文湛持为余额之曰“归田园居”。门临委巷,不容旋马,编竹为扉,质任自然。入门不数武,有廊直起,为“墙东一径”,友人归文休额之也。径尽,折北为秫香楼。楼可四望,每当夏秋之交,家田种秫,皆在望中。自楼折南皆池,池广四五亩,种有荷花,杂以荇藻,芬葩灼灼,翠带柅柅。修廊蜿蜒,驾沧浪而度,为芙蓉榭,为泛红轩。自泛红轩绕南而行,轩前有丛桂参差,友人蒋伯玉名之曰“小山之幽”。又西数武,有堂五楹,爽塏整洁,文湛持取李青莲“春风洒兰雪”之句,额之曰“兰雪堂”。东西桂树为屏,其后则有山如幅,纵横皆种梅花。梅之外有竹,竹邻僧舍,旦暮梵声,时从竹中来。其前则有池,取储光羲“池草涵青色”句,曰涵青。诸山环拱,有拂地之垂杨,长丈之芙蓉,杂以桃、李、牡丹、海棠、芍药,大半为予之手植。池南有峰特起,云缀树杪,名之曰缀云峰。池左两峰并峙,如掌如帆,谓之联璧峰。峰之下有洞,曰小桃源。内有石床、石乳。南出洞口,为漱石亭,为桃花渡。其石之出没池面者,或锐如啄,或凸如背。又折北磴而上,为夹耳冈,为迎秀阁,为红梅坐,直接竹香廊,以至山余馆,渐逼余室。余性不耐,家居不免人事应酬,如苦秦法。步游入洞,如渔郎入桃源,桑麻鸡犬,别成世界,故以小桃源名之。洞之上为啸月台、紫藤坞,可扪石而登也。洞之东有池曰清泠渊。池上有屋三楹,竹木蒙密,友人陈古白额之曰“一邱一壑”。自兰雪以东,此其最幽者。兰雪以西,石磴重叠,皆可布坐。梧桐参差,竹木交荫,一径可通聚花桥。东折,诸峰攒翠,下临幽涧,颇有茂林修竹、流觞曲水之意。自此渡试望桥,曲径数折,即得缀云峰,北望兰雪堂,又隔盈盈一水矣。山径逶迤,从高趋下,上接缀云峰,俯瞰涵青池者,为连云渚;绝涧欲穷,得石如螺,因之而渡者,为螺背渡。又折而东,为听书台,以可听儿子辈读书声也。西折,为悬井岩,有洞幽邃,蹈水傍崖,四面悬崖直削,盖如井然。再拾磴而造其颠,诸峰高下,或如霞举,或如舞鹤,各争雄长于缀云下者,余不能尽名之。又西则为幽悦亭。亭之左有石丈余,夭矫如龙,余自采之包山云。自此层磴而下,溪涧相连,植有杨家果数树,是为杨梅隩。又北折,有屋半楹,四望皆竹,是为竹邮。由竹邮又西折从南,为饲兰馆,庭有旧石数片,玉兰、海棠,高可蔽屋,颇堪幽坐。北折,则回廊曲而且幽。廊半有小径,斜通石塔岭。廊尽由南折西,皆架山茶,有亭曰延绿。延绿之北,有石如玉,拱立檐际,谓之玉拱峰。每至春月,山茶如火,玉兰如雪,而老梅数十树,偃仰屈曲,独傲冰霜,如见高士之态焉。插篱成径,至梅亭、紫薇沼,亦园居之一幽胜也。北临漾藻池,遥望紫逻山,飞翠直来扑坐。夏月之荷,秋月之木芙蓉,如锦帐重叠,又一胜观。有桥横跨池面,谓卧虹桥。桥之东,有石如云,向空而涌,为片云峰。桥尽,有石可憩,为卧虹渚。转径而北,依山傍水,苍松杂卉,接叶连阴,为小剡溪。有石横亘如门,四山崒律,停水一泓,有古杏覆其上,为杏花洞。渡洞盘旋而上,是为紫逻山,以言其石之色也。山有五峰,曰紫盖,曰明霞,曰赤笋,曰含华,曰半莲,又谓之五峰山。有亭曰放眼。西与南洲之拙政园,连林靡间。北则齐女门雉堞半控中野,似辋川之盂城。东南一望,烟树弥漫,惟见隐隐浮图,插青汉间,近以林木蓊郁,不可纵目,濮上叶润山额之为“流翠亭”。自流翠而南,于石阿间得路,东折为拜石坡,水石俱备,梅杏交枝。左有花红果树,扶疏如盖,有阁耸树杪间,曰资清。资清之下,三囿其户,是为串月矶,复设柴扉,尝扃之。自拜石折北又西,则为紫逻之背,众峰迭涌,乱石嶙峋。环山有濠,从水中央,结有草亭。架梁而登,可通濠北,有地皆种木奴,因号其亭曰奉橘,盖借王逸少奉橘帖名之也。至此则山尽水穷。东行长廊为想香径,竹梅夹道,香韵悠然,沈启南有“可竹”之额,尚恨无人以梅匹之。出想香,已在兰雪堂矣。
땅이 못이 될 만하면 못으로 삼고, 못에서 흙을 취하여 쌓아 높이 이루어 산이 될 만하면 산으로 삼았다. 못 위와 산 사이에서 집이 될 만하면 집으로 삼았다. 그해 가을에 시작하여 을해(乙亥) 겨울에 낙성하니, 벗 문담지(文湛持)가 내게 액(額)을 써 주어 “귀전원거(歸田園居)“라 하였다. 문이 구불구불한 골목에 임하여 말을 돌릴 수도 없고, 대나무를 엮어 문을 삼아 소박하게 자연에 맡겼다. 문에 들어서면 몇 보 되지 않아 회랑이 곧장 일어나 “장동일경(牆東一徑)“이 되는데, 벗 귀문휴(歸文休)가 액을 써 준 것이다. 길이 다한 곳에서 꺾여 북으로 가면 수향루(秫香樓)다. 누(樓)에서는 사방을 바라볼 수 있어, 여름과 가을이 바뀔 때마다 집안의 밭에 심은 기장(秫)이 모두 바라보이는 가운데 있다. 누에서 꺾여 남으로 가면 모두 못이니, 못이 사오 무(畝)로 넓어 연꽃을 심고 행조(荇藻)를 섞었으니, 향기로운 꽃은 밝게 타오르고 푸른 띠는 부드럽게 나부낀다. 긴 회랑이 굽이굽이 창랑(滄浪) 위를 걸어 건너면 부용사(芙蓉榭)요 범홍헌(泛紅軒)이다. 범홍헌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면 헌 앞에 계수나무가 층층이 있는데, 벗 장백옥(蔣伯玉)이 이름하여 “소산지유(小山之幽)“라 하였다. 또 서쪽으로 몇 보에 다섯 칸 당(堂)이 있어 밝고 높으며 정결하니, 문담지가 이청련(李靑蓮)의 “춘풍쇄란설(春風灑蘭雪)” 구절을 취하여 액을 “난설당(蘭雪堂)“이라 하였다. 동서의 계수나무가 병풍이 되고, 그 뒤에는 산이 한 폭 그림과 같아 세로가로로 모두 매화를 심었다. 매화 밖에는 대나무가 있고, 대나무가 승사(僧舍)에 이웃하여 아침저녁의 범음(梵聲)이 때때로 대나무 가운데서 온다. 그 앞에는 못이 있어 저광희(儲光羲)의 “지초함청색(池草涵靑色)” 구절을 취하여 함청(涵靑)이라 하였다. 여러 산이 둘러싸고 받들며, 땅에 닿는 늘어진 버들과 한 길 되는 부용(芙蓉)이 있고, 복숭아·오얏·모란·해당·작약을 섞었으니 대부분이 내 손으로 심은 것이다. 못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구름이 나무 끝을 수놓으니 이름하여 철운봉(綴雲峰)이라 하였다. 못 왼쪽에 두 봉우리가 마주 서서 손바닥 같기도 하고 돛 같기도 하니 이를 연벽봉(聯璧峰)이라 한다. 봉우리 아래에 굴이 있으니 소도원(小桃源)이다. 그 안에 석상(石床)과 석유(石乳)가 있다. 남쪽으로 굴 입구를 나서면 석석정(漱石亭)이요 도화도(桃花渡)이다. 그 돌 가운데 못 위에 드러난 것은 혹은 부리처럼 날카롭고 혹은 등처럼 불거졌다. 또 꺾여 북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협이강(夾耳岡)이요 영수각(迎秀閣)이요 홍매좌(紅梅坐)이니, 곧장 죽향랑(竹香廊)에 이어지고 산여관(山餘館)에 이르러 점점 내 집에 가까워진다. 나는 성정이 조급하여 견디지 못해 집에 있으면 인사(人事)의 응주(應酬)를 면하지 못하니 진(秦)의 법처럼 괴롭다. 걸어 노닐며 굴에 들어가면 어랑(漁郞)이 도원(桃源)에 들어간 듯, 뽕나무와 닭과 개가 별도의 세계를 이루므로 소도원으로 이름한 까닭이다. 굴 위는 소월대(嘯月臺)·자등오(紫藤塢)로 돌을 더듬어 오를 수 있다. 굴 동쪽에 못이 있으니 청령연(淸冷淵)이라 한다. 못 위에 집 세 칸이 있고 죽목(竹木)이 빽빽이 덮였는데, 벗 진고백(陳古白)이 액을 “일구일협(一邱一壑)“이라 하였다. 난설(蘭雪)의 동쪽으로는 이곳이 가장 그윽하다. 난설 서쪽은 돌계단이 겹겹이 이어져 모두 자리를 펴고 앉을 만하다. 오동나무가 층층이고 죽목이 교차하여 그늘지니, 한 길이 취화교(聚花橋)로 통한다. 동쪽으로 꺾이면 여러 봉우리가 푸르게 모이고 아래로 그윽한 시내에 임하여 자못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에 잔을 띄우는 곡수(曲水)의 뜻이 있다. 여기에서 시망교(試望橋)를 건너 굽이진 길을 몇 번 꺾으면 곧 철운봉(綴雲峰)을 얻고, 북쪽으로 난설당을 바라보며 또 가늘게 한 줄기 물이 가로막혀 있다. 산길이 굽이굽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가며, 위로 철운봉(綴雲峰)에 이어지고 아래로 함청지(涵靑池)를 굽어보는 것은 연운저(連雲渚)요; 시내가 끊어져 다하려는 곳에 나사 같은 돌을 얻어 이를 따라 건너는 것은 나배도(螺背渡)다. 또 꺾여 동쪽으로 가면 청서대(聽書臺)니, 아들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까닭이다. 서쪽으로 꺾이면 현정암(懸井岩)으로 그윽하고 깊은 굴이 있어 물을 밟고 절벽을 끼니, 사면의 절벽이 곧게 깎여 대개 우물과 같다. 다시 돌계단을 밟아 그 꼭대기에 이르면 여러 봉우리가 높고 낮게, 혹은 노을처럼 솟구치고 혹은 춤추는 학과 같아 각기 철운(綴雲) 아래에서 우열을 다투니, 내가 능히 다 이름하지 못한다. 또 서쪽은 곧 유열정(幽悅亭)이다. 정자 왼쪽에 한 길 남짓한 돌이 있어 요동하는 자태가 용과 같은데, 내가 몸소 포산(包山)에서 캐왔다 한다. 여기에서 층층의 돌계단으로 내려가면 시내가 잇달아 있고 양가(楊家)의 열매 몇 그루를 심었으니, 이것이 양매오(楊梅隩)다. 또 북으로 꺾이면 반 칸의 집이 있어 사방을 바라보아도 모두 대나무니, 이것이 죽우(竹郵)다. 죽우에서 또 서쪽으로 꺾여 남으로 가면 사란관(飼蘭館)이니, 뜰에 오래된 돌 몇 편(片)이 있고 목란(玉蘭)과 해당이 높이 집을 덮을 만하여 자못 그윽히 앉을 만하다. 북으로 꺾이면 곧 회랑(回廊)이 굽이져 또한 그윽하다. 회랑 중간에 작은 길이 있어 비스듬히 석탑령(石塔嶺)으로 통한다. 회랑이 다한 곳에서 남쪽으로 꺾여 서쪽으로 가면 모두 산차(山茶)를 걸어 놓았고 정자가 있으니 연록(延綠)이라 한다. 연록의 북쪽에 옥 같은 돌이 있어 처마 끝에 공손히 서 있으니 이를 옥공봉(玉拱峰)이라 한다. 봄달에 이를 때마다 산차는 불과 같고 목란은 눈과 같으며, 오래된 매화 수십 그루가 눕고 일어나며 굽이져 홀로 얼음과 서리에 거만하니 높은 선비의 태도를 보는 듯하다. 울타리를 꽂아 길을 만들어 매정(梅亭)·자미소(紫薇沼)에 이르니, 또한 원거(園居)의 한 그윽한 명승이다. 북쪽으로 양조지(漾藻池)에 임하여 멀리 자라산(紫邏山)을 바라보며 날아오는 푸름이 곧장 자리로 달려든다. 여름 달의 연꽃과 가을 달의 목부용이 비단 장막처럼 겹겹이니, 또 하나의 뛰어난 볼거리다. 다리가 못 위를 가로질러 놓였으니 와홍교(臥虹橋)라 한다. 다리 동쪽에 구름 같은 돌이 있어 허공을 향해 솟구치니 편운봉(片雲峰)이다. 다리가 다한 곳에 쉴 만한 돌이 있으니 와홍저(臥虹渚)다. 길을 돌아 북으로 가면 산을 의지하고 물을 곁에 하여 푸른 소나무와 여러 꽃이 잎을 맞대고 그늘을 이으니 소섭계(小剡溪)다. 돌이 가로질러 문과 같고 사방의 산이 험준하게 솟았으며 고인 물 한 웅덩이 위에 오래된 살구나무가 덮였으니 행화동(杏花洞)이다. 동(洞)을 건너 빙 돌아 오르면 이것이 자라산이니, 그 돌의 빛깔을 말한 것이다. 산에 다섯 봉우리가 있으니 자개(紫蓋)·명하(明霞)·적순(赤筍)·함화(含華)·반련(半蓮)이라 하고, 또 오봉산(五峰山)이라 한다. 정자가 있으니 방안(放眼)이라 한다. 서쪽으로는 남주(南洲)의 졸정원과 숲이 이어져 틈이 없다. 북쪽으로는 제녀문(齊女門)의 성가퀴가 들판 한가운데를 반쯤 가로질러 망천(輞川)의 우성(盂城)과 같다. 동남으로 한번 바라보며 안개 낀 나무가 널리 퍼져 오직 어렴풋한 부도(浮圖)만이 푸른 하늘 사이에 꽂혀 보이고, 가까이로는 수목이 울창하여 눈을 마음껏 둘 수 없는데, 복상(濮上)의 엽윤산(葉潤山)이 액을 “류취정(流翠亭)“이라 하였다. 류취(流翠)에서 남쪽으로 바위틈 사이에서 길을 얻어 동쪽으로 꺾이면 배석파(拜石坡)로 물과 돌을 갖추고 매화와 살구나무가 가지를 교차하였다. 왼쪽에 화홍과수(花紅果樹)가 있어 가지가 벌어져 덮개와 같고, 나무 끝 사이에 누각이 우뚝하니 자청(資淸)이라 한다. 자청 아래 세 곳에 문이 있으니, 이것이 천월기(串月磯)요, 다시 시문(柴扉)을 설치하여 일찍이 이를 잠갔다. 배석(拜石)에서 꺾여 북으로 또 서쪽으로 가면 곧 자라(紫邏)의 등 뒤로 여러 봉우리가 겹쳐 솟고 어지러운 돌이 삐죽삐죽하다. 산을 둘러 해자(濠)가 있어 물 한가운데에 초정(草亭)을 지었다. 들보를 놓아 오르면 해자 북쪽으로 통할 수 있고, 땅에 모두 목노(木奴, 귤나무)를 심었으므로 그 정자를 봉귤(奉橘)이라 불렀으니, 대개 왕일소(王逸少)의 《봉귤첩(奉橘帖)》을 빌려 이름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산이 다하고 물이 끊어진다. 동쪽으로 긴 회랑을 가면 상향경(想香徑)으로 대나무와 매화가 길을 끼고 향기로운 운치가 아득하며, 심계남(沈啓南)의 “가죽(可竹)” 액(額)이 있으나 오히려 매화로 그것과 짝할 이가 없음을 한한다. 상향(想香)에서 나서면 이미 난설당이다.
东南诸山,采用者湖石,玲珑细润,白质藓苔,其法宜用巧,是赵松雪之宗派也。西北诸山,采用者尧峰,黄而带青,质而近古,其法宜用拙,是黄子久之风轨也。余以二家之意,位置其远近浅深,而属之善手陈似云,三年而工始竟。甲戌余复流连尘网。庚辰归田,又为修其颓坏,补其不足。予无间阴晴,散步畅怀,聊以自适其邱山之性而已。所谓此子宜置邱壑中,余实不能辞避。崇祯壬午九月日,园居主人王心一记。
동남쪽의 여러 산은 채용한 것이 호석(湖石)으로 영롱하고 가늘며 윤기 있고 흰 바탕에 이끼가 있는 것이니, 그 법(法)은 마땅히 교묘함을 써야 하니 이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복)의 종파(宗派)이다. 서북쪽의 여러 산은 채용한 것이 요봉(堯峰)의 돌로 누르면서 푸른빛을 띠고 질박하여 옛것에 가까우니, 그 법은 마땅히 졸(拙)함을 써야 하니 이는 황자구(黃子久, 황공망)의 풍궤(風軌)이다. 나는 두 집의 뜻으로 그 멀고 가까움과 얕고 깊음을 배치하고, 능한 손 진사운(陳似雲)에게 맡겨 삼 년 만에 공역이 비로소 마쳐졌다. 갑술(甲戌)에 내가 다시 속세의 그물에 머물렀고, 경진(庚辰)에 전(田)으로 돌아와 다시 기울고 부서진 것을 고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였다. 나는 흐리고 갬에 관계없이 산보하며 회포를 풀어 다만 스스로 그 구산(邱山)의 성정을 쾌적하게 할 따름이다. 이른바 “이 아이는 마땅히 구협(邱壑) 가운데 두어야 한다”는 말을 나는 실로 사양하고 피할 수 없다. 숭정(崇禎) 임오(壬午) 구월 일, 원거(園居)의 주인 왕신일(王心一)이 기(記)하다.
《소송상도신서기(蘇松常道新署記)》
分守苏松常道驻苏州,故时道署在城之西南隅,隘庳敝陋,不足以称三府一州十六县之守令受教承事,及搢绅耆老来观政令之和布,及部曲将校所以走趋奉指麾者。康熙十八年,参议某使君因王永宁入官园屋为新署,增置堂三楹,重门三楹,甍栋墉阈,皆中程度。赋财庀徒,不日而成,乃揆辰日而移治焉。其地在娄、齐二门之间,所谓拙政园者是也。
분수(分守) 소송상도(蘇松常道)는 소주(蘇州)에 주재(駐)하는데, 옛적 도서(道署)는 성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어 좁고 낮으며 낡고 초라하여, 삼 부(府) 한 주(州) 십육 현(縣)의 수령(守令)이 가르침을 받고 일을 받들며, 진신(搢紳)과 기로(耆老)가 와서 정령(政令)의 화평한 펼침을 보며, 부곡(部曲)과 장교(將校)가 달려가 지휘를 받드는 데 합당하지 못하였다. 강희 18년, 참의(參議) 모 사군(使君)이 왕영녕(王永寧)의 관(官)에 들어간 원옥(園屋)을 인하여 새 관서로 삼아, 당(堂) 세 칸과 중문(重門) 세 칸을 늘려 놓았는데, 용마루와 마룻대와 담장과 문지방이 모두 법도에 합하였다. 재물을 부리고 장정을 모으니 얼마 되지 않아 이루어져, 이에 길일을 헤아려 치소(治所)를 옮겼다. 그 땅은 누(婁)·제(齊) 두 문 사이에 있으니, 이른바 졸정원이 바로 이것이다.
案明嘉靖中,有王侍御某者,因大弘寺废地营别墅老焉,为陂池台榭之乐,以自托于潘岳所谓“拙者之为政”。一时名士如文待诏征明辈,为图记诗赋以志其胜,此拙政园之名所以著于吴中也。侍御有子,弗克负荷,以樗蒲与里中豪士徐君决赌,一掷失之。徐君传子及孙,而生产亦耗矣。入国朝以来三十余年,园凡数易主,而后今为官署云。
살펴보건대 명 가정 연간에 왕(王) 시어(侍御)라는 이가 있어 대홍사(大弘寺)의 폐지(廢地)를 인하여 별서(別墅)를 지어 늙어갔으니, 파지(陂池)와 대사(臺榭)의 즐거움을 지어 반악(潘岳)이 이른바 “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에 스스로를 맡겼다. 한 시대의 이름난 선비로 문대조(文待詔) 징명(徵明) 무리가 있어 그림과 기(記)와 시부(詩賦)를 지어 그 명승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졸정원의 이름이 오중(吳中)에 드러난 까닭이다. 시어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능히 짊어지지 못하여 저포(樗蒲, 도박)로 고을의 호사(豪士) 서군(徐君)과 내기를 겨루어 한 번의 던짐으로 이를 잃었다. 서군이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미치매 가산(生産) 또한 소모되었다. 국조(國朝, 청)에 들어온 이래 삼십여 년에 정원이 모두 여러 번 주인을 바꾸고, 그 뒤 이제 관서가 되었다 한다.
始,虞山钱宗伯尝构曲房其中,以娱所嬖河东君,而海宁相公继之,门施行马。海宁得祸入官,而驻防将军以开幕府。禁旅既还,则有镇将某某者迭馆焉。亡何,而前备兵使者安公,以为治所,未暇有所改作。既而归于永宁。凡前此数人居之者,皆仍拙政之旧,自永宁始,易置丘壑,益以崇高彤镂,盖非复图记诗赋之云云矣。滇黔作逆,永宁与凶渠有连,既先事死,而园屋犹以藩本入官。其最侈僭,则楠木厅柱础皆刻升龙,今已撤而辇至京师,供将作矣。
처음에 우산(虞山)의 전종백(錢宗伯, 전겸익)이 일찍이 그 안에 곡방(曲房)을 지어 총애하는 하동군(河東君)을 즐겁게 하였고, 해녕(海寧)의 상공(相公, 진지린)이 이를 이었는데 문에 행마(行馬)를 베풀었다. 해녕이 화를 얻어 관(官)에 몰수되매 주방장군(駐防將軍)이 이로써 막부(幕府)를 열었다. 금려(禁旅)가 이미 돌아가자 진장(鎭將) 모모(某某) 등이 번갈아 머물렀다. 얼마 안 되어 전임 비병사자(備兵使者) 안공(安公)이 이를 치소(治所)로 삼았으나 고쳐 지을 여유가 없었다. 이윽고 영녕(永寧)에게 돌아갔다. 무릇 이전의 여러 사람으로서 여기에 산 자는 모두 졸정(拙政)의 옛것을 그대로 따랐고, 영녕으로부터 비로소 구협(丘壑)을 바꾸어 놓고 높고 붉게 조각한 것을 더하였으니, 대개 다시는 도기(圖記)와 시부(詩賦)에 말한 바가 아니게 되었다. 전(滇, 윈난)과 검(黔, 구이저우)이 역적을 일으키매 영녕이 흉거(凶渠)와 연루되어, 이미 일 전에 죽었으되 원옥(園屋)은 오히려 번(藩)의 근본[으로 취급되어] 관(官)에 들어갔다. 그 가장 사치하고 참람(僭)한 것은 남목청(楠木廳)의 주춧돌에 모두 승룡(升龍)을 새긴 것이니, 지금 이미 철거하여 수레로 경사(京師)에 실어 가 장작(將作)에 바쳤다.
盖数有其极,而物有其变,向之废兴,不已亟哉!夫古之封国,如齐为爽鸠氏之墟,季荝因之,有逢、伯陵因之,薄姑氏因之,而后太公因之。鲁为少昊之墟,而国中有大庭氏之库。盖因前代之都邑,其城郭沟涂宫室,可以无创事之劳,而又即其废兴之由,以为南面者之戒。古人之用心至矣。然则使君之为是举也,其亦有古人之心哉?为之记,使来者有考焉。成之日为康熙十八年月甲子,记之者某官崐山徐某也。
대개 수(數)에는 그 극(極)이 있고 사물에는 그 변(變)이 있으니, 지난날의 폐(廢)와 흥(興)함이 빠르지 않았던가! 무릇 옛날의 봉국(封國)은, 제(齊)가 상구씨(爽鳩氏)의 옛터이니 계측(季荝)이 이를 이었고, 유봉(有逢)·백릉(伯陵)이 이를 이었고, 박고씨(薄姑氏)가 이를 이었으며, 그 뒤 태공(太公)이 이를 이었다. 노(魯)는 소호(少昊)의 옛터이요, 그 나라 안에 대정씨(大庭氏)의 창고가 있다. 대개 전대(前代)의 도읍을 이음은 그 성곽과 도랑과 길과 궁실이 창건의 수고로움을 없앨 수 있고, 또 그 폐흥(廢興)의 연유를 곧바로 남면(南面)하는 자의 경계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옛사람의 마음씀이 지극하다. 그런즉 사군(使君)이 이 거사를 함이 또한 옛사람의 마음이 있음이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기(記)를 지어 오는 이로 하여금 상고할 바가 있게 한다. 이루어진 날은 강희 18년 모월(某月) 갑자(甲子)일이요, 기록한 이는 모 관(官) 곤산(崐山)의 서모(徐某)이다.
《소주부지(蘇州府志)》
拙政园在娄门内迎春坊,本道观也,中多乔木,御史王宪臣侵以为园,大弘寺在其后,亦半侵焉。崇台重屋,清川映带,水木擅胜吴中。待诏文徵明有记一传,而其子以蒱博为徐鸿胪少泉所得,更几世。至国朝顺治初年,为营将寓居,后归大学士陈之遴。之遴谴谪辽左,园亦籍没,扃户荒凉。中有宝珠山荼树,连理交柯,花时烂红夺目。
졸정원은 누문(婁門) 안 영춘방(迎春坊)에 있으니, 본래 도관(道觀)으로 그 안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어사(御史) 왕헌신(王憲臣)이 침범하여 정원으로 삼았고, 대홍사(大弘寺)가 그 뒤에 있으니 또한 절반이 침범되었다. 높은 대(臺)와 겹친 집에 맑은 내가 비끼듯 두르니, 수목(水木)이 오중(吳中)에서 뛰어남을 뽐냈다. 대조(待詔) 문징명이 기(記) 한 편을 지어 전하는데, 그 아들이 도박(蒱博)으로 서홍려(徐鴻臚) 소천(少泉)에게 넘겨주어 몇 대를 지났다. 국조(國朝) 순치(順治) 초년에 이르러 영장(營將)의 숙소가 되었고, 뒤에 대학사 진지린(陳之遴)에게 돌아갔다. 지린이 책벌(譴謫)되어 요좌(遼左)로 귀양 가매 정원 또한 적몰되어, 문이 닫히고 황량하였다. 그 안에 보주산다(寶珠山荼) 나무가 있어 가지가 이어지고 어울려 꽃 필 때면 붉게 눈부셔 눈을 빼앗았다.
《백성연수(百城烟水)》
拙政园,故大弘寺基也。其地林木绝胜,有王御史者侵以广其宫,后归徐氏最久。兵兴为镇将所据。已而海昌陈相国得之。内有宝珠山茶三四株,交柯合理,花时巨丽鲜妍,纷披照瞩,为江南所仅见。
졸정원은 옛 대홍사의 터이다. 그 땅의 수목이 지극히 뛰어나 왕(王) 어사라는 이가 침범하여 그 궁실을 넓혔고, 뒤에 서씨(徐氏)에게 돌아간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전란이 일어나 진장(鎭將)에게 점거되었다. 이윽고 해창(海昌)의 진상국(陳相國)이 이를 얻었다. 그 안에 보주산차(寶珠山茶) 서너 그루가 있어 가지가 어울리고 이치가 합하여, 꽃 필 때면 크고 곱고 선명하고 아름다워 흩날리며 비추어 바라보이니, 강남에서 오직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삼월삼일귀전원수계서(三月三日歸田園修禊序)》
吴中名园,归田独存。王君四怀克绍前烈,招我友朋,续修禊事。维时春风方和,百物呈象,绿草夹径,紫藤挂空,新荷舒钱,幽篁拂粉,坐危石,荫乔柯,陟前贤之故墅,逢佳日以娱宾,致足乐焉。于是解衣磅礴,散发咏歌,谈仙释之玄理,征古今之逸闻。林鸟来窥,渊鱼聚听,锋铦尽泯,俯仰皆宽,寄躯寰中,结想天外矣。迨主客既醉,少长忘年,手掬悬溜,身卧落花,慨彼桎梏轩冕,驰驱市朝,明月碧云,失之当境,曷若抗迹巢由,追踪支许,鸿飞鹄举,离尘避弋之适乎?未知右军兰亭,视此何如也。因思自有斯园,名流接踵。司寇公集胜国之衣冠,遴汝先生,联两朝之耆旧,相与锵金戛玉,投辖衔杯。无何埋白骨于青山,检赠诗于残箧,风景不殊,并为异物。抚今忆往,是用怆怀。百年以后,游者何人?
오중(吳中)의 이름난 정원 가운데 귀전(歸田)이 홀로 남았다. 왕군(王君) 사회(四懷)가 능히 앞선 유업(烈)을 계승하여 우리 벗들을 불러 수계(修禊)의 일을 이었다. 이때 봄바람이 바로 화하고 만물이 형상을 드러내니, 푸른 풀이 길을 끼고 등나무가 허공에 걸렸으며, 새 연잎이 동전을 펼치고 그윽한 대나무가 가루를 턴다. 높은 돌에 앉고 큰 가지 아래 그늘지며 앞선 어진 이의 옛 별장에 오르고 좋은 날을 만나 손님을 즐겁게 하니 지극히 즐거울 만하다. 이에 옷을 풀어헤치고 활개하며, 머리를 풀고 읊조려 노래하며, 신선과 석가(釋)의 현리(玄理)를 이야기하고 고금의 일문(逸聞)을 징험(徵)한다. 숲의 새가 와서 엿보고 연못의 물고기가 모여 들으니,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다 사라지고 우러러보고 굽어봄이 모두 너그러워, 몸을 천하 가운데 맡기고 생각을 하늘 밖에 맺는다. 주인과 손님이 이미 취함에 이르러 어리고 늙음이 나이를 잊고, 손으로 매달린 물줄기를 떠 마시며 몸은 떨어진 꽃 위에 눕는다. 저 지고(桎梏) 같은 헌면(軒冕)을 개탄하며 시조(市朝)에 달려 다니는 자는 밝은 달과 푸른 구름을 바로 그 경지에서 놓치니, 어찌 소부(巢父)·허유(許由)의 자취를 높이고 지허(支許, 지돈·허순)를 따라잡으며, 기러기 날고 고니 오르듯 속세를 떠나 화살을 피하는 쾌적함과 같겠는가? 우군(右軍, 왕희지)의 난정(蘭亭)이 이에 견주어 어떠할지 알 수 없다. 이에 생각하건대 이 정원이 있은 이래로 명류(名流)가 발뒤꿈치를 이었다. 사구공(司寇公)이 승국(勝國)의 의관(衣冠)을 모았고, 린여(遴汝) 선생이 양조(兩朝)의 기구(耆舊)를 이었으며, 서로 더불어 금을 울리고 옥을 두드리듯 [시를 읊조리고] 말굽을 던지고 잔을 입에 댔다. 얼마 안 되어 흰 뼈를 푸른 산에 묻고 남은 궤짝에서 증시(贈詩)를 찾아내니,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함께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다. 지금을 어루만지며 지난날을 생각하니 이에 쓸쓸한 회포(懷)가 든다. 백 년 뒤에 노닐 자는 어떤 사람일까?
《영졸정원산채화(詠拙政園山茶花)》
拙政园,故大弘寺基也。其地林木绝胜,有王御史者,侵之以广其宫,后归徐氏最久。兵兴,为镇将所据。已而海昌陈相国得之。内有宝珠山茶三四株,交柯合理,得势争高。每花时,巨丽鲜妍,纷披照瞩,为江南所仅见。相国自买此园,在政地十年不归,再经谴谪辽海,此花从未寓目。余偶过太息,为作此诗。他日午桥独乐,定有酬唱,以示看花君子也。
졸정원은 옛 대홍사의 터이다. 그 땅의 수목이 지극히 뛰어나 왕(王) 어사라는 이가 있어 이를 침범하여 그 궁실을 넓혔고, 뒤에 서씨에게 돌아간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전란이 일어나 진장에게 점거되었다. 이윽고 해창의 진상국이 이를 얻었다. 그 안에 보주산차 서너 그루가 있어 가지가 어울리고 이치가 합하여 형세를 얻어 다투어 높아졌다. 꽃 필 때마다 크고 곱고 선명하고 아름다워 흩날리며 비추어 바라보이니, 강남에서 오직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상국은 이 정원을 산 이래 정지(政地, 조정)에 있어 십 년을 돌아오지 않고, 다시 책벌(譴謫)되어 요해(遼海)로 귀양 가매, 이 꽃을 일찍이 한 번도 눈에 담지 못하였다.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 탄식하며 이를 위해 이 시를 지었다. 훗날 오교(午橋)의 독락(獨樂)처럼 반드시 화창(酬唱)이 있어 꽃 보는 군자에게 보일 것이다.
拙政园内山茶花,一株两株枝交加。艳如天孙织云锦,赪如姹女烧丹砂。吐如珊瑚缀火齐,映如䗖𬟽凌朝霞。百年前是空王宅,宝珠色相生光华。长养端资鬼神力,优昙涌现西流沙。歌台舞榭从何起,当日豪家擅闾里。苦夺精蓝为玩花,旋抛先业随流水。儿郎纵博赌名园,一掷留传犹在耳。后人修筑改池台,石梁路转苍苔履。曲槛奇花拂画楼,楼上朱颜娇莫比。千条绛蜡照铅华,十丈红墙饰罗绮。斗尽风流富管弦,更谁瞥眼閒桃李。齐女门边战鼓声,入门便作将军垒。荆棘从填马矢高,斧斤勿剪莺簧喜。近年此地归相公,相公劳苦承明宫。真宰阳和暗回斡,长安日日披薰风。花留金谷迟难落,花到朱门分外红。独有君恩归未得,百花深锁月明中。灌花老人向前说,园中昨夜零霜雪。黄沙淅淅动人愁,碧树垂垂为谁发。可怜塞上燕支山,染花不就花枝殷。江城作花颜色好,杜鹃啼血何斑斑。花开连理古来少,并蒂同心不相保。名花珍异惜如珠,满地飘残胡不扫。杨柳丝丝二月天,玉门关外无芳草。纵费东君着意吹,忍经摧折春光老。看花不语泪沾衣,惆怅花间燕子飞。折取一枝还供佛,征人消息几时归。
졸정원 안의 산차꽃, 한 그루 두 그루 가지가 서로 어울렸네. 고운 것은 하늘 손녀(天孫)가 짠 구름 비단 같고, 붉은 것은 미녀(姹女)가 단사(丹砂)를 태운 빛 같네. 피어남은 산호에 화제(火齊)를 수놓은 듯하고, 비침은 지동(䗖𬟽, 무지개)이 아침 노을을 능가하는 듯하네. 백 년 전에는 이곳이 공왕(空王, 부처)의 집이었으니, 보주(寶珠)의 색상(色相)이 빛을 내었네. 길러 기름은 진실로 귀신의 힘을 빌렸고, 우담(優曇)이 서쪽 유사(流沙)에서 솟아 나타났네. 노래 부르던 대(臺)와 춤추던 사(榭)가 어디서 일어났던고, 그날의 호족(豪家)이 고을을 제멋대로 하였네. 애써 정람(精藍, 사찰)을 빼앗아 꽃 구경을 하더니, 곧 선대의 유업을 던져 흐르는 물을 따랐네. 아들이 도박을 벌여 이름난 정원을 걸더니, 한 번 던져 잃었다는 말이 아직 귀에 남았네. 뒷사람이 쌓고 지어 못과 대(臺)를 고치니, 돌다리 길이 돌고 푸른 이끼가 밟혔네. 굽은 난간의 기이한 꽃이 그림 누각을 쓸고, 누 위의 붉은 얼굴이 교태로워 견줄 바 없네. 천 가닥 붉은 초가 연분(鉛華)을 비추고, 십 장 붉은 담이 나라(羅綺)로 장식되었네. 풍류를 다투고 관현(管絃)이 넘쳐도, 다시 누가 한눈으로 한가로운 도리(桃李)를 보았던고. 제녀문(齊女門) 곁에 전고(戰鼓) 소리 들리더니, 문에 들어서자 곧장 장군의 보루가 되었네. 가시덤불이 말똥만큼 높이 채워지고, 도끼가 베지 않으니 꾀꼬리 노래가 기뻐하네. 근년에 이 땅이 상공(相公)에게 돌아갔으나, 상공은 승명궁(承明宮)에서 수고로웠네. 참된 주재(主宰)의 따뜻한 기운이 은밀히 돌아오니, 장안(長安)에는 날마다 훈풍(薰風)이 불었네. 꽃이 금곡(金谷)에 머물러 늦도록 지지 않고, 꽃이 주문(朱門)에 이르니 각별히 붉네. 오직 임금의 은혜로 돌아오지 못하매, 온갖 꽃이 달 밝은 가운데 깊이 갇혔네. 꽃에 물 주는 노인이 앞으로 나아와 말하네, 원 안에 어젯밤 서리와 눈이 내렸다고. 누른 모래가 소슬소슬 사람의 시름을 움직이고, 푸른 나무가 늘어져 누구를 위해 피는고. 가련한 변경의 연지산(燕支山)이여, 꽃을 물들이지 못하여 꽃가지가 검붉네. 강성(江城)의 꽃은 빛깔이 좋건만, 두견새가 피를 토하니 어찌 그리 얼룩졌는고. 꽃이 이어진 가지에 피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고, 나란히 핀 꽃술이 한마음이어도 서로 보전하지 못하네. 이름난 꽃을 진기히 여겨 구슬처럼 아끼건만, 온 땅에 흩날려 시드니 어찌 쓸지 않는고. 버들 가닥가닥 이월의 하늘이나, 옥문관(玉門關) 밖에는 향기로운 풀이 없네. 비록 동군(東君, 봄의 신)이 마음을 다해 불게 하여도, 어찌 꺾이고 꺾여 봄빛이 늙어감을 견디겠는고. 꽃을 보며 말 없이 눈물이 옷을 적시고, 꽃 사이 제비가 나는 것에 서글퍼하네. 한 가지를 꺾어 가지고 돌아가 부처께 올리니, 정인(征人)의 소식은 언제 돌아올고.
《복원기(復園記)》
吴中娄、齐二门之间,有名园焉。园以“复”名,蒋司马葺旧地为园而名之者也。前此为拙政园,创于王侍御,归于陈相君,先后为王、严二镇将所有。其中飞楼画栋,崇岩广池,与夫连理奇花,靡曼歌舞,胜概甲于吴下。百年来废为秽区,既已丛榛莽而穴狐兔矣。主人得其地而有之,谓奢侈可戒而名区不容弃捐也。于是与客商略,因阜垒山,因洼疏池,集宾有堂,眺远有楼、有阁,读书有斋,燕寝有馆、有房,循行往还,登降上下,有廊榭亭台、碕沜村柴之属。既已经营缔造,历有年所矣。
오중(吳中) 누(婁)·제(齊) 두 문 사이에 이름난 정원이 있다. 정원이 “복(復)“으로 이름함은, 장(蔣) 사마(司馬)가 옛터를 수리하여 정원을 만들고 이로써 이름한 것이다. 이전에 이곳은 졸정원으로, 왕 시어(侍御)가 창건하고 진상군(陳相君)에게 돌아갔으며, 선후로 왕(王)·엄(嚴) 두 진장(鎭將)의 소유였다. 그 안에 나는 듯한 누각과 그림 그린 마룻대, 높은 바위와 넓은 못, 그리고 이어진 가지의 기이한 꽃과 화사한 가무(歌舞)가 있어 뛰어난 경관이 오하(吳下)에서 으뜸이었다. 백 년 동안 폐하여 더러운 구역이 되어 이미 개암나무와 잡풀이 우거지고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팠다. 주인이 그 땅을 얻어 소유하며 이르기를 사치함은 경계할 만하나 이름난 구역은 버려 둘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손님과 함께 상략(商略)하여, 언덕을 따라 산을 쌓고 웅덩이를 따라 못을 준설하며, 빈객을 모을 당(堂)이 있고 멀리 바라볼 누(樓)와 각(閣)이 있으며, 글 읽을 재(齋)가 있고 편히 잘 관(館)과 방(房)이 있으며, 두루 다니며 오가고 오르내리는 데 랑사(廊榭)·정대(亭台)·기반(碕沜)·촌시(村柴)의 무리가 있다. 이미 경영하여 조성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戊午、庚申,余两经其地,谓是园告成,将丰而不侈,约而不陋,百里之内,可以接踵乐郊,而邾莒学山茧园也。时予方之京师,未及俟其断手何日,日月既久,常往来于心。丁卯春以乞假南归,复游其中,觉山增而高,水浚而深,峰岫互回,云天倒映。堂宇不改,而轩邃高朗,若有加于前;境地依然,而屈盘合沓,疑新交于目。秾柯蔽日,低枝写镜,岸欹怪状之石,砌列不名之蘤。主人举酒酌客,咏歌谈谐,萧然泊然。禽鱼翔游,物亦同趣。不离轩裳而共履闲旷之域,不出城市而共获山林之性。回忆初游,心目倍适。屈指数之,盖园之成,已四五年于兹矣,旧观仍复,即以复名其园。
무오(戊午)·경신(庚申)에 내가 두 번 그 땅을 지나며, 이 정원이 준공되면 넉넉하되 사치하지 않고 검약하되 누추하지 않아, 백 리 안에서 즐거운 교외에 발뒤꿈치를 이을 수 있으며 주(邾)·거(莒)의 학산(學山)·검원(繭園)과 같으리라 하였다. 그때 나는 막 경사(京師)로 가는 중이라 그 준공이 어느 날인지 기다리지 못하였고,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도 늘 마음에 오고 갔다. 정묘(丁卯) 봄에 휴가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와 다시 그 안을 노니, 산이 더하여 높아지고 물이 준설되어 깊어졌으며, 봉우리와 바위가 서로 굽이치고 구름과 하늘이 거꾸로 비침을 느꼈다. 당우(堂宇)는 바뀌지 않았으나 헌연(軒)이 그윽하고 높고 밝아 앞보다 더한 듯하고, 경지(境地)는 여전하나 굽이돌고 합쳐지고 포개져 눈에 새로이 사귄 듯 의심스러웠다. 무성한 가지가 해를 가리고 낮은 가지는 거울 같은 물에 비치며, 언덕에 기이한 모양의 돌이 기울어지고 층계에 이름 모를 꽃이 늘어섰다. 주인이 술을 들어 손님에게 따르며 읊조려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어울리니, 쓸쓸한 듯 담담하였다. 새와 물고기가 날고 노니, 만물 또한 같은 취향이었다. 헌상(軒裳, 벼슬)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한가하고 넓은 경지를 밟으며, 성시(城市)를 나가지 않고 함께 산림의 성정을 얻었다. 처음 노닐던 것을 돌이켜 보니 마음과 눈이 배로 쾌적하였다. 손가락을 굽혀 세어 보니 대개 정원이 이루어진 지 이미 사오 년이 이곳에 지났으니, 옛 모습을 그대로 회복하여 곧 “복(復)“으로써 그 정원을 이름한 것이다.
予尝思古来名园,如辟疆,如金谷,如铜池,如华林,如奉诚、平泉、履道、独乐,一切擅胜寰中者,时叠见咏歌,形诸记载,然既废以后,无人焉起而新之,求如宋玉故居复归庾信者,艺林流传,不可多见。今因拙政废园而复之,虽林庐息影,栖情颐神,视前人之竞豪侈、饰土木者,若各自乐其所乐,而不欲自标其名,恐使前此之殚心规画者,因我而遽归于乌有之乡也。其用心之厚,非戋戋者所能共喻也已。且主人用心,又不止于此。主人高祖为兵宪雉园公。雉园文章风节,养晦树德,焯焯一时,后之子孙,故当思贻前光而扬清芬者。主人承先人庇荫,本无藉于复业,而敛抑之怀,常有事于复德。则夫奉世泽而继述之,味道风而涵泳之,以修身之不远复,进于中行之独复、无悔之敦复,有日惓惓于寸衷而不能暂释者也。取以名园,其即谢康乐述祖德意乎?因承命作记,而书其说以俟。主人名棨,字诵先,需次司马,今跧伏未出,固以天爵为贵者云。乾隆十二年丁卯夏日同学弟归愚沈德潜撰。
내가 일찍이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이름난 정원으로, 벽강(辟疆)과 같고, 금곡(金谷)과 같고, 동지(銅池)와 같고, 화림(華林)과 같고, 봉성(奉誠)·평천(平泉)·리도(履道)·독락(獨樂)과 같아, 천하에서 뛰어남을 뽐낸 모든 것이 때때로 거듭 읊조려 노래되고 기록에 나타났으나, 이미 폐한 뒤에는 그것을 일으켜 새롭게 하는 사람이 없어, 송옥(宋玉)의 옛집이 다시 우신(庾信)에게 돌아간 것과 같은 것을 구하면, 예림(藝林)에 전해 흐르는 것이 많이 보기 어렵다. 지금 졸정(拙政)의 폐원(廢園)을 인하여 이를 회복하니, 비록 숲의 오두막에서 그림자를 쉬고 정(情)을 깃들이고 신(神)을 기르지만, 앞사람의 호사(豪侈)를 다투고 토목(土木)을 꾸민 것을 보며, 마치 각자 그 즐기는 바를 즐기되 스스로 그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듯하니, 이전에 마음을 다해 규획한 자가 나로 인해 곧 무유지향(烏有之鄕)으로 돌아갈까 두려워함이다. 그 마음씀의 도타움은 하찮은 이가 함께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한 주인의 마음씀은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인의 고조(高祖)는 병헌(兵憲) 치원공(雉園公)이다. 치원(雉園)은 문장(文章)과 풍절(風節)로 빛을 기르고 덕을 세워 한 시대에 빛났으니, 뒤의 자손은 마땅히 앞의 빛을 물려주고 맑은 향기를 드날릴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인이 선인(先人)의 비호와 그늘을 이어받아 본래 업(業)을 회복함에 기댈 바가 없으나, 거두어 누르는 회포(懷)로 늘 덕을 회복하는 일에 힘쓰니, 곧 세택(世澤)을 받들어 이어 서술하고, 도(道)의 풍(風)을 맛보아 함영(涵泳)하며, 몸을 닦음의 “멀지 않은 회복(不遠復)“으로써 나아가 “중행(中行)의 홀로 회복(獨復)“과 “후회 없는 돈독한 회복(敦復)“에 이르기까지, 날로 권권(惓惓)히 촌충(寸衷)에 두어 잠시도 놓지 못하는 바가 있다. 이를 취하여 정원을 이름함은 곧 사강락(謝康樂, 사령운)이 조상의 덕을 서술한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명(命)을 받들어 기(記)를 짓고 그 말을 써서 기다린다. 주인의 이름은 기(棨)요, 자는 송선(誦先)이며, 사마(司馬)로 차임(差任)을 기다리는 차(次)이나 지금 움츠리고 숨어 나아가지 않으니, 진실로 천작(天爵)을 귀하게 여기는 이이다. 건륭 12년 정묘(丁卯) 여름날, 동학제(同學弟) 귀우(歸愚) 심덕잠(沈德潛)이 짓다.
《팔기봉직회관사헌창건기(八旗奉直會館四憲創建記)》
凡兴作之事,莫难于创始,而创始之难有三,曰财曰地曰人。无财不可以图功;有财而无其地,平地为山,事劳而功倍,鲜不隳于半涂;有财有地矣,而经始之人学品闻望不足以率众而服公,则名胜之地,众所争羡,亦乌能购而有之哉。
무릇 일으키고 짓는 일은 시작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시작함의 어려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재(財)·지(地)·인(人)이라 한다. 재물이 없으면 공을 도모할 수 없고, 재물이 있으되 그 땅이 없으면 평지에 산을 쌓는 것이니 일은 수고롭고 공은 배가 되어 반쯤 길에서 무너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재물과 땅이 있으되, 일을 시작하는 사람의 학문과 품행과 명망이 대중을 거느리고 공(公)을 복종시키기에 족하지 못하면, 명승(名勝)의 땅은 뭇사람이 다투어 부러워하는 바이니 또한 어찌 능히 사서 소유할 수 있겠는가?
吴郡为各省官商辐辏之区,皆有会馆以为联络乡谊之地。独八旗奉直未之或有。岂我朝二百余年侨寓于斯者,即无一二有志之士,倡议于其间?徒以财力不足,而又无名位兼隆之人以振兴之耳。
오군(吳郡)은 각 성(省)의 관리와 상인이 바퀴살 모이듯 모이는 구역으로, 모두 회관이 있어 향의(鄕誼)를 연락하는 곳으로 삼았다. 오직 팔기(八旗)의 봉직(奉直)만은 일찍이 이것이 없었다. 어찌 우리 조정 이백여 년 동안 이곳에 교거(僑寓)한 자 가운데 곧 한두 뜻 있는 선비가 없어 그 가운데서 창의하지 못하였겠는가? 다만 재력(財力)이 족하지 못하고 또 명위(名位)가 겸하여 높은 사람이 없어 이를 진흥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己巳,榷使静山德公寿,粮道茂文英公朴,先后奉命来苏。每于同乡属佐谒见时,慨然动念,故于庚午、辛未两岁,首倡团拜,藉联桑梓,常以借地宴叙为阙如。适南皮殿撰子青张公之万抚苏,以吴园为行馆,爱其地之幽旷,略加修葺,已隐有备价购作会馆之意。及升任浙闽总督,予告归养,行有日矣。乃与竹樵方伯恩公锡议及,意相符合,毅然任之,又经德、英二公极力赞成,遂各出俸余,照原买价并加修葺工本,如数缴公,于壬申正月改此园为八旗奉直会馆。爰集同乡僚属,会宴于斯,略分言情,迭相酬酢,以尽欢为乐。此诚二百余年未有之盛举,而督抚榷使司道萃于一时,谦光下逮,无分贵贱,皆与于燕,此又他省所未有,历任所不能遇合者也。千载一时,官于斯者抑何幸焉。自兹以往,凡我同乡,居于斯,燕于斯,游咏于斯,聚乡族于斯,皆出自四宪之所赐也。襄其事者前署苏州守绶臣杨靖,前署泰州牧云衢长康,商诸同人,为四宪设长生位于园中之见山楼,以不忘兴始之功,属予为记以志感。同治壬申三月潞河李翰文谨记并书。时年六十有二。
기사(己巳)에 각사(榷使) 정산(靜山) 덕공 수(德公壽)와 양도(糧道) 무문(茂文) 영공 박(英公朴)이 선후로 명(命)을 받들어 소주(蘇)에 왔다. 동향의 속좌(屬佐)가 알현할 때마다 개연히 뜻을 움직여, 이런 까닭에 경오(庚午)·신미(辛未) 두 해에 처음으로 단배(團拜)를 창창하여 이로써 상재(桑梓, 고향)를 연결하였으나, 늘 땅을 빌려 연회함을 결여(闕如)로 여겼다. 마침 남피(南皮)의 전찬(殿撰) 자청(子靑) 장공 지만(張公之萬)이 소주를 순무(巡撫)하며 오원(吳園)을 행관(行館)으로 삼고 그 땅의 그윽하고 넓음을 사랑하여 대략 수리를 더하였으니, 이미 은연중에 값을 갖추어 사서 회관으로 만들 뜻이 있었다. 절민총독(浙閩總督)으로 승임하고 여고(予告, 휴가)를 받아 돌아가 봉양함에 떠날 날이 잡히자, 이에 죽초(竹樵) 방백(方伯) 은공 석(恩公錫)과 의논하여 뜻이 서로 부합하매, 의연히 이를 맡았고 또 덕(德)·영(英) 두 공이 힘을 다해 찬성하여, 마침내 각각 봉급의 남은 것을 내어 원래 산 값에 수리 공본(工本)을 더하여 그 수대로 공(公)에 납부하고, 임신(壬申) 정월에 이 정원을 팔기봉직회관으로 고쳤다. 이에 동향의 요속(僚屬)을 모아 이곳에서 모여 연회하며, 대략 분(分)을 헤아리고 정(情)을 말하여 번갈아 주배(酬酢)하며 즐거움을 다함을 낙으로 삼았다. 이는 참으로 이백여 년에 없던 성거(盛擧)요, 총독·순무·각사·사도(司道)가 한때에 모이고 겸손한 빛이 아래에 미쳐 귀천(貴賤)을 나누지 않고 모두 연회에 참여하였으니, 이는 또한 다른 성에 없던 것이요 역임(歷任)한 이들이 만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천 년에 한때이니, 이곳에서 벼슬한 자는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이로부터 나아가 무릇 우리 동향(同鄕)은 이곳에 살고, 이곳에서 연회하고, 이곳에서 노닐며 읊조리고, 이곳에 향족(鄕族)을 모으니, 모두 네 헌(憲)의 베푸신 바에서 나왔다. 그 일을 도운 이는 전임 서(署) 소주수(蘇州守) 수신(綬臣) 양정(楊靖)과 전임 서(署) 태주목(泰州牧) 운구(雲衢) 장강(長康)으로, 여러 동인(同人)과 상의하여 네 헌을 위해 원중의 견산루(見山樓)에 장생위(長生位)를 설치하여 시작한 공을 잊지 않고자 하며, 나에게 기(記)를 지어 감사를 기록하라 부탁하였다. 동치(同治) 임신(壬申) 삼월, 노하(潞河) 이한문(李翰文)이 삼가 기록하고 아울러 쓰다. 그때 나이 예순두 살이다.
《팔기봉직회관기(八旗奉直會館記)》
往岁备官京师,交游中有至自苏者,道及吾乡会馆之胜,辄神为之往。嗣于光绪九年秋,忝膺简命,视织斯邦,数与乡人游宴于中。向之所闻,历历在目,流连光景,欣慨交心。馆界娄、齐二门间,在明为王氏别墅,名拙政园。国初海宁陈氏得之。旋入官,为驻防将军府,又为兵备道馆。继为吴三桂婿王氏所有,籍没,复入官。改苏松常道新署。署裁散为民居。历蒋氏、查氏,最后归吴氏。咸丰庚申,粤匪入踞为伪府。城复,由善后局拨白银三千作值,付吴氏,而以园归公,暂为巡抚行辕。同治十年冬,今南皮相国来抚吴,适德静山尚衣、恩竹樵方伯、英茂文观察三君皆同乡,乃倡建立会馆之议,以价银三千、修理银二千,汇交藩库,改称今名。其中文槛参差,修廊迤逦,清泉贴地,曲沼绮交,峭石当门,群峰玉立,吴中园亭之美,未有出其右者。当夫风日清和,迎神迓福,衔杯情话,冠盖偕来,于以观少长之仪,而申桑梓敬恭之义,甚盛事也。独念斯馆创于明嘉靖中,迄今三百余年,天运易于上,人事迁于下,烟云变态,迭废迭兴,由后溯前,感慨系之。计为吾乡会馆,又十年矣。日月不居,风摧雨蚀,保无有井干、庑廊、榱桷哆剥者乎?勋莅吴三载,虽与诸君子经纪其事,稍为修葺之谋,然又愿我乡人同心断金,合力润屋。俾斯馆之美轮美奂,历久恒新,毋令后人更笑其拙。斯则抚衷深念,而属望无穷者也。爰泚笔而为之记。光绪柔兆阉茂之岁,皋月下浣,长白世勋识并书。
지난날 경사(京師)에서 벼슬에 보충(備官)되었을 때, 교유(交游) 가운데 소주(蘇)에서 온 자가 있어 우리 고향 회관의 명승을 말하면 곧 정신이 그것을 위해 달려갔다. 이어 광서 9년(1883) 가을에 외람되이 간명(簡命)을 받들어 이 고을의 직조(織造)를 살피게 되어 여러 차례 향인(鄕人)과 더불어 그 안에서 노닐며 연회하였다. 지난날 들은 바가 눈앞에 낱낱이 있어 경치에 머물며 기쁨과 감개가 마음에 어울렸다. 회관은 누(婁)·제(齊) 두 문 사이에 경계하여, 명대에는 왕씨(王氏)의 별서(別墅)로 이름이 졸정원이었다. 국초(國初)에 해녕(海寧) 진씨(陳氏)가 이를 얻었고, 곧 관(官)에 들어가 주방장군부(駐防將軍府)가 되고 또 병비도관(兵備道館)이 되었으며, 이어 오삼계(吳三桂)의 사위 왕씨(王氏)의 소유가 되고, 적몰되어 다시 관(官)에 들어갔으며, 소송상도신서(蘇松常道新署)로 고쳐졌다. 관서가 폐지되고 흩어져 민가가 되고, 장씨(蔣氏)·사씨(查氏)를 지나 마지막에 오씨(吳氏)에게 돌아갔다. 함풍(咸豊) 경신(庚申)에 월비(粤匪, 태평군)가 들어와 움크려 위부(僞府)를 삼았다. 성이 회복되매 선후국(善後局)에서 백은 삼천[냥]을 떼어 값으로 삼아 오씨에게 주고, 정원을 공(公)에 돌려 잠시 순무행원(巡撫行轅)으로 삼았다. 동치 10년 겨울에 지금의 남피(南皮) 상국(相國, 장지만)이 와서 오(吳)를 순무(撫)하매, 마침 덕정산(德靜山) 상의(尚衣)·은죽초(恩竹樵) 방백(方伯)·영무문(英茂文) 관찰(觀察) 세 군(君)이 모두 동향이라, 이에 회관을 건립할 의(議)를 창창하여 값의 은 삼천[냥]과 수리 은이천[냥]을 번고(藩庫)에 모아 바치고, 고쳐 지금의 이름을 칭하였다. 그 안에 무늬 있는 난간이 층층하고 긴 회랑이 굽이굽이 이어지며, 맑은 샘이 땅에 붙고 굽은 못이 비단처럼 교차하며, 빼어난 돌이 문을 마주하고 여러 봉우리가 옥처럼 서 있으니, 오중(吳中) 원정(園亭)의 아름다움은 그 오른쪽에 나는 것이 없다. 바람과 햇살이 맑고 화할 때 신(神)을 맞고 복을 영접하며, 잔을 입에 대고 정담을 나누고 관개(冠蓋)가 함께 오니, 이로써 어리고 늙은 이의 예(儀)를 보고 상재(桑梓)에 공경하는 의(義)를 펴니 심히 성대한 일이다. 홀로 생각하건대 이 회관은 명 가정 연간에 창건되어 지금까지 삼백여 년이니, 천운(天運)이 위에서 바뀌고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옮겨, 연운(煙雲)이 자태를 변하여 번갈아 폐하고 번갈아 흥하니, 뒤에서 앞을 거슬러 오르면 감개가 매인다. 헤아리건대 우리 고향 회관이 된 지 또 십 년이다. 세월이 머물지 않고 바람에 부서지고 비에 닳으니, 정간(井幹)·무랑(廡廊)·최각(榱桷)에 벗겨지고 갈라지는 것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훈(勳)이 오(吳)에 임한 지 삼 년에, 비록 여러 군자와 더불어 그 일을 경기(經紀)하며 조금 수리의 꾀를 마련하였으나, 또한 바라건대 우리 향인(鄕人)이 한마음으로 쇠를 끊고 힘을 합하여 집을 윤기 있게 하여, 이 회관의 미륜미환(美輪美奐)함이 오래도록 늘 새롭게 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그 졸(拙)함을 웃지 않게 하리라. 이것이 곧 마음속을 어루만져 깊이 생각하고 바람이 다함이 없는 바이다. 이에 붓을 적셔 이를 위해 기(記)를 짓는다. 광서(光緖) 유조(柔兆)·엄무(閹茂)의 해, 고월(皋月, 오월) 하환(下浣), 장백(長白) 세훈(世勳)이 기록하고 아울러 쓰다.
《보원기(補園記)》
岁己卯,卜居娄门内迎春坊。宅北有地一隅,池沼澄泓,林木蓊翳,间存亭台一、二处,皆欹侧欲颓,因少葺之,芟夷芜秽,略见端倪,名曰补园。园之东即故明王槐雨先生拙政园也。一垣中阻,而映带联络之迹,历历在目。观其形势,盖创造之初,当出一手,后人剖而二之耳。
해 기묘(己卯), 누문(婁門) 안 영춘방(迎春坊)에 점쳐 살았다. 집 북쪽에 한 모퉁이의 땅이 있어 못과 소(沼)는 맑고 깊고 수목은 울창히 가리워 있으며, 그 사이에 정대(亭台) 한두 곳이 남았으나 모두 기울어져 무너지려 하므로, 이에 조금 수리하고 무성하고 더러운 것을 베어 없애니 대략 단서가 보여, 이름하여 보원(補園)이라 하였다. 정원의 동쪽은 곧 옛 명(明)의 왕회우(王槐雨) 선생의 졸정원이다. 한 담장이 가운데 가로막았으나 비끼듯 두르고 잇닿은 자취가 눈앞에 낱낱이 있다. 그 형세를 보며 대개 창조의 초기에 마땅히 한 손에서 나왔을 것을 뒷사람이 갈라 둘로 만든 것이다.
今秋顾君若波客予家,偶检得旧藏文待诏《拙政园记》石刻,首尾完好,举以见赠。因就两园遍索是石不可得,询好古者,亦鲜知之。《记》中所谓胜处三十有一,各为赋之,既未知待诏集中诗尚在否?即其标举诸胜,亦旧观尽改,无复可征。盖居是园者,迭有变置,自嘉靖迄今,垂四百年,衣裳钟鼓,固已屡易主矣。
올가을에 고군(顧君) 약파(若波)가 내 집에 객(客)으로 와서, 우연히 옛 소장의 문대조(文待詔) 《졸정원기(拙政園記)》의 석각(石刻)을 찾아내니 처음과 끝이 온전하여, 들어 나에게 주었다. 이에 두 정원에서 이 돌을 두루 찾아도 얻을 수 없고, 호고(好古)하는 이에게 물어도 또한 아는 이가 드물다. 《기(記)》 가운데 이른바 명승(勝處)이 서른하나로 각기 부(賦)를 지었으니, 이미 대조의 집(集)에 시가 아직 있는지 알 수 없고, 곧 그 표거(標擧)한 여러 명승 또한 옛 모습이 모두 바뀌어 다시는 징험할 수 없다. 대개 이 정원에 사는 자가 번갈아 변하고 옮겨져, 가정(嘉靖) 이래 지금까지 거의 사백 년이니, 의상(衣裳)과 종고(鐘鼓)가 진작에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다.
予恐待诏手迹,久亦湮没,属钱新之重摹上石,以永其传,且俾游者。虽不获睹当时之胜,而三十一景具载其名,尚足资考订一助也。曩得征仲、石田先生遗像,为构一椽,勒石奉之。曾未几时,适获是刻,毋亦先生之灵,式凭有在,是固拙政园一大幸,而吾补园亦与有光已。遂忘不文,爰赞数言,志欣慰焉。
내가 대조(待詔)의 손글씨가 오래되면 또한 묻힐까 염려하여, 전신지(錢新之)에게 부탁하여 다시 모각(摹刻)하여 돌에 오르게 하여 그 전함을 길이 하고, 또 노니는 이로 하여금 비록 당시의 명승을 보지 못하더라도 삼십일 경(景)에 그 이름이 갖추어 실려 있어 오히려 고정(考訂)에 한 가지 도움이 될 만하게 하였다. 예전에 징중(徵仲)·석전(石田, 심주) 선생의 유상(遺像)을 얻어 이를 위해 한 칸의 집을 지어 돌에 새겨 봉안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마침 이 각(刻)을 얻었으니, 무릇 선생의 영(靈)이 의지할 바가 있음이 아니겠는가. 이는 진실로 졸정원의 한 큰 다행이요, 우리 보원 또한 그 빛에 참여한 것이다. 이에 글 아님을 잊고 이에 몇 마디 찬(贊)하여 기쁘고 위로됨을 기록한다.
光绪二十年岁在甲午除夕前三日,吴县张履谦月阶甫识,嘱古娄俞宗海粟庐氏书于拜文揖沈之斋。
광서 20년 해가 갑오(甲午)에 석양(除夕) 사흘 전, 오현(吳縣) 장리겸(張履謙) 월계보(月階甫)가 기록하고, 고루(古婁)의 유종해(俞宗海) 속려씨(粟廬氏)에게 부탁하여 배문읍심지재(拜文揖沈之齋)에서 쓰다.
《초랑좌록(蕉廊脞錄)》
文待诏拙政园图册子嘉靖十二年癸已五月画,图中诸景凡三十有一,曰若墅堂、梦隐楼、繁香岛、倚玉轩、小飞虹、芙蓉隈、小沧浪、志清处、意远台、钓䂬、水华池、深净亭、待霜亭、听松风处、怡颜处、来禽囿、玫瑰柴、珍李坂、得真亭、蔷薇径、桃花沂、湘筠呜、槐幄、槐雨亭、尔耳轩、芭蕉槛、竹涧、瑶圃、嘉实亭、玉泉。每一景系以一诗,诗有小引,述命名意。诗后拙政园记一首,亦待诏作。园主人王敬止,字槐雨,又字献臣,以御史忤权贵,逮系赦归。卷首有林庭棉小泉题识云:“文子有声画、无声诗,两臻其妙。”又云:“槐雨在诏狱,祸且不测,先文安官南铨冢宰,抗奏论救,始获从轻。”文安论救事见《明史》本传。小泉谥康懿。此图旧藏吴门蒋氏,后归海宁胡豫波,道光间归朱仲青中翰。有吴槎客骞、钱梅溪泳、查仲湛人供、殷云栖树柏、文后山鼎、程万伯庆华、苏厚子惇元、顶芝生廷绶、顾兰厓翃、钱叔美杜、黄霁青安涛、徐子勉楙、陈登之延恩、张叔未廷济诸人诗跋,何子贞、张子祥、吴平斋诸公题识。最后子贞丈一诗并跋云:“此册归鄞县蒋君芝舫,则同治乙丑春也。”册面钱梅溪书“衡山先生三绝册”,文待诏“拙政园图”七字为俞曲园师题。钱题之前,别有戴文节画拙政园图一帧,自题云:“余平生所见文画,无如拙政园之多者,可谓极文之大观。”又云:“予于文画爱之入骨,此偶尔兴发为之,自忘其陋。近时松壶、后山两先生皆深于文者,仲青倘能为予就正,则予于文或可得进步尔。”末署“文衡山私淑弟子戴熙”,则文节他画所未有也。此园二百年来兴废无常,云烟变幻,尤足为东吴掌故画矣。今为南林蒋孟苹以重直得之。光绪中游吴门,曾访兹园,时已为八旗会馆,屋宇敝陋,而水石林木之胜,金闲诸园皆不逮也。园在明嘉靖间王御史献臣筑,侵大宏寺基以辟之。其子与里中徐氏子博,一夕失之,归于徐氏。国初归海宁陈相国之遴。陈败,时方添设驻防兵,改将军府;驻防兵撤,又为兵备道行馆。既而吴三桂婿王永康居之,寻籍没入官。康熙十八年改苏松常镇道官署,旋裁,园散入民居。郡人蒋太守邳得之,名曰复园。嘉庆中查憺余孝廉人倓购得之。道光中家菘圃相国又得之。至今虽屡易主,而谈者尚呼为吴园云。
문대조(文待詔) 졸정원도(拙政園圖) 책자는 가정 12년 계사(癸巳) 오월에 그린 것으로, 그림 가운데 여러 경(景)이 모두 서른하나이니, 약서당(若墅堂)·몽은루(夢隱樓)·번향도(繁香島)·의옥헌(倚玉軒)·소비홍(小飛虹)·부용외(芙蓉隈)·소창랑(小滄浪)·지청처(志淸處)·의원대(意遠臺)·조괄(釣䂬)·수화지(水華池)·심정정(深淨亭)·대상정(待霜亭)·청송풍처(聽松風處)·이안처(怡顏處)·내금유(來禽囿)·매괴시(玫瑰柴)·진리판(珍李坂)·득진정(得眞亭)·장미경(薔薇徑)·도화기(桃花沂)·상균오(湘筠嗚)·회악(槐幄)·회우정(槐雨亭)·이이헌(爾耳軒)·파초함(芭蕉檻)·죽간(竹澗)·요포(瑤圃)·가실정(嘉實亭)·옥천(玉泉)이라 한다. 매 경(景)마다 한 수의 시를 달고, 시에 작은 서(序)가 있어 이름 지은 뜻을 서술하였다. 시 뒤에 졸정원기(拙政園記) 한 수가 있으니, 또한 대조(待詔)의 지음이다. 정원의 주인 왕경지(王敬止)는 자가 회우(槐雨)요, 또 자가 헌신(獻臣)으로, 어사(御史)로 권귀(權貴)를 거슬러 체포되어 갇혔다가 사면받아 돌아왔다. 권두(卷首)에 임정면(林庭棉) 소천(小泉)의 제지(題識)가 있어 이르기를 “문씨(文子)는 소리 있는 그림과 소리 없는 시에 두루 그 묘(妙)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회우가 조옥(詔獄)에 있을 때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선문안(先文安)이 남전(南銓)의 총재(冢宰)로 벼슬하며 항주(抗奏)하여 논구(論救)하매 비로소 가볍게 함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문안(文安)이 논구한 일은 《명사(明史)》 본전(本傳)에 보인다. 소천(小泉)의 시호는 강의(康懿)이다. 이 그림은 옛적 오문(吳門) 장씨(蔣氏)가 소장하였고, 뒤에 해녕(海寧) 호예파(胡豫波)에게 돌아갔으며, 도광(道光) 연간에 주중청(朱仲靑) 중한(中翰)에게 돌아갔다. 오차객(吳槎客) 건(騫)·전매계(錢梅溪) 영(泳)·사중담(查仲湛) 인공(人供)·은운서(殷雲栖) 수백(樹柏)·문후산(文後山) 정(鼎)·정만백(程萬伯) 경화(慶華)·소후자(蘇厚子) 돈원(惇元)·정지생(頂芝生) 정수(廷綬)·고난애(顧蘭厓) 굉(翃)·전숙미(錢叔美) 두(杜)·황제청(黃霽靑) 안도(安濤)·서자면(徐子勉) 무(楙)·진등지(陳登之) 연은(延恩)·장숙미(張叔未) 정제(廷濟) 여러 사람의 시발(詩跋)과, 하자정(何子貞)·장자상(張子祥)·오평재(吳平齋) 여러 공(公)의 제지(題識)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정(子貞) 장(丈)의 한 수 시와 발(跋)에 이르기를 “이 책은 영현(鄞縣)의 장군(蔣君) 지방(芝舫)에게 돌아갔으니, 곧 동치(同治) 을축(乙丑) 봄이다”라고 하였다. 책 표지에 전매계(錢梅溪)가 “형산선생삼절책(衡山先生三絶冊)“이라 썼고, 문대조(文待詔)의 “졸정원도(拙政園圖)” 일곱 글자는 유곡원(俞曲園) 선생이 제(題)한 것이다. 전매계의 제(題) 앞에는 별도로 대문절(戴文節)이 그린 졸정원도 한 폭이 있는데, 스스로 제(題)하여 이르기를 “내가 평생 본 문씨(文)의 그림 가운데 졸정원만큼 많은 것이 없으니, 문씨의 큰 볼거리를 다하였다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가 문씨의 그림을 뼈에 사무치도록 사랑하여, 이것은 우연히 흥이 발하여 한 것이니 스스로 그 누추함을 잊었다. 근래 송호(松壺)·후산(後山) 두 선생은 모두 문씨에 깊은 이들이니, 중청(仲靑)이 만일 나를 위해 바로잡아 준다면 내가 문씨에 대해 혹 진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끝에 “문형산(文衡山)의 사숙제자(私淑弟子) 대희(戴熙)“라 서(署)하였으니, 이는 문절(文節)의 다른 그림에 없던 것이다. 이 정원은 이백 년 동안 흥폐(興廢)가 일정하지 않고 연운(雲煙)처럼 변환하여 더욱 동오(東吳)의 장고(掌故)를 그린 그림이 될 만하다. 지금은 남림(南林)의 장맹평(蔣孟苹)이 무거운 값으로 이를 얻었다. 광서(光緖) 연간에 오문(吳門)을 노닐며 일찍이 이 정원을 찾았는데, 그때 이미 팔기회관(八旗會館)이 되어 집은 낡고 누추하였으나, 물과 돌과 수목의 명승은 금한(金閒)의 여러 정원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정원은 명 가정 연간에 왕(王) 어사 헌신(獻臣)이 쌓아 대홍사(大宏寺)의 터를 침범하여 이를 넓혔다. 그 아들이 고을 안의 서씨(徐氏) 아들과 도박하여 하룻저녁에 이를 잃어 서씨에게 돌아갔다. 국초(國初)에 해녕의 진상국(陳相國) 지린(之遴)에게 돌아갔다. 진씨가 패하매 그때 막 주방병(駐防兵)을 더 설치하여 장군부(將軍府)로 고쳤고, 주방병이 철수하매 또 병비도행관(兵備道行館)이 되었다. 이윽고 오삼계의 사위 왕영강(王永康)이 여기에 살다가 곧 적몰되어 관(官)에 들어갔다. 강희 18년에 소송상진도(蘇松常鎭道)의 관서로 고쳤고, 곧 폐지되어 정원이 흩어져 민가에 들어갔다. 군(郡) 사람 장(蔣) 태수(太守) 피(邳)가 이를 얻어 이름하여 복원(復園)이라 하였다. 가경(嘉慶) 연간에 사(查) 담여(憺餘) 효렴(孝廉) 인담(人倓)이 사들였다. 도광(道光) 연간에 집안의 숭포(菘圃) 상국(相國)이 또 이를 얻었다. 지금까지 비록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으나 말하는 이는 오히려 오원(吳園)이라 부른다 한다.
옛 사진
1929년 게재
오스발드 시렌(Osvald Sirén)의 원저로 1929년에 출판된 《A History of Early Chinese Art》의 부록 “중국 경관”에는 제목이 분명한 졸정원 사진 세 장이 수록되어 있으며, 도판 주석에는 각각 원경(園景), 월량문(月亮門) 앞, 연경(荷景)으로 표기되어 있다. 원간(原刊)에는 이 세 사진의 구체적인 촬영 연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



1986년 게재
쑤저우 지방지 편찬위원회 판공실과 쑤저우 원림관리국이 1986년에 편찬·간행한 《졸정원지고(拙政園志稿)》는 권두에 부용사(芙蓉榭), 함청정(涵靑亭), 중부 원경, 원향당(遠香堂)과 의옥헌(倚玉軒), 견산루(見山樓), 오죽유거(梧竹幽居), 향주(香洲)와 소비홍(小飛虹), 별유동천(別有洞天)과 의양정(宜兩亭), 서부 수랑(水廊), 그리고 삼십육원앙관(三十六鴛鴦館)의 창문 경치와 실내 진열 등 열 두 장의 사진을 집중 수록하였다. 책에는 이 사진들의 구체적인 촬영 연월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참고 자료
- 조림제(曹林娣): 《책을 손에 들고 아이들의 농사를 가르치며 — 졸정원을 읽다》, 쑤저우 도서관 “쑤저우 대강단”, 2009년 6월 28일.
- 곽명우(郭明友): 《풍우 속 졸정 오백 년 — 졸정원사》, 쑤저우 도서관 “쑤저우 대강단”, 2013년 4월 17일.
- 쑤저우시 원림녹화관리국: 《졸정원》.
- 쑤저우 박물관: 《쑤저우 박물관 건축》.
- 쑤저우 박물관: 《보산루(寶山樓)》 특별 전시 페이지 “도목이 회우에게 보낸 서신(都穆致槐雨札)”, 2018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