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전승에 따르면 북위 때 이미 산시성 창쯔현 자림산에 절이 있었으며, 옛 이름은 자림사였다. 이 절이 법흥사의 전신이다. 당 정관 연간, 고조 이연의 열셋째 아들로 노주 자사를 지낸 정혜왕 이원의가 절 안에 석조 사리탑을 세워 조정이 내린 사리와 경전을 모셨다. 사암으로 쌓은 탑은 안팎의 두 벽 사이에 통로를 두어 중심 석실을 돌 수 있게 했다. 함형 4년(673), 조성에 참여한 승려 홍만은 훗날 “능곡변이”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탑을 세운 경위와 이원의의 아들 열 명의 이름·작호를 돌에 새겼다[1].
대력 8년(773), 불교 신도 동희선과 가족이 등불을 공양하며 예불하기 위해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힐 등대를 만들었다. 청석을 조각한 등대의 등실은 팔각 정자를 본떴으며, 기둥 사이에 문과 창을 새겼다. 아래에는 연꽃 모양 받침이 있고, 기단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과 상서로운 짐승을 조각했다. 동씨 가족의 이름과 제작 날짜는 기단의 감실 사이에 놓인 짧은 기둥에 새겨져 있다[2].
오대의 전란 때 은사 왕경순은 진양에서 자림산사로 피란해 산중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다. 절의 불전은 후진 개운 2년(945)에 지어졌으며, 훗날 원각전의 전신이 되었다. 송 초기 승려 응회가 절을 수리했고 왕경순은 절의 비문을 지었다. 자림산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왕서는 관직에 오른 뒤 토지를 사서 승려에게 시주하여 계속 경작할 사찰 재산으로 삼았다.
천성 5년(1027), 노주 지주로 있던 왕서는 귀향하여 시를 지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산천, 황폐해진 정원, 글자가 닳고 빠진 절의 비석을 읊었다. 이듬해 주지 법신이 왕경순이 지은 사찰 비문의 탁본을 들고 왕서를 찾아왔다. 아버지의 글을 읽은 왕서는 양육의 은혜를 떠올렸으나 이미 봉양할 수 없음을 “욕양부대”라 탄식했다. 천성 8년(1030), 법신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에 자의를 내려 달라고 청했음을 알리고[3], 자색 능견 세 필과 칙첩을 동봉하여 아버지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원풍 2년(1079), 주지 소영이 왕서의 귀향시를 비석에 새기게 했으며, 고평의 이엄이 각자했다. 후진 때 지은 불전은 130여 년이 지나 벽이 손상되고 서까래가 기울어 있었다. 소영은 시주를 모으고 일손을 구해 옛 전각을 헐고 새로 지었다. 전각은 세 칸으로 둘레에 회랑을 두었으며, 기둥과 문을 돌로 만들었다. 완공 후 소영은 왕서의 아들 왕익유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부탁했다. 당시 왕익유는 용도각 직학사로 이부 사무를 맡고 있었다[4]. 조부가 머물며 쉬고 아버지가 태어난 산사에서 온 편지를 읽자 왕익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원풍 4년(1081), 그는 새 불전의 조성 경위를 기록했다. 소영은 승려들을 이끌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우고 경전을 읽었으며, 왕익유는 찾아오는 이들이 독경 소리를 듣고 불상을 보며 다투거나 속이는 마음을 거두기를 바랐다.
정화 원년(1111), 소조장 풍종본이 불전의 상을 만들고 화공 진도영과 여영이 채색했다. 전각 안의 원각보살 열두 존은 이때 조성한 상이다.
13세기, 주지 담가는 택주·노주 일대의 전란과 기근으로 식량을 찾아 떠났다가 10년 만에 자림산으로 돌아왔다. 절은 황폐하고 무너져 있었다. 그는 담흥 등의 승려를 이끌고 가시덤불과 잡초를 걷어 내고, 썩고 기운 건물을 수리하고, 지붕의 빗물이 새는 곳을 막고, 불상과 채색을 청소하고, 담장을 보수했다. 사찰의 경비는 농사로 충당했다. 지원 10년(1273), 여든에 가까운 담가는 창쯔의 문인 송도에게 사찰의 연혁과 복구 과정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돌에 새겨 이러한 일을 오래 전하고 “사찰의 일을 영원히 전할 기록”으로 남기려는 뜻이었다. 담가는 송씨 집안 세 세대와 알고 지냈고 송도도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알았다. 송도는 부탁을 받아들였지만 돌에 새겨 영구히 남기려는 생각에는 의문을 던졌다. 불경에서는 세계가 환영처럼 생멸한다고 하는데, 비석인들 어떻게 영원히 남겠는가? 담가는 그 논의를 잠시 접자며 “기록은 반드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송도는 절을 수리한 경위와 이 문답을 함께 사찰 기록에 담았다.
정덕 14년(1519), 절에서는 대전의 불상을 수리하고 금강상 가슴속의 지지용 나무 부재에 “대명 정덕 14년”과 “자림산 법흥사 대전의 불상 한 무리를 중수함”을 적었다. 사제 다섯 세대에 걸친 승려 명단과 화공·소조장의 이름도 함께 기록했다[5].
청대부터 민국 시기 사이 원각전의 외관이 바뀌었다. 처마 아래 공포와 전각을 둘러싼 회랑이 제거되고 지붕은 팔작형에서 맞배형으로 바뀌었지만, 내부의 송대 가구는 남았다[6].
1970년대 이후 자림산 옛 터는 석탄 채굴로 생긴 지하 빈 공간 때문에 침하했고, 전각의 벽이 갈라지고 가구가 변형되었다. 건축과 소조상을 구하기 위해 산시성 문화재 주관 부서는 절 전체를 취운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공사는 1984년 봄에 시작되어 주요 이건 공정이 1996년 가을에 끝났다. 원각전의 송대 주요 가구는 보존했으며, 외부 처마 구조는 산시성 고건축보호연구소가 전각 안의 송대 유구, 『영조법식』, 현지의 동시대·동유형 건축을 토대로 추정 복원했다. 새 터의 전각 안에서는 불단 앞면에 석가모니를 모시고 좌우에 제자·보살·선신을 배치했다. 뒷면에는 관자재보살을 모셨으며 원각보살 열두 존이 주변에 늘어서 있다.
역사 문헌
정혜왕 석탑기
大唐故赠司徒、荆州大都督、兖、安二州都督、郑、绛、潞三州剌史、上柱国郑惠王石记:
대당에서 사후 사도·형주 대도독에 추증되고, 연·안 두 주의 도독, 정·강·노 세 주의 자사, 상주국을 지낸 정혜왕의 석기.
王讳字,陇西狄道人也。曾祖太祖景皇帝,祖元皇帝,父高祖太武皇帝,王即太武皇帝之第拾叁子,往任潞州日,于此山奉为先圣敬造石舍利塔壹所。下井有敕赐舍利骨终漆粒,造藏经三千卷。观夫大造远契,洪猷永贞,庶绩咸熙,彝伦式叙,莫不分茅土,建诸侯,延帝子于维藩,降天孙于伯牧者矣。伏惟大王通源圣泽,宠位皇华,松姿孤坚,玉气柔润,镇静方岳,声政洽闻,都督荆安,惟德是顺。出守绛、潞,非贤勿居,即何暮海沂之谣,不足俦其匹也。而乃洗心觉路,虔诚妙门,慈林山中,雕砻宝塔,智乘寺所,装饰真容,藻绘具周,庆赞将毕。洪满亲承教旨,躬奉绘言,以拙补勤,猥当检校。恐河海倾竭,陵谷变移,谨件先皇子孙,勒诸贞石。
왕의 휘는 본문에 “讳字”라고 되어 있다[이름 부분 불명확]. 농서 적도 사람이다. 증조부는 태조 경황제, 조부는 원황제, 아버지는 고조 태무황제이며, 왕은 태무황제의 열셋째 아들이다. 노주에 부임했을 때 이 산에 선성을 위해 석조 사리탑 한 기를 정성껏 세웠다. 아래 우물에는 칙명으로 내린 사리골 “终漆粒”[수량 글자 불명확]을 넣고 경장 삼천 권을 조성했다. 큰 조화는 먼 뜻과 맞고, 큰 계획은 영원히 바르며, 모든 공적이 번성하고 인륜이 질서를 얻는다. 봉토를 나누고 제후를 세워 황제의 아들을 번병으로, 천손을 지방의 장관으로 두지 않는 경우가 없다. 대왕은 성스러운 은택을 이어받아 영화로운 지위에 있었으며, 소나무처럼 굳세고 옥처럼 온윤했다. 지방을 안정시켜 좋은 정치가 널리 알려졌고, 형·안을 도독하며 덕을 따랐다. 강·노에 나가 다스리는 자리는 현자가 아니면 맡지 못하니, “하모”나 “해기”의 노래도 견줄 수 없다. 깨달음의 길에서 마음을 씻고 묘한 가르침에 정성을 다하여 자림산에서 보탑을 다듬고 지승사에서 진용을 장엄했다. 채색을 두루 마쳐 경찬을 끝내려 했다. 홍만은 직접 가르침을 받들고 말씀에 따라 부족함을 부지런함으로 보태어 외람되이 감독을 맡았다. 강과 바다가 마르고 산과 골짜기가 바뀔까 두려워 선황의 자손을 하나씩 적어 굳은 돌에 새긴다.
嗣郑王郢州刺史璥,第二王子吕国公琛,第三王子乐平公圭,第四王子尚庸公琰,第五王子乐陵公囗,第六王子武安公琨,第七王子南海公璇,第八王子安德公琳,第九王子新平公璲,第十王子邵陵公珩,
정왕을 계승한 영주 자사 경(璥), 둘째 왕자 여국공 침(琛), 셋째 왕자 낙평공 규(圭), 넷째 왕자 상용공 염(琰), 다섯째 왕자 낙릉공 囗[이름 결자], 여섯째 왕자 무안공 곤(琨), 일곱째 왕자 남해공 선(璇), 여덟째 왕자 안덕공 림(琳), 아홉째 왕자 신평공 수(璲), 열째 왕자 소릉공 형(珩).
咸亨四年十月八日,检校功德僧洪满建。
함형 4년 10월 8일, 공덕을 감독한 승려 홍만이 세웠다.
右郑惠王石塔记释洪满以王曾任潞州,为造石舍利塔一所,而自为之记。郑王元懿,新旧唐书有传。初授兖州刺史,在贞观七年,次历郑、潞二州剌史,在贞观十年。最后之绛州剌史,在总章中,而不见有安州刺史之官,则传略也。时称小郑王,亦曰郑惠王,以别于郑王亮云。元懿十子世系表吕国公下脱琛字,又脱第六王子武安公琨一人,新平郡公璲作遂,则史之误。而此记第五王子乐陵公下脱一字,据表则球字也。是传与表未尝不可互补矣。
승려 홍만이 지은 위 「정혜왕 석탑기」는 노주를 다스렸던 정왕과 관련된 석조 사리탑 한 기를 기록한 것이다. 정왕 원의는 신·구 『당서』에 전기가 있다. 정관 7년 처음 연주 자사에 임명되었고, 정관 10년 정·노 두 주의 자사를 역임했다. 마지막 강주 자사는 총장 연간이지만 안주 자사였다는 기록은 없으니 전기가 생략한 것이다. 당시 소정왕 또는 정혜왕이라 불러 정왕 량과 구별했다고 한다. 원의의 아들 열 명을 적은 세계표는 여국공 아래 “침”을 빠뜨리고 여섯째 왕자 무안공 곤 한 사람도 누락했으며, 신평군공 수(璲)를 수(遂)라 적었다. 이는 사서의 오류다. 반면 이 기록에서는 다섯째 왕자 낙릉공의 이름 한 글자가 빠졌으나 표에 따르면 구(球)이다. 전기와 표는 서로 보완할 수 있다.
법흥사
法兴寺旧名慈林寺,在县东南三十里,则慈林山之佛院也。魏神鼎元年建。唐郑惠王元懿为潞州刺史时,建石塔,藏舍利二十一粒,及藏经千卷,释洪满为撰碑。至宋元丰四年重修,王益柔为之记。
법흥사는 옛 이름이 자림사로, 현 동남쪽 30리에 있는 자림산의 불원이다. 위 신정 원년에 세웠다. 당 정혜왕 원의가 노주 자사일 때 석탑을 세워 사리 스물한 알과 경장 천 권을 봉안하고 승려 홍만이 비문을 지었다. 송 원풍 4년에 중수하여 왕익유가 기문을 지었다.
자림산 법흥사 승당 중수기
一林山法兴寺重修僧堂记并序,僧惠陌述,并书。
일림산 법흥사 승당 중수기와 서문. 승려 혜맥이 서술하고 썼다[표제와 이름은 원문 표기].
粤维天元地像,圣之阶也。上栋下宇,道之基也,故能立。三朝于妙躅,显无事以崇贞。既而教拯编言,故得僧严丽境者,岂非福圣乎?邦有此寺者,故唐郑惠王之所再□也。王乃亲临福景,仰奉徽交,安塔藏贞,广崇佛事,洗尘边于定水,长解脱于慈林1此因历星华,圣摽遐泯。今乃厥有当寺山主僧所谓净持惑律,寒洁冰霜,夙蕴香风,□□筠竹。群方仰侍,遐迩潜皈,结乡党之缘,备云堂之址。并乃星楣映像,月拱吞鲸,玉梵凝烟,琼檐夺暑。即于咸平二年九月二十八日,崇斋庆赞毕。都维那邑众郭赟等,是曰恭心息虑,仰志口瘦,俯信容颜,潜资圣影。所冀国圆弥茂,府郡昭舒。圣日同佛高悬,皇风与慧风永扇。
하늘의 근원과 땅의 형상은 성스러움으로 가는 계단이고, 위의 마룻대와 아래의 건물은 도의 바탕이므로 세울 수 있다. “三朝于妙躅”[뜻 불명확], 무위를 드러내어 바름을 높인다. 가르침을 적은 말로 구제하여 아름다운 경계를 장엄할 수 있었으니 성스러운 복이 아니겠는가? 이 고을의 절은 당 정혜왕이 다시 □한 곳이다[결자]. 왕은 몸소 복된 경치에 와서 존귀한 교화를 받들고, 탑을 놓고 참된 것을 간직하며 불사를 크게 높였다. 선정의 물로 티끌을 씻고 자림에서 해탈을 기른다[이 뒤 원문에는 숫자 1이 있음]. 세월이 지나 성스러운 표지가 멀리 사라졌다. 지금 이 절의 산주 승려는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며 빙상처럼 맑고, 일찍부터 향기로운 풍모를 쌓아 □□筠竹[결자와 뜻 불명확]. 사방의 사람들이 우러르고 원근의 이들이 귀의하여 향리와 인연을 맺고 승당 터를 마련했다. 별 같은 문틀이 상을 비추고 달 같은 공포가 고래를 삼키며, 옥 같은 범음에 연기가 모이고 아름다운 처마가 더위를 없앤다. 함평 2년 9월 28일 재회와 경찬을 마쳤다. 도유나 곽윤 등의 읍중은 공손한 마음으로 생각을 쉬며 뜻을 우러르고[“口瘦” 등 불명확], 성스러운 그림자를 돕는다. 나라가 더욱 번영하고 부와 군이 밝고 편안하며, 성스러운 해가 부처와 함께 높이 걸리고 황화와 지혜의 바람이 영원히 불기를 바란다.
乃述词曰:道广灵踪,凝用理性。寒谷生风,云堂集圣。身润慈舟,心悬净镜。厥搆殊因,位摽明证。开慈上善,利乐全身。口崇云室显,是为泄。悟帛无坚,观缘绝尘。陵谷迁变,刊名常真。
이에 글을 짓는다. 도는 신령한 자취를 넓히고 이성과 성품에 작용을 모은다. 찬 골짜기에 바람이 나고 승당에 성인이 모인다. 몸은 자비의 배에 젖고 마음에는 맑은 거울을 건다. 특별한 인연으로 지은 건물은 명확한 증거를 보인다. 자비와 지선의 길을 열어 온몸에 이익과 즐거움을 준다. “口崇云室显,是为泄”[원문 불명확]. “帛”에 단단함이 없음을 깨닫고[뜻 불명확], 인연을 관하여 티끌을 끊는다. 산과 골짜기는 바뀌어도 새긴 이름은 늘 참되다.
都维那邑人郭赟、花进、宋赟、郭琛、宋贞、宋澄、尚座僧善兴、绍讷院主僧法郎,山主僧崇达。
도유나를 맡은 읍인은 곽윤·화진·송윤·곽침·송정·송징이다. 상좌 승려는 선흥, 소눌원의 원주는 법랑, 산주는 숭달이다.
大宋咸平二年,岁次己亥九月庚辰朔二十八日丁未。
대송 함평 2년 기해, 9월 경진 초하루, 28일 정미.
노주 장자현 자림산사 선현당기
长子治境,地势夷衍,南有慈林,实襟冯之镇,与紫云山连麓对峙,归然在乎其右。周览形势,不甚壮观,粗有可探。孤峰峭拔,林壑邃幽,其踞地掘起,则骧首偃蹇,其分势掩抱,则交臂拱揖。樵竖纪其胜槩。麻衣目为福地,秀气所钟,挺生贤哲。
장자의 관할 지역은 평탄하고 넓다. 남쪽 자림산은 요충지이며 자운산과 산기슭을 이어 마주하고 오른편에 우뚝하다. 전체 지세가 매우 장관은 아니나 찾아볼 만한 곳은 있다. 외봉은 가파르고 숲과 골짜기는 깊고 고요하다. 땅에서 솟는 모습은 머리를 들고, 양쪽이 감싸는 모습은 팔을 모아 읍하는 듯하다. 나무꾼이 경승을 전했고 마의는 복지라 여겼다. 빼어난 기운이 모여 현철이 태어났다.
有宋名臣,曰文康公,实生其问。自公童稚时,秀颖不凡,及长,文章深醇,蔚为儒宗。践更胙什,及登台辅,佐佑仁宗,勋在王室。㛎公之父,来自晋阳,五季兵乱,卜幽避地,遂隐居山寺,为终焉之计。逮文康衣锦,追念遗迹,忾然兴怀,买地施僧,永充常业,恋恋于□梓之情。自天圣二年迄今凡一百余年。
송의 명신 문강공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자라서는 글이 깊고 순후하여 유학의 종장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胙什” 불명확] 재상에 올라 인종을 보좌하고 왕실에 공을 세웠다. 아버지는 진양에서 와 오대 전란 때 조용한 피란처를 골라 산사에 은거하며 평생을 마치려 했다. 문강공이 금의환향하여 옛 자취를 되새기고 감회에 젖어 토지를 사서 승려에게 시주해 영구적인 재산으로 삼았다. 고향에 대한 마음이 깊었다[“□梓”에 결자]. 천성 2년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이다.
寺僧耕植自养,可度岁脑口饱口口私自念言:我大雄世尊,尚有乞食之劳。今我比丘食指稍众,所仰哺者,岁有仓箱之望。此大檀越所赐,其利无穷。相与讽呗作礼,荐以冥福。
절의 승려들은 경작해 자급하고 해를 넘겨 배불리 먹을 수 있다[이 부분에 불명확한 글자와 결자]. 속으로 생각했다. 대웅세존조차 걸식하는 수고가 있었는데, 지금 비구의 식구가 늘어도 해마다 창고에 곡식이 찰 것을 기대한다. 이는 큰 시주의 은혜로 그 이익이 끝없다. 함께 독경하고 예배하며 명복을 빌었다.
旧有祠堂,绘像王氏,自隐士而下至不疑,凡五人。隐士讳景纯,字太朴,赠太子太师,文康公名犯庙讳,字晦叔。长士讳𪾊恭,官至司农少卿,赠特进。次子讳益柔,官至龙图阁直学士。特进子讳慎言,字不疑,官至中散大夫,居洛社,为九老。又有孙尚书冲升伯,及其孙永曼叔,亦居其巾。本阳翟人,俱以文章擅名。初升伯为本路漕使,继守是邦,以谓慈林山地产巨贤,博节来游,赋诗作记,称述凤美。曼叔帅并门,亲题榜额,屡贻竿牍,严护仪像。
옛 사당에는 은사부터 불의까지 왕씨 다섯 명의 초상을 그렸다. 은사의 휘는 경순, 자는 태박으로 태자태사에 추증되었다. 문강공의 이름은 묘휘에 저촉되어 적지 않았고 자는 회숙이다. 맏아들의 휘는 𪾊恭[원문 표기]이며 사농소경에 이르러 특진에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 익유는 용도각 직학사에 이르렀다. 특진의 아들 신언, 자 불의는 중산대부에 이르러 낙사에 살며 구로 가운데 하나였다. 또 상서 손충, 자 승백과 그 손자 영, 자 만숙도 그 안에 모셨다. 본래 양적 사람들로 모두 문장으로 이름났다. 승백은 처음 이 로의 조사를 맡고 이어 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자림산에서 큰 현인이 났다 하여 찾아와 시와 기문을 지어 아름다움을 칭송했다[방문에 관한 일부 글자 불명확]. 만숙은 병주를 다스리며 직접 편액을 쓰고 자주 편지를 보내 초상을 엄중히 보호했다.
客有居士,面山而居,慕林泉之乐,因以为号。逍遥神刹,徘徊祠宇。主僧告居士曰:某甲自幼出家,受檀越供养,为粥饭僧,德公之赐,铭感于心,惧有遗忘,或书题漫灭,来者不知。愿居士记其本未,刻之坚珉,以告夫后之人,以祢子之下,忘本也。
산을 마주하여 살며 숲과 샘의 즐거움을 사모해 이를 호로 삼은 거사가 있었다. 절에서 소요하고 사당을 둘러볼 때 주지 승려가 말했다. “저는 어려서 출가하여 시주의 공양을 받고 밥을 먹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공의 은혜를 마음에 새겼지만, 잊히거나 글씨가 닳아 뒤에 오는 사람이 모를까 두렵습니다. 거사께서 본말을 써서 굳은 돌에 새겨 뒷사람에게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말미 “以祢子之下,忘本也” 불명확].
居士曰:汝谈空之流乎?有形者终坏,有象者终灭。祠有象也,祠存则思其人,既隳则已。石有形也,石存则规其石,既勒则已。惟有德者感八也深,而其传无所终穷,又奚待于鄙文哉?虽然,无字碑寓意于无书,或谓无字安用碑,亦太高之论。夫有有则有无无有。则亦无无。有之则其利而无之亦其用石者,其有也。记以文者,盖托其所无耳。惠人之恩德,因垂不朽,又其所托耳。佛子知恩,以记报恩,口口情之所喜也,遂因以书。藤林居士张口记。
거사가 말했다. “그대는 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닌가? 형체가 있는 것은 끝내 부서지고 모습이 있는 것은 끝내 없어진다. 사당에는 상이 있어 남아 있는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하고 무너지면 그만이다. 돌에는 형체가 있어 남아 있는 동안 그 돌을 살피고[‘规’의 뜻 불확실], 새겨지면 그만이다. 덕 있는 사람의 감화는 깊고 전승은 끝없으니 어찌 내 졸문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무자비는 글을 쓰지 않는 데 뜻을 두며, 글자가 없는데 왜 비석이 필요한가 하는 말도 지나치게 높은 논의다. 있음이 있으면 없음이 있다[이어지는 유무 논의의 원문 불명확]. 있음은 이익이고 없음도 쓰임이다. 돌은 있음이고 글로 기록하는 것은 없음에 맡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은덕을 베풀어 불후로 전하는 것 또한 맡기는 바다. 불자가 은혜를 알고 기록으로 보답함은 □□의 정이 기뻐하는 바다[결자].” 이에 글을 썼다. 등림거사 장口 기록[이름 끝 글자는 원문 표기].
법흥사 신수 불전기
潞郡上与天党,号天下之脊,而慈林挟右壶口,居太行之肩,陟其峻绝莽苍杳霭之间,可以南望山川,北顾汾、浍。其崇山峻岭,穹谷大畎,草木茂密,云霞万状,轩豁叫窱,气象熊熊,乃一山之秘奥,而天下之形胜也。佛寺经始于后魏之神鼎,易新于唐之咸亨,厥后或兴,或废或葺,浸以颓陀。逮皇朝建隆之初,有僧曰凝诲,缔搆复完,家,太师令君尝为之碑镕。天圣中,释法信与麻衣从深又辟其基,敞三门于其前,给事中孙公冲刻其辞于石。今继主其事者曰绍荣,以佛殿始作于晋开运二年,距今一百三十余载,垣穿城夷,榱桷倾北,于是募檀施,鸠力役,发于至诚,心身信向,崇坛广宇,撤旧谋新,经之营之,成于不日。
노군은 상당과 이어져 천하의 등뼈라 불린다. 자림은 오른쪽 호구를 끼고 태행의 어깨에 있다. 가파른 산과 깊은 안개 속을 오르면 남쪽 산천과 북쪽 분·회를 바라볼 수 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무성한 초목과 온갖 구름과 노을, 트인 곳과 깊숙한 곳, 웅성한 기상은 한 산의 비경이자 천하의 승지다. 불사는 후위 신정에 시작되고 당 함형에 새로워졌다. 이후 흥하고 쇠하거나 수리하며 점차 무너졌다. 송 건륭 초, 응회라는 승려가 다시 온전하게 세웠고 우리 집안의 태사 영군이 비문을 지었다[“碑镕” 불명확]. 천성 연간 승려 법신과 마의 종심이 터를 넓혀 앞에 삼문을 열고 급사중 손충이 글을 돌에 새겼다. 지금 일을 이은 소영은 진 개운 2년에 지은 불전이 130여 년 지나 벽이 뚫리고 담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기운 것을 보고 시주와 인력을 모았다. 지극한 정성과 신심으로 단을 높이고 건물을 넓히며, 옛것을 헐고 새것을 계획해 곧 완성했다.
其为殿三楹,周以廓腰,袭珉以为柱,伐石以为扉,高广壮严,可以为他屋冠。备像设之庄严,穷绘景之精妙。率其徒朝夕焚香赏呗,发其书而诵习之,使来者闻声而悟,睹相而信,革斗怒鄙悖之心,而向于和顺,消欺诞险害之虑而趋于夷易。外则渐摩于上之仁义教化,而恐畏于礼法刑典,俾之暗然日迁善远罪,论有厚元元之性,辅宴宴之化。由是而言,则兴废系乎其时,而得失存乎其人矣。荣师生而朴愿,幼袭佛服,其见闻董修,未始不仿依于其教,游泳于其业,顾世俗贪冒没溺者,宜不一动其心。且其诚悫得乡闾欣慕,以能就其所愿,则其精进智识,可以副予向所陈为不疑矣。殿既成,使以书来请记。予以大父尝所游息,先子诞育之地也,阅其书,不知涕泗之横集,自托不腐,实素愿焉。
전각은 세 칸이며 둘레에 회랑을 돌렸다. 돌로 기둥을 만들고 돌을 잘라 문으로 삼았다. 높고 넓고 장엄하여 다른 건물 가운데 으뜸이다. 상을 장엄하게 갖추고 채색의 정묘함을 다했다. 제자들을 이끌어 아침저녁 향을 피우고 범패하며 경전을 펴 독송하고 익혔다. 찾아오는 이가 소리를 듣고 깨닫고 상을 보고 믿어, 다투고 노하고 비루하고 거스르는 마음을 바꿔 화순으로 향하며, 속이고 해치려는 생각을 지워 평이함으로 나아가게 했다. 밖으로는 위의 인의 교화를 받아들이고 예법과 형전을 두려워해 자신도 모르게 날마다 선을 향하고 죄를 멀리하게 했다. 백성의 성품을 두텁게 하고 평안한 교화를 돕는다[일부 글자 불명확]. 이렇게 흥폐는 시대에 달리고 득실은 사람에게 있다. 영사는 본디 소박하고 성실하여 어려서 승복을 입었고, 견문과 수행은 가르침을 따르고 불업 속에 노닐었다. 세속의 탐욕에 빠지는 일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성실함을 향리에서 존경해 원하던 일을 이루었으므로, 정진과 지식이 앞서 내가 말한 바에 부합함은 의심할 수 없다. 전각이 완성되자 편지를 보내 기록을 청했다. 조부가 쉬던 곳이자 돌아가신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 편지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썩지 않는 글에 맡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다.
于为之记。元丰四年正月五日。
이에 기록한다. 원풍 4년 정월 5일.
노주 장자현 법흥사기
法兴寺碑。
법흥사 비석.
至元十年宋道撰,今在长子县慈林山。
지원 10년 송도가 지었으며 지금 장자현 자림산에 있다.
谨案:宋道,长子人,元史有传。所箸秬山集十卷,今不传。碑称道七岁侍先大父上马武京,迁洛西,去国五十年近,始能归葬大父于先茔。又称其祖兵部公拄笏轩留题,今犹未沬。本传道金兵部员外郎元吉之孙,年十七,避地襄阳云云。据金史:兴定四年庚辰,上党公张开壁马武寨。由庚辰至是年甲戌,凡五十五年,是其避地即在兴定时。自述年七岁,史言十七,似史有误。至所言元吉拄笏轩留题诗已不传,当是书之寺壁者,故云未沬,非有石刻也。
삼가 살펴보면 송도는 장자 사람이며 『원사』에 전기가 있다. 저술한 『거산집』 열 권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비에는 일곱 살 때 조부를 따라 마무경에 올라 낙서로 옮겼고, 고향을 떠난 지 50년 만에 근래 조부를 선영에 귀장했다고 한다. 조부인 병부공이 주홀헌에 남긴 시도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본전에는 금 병부원외랑 원길의 손자로 열일곱 살 때 양양에 피란했다고 한다. 『금사』에 따르면 흥정 4년 경진에 상당공 장개가 마무채에 진을 쳤다. 경진부터 이 갑술년까지 55년이니 피란은 흥정 때다. 스스로는 일곱 살, 사서는 열일곱 살이라고 하므로 사서가 틀린 듯하다. 언급된 원길의 주홀헌 시는 이제 전하지 않으며 절 벽에 쓴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고 석각은 아니었다.
长子县东南一舍而远,有山曰慈林,不峻不卑,石涧愁洌,东峰拔萃,岗阜拱揖,绝壁西断,平原下开,掖峰据璧,是为法兴寺。长松古柏,植列森严,棫朴榛灌,绵络弥望。若夫阳舒阴惨之交,云霞烟霭之变,光风霁月,雨昏雪缟之际,千状万态,不可胜言。故贵游才士,登临舒眺,赋诗称道者颇多。八百余年,恒为潞州名刹。今山主大比邱昙珂,高平宿儒仇文昌之子,净性不昧,潜心义天,遂为唯识论。屿公之高弟,讲圆觉修多罗了义,得圭峰言外意,读书能诗,喜与士大夫游。一日,来谓仆日:此寺肇寝艺文,迹于元魏神鼎元年,历齐、周、隋,钟鱼不废。唐咸亨四年,高祖第十三子郑惠王元懿为潞州剌史,于寺中造石塔,藏所赐佛舍利三七粒,及写大藏经为卷者三千,以报罔极之恩。
장자현 동남쪽 한 사 남짓에 자림산이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돌계곡은 차고 맑다[“愁洌” 글자 뜻 불명확]. 동봉은 뛰어나고 언덕은 읍하듯 마주하며, 서쪽은 절벽으로 끊기고 아래로 평원이 열린다. 봉우리와 벼랑에 기대 선 곳이 법흥사다. 큰 소나무와 오래된 측백이 엄숙하게 늘어서고 떡갈나무와 관목은 끝없이 이어진다. 볕의 밝음과 그늘의 어두움, 구름과 노을의 변화, 맑은 바람과 달, 비의 어둠과 눈의 흰빛이 만드는 온갖 모습은 다 말할 수 없다. 귀인과 문인이 올라 바라보고 시로 칭송한 일이 많다. 800여 년 동안 노주의 명찰이었다. 지금 산주인 대비구 담가는 고평의 노유 구문창의 아들로, 청정한 성품을 잃지 않고 교의에 몰두하여 유식론의 서공에게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원문의 구분은 불확실]. 원각경의 요의를 강설하고 규봉의 말 밖의 뜻을 얻었으며, 책을 읽고 시를 지어 사대부와 교유하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이 절은 원위 신정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앞 구절 일부 불명확], 제·주·수를 지나도 종과 목어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당 함형 4년 고조의 열셋째 아들이며 노주 자사인 정혜왕 원의가 절에 석탑을 세워 내려받은 불사리 스물한 알과 필사한 대장경 삼천 권을 봉안해 끝없는 은혜에 보답했다.”
金界光华,自此尤盛。上元元年,改广德。五代麻衣道者特建三门。宋治平中,改法兴。祥符中,高士王景纯隐居此山,与晦禅师为莲社友,其子文康公曙。佐仁宗,号贤相,奕叶贵显,各绝名衔。若其璇题之更革,法筵之隆替,住持师资之源委,则具载于历代之碑。国朝岁壬午,泽、潞兵荒,予就食东土,十载方归,山川如昔,人物萧条。礼窣堵之神奇,瞻招提之芜圯,慨叹既为佛子,当报佛恩,遂率首座昙兴等,刜荆棘,燹草莱,枝易朽欹,补幂罅漏,汛拂绘塑,缮完阐垣,晨香夕灯,以赞皇图,寒耕热耘,以足常住。众心协敬,克保前修。今年将八十,可谓老矣。恒虑化理密移,功缘难毕,为没齿恨。君家三世,予皆识之,令祖兵部公拄笏轩留题,今犹未沬,是故欲得君文,勒诸贞石,为山门不朽之传。
“불계의 빛은 이때부터 더욱 성했다. 상원 원년에 광덕으로 바꾸고, 오대에 마의도자가 특별히 삼문을 세웠다. 송 치평 중 법흥으로 바꾸었다. 상부 중 고사 왕경순이 이 산에 은거해 회선사와 연사의 벗이 되었다. 그의 아들 문강공 서는 인종을 보좌해 현상이라 불렸으며 자손도 대대로 귀하게 현달했다. 사찰 이름의 변천, 법연의 성쇠, 주지와 사제 계통은 역대 비에 자세하다. 당조 임오년, 택·노의 전란과 기근 때 나는 동쪽에서 먹을 것을 구하다 10년 만에 돌아왔다. 산천은 같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탑의 신기를 예배하고 절의 황폐함을 바라보며, 불자인 만큼 불은에 보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수좌 담흥 등을 이끌고 가시를 치고 풀을 태우고, 썩고 기운 부재를 바꾸고, 지붕의 틈과 누수를 막고, 그림과 소조를 청소하고, 담을 수리했다. 아침 향과 저녁 등불로 황업을 기리고, 추울 때 갈고 더울 때 김매어 사찰의 살림을 채웠다.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모아 선인의 수업을 지켰다. 올해 거의 여든이니 늙었다 할 만하다. 시간이 남몰래 흐르고 공덕의 인연을 마치지 못해 평생의 한이 될까 늘 염려한다. 그대 집안 세 세대를 모두 알며, 조부 병부공의 주홀헌 시도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대의 글을 얻어 굳은 돌에 새기고 산문의 불후한 전승으로 삼으려 한다.”
仆曰:道七岁侍先大父上马武京,迁洛西,丁壬辰乱,登女凡,历嵩、少,涉丹、浙,渡汉沔,寓武当,抵南郡。间关险阻,百死一生。去国五十年,近,始能归葬大父于先茔,抚高祖手植庭槐,与邑中父老子弟相劳问,悲感交集。若其识不肖于童稚,令艺文之间,能道吾家尊显行辈及姻亲之氏族者,惟珂公及邑令张君逸卿在焉。道虽孤陋不文,亦安敢拒命?然尝闻佛经云:幻灭灭尽,非患不灭。又云:变者变,不变者不变。师何虑齿发之衰乎?栽松道者身先老,放下锄头好再来。古德如斯,师行若是,又何虑功缘之难毕乎?三千大千世界,犹如空花,乱起乱灭,而乃琢磨再石,镌刻空文,欲以为山门不朽之传,无乃近于妄乎?呵公曰:兹事且置无论,记不可不作也。满日,谓已童矣,而其刻之。
나는 답했다. “송도는 일곱 살에 조부를 따라 마무경에 올라 낙서로 옮겼습니다. 임진의 난을 만나 ‘女凡’[지명 불명확]에 오르고, 숭·소를 지나 단·절을 건너며 한·면을 넘어 무당에 머물다 남군에 이르렀습니다. 험난한 길에서 백 번 죽을 고비 중 한 번 살아났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50년, 근래에야 조부를 선영에 귀장했습니다. 고조가 손수 심은 뜰의 홰나무를 어루만지고 고을의 어른과 자제들과 위로를 나누며 슬픔과 감회가 교차했습니다. 어린 저를 알고 집안 어른의 항렬과 인척의 성씨까지 말할 수 있는 이는 가공과 현령 장일경뿐입니다[중간 일부 글자 불명확]. 고루하고 문재가 없는 저도 어찌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다만 불경에 ‘幻灭灭尽,非患不灭’[‘患’은 원문대로이며 뜻 불확실]이라 하고, 변하는 것은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합니다. 스님은 어찌 치아와 머리카락이 쇠함을 걱정합니까? 소나무를 심는 도자가 먼저 늙어도 괭이를 놓고 다시 오면 됩니다. 옛 덕인이 그러하고 스님의 행도 그러한데 공덕을 마치지 못함을 왜 걱정합니까? 삼천대천세계도 허공의 꽃처럼 어지러이 생멸하는데 돌을 다듬고 빈 글을 새겨 산문의 불후한 전승으로 삼으려는 것은 망상에 가깝지 않습니까?” 가공[원문 ‘呵公’]은 “이 일은 일단 논하지 말고, 기록은 반드시 써야 하오”라 했다. 말미 “满日,谓已童矣,而其刻之”는 판독이 불명확하며 새기는 일을 언급한다.
至元十年癸酉十月朔日。
지원 10년 계유, 10월 초하루.
자림산사에 남긴 시
右谏议大夫、知潞州年州事孙冲述。
우간의대부·노주 지주 손충이 짓다[원문 관직에 ‘年’자가 있음].
秋宿山中寺,泠然洗宦心。况当衰髦发,消得卧云林。泉涩石沟浅,灯昏松屋深。上方清梦寐,晓谷飏钟音。
가을 산사에 묵으니 서늘히 관직의 마음을 씻는다. 머리카락도 쇠한 지금, 구름 낀 숲에 누울 만하다. 샘물은 더디고 돌도랑은 얕으며, 등불은 어둡고 소나무집은 깊다. 높은 불당의 꿈은 맑고, 새벽 골짜기에는 종소리가 퍼진다.
其二:山中古佛寺,暂到觉神情。扫地云粘帚,敲钟谷应声。诵经僧坐石,下树鸟寻生。白日尘寰内,劳劳徒利名。
둘째 시. 산중의 옛 불사에 잠시 와도 정신이 깨어난다. 땅을 쓸면 구름이 빗자루에 붙고, 종을 치면 골짜기가 응답한다. 독경하는 승려는 돌에 앉고 나무를 내려오는 새는 삶을 구한다. 대낮 속세에서는 오직 이익과 이름을 위해 바쁘다.
天圣五年八月五曰题。男前进士景上:总辔连高顶,名区得赏心。身闲除五盖,地福亚双林。梵逐松风远,香飘夜涧深。堂中有多士,一一卜知音。
천성 5년 8월 5일에 쓰다. 아들인 전 진사 경이 올린다. 고삐를 잡고 높은 봉우리로 이어 가니 명소에서 마음껏 즐긴다. 몸이 한가하면 오개를 없애고 복된 땅은 쌍림에 버금간다. 범음은 솔바람 따라 멀어지고 향은 밤의 깊은 골짜기로 흐른다. 당 안에는 여러 선비가 있어 하나하나 지음을 찾는다.
其二:半空山叠翠,满耳松风清。楼高入浓碧,泉落飞寒声。世路有穷尽,佛法无死生。会当冥至理,不复狥浮名。
둘째 시. 허공의 산은 푸르름을 겹치고 귀에는 맑은 솔바람이 가득하다. 높은 누각은 짙은 푸름에 들고 샘은 떨어져 찬 소리를 날린다. 세상 길은 끝이 있지만 불법에는 죽음과 삶이 없다. 깊은 이치를 깨달아 뜬 이름을 따르지 않으리라.
家君大谏以慈林山寺地产巨贤,故有院记。及游胜境,遂留二诗。景今到此,辄次元韵以和。明道二年十一月八日谨志。
아버지 대간께서는 자림산사가 있는 땅에서 큰 현인이 태어났다 하여 원기를 지으셨고, 경승을 유람하여 두 시를 남기셨다. 경도 이제 이곳에 와서 원래 운자를 따라 화답했다. 명도 2년 11월 8일 삼가 기록한다.
元丰二年二月初五曰,院主僧绍荣立石。
원풍 2년 2월 5일, 원주 승려 소영이 비석을 세웠다.
왕서 「귀향 칠언사운시」
왕서가 노주 지주로 재임할 때 지어 천성 5년(1027) 중춘 17일에 쓴 시다. 원풍 2년(1079) 중춘 5일 원주 소영이 비석을 세우고 고평의 이엄이 각자했다. 표제·서명·연기는 예겸이 편찬한 『장자현지』 권7에 나오며, 아래 시는 유월 편찬본 권20의 기록을 따른다.
昔曰垂髫今作翁,山川犹忆赋征东。头陀碑在遗或缺,靖节园荒旧业空。遮道野人窥衣锦,𬴐迎竹马拜凭熊。吾乡信美归来宴,都似无何两字中。
옛날에는 어린아이였고 이제 늙은이가 되었다. 산천은 아직 동정의 시를 지은 기억을 간직한다. 두타비는 있으나 일부는 빠졌고, 정절의 정원은 황폐해 옛 업은 비었다. 길을 막은 촌사람들은 비단옷으로 귀향한 이를 엿보고, 죽마를 맞아 태수의 수레에 절한다[‘𬴐’의 뜻 불명확]. 내 고향 참으로 아름다워 돌아와 잔치하니 모두 ‘무하’ 두 글자 속인 듯하다.
『장자현지』에 실린 시문
苜年樵𥪡隐斯山,名振京师世所贤。今日我来还避乱,愿同八鹿老林泉。
“苜年”[첫 구절 불명확], 나무꾼[원문 ‘樵𥪡’]이 이 산에 숨어 이름을 서울에 떨치고 세상에서 현인으로 여겨졌다. 오늘 나도 난을 피해 이곳에 와, 팔록과 함께 숲과 샘에서 늙고 싶다.
秋风脱叶绕禅龛,缥缈慈云紫翠涵。几字云鸿迷塞北,一声山鸟起杖南。断崖古树传幽磬,落日孤云送晚岚。我亦无心留色相,好将虚寂问瞿昙。
가을바람은 잎을 떨구어 선감 주위를 돌고, 아득한 자비의 구름은 자주와 푸른빛을 머금는다. 몇 글자 모양의 기러기가 새북에서 길을 잃고, 한 소리 산새가 지팡이 남쪽에서 운다. 절벽의 고목은 고요한 경쇠 소리를 전하고, 지는 해의 외로운 구름은 저녁 안개를 보낸다. 나도 색상을 붙들 뜻이 없으니 허적을 구담에게 물으리라.
옛 사진
1958년(게재)
주관오의 「산서 장자현 자림산 법흥선사」는 『문화재 참고자료』 1958년 제11호에 실렸다. 아홉 장의 사진은 이건 전 자림산 옛 터의 사리탑·연등탑·원각전·가구와 채색 소조상을 기록했다.
1962년
장어환의 『상당의 고건축』에 수록된 1962년 산시성 동남부 고건축 조사 사진은 이건 전 자림산 옛 터의 두 석탑, 대전의 가구와 내부 소조상을 기록했다.
참고 문헌
- 『나라의 보물―장자 법흥사·숭경사』, 중국건축공업출판사, 2011년, 89쪽.
- 주관오, 「산서 장자현 자림산 법흥선사」, 『문화재 참고자료』 1958년 제11호.
- 호빙지, 『산서 석각 총편』 권4.
- 왕헌 지음·장후 편집, 『산서 금석기』 금석기8.
- 예겸 편찬, 『장자현지』 권7.
- 유월 편찬, 『장자현지』 권13·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