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무덕 원년(618) 11월, 진왕 이세민은 천수원에서 설인고를 격파했다. 훗날 당 태종으로 즉위한 그는 거병 이후 싸웠던 곳마다 절을 세워 전몰자의 명복[1]을 빌게 했다. 소인사는 그 천수원 전장에 들어섰고 정관 4년 정월에 완공되었다. 지금의 산시성 창우현으로, 당대에는 빈주 의록현에 속했다.
조정은 주자사에게 비문을 맡겨 전란을 평정한 공적을 돌에 새기게 했다. 삼천 자가 넘는 글은 많은 부분을 태종 찬양에 할애하지만,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절인지도 밝힌다. 전사한 당군 장병을 불법으로 구제하고, 당군과 맞서 싸우다 죽은 이들도 함께 기린다는 것이다. 높은 문과 전각이 세워지고 승려들이 들어왔다. 옛 전장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공간이 되었다.
북송 치평 원년(1064), 구양수는 비문을 읽고 건립 의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태종이 난세를 평정한 공은 인정했지만, 장병을 위한 기도를 내세워 자신의 살인죄를 씻으려 했다고 보았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도 폭군을 무너뜨리며 사람을 죽였으나, 공심으로 백성의 해를 없앴기에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태종의 평정도 칭찬할 만하다면, 왜 절을 세워 속죄해야 하는가? 구양수는 이를 발문[2]으로 쓰면서도 글씨는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해 자신의 금석 수집 기록에 넣었다.
원풍 5년(1082) 11월 7일, 현지인 장순이 구양수의 발문을 비 뒷면에 썼다. 앞면에는 태종의 공적이, 뒷면에는 건립 의도에 대한 비판이 새겨졌다. 뒷면 탁본[3]을 얻으면 후대 독자도 그 비판을 읽을 수 있었다. 명대 서화·비첩 연구자 안세봉도 먼저 구양수의 글을 읽고 뒷면 탁본을 구했지만, 그 판단에는 계속 의문을 품었다. 더 찾아다닌 끝에 한 집안의 옛 소장품에서 손상된 탁본 네 부를 비싼 값에 샀다.
비문을 읽은 안세봉은 오히려 구양수를 비판했다. 주된 목적이 당군 전사자를 위한 기원이며 적군 사망자도 포함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적혀 있다는 것이다. 구양수는 불교를 배척하는 데 급해 조정이 전몰자를 애도한 뜻을 놓쳤다고 보았다. 군주가 살인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마저 비웃으면 오히려 살육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했다. 그는 『묵림쾌사』에서 태종을 변호하며, 절 건립을 죽은 이를 가엾게 여기고 살인을 차마 견디지 못한 행동으로 해석했다.
건륭 49년(1784), 금석학자 왕창은 군대를 이끌고 창우에 주둔했다. 공무 틈에 비를 보러 갔을 때 비신은 온전했다. 돌 받침 위 정자 안에 있어 목동이 불을 얻으려 돌을 치거나 소가 뿔을 비벼도 닿지 않았다. 뒤에 『금석췌편』을 편찬하면서 왕창은 같은 전몰자 추모비인 등자사비와 함께 읽었다. 두 글 모두 태종을 크게 칭송하지만 장병 애도는 십분의 일도 안 된다고 지적하며,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비라는 견해에 동의했다.
왕창의 방문 뒤 삼십여 년이 지나자 정자는 허물어지고 비의 기초도 손상되어 넘어질 위험이 생겼다. 난주로 가던 청 관리 비준이 이를 보고 돈과 자재를 마련해 현지 관리 허복창에게 수리를 맡겼다. 공사는 약 스무 날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는 정자가 튼튼해지고 기초가 보강되었으며 둘레에 난간도 생겼다. 앞에는 태종 찬양을, 뒤에는 구양수의 비판을 새긴 비는 수리된 정자 안에 계속 놓여 있었다.
역사 문헌
『원화군현도지』
宜禄县,本汉浅水县地,属上郡。后魏为东阴盘县地,废帝以县南临宜禄川,因改名,隶泾州。暨周、隋又为白土县。贞观二年,分新平县又置宜禄县,后魏旧名也。浅水原,即今县理所。初,金城人薛举称兵,攻破郡县。武德元年,举寇泾州,屯兵于安定县之折摭城。太宗亲征,相守六十余日。会举死,其子仁杲统其众,并羌胡十余万数来挑战。上遣总管庞玉自此原南出贼之右,因高而陈。上率大兵自原北出其不意,斩首万余级,贼大溃。仁杲惧而请降,俘其精兵万余人,男女五万口,故城犹在今县北五里。阴盘城在县西北二十五里。昭仁寺在县西十步浅水原上。王师讨平仁杲,诏于此置寺。碑,谏议大夫朱子奢之词也。长武城,在县西五十里。隋开皇中筑,在泾河南岸。武德元年废。大历初,郭子仪置兵以备西戎。
의록현은 본래 한대 천수현 땅으로 상군에 속했다. 후위에는 동음반현 땅이었다. 폐제는 남쪽에 의록천이 있어 이름을 바꾸고 경주에 속하게 했다. 주·수대에는 백토현이 되었고, 정관 2년 신평현 일부를 나누어 의록현을 다시 두어 후위의 이름을 회복했다. 천수원은 지금 현청 소재지다. 금성 사람 설거가 군사를 일으켜 군현을 함락하고, 무덕 원년 경주를 침범하여 안정현 절척성에 주둔했다. 태종이 친정하여 육십여 일 대치했다. 설거가 죽자 아들 인고가 병력을 이끌고 강·호를 합해 십여만으로 여러 번 도전했다. 황제는 총관 방옥을 대지 남쪽으로 보내 적 우익의 높은 곳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북쪽에서 불시에 내보냈다. 만여 명의 목을 베자 적은 크게 무너졌다. 인고가 항복하여 정병 만여 명, 남녀 오만 명을 사로잡았다. 옛 성은 현 북쪽 오 리에 남아 있다. 음반성은 서북 이십오 리, 소인사는 현 서쪽 열 걸음 천수원 위에 있다. 왕사가 인고를 평정한 뒤 칙명으로 절을 두었다. 비문은 간의대부 주자사가 지었다. 장무성은 서쪽 오십 리로, 수 개황 연간 경하 남쪽에 쌓고 무덕 원년에 폐했다. 대력 초 곽자의가 서방 적에 대비해 병사를 두었다.
『옥해』
唐贞观纪功业碑铭。旧纪:“贞观三年十二月癸丑,诏建义已来交兵之处,各立一寺,命虞世南、李百药、褚亮、颜师古、岑文本、许敬宗、朱子奢等为之碑铭,以纪功业。”会要:“贞观二年十二月一日,诏破刘武周于汾州,立洪济寺;破宋老生于吕州,立普济寺;破薛举于邠州,立昭仁寺;破宋金刚于晋州,立慈云寺;破王世充于邙山,立昭觉寺;破窦建德于汜水,立等慈寺;破刘黑闼于洺州,立昭福寺。”并贞观四年正月建造毕。
당 정관 연간의 공업을 기록한 비명. 구기에는 “정관 3년 12월 계축, 거병 이래의 교전지마다 절을 세우고 우세남·이백약·저량·안사고·잠문본·허경종·주자사 등에게 비명을 지어 공업을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회요는 “정관 2년 12월 1일, 유무주를 격파한 분주에 홍제사, 송노생을 격파한 여주에 보제사, 설거를 격파한 빈주에 소인사, 송금강을 격파한 진주에 자운사, 왕세충을 격파한 망산에 소각사, 두건덕을 격파한 사수에 등자사, 유흑달을 격파한 명주에 소복사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모두 정관 4년 정월에 완성되었다.
『집고록발미』
右昭仁寺碑,在豳州,唐太宗与薛举战处也。唐自起义,与群雄战处,后皆建佛寺,云为阵亡士荐福。汤、武之败桀、纣,杀人固亦多矣,而商、周享国各数百年,其荷天之祐者,以其心存大公,为民除害也。唐之建寺,外虽托为战亡之士,其实自赎杀人之咎尔。其拨乱开基,有足壮者,及区区于此,不亦陋哉!碑文朱子奢撰,而不著书人名氏,字画甚工,此余所录也。治平甲辰秋分后一日书。
이 소인사비는 빈주, 태종이 설거와 싸운 곳에 있다. 당은 거병 이후 군웅과 싸운 곳마다 나중에 불사를 세워 전몰자에게 복을 빈다고 했다. 탕·무도 걸·주를 이기며 많이 죽였으나 상·주는 수백 년씩 누렸다. 공심으로 백성의 해를 없앴기에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당의 건사는 겉으로 전몰자를 내세웠지만 실은 살인의 허물을 스스로 속죄하려는 것이었다.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연 공은 장하나, 이런 일에 얽매임은 비루하지 않은가! 주자사가 비문을 지었고 서자는 적지 않았다. 글씨가 매우 뛰어나 내가 기록했다. 치평 갑진 추분 다음 날 쓰다.
『석창역대시선』
危栏凭绝壑,欲奈此时何。但有夕阳处,就中秋色多。与谁同徙倚,空自发吟哦。便觉成羁旅,归心逐雁过。
높은 난간은 깊은 골짜기를 굽어본다. 이 시간을 어찌할까. 저녁 해가 닿는 곳마다 가을빛 더욱 짙다. 누구와 함께 머물까, 홀로 시를 읊을 뿐. 문득 나그네임을 느끼니 돌아갈 마음은 기러기를 따라간다.
「빈주 소인사비」
守谏议大夫、骑都尉臣朱子奢奉敕撰。
수간의대부·기도위 신 주자사가 칙명을 받들어 짓다.
大哉乾元,寒暑违而成岁;赫矣上圣,禅代乖而为道。斯则淳源既往,弧矢开戡翦之利;天下为公,揖让盛皇王之业。是知圣无自我,不背时以成务;仁惟济物,乃当流而义行。岂好异哉,盖因世而已矣。若乃执契提象,继天理物,张八极,叶五纬,坐玄扈,游翠受昭华而锡天佩,观荥河而巡温洛。补石于娲皇之世,奠山于文命之初。殊质文于车服,改正朔于寅丑。顺天地而财成,奄宇县而光宅。斯固神宗与汜水一致,文祖将㙁野同归者也。
위대하다 하늘의 근원이여. 추위와 더위가 달라 한 해를 이루고, 빛나는 성왕은 선양과 정벌이 달라도 도를 이룬다. 순박한 시대가 지나자 활과 화살이 평정에 쓰였고, 천하가 공공의 것이면 양보가 왕업을 높였다. 성인은 사심 없이 때를 거스르지 않고 일을 이루며, 인은 만물을 구제하고 형편에 맞게 의를 행한다. 새로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시대에 따름이다. 천명을 받아 만물을 다스리고 팔방을 열며 다섯 행성을 조화시킨다. 현호와 빛나는 옥, 하늘의 패옥, 형하와 낙수의 고사를 들고, 여와가 돌로 하늘을 메우고 문명이 산을 정한 일을 말한다. 수레와 옷의 질박함과 장식, 달력의 정월은 바뀌어도 천지를 따라 세계를 완성하고 천하를 밝힌다. 신종과 사수, 문조와 목야도 결국 같은 이치다.
随政悖道,区夏歼溃。星亡日斗,天瘥地反。驭朽无秋驾之术,履薄罕春冰之惧。竭人力于醉饱,轻神器于弈棋。玉杯非藜藿之用,金柱乃骄淫之靡。旌跸遍天下,驰道穷华裔。暴师韩濊,宿兵辽碣。贪石田之地,忘金镜之宝。骏𫘧之乘,骛燕山而不息;鼋鼍之梁,泛苍波其无已。五岳维尘,三川咸震。大盗负其扃𫔎,长鲸冲其漏网。介胄不能匡其祸,衣冠无以靖其乱。伊尹去而夏亡,辛甲奔而殷灭。人怨神怒,众叛亲离。触瑟无汉臣之忠,梦骖成秦宫之酷。于是九畿幅裂,窃名假号,四方圜视,蜂飞猬结。赤眉起刘樊之众,白梃奋陈吴之兵,徇赵北而图王,反淮南而称帝。钩爪锯牙,递相吞灭。茫茫禹迹,沟壑无归,苍苍彼天,何其罔极!
수의 정치는 도를 어겨 중국을 무너뜨렸다. 별은 사라지고 해는 싸우며 하늘은 재앙을, 땅은 변란을 일으켰다. 썩은 고삐를 잡고도 조심하지 않고 얇은 얼음을 밟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력을 주연에 소모하고 신성한 제위를 바둑처럼 가볍게 여겼다. 옥잔과 금기둥은 사치의 도구였다. 행차와 길은 온 나라와 외국까지 뻗었고, 군대는 한·예와 요동·갈석에서 고생했다. 메마른 땅을 탐내며 선정을 비추는 거울을 잊었다. 준마는 연산으로 끝없이 달리고 큰 거북과 악어의 다리는 파도 위에 이어졌다. 오악은 먼지, 삼천은 진동, 대도는 문과 자물쇠를 훔치고 거경은 그물을 뚫었다. 무장과 문관 누구도 재난과 난을 막지 못했다. 이윤이 떠난 하, 신갑이 달아난 은처럼 사람과 신이 원망하고 따르던 자와 친족이 떠났다. 거문고와 꿈속 수레의 고사는 한의 충성 대신 진의 잔혹함을 드러낸다. 천하가 찢어져 참칭한 자들이 벌과 고슴도치처럼 모였다. 적미의 유·번, 백정의 진·오 같은 무리가 조 북쪽에서 왕을, 회남에서 황제를 노렸다. 갈고리 발톱과 톱니로 서로 먹어치웠다. 우의 넓은 땅에서 죽은 자는 구렁에 누워 돌아갈 곳이 없었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끝이 없는가!
若乃崇替相袭,天地恒其道;灵贶所归,三五更其运。是以秦人弛御,丰沛膺赤帝之符;夏道云衰,景亳得白狼之瑞。殷忧启圣,必将有主,扑原静海,上玄有属。我皇帝受之。皇帝兆出震之灵,禀枢电之精,开日月之明,审正气之贞。潜德而隐,凝玄姑射之侧;感而遂通,应迹庙堂之上。乘龙之梦,夙符于神道;断鳌之心,早发于灵鉴。蕴风云于藏用,纳宇宙于胸怀。濡足授手,救焚是急。于是御太乙,挹勾陈,驱天驷,回地轴。乾行岳止,雷惊麟震。得兵钤于玄教,吞戎韬于黄石。龙飞晋水,凤翥河干。命苍以泛流,麾鸟旗以长迈。以仁为本,扶义而西,传檄百城,转斗千里。战无交兵之虏,攻无汤池之固。望凤墟而一息,登灞上而回首。观衅而动,俟天休命。壶浆溢陌,厥篚盈涂,鬼神叶赞,华夷载伫。𫄬秦婴于枳道,拜殷士于商旌台之珠,毕散于邦国;诸侯之玊,不留于服御。眷言兆庶,企景来苏。
흥망은 이어져도 천지의 도는 일정하고, 신령한 복은 제왕 사이를 옮긴다. 진이 통어를 잃자 풍·패에 적제의 부절이, 하가 쇠하자 경·박에 흰 늑대의 상서가 왔다. 깊은 근심은 성인을 일으키고 천상은 땅과 바다를 안정시킬 주인을 정한다. 우리 황제가 이를 받았다. 우레와 천상의 번개 정기를 받아 일월의 밝음과 바른 기운을 갖추었다. 덕을 숨겨 머물다가 조정의 부름에 응했다. 용을 타는 꿈과 거대한 자라의 다리를 끊을 뜻이 일찍 그 사명을 보였다. 풍운을 능력 속에, 우주를 가슴에 품고 발을 적시고 손을 내밀어 불 속의 사람을 구했다. 태일·구진·천마와 지축을 움직이고 하늘처럼 나아가 산처럼 멈추며 우레와 기린처럼 떨쳤다. 신묘한 병법과 황석공의 전략을 익혔다. 진수에 용이 날고 강가에 봉황이 솟았다. 배와 새 깃발이 나아가며 인을 근본으로 의를 도와 서진했다. 백 성에 격문을 보내고 천 리를 싸우니 적도 견고한 성도 버티지 못했다. 봉황의 옛터와 패상을 돌아보며 기회를 살펴 천명을 기다렸다. 길은 음식과 음료로 차고 귀신이 돕고 화이가 기다렸다. 진 자영의 항복과 은 신하의 귀순을 거론하며, 구슬과 옥을 천하에 나누고 사사로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백성을 돌보니 모두 구원을 바랐다.
薛举往因天隙,偷安陇坻,藉九州之险,成五幡之暴。推锋东向,结垒西夏,同恶如市,转相煽合,带州连郡,豺虺为群。无窦融之先觉,有隗嚣之迷谬。游魂放命,豕突豳梁。虽大风之作梗青丘,有苖之称乱丹浦,均强比逆,异代同年。岂不以道丧鹑居,让王义隐,时惟龙战,争帝理开者乎?是以轩辕五十一伐,殷后二十七征,暴寿华之泽,戮凶绝辔之野,非文德之可绥,乃雄略之攸震。天子躬御武节,亲总元戎,洒沉灾而括地象,正斗极而清天步,倚长剑以肃威,伫中区以傍瞩。运投水转规之智,蓄礼乐慈爱之兵。韬百战百胜之谋,总天关天梁之术。驱驾韩白,鞭击雷电。命招摇以启行,诏参伐以前扫。殉义之士,听鼓鼙而窃誓;蹈恩之众,望旌笳而张胆。呼吸则河海沸荡,指麾则昆岱掎拔。圣上顺天道好生之德,体周王掩瘠之仁,将欲克乱在权,善师非战,兵交使在,弘其自革。而茅旌不建,舆榇莫从,告舍既违,行迷遂往。吠尧之犬,终成桀用;刺由之客,俱为跖徒。鸟啄兽穷,来犯锋刃,比角为城池之固,召雨恣屈强之力。非折箠之可笞,岂亭长之攸制?于时摄提在岁,黄钟纪月,义勇同奋,贲育争先。下神兵于九天,决睿图于万里。逆顺斯悬,轰然大溃。僵尸蔽莽,委甲成山。拥秦泾而不流,投过涧而自满。焚巢扫窟,野无遗正倾旻于西北,纽缺地于东南,卷氛祲于辰象,反光华于日月。九伐已施,载櫜于武库;五兵罢用,偃伯于灵台。分蒨旆于应毕,誓山河于将率。
설거는 하늘의 틈을 타 농산 너머에 의지하고 험지를 믿어 폭정을 폈다. 동진하고 서쪽에 보루를 세우자 악한 무리가 모여 서로 선동하며 주군을 잇고 이리와 독사처럼 떼를 지었다. 두융의 선견은 없고 외효의 미혹을 지녔다. 망할 군사는 명을 거스르고 멧돼지처럼 빈·양을 들이쳤다. 청구의 대풍, 단포의 묘족처럼 강포와 반역은 고금이 같았다. 도가 사라져 선양이 무의미해지면 용들이 제위를 다툰다. 그래서 헌원은 쉰한 번, 은왕은 스물일곱 번 정벌하여 수화·절비에서 흉악을 죽였다. 문덕만으로 달랠 수 없어 웅략이 필요했다. 천자는 직접 군을 통솔해 재앙을 씻고 천지 질서를 바로잡으며 장검을 들고 천하를 보았다. 물과 원처럼 자유로운 지혜, 예악과 자애의 군사, 백전백승의 꾀와 천관·천량의 술을 갖추었다. 한신·백기를 능가하고 우레와 초요·삼벌의 별을 명했다. 의를 위해 죽을 자는 북소리에 맹세하고 은혜를 갚을 자는 기와 피리에 용기를 냈다. 숨결에 바다가 끓고 손짓에 곤륜·태산이 뽑힐 듯했다. 하늘의 생명 사랑과 주왕의 시신 매장 자비를 따라 싸우지 않고 이기려 사신을 두어 적의 변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항복 깃발도 관도 오지 않았다. 구원을 거절하고 요에게 짖으며 걸을 섬기는 개, 도척의 무리가 된 자객처럼 잘못을 고집했다. 궁지의 짐승처럼 칼날로 달려들어 병력을 성벽으로, 비를 부를 힘을 믿었다. 부러진 채찍이나 일개 정장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섭제의 해 황종의 달, 용사들은 맹분·하육처럼 앞을 다투었다. 신병이 구천에서 내리고 지략이 만 리에 미쳤다. 역순은 분명하여 적이 무너졌다. 시체는 들을 덮고 갑옷은 산, 몸은 진·경의 물과 골짜기를 막았다. 소굴을 불태운 뒤의 전승 문장은 손상되어 있다. 기울어진 천지를 바로잡고 흉기를 걷어 일월의 빛을 되돌렸다. 정벌을 마쳐 무기를 곳간에 넣고 전쟁을 멈추며 장수에게 기와 봉토를 주고 산하에 맹세했다.
帝图咸举,邦政斯澄。革污俗于维新,正王风于旧物。鼓之以道德,怀之以仁义。春雨以润之,秋阳以暴之。解罔深汤帝之慈,焚书下汉王之诏。布以新政,刑用轻典。四海之内,靡然向风;八荒之表,奔走无𭣧。却塞蹛林之北,开郡铜柱之南。苑葱山而池盐泽,逾盘水而跨热阪。郡生环海,自入提封;方朔炎洲,同归王会。岂止菌鹤短独、西鹣东鲽之贡而已哉!若夫至人忘已,义期拯物,黄屋非汾水之荣,玄圭岂具茨之贵?圣道运而不积,神功为而莫宰。虽复大横固祉,长发启祥,犹且置玺陈谦,避河为让,道外天下,情遗尊极。而岩廊余事,人神之望难拒;符命傥来,历数之期安避?仰追上玄之心,俯顺域中之请。然后履乘石,握神珠,开黄玉之图,临紫辰之位,冠百王而称首,与三代而同风。巍巍乎,荡荡乎,粤不可名也。于是衢室辟扉,宾门启路,延揽英彦,鉴昧幽仄。用人不偏于世族,得贤无弃于农琐。故非熊非螭,致光景之佐;为舟为楫,获营求之士。等五臣之亮采,同六相之𬣙谟。崇台非一木之枝,珍裘乃千金之丽。济济多士,皇家以宁。重以制礼作乐,移风也;胜残去杀,刑措也。藏金舜岭,菲膳尧宫。雉裘非先王之服,宝马岂鸾旗之用?运玄览以照物,推赤心以期下。万方罪已,轸推沟之虑;百姓为心,顺天从之欲。若乃上嗣重光之美,元良万国;棣华璇萼之宗,本支百世。咸幼陶慈训,言提自昔。奉审喻于宸极,得乐善于轩殿。非藉保传之勤,宁因师友之力。逾启诵而高视,越郇韩而上征。既而休气和年,祥风荐祉。威凤为宝,麟趾游郊。若烟非烟,浮晓空而下映;似月非月,丽宵天而成象。祯不绝书,灵无遁迹,猗与伟与,事高图史。至于登舆下辇,省方巡岳,应感必彰,形言弥著,道盛金奏,美盈玉简,叶睿思于泉涌,谐神功于日用,陋柏梁之词,掩南风之曲,圣作物睹,永贻千载者焉。
제업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맑아져 악습을 고치고 왕도를 회복했다. 도덕으로 이끌고 인의로 품어 봄비처럼 적시고 가을볕처럼 비췄다. 탕왕이 그물을 연 자비, 한왕이 문서를 태운 용서를 따라 새 정치를 펴고 형벌을 가볍게 했다. 사해와 먼 땅이 귀순했다. 경계는 체림 북쪽과 동주 남쪽으로 뻗고 총령·염택·반수·열판을 아우르며 섬나라와 남북 땅도 조회에 왔다. 진귀한 새와 물고기의 공물만이 아니었다. 지인은 자신을 잊고 남을 구한다. 분수의 성인에게 황제 수레가, 구자에서 검은 옥이 귀하지 않듯 제위를 탐하지 않는다. 도는 쌓아두지 않고 신공은 소유하지 않는다. 길조에도 인장을 내려놓고 겸양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사람과 신의 기대와 천명을 거절할 수 없어 왕석에 올라 신주를 쥐고 황옥의 도를 펴 자진의 자리에 섰다. 백왕의 으뜸, 삼대와 같은 덕은 광대하여 이름 붙일 수 없다. 조정을 열어 영재와 숨은 인재를 불렀고 문벌을 편들거나 농민을 버리지 않았다. 옛 현자와 오신·육상 같은 보좌를 얻었다. 높은 대는 한 나무로, 귀한 털옷은 한 가죽으로 만들 수 없다. 많은 인재가 황실을 편안하게 했다. 예악으로 풍속을 바꾸고 잔혹과 살육을 없애 형벌이 쓰이지 않았다. 순·요처럼 재물과 성찬을 멀리하고 화려한 옷과 명마를 구하지 않았다. 통찰과 진심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만방의 죄를 자신에게 돌리며 백성을 구렁에 민 듯 걱정했다. 태자는 빛을 잇고 종실은 백세를 약속했다. 어려서부터 자애의 가르침과 황제의 훈도를 받아 스승과 벗만 의지하지 않고 계·송, 순·한을 넘었다. 상서로운 기운과 봉황·기린, 연기나 달 같은 징조가 하늘에 나타나 기록을 넘는 기적을 보였다. 순행과 시찰에서 말과 감응이 덕을 드러냈고, 음악과 옥간에 찬 문장은 샘처럼 솟아 백량의 시와 남풍의 노래를 넘으며 천년 뒤에 전해졌다.
抑又闻之,羲、农遐邈,轩、顼悠 绝,传信于故老,非取接于闻见。百世可知,斯言殆息,七代更立,求之岂易?今之视昔,遥然未睹。将何以分素青于三后,辨天地于九皇,遂能历选列辟,详观群帝,得茂实于千古,验英声于万叶。斯道何哉?将由孔丘登岱,纪金绳者七十;管仲对齐,陈玉检者十二。亦有汉廓帝图,魏开王业,树丰碑于泗水,𬤥贞石于繁昌。莫不垂鸿名,腾显号,播休风于六舞,歌盛德于九韶,与天壤而无穷,悬贞明而可久。刊勒之美,不其懋与!
복희·신농과 헌원·전욱은 멀어 눈과 귀가 아닌 고로의 전승을 믿는다. 백세를 안다는 말도 어렵거니와 일곱 시대를 찾기는 더욱 어렵다. 옛 제왕을 비교하고 공적과 명성을 확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공자가 태산에서 금승을 쓴 칠십 왕을 기록하고, 관중이 제후에게 옥검을 쓴 열두 왕을 말했기 때문이다. 한이 제도를 넓히고 위가 왕업을 열며 사수에 큰 비, 번창에 돌을 세웠다. 이름을 남기고 육무에 풍속을, 구소에 덕을 노래해 천지와 함께 오래 밝게 전했다. 새겨 기록함의 가치가 크지 않은가!
然则事止寰中,道外,未辨西方之圣,莫知东被之法。求真之理,我则未闻。虽御辩崆峒,非 涅盘之岸;乘云谷口,宁游波若之门?莫不同陟耶山,俱沉业浪,生死无际,苦集相因。讵照重昏之日,谁翦稠林之树?比夫真如实相,解脱妙津,道王三千,功弥百亿,何异吹剑首于雷门,策蚊睫于鹏运者哉!是知伊兰无实,有为终假,漂溺四流,邅回九结,践畏涂而卒岁, 捷径其长往。大梦无晓,可为叹息。粤若能仁,深弘慈奖,虽寂泊为道,无来无去,乘机诱发,垣玺必追。住一子地,开方便门,翔八正道,示如来藏。飘香风于有顶,洒甘露于无边。慧炬明而幽夜朗,法桥搆而冯河息。但为仁由已,履道自衷,表立影从,因果非外。今我所以仰胜缘于十号,纪武功于七德,真俗二谛,兼而两之。
그러나 이는 세상 안의 일에 머문다. 전승에는 빠진 부분이 있으며, 서방의 성인과 동쪽에 전한 법, 진리를 구하는 이치를 모른다고 한다. 공동의 문답은 열반의 언덕이 아니고 골짜기에서 구름을 타도 반야의 문에 이르지 못한다. 모두 그릇됨의 산에 올라 업의 물결에 잠겨 생사와 고통이 끝없다. 누가 어둠을 비추고 숲을 벨 것인가. 진여실상과 해탈의 나루, 삼천·백억 세계의 도와 공에 비하면 속세의 공은 뇌문 앞 칼자루를 불거나 붕새 옆 모기 속눈썹을 타는 격이다. 이란에는 좋은 열매가 없고 유위는 허상이다. 사류와 구결에서 떠돌며 위험한 길을 걷는다. 다음 구절은 결락되었다. 큰 꿈은 깨지 않는다. 능인은 깊은 자비로, 오고 감 없는 고요함에 있으면서 때에 응해 이끈다. 전승 일부는 불명확하다. 모두를 외아들처럼 보고 방편문·팔정도·여래장을 열어 향풍과 감로를 무한히 보낸다. 지혜의 횃불은 밤을 밝히고 법의 다리는 위험한 건넘을 없앤다. 인과 도는 마음에서 나오며 기둥에 그림자가 따르듯 인과는 밖에 있지 않다. 우리는 부처의 승연을 우러르고 무공의 칠덕을 기록하여 진제와 속제를 함께한다.
皇上昔居因地,早弘誓力,应迹忍土,负荷群生。属忧火燎原,稽天方割,飙林无自静之木,震海岂澄源之水。东戡西翦,南征北怨,旄钺所次,酣战兹邦。君轻散千金之赏,士重酬九死之命。莫不竞凌锋镝,争赴水火。虽制胜之道,允归上略,而兵凶战危,时或殒丧。褰裳不顾,结缨荒野。忠为令德,没有余雄。同艰难于昔晨,异欢泰于兹日。有怀亮烈,用切旒扆。仍于战地,爰搆神居。变秽土于宝城,开莲花于火宅。高𤇺罢昭,慈灯载朗;鸢旌辍警,胜幡斯立。拔无明于棘林,𨗳焦热于渴井。尽诸有结,永除苦际。虽复去顺效逆,同归各徒,中涓颍从,寔惟义重。而上忍所被,旃檀与利刀兼忘;大慈所覃,怨贼将义夫齐指。俱润法雨,同乘大辕,回向菩提,无上平等。
황제는 아직 인위에 있을 때 큰 서원을 세우고 인토에 나타나 중생을 짊어졌다. 근심의 불이 들을 태우고 물이 하늘에 닿아 나무도 바다도 고요하지 못할 때, 동서를 평정하고 남정하면 북쪽 백성이 기다렸다. 깃발과 부월이 여기 이르러 격전했다. 군주는 천금의 상을 아끼지 않고 군사는 목숨으로 갚아 칼과 불과 물에 다투어 갔다. 승리는 상략 덕이지만 전쟁은 위험해 죽는 이도 있었다.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 들에서 의롭게 죽으니 충성과 용맹은 남았다. 옛 고난을 함께한 이가 오늘의 평안을 함께하지 못함을 황제는 슬퍼하여 전장에 신성한 집을 세웠다. 더러운 땅은 보성, 불타는 집에는 연꽃, 봉화 대신 자비의 등불, 군기 대신 성스러운 깃발이 섰다. 무명을 뽑고 타는 이에게 물을 주며 모든 속박과 고통을 없앤다. 반역에 따른 이도 각자의 주인을 섬겼고 중연과 영의 종자처럼 의리가 무겁다. 지극한 인욕은 전단과 칼을 구별하지 않고 대자비는 적과 의사를 함께 본다. 모두 법우에 젖고 대승을 타며 보리로 향하는 무상의 평등이다.
尔乃仰图景宿,东井躔其分野;下料物土,西河限其封域。雕戈是锡,尸臣启邦之所;豳馆斯开,公刘建都之地。梁山南枕,甘泉东指。面雕云之郁蓊,想玉树之青葱。沃野千里,平原超忽。先王之桑梓,西州之都会。于是诏司空,相原隰。四衢如砥,八道傍通。考极星之曜,测土圭之景。选耜梓于南郢,征琬琰于西昆。匠石奋斤,公输审墨。高门洞启,层甍有亢。藻井瞰烟霞之路,步檐拖虹霓之色。徘徊珠柱,陆离璇题。春牖前临,秋窗左辟。月殿含影,金波上而相照;日宫吐曜,羲和沉而犹朗。何止四柱成台,高多罗之树;五王立寺,临伽尸之水。信足上图驾御,傍拟醍醐,望鹫山而非远,想鸡林而可即。法徒萃止,应供来游,咸珠戒无缺,威仪莫犯。杖锡四禅之林,摄𪗋三朗之路。有宝所焉,有名僧焉。至矣哉,伽蓝之为盛也!虽复高天已烬,大海成田,我皇基与净刹,终永永而常传。
하늘로는 동정의 분야, 땅으로는 서하의 경계다. 조각 창을 받은 신하가 나라를 열고 공유가 빈에 도읍한 곳이다. 남쪽 양산, 동쪽 감천, 상서로운 구름과 옥 같은 나무, 천 리의 비옥한 평원은 선왕의 고향이자 서쪽 도회다. 사공이 높고 낮은 땅을 살피고 사통팔달 길을 냈다. 북극성과 규표 그림자를 재어 남쪽 영의 목재와 서쪽 곤륜의 옥을 골랐다. 장석처럼 도끼를, 공수처럼 먹줄을 다뤘다. 높은 문과 겹지붕, 구름을 바라보는 조정, 무지개색 회랑, 보석 기둥과 문액이 빛났다. 봄가을 창, 달빛 전당과 해의 궁은 해가 져도 밝았다. 네 기둥 대와 다라수, 가시 강의 오왕 사찰을 넘어 부처의 성지에 비길 만해 영취산과 계림도 가까웠다. 승려와 응공이 모여 계율과 위의를 지키고 석장으로 사선의 숲과 밝음의 길을 걸었다. 한 단어는 전승이 불명확하다. 보물과 명승이 있으니 가람의 융성이 지극하다. 하늘이 타고 바다가 밭이 되어도 황업과 정찰은 영원하리라.
其词曰:三界云扰,六趣波扬。苦流方割,忧火炎岗。俱迷津济,莫导舟航。长夜无晓,非徒未央。于昭十号,四生是愍。道王大千,智周上忍。慧刀已裂,化城斯引。教有殊涂,乘无异轸。甘露朝洒,慈云夕布。品物以亨,群迷式悟。捷迳坦道,耶山启路。不有善权,谁澄恶趣。炎行弛德,废道毁常。玊弩惊焰,金宿腾芒。俯震瀛壑,仰紊乾纲。九野鲸奋,八极鸱张。乱离瘼矣,孰济生灵。黄星表曜,赤伏开祯。大君应历,粤御神兵。乃圣乃武,如雷如霆。于铄王旅,除凶靖暴。关右长驱,唐郊大号。壤裂逋丑,家离浞傲。刷野屠祅,空山剿盗。见危殒辔,怀忠死绥。惊燐宵远,穷魂夜飞。我有慈被,深仁莫违。建斯净域,永树归依。归依伊何,俱消五䌸。净域伊何,同升妙觉。架汉开宇,凭霞竦阁。朱丽琼丹,地严金雘。鹫山非远,鸡林可求。七宝低树,八解疏流。瑞莲开晓,天花不秋。戒定攸息,应供来游。凡厥慈众,俱弘上善。稠林以辟,爱枝爰翦。九结冰泮,四禅自。 彼岸可归,法轮恒转。金刚不坏,璇保惟长。慧室长湛,皇基载昌。僧祗可筭,恒沙易量。悠哉天历,永配无疆。
명에 이른다. 삼계는 어지럽고 육취는 물결친다. 고통의 물과 근심의 불, 길 잃은 중생은 배도 길잡이도 없이 긴 밤에 있다. 십호의 부처는 사생을 가엾게 여겨 대천세계를 다스리고 지혜로 상인에 이른다. 혜도로 속박을 자르고 화성으로 이끌며, 가르침은 달라도 수레는 함께 간다. 아침 감로와 저녁 자운에 만물이 자라고 미혹이 깬다. 그릇된 산에 평탄한 길을 내는 방편 없이 누가 악취를 맑힐까. 수가 덕과 도와 상도를 버리자 천상이 타오르고 바다와 하늘 질서가 흔들렸다. 반란이 사방에 가득하니 누가 살릴까. 황성·적부의 징조에 대군이 천명을 받아 신병을 거느리니 성스럽고 무용이 우레 같다. 빛나는 왕사는 폭악을 없애고 관서로 달려 당의 들에서 외치며 도적과 악한 집안을 무너뜨리고 들과 산을 쓸었다. 충사는 위험 속에 죽고 인광과 외로운 혼이 밤을 난다. 우리의 자비가 덮고 깊은 인이 버리지 않는다. 정역을 세워 영원한 귀의처로 삼는다. 귀의는 오박을 풀고 정역은 함께 묘각에 오름이다. 은하를 건넌 집, 구름의 누각, 붉은 보석과 금빛 땅, 영취산과 계림이 가깝다. 칠보가 나무에 드리우고 팔해탈이 흐르며 새벽 연꽃과 가을 없는 천화가 핀다. 계정이 머물고 응공이 와서 선을 넓힌다. 숲과 애착의 가지를 베고 구결이 얼음처럼 풀린다. 사선 구절은 결락이다. 피안으로 가고 법륜은 늘 돌며 금강과 보배는 영원하다. 지혜의 방은 고요하고 황업은 번창한다. 아승기와 항하 모래도 셀 수 있으리니, 천명은 무한과 함께 길이 지속하라.
右昭仁寺碑,唐守谏议大夫骑都尉朱子奢𬤥。欧阳公爱其字画甚工,惜无书人氏名。金石录尝载其目,亦不言为何人书也。惟通志金石略以为虞永兴书。永兴书之传世者,有孔子庙堂碑,然与此不类,而金石略乃谓出于虞公,当必有所据。昭仁寺在邠州西八十里,昔唐太宗与薛举战争之处。正德癸酉,予以使事道邠,得搨其本,字画完好,若初刻者,真可宝也。朱公,予乡先生,唐史有传,其文字人间罕存,可见者仅有此耳。
이 소인사비는 당 수간의대부·기도위 주자사가 지었다. 구양공은 뛰어난 글씨를 사랑하고 서자 이름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금석록』도 목록만 싣고, 『통지』 금석략만 우영흥의 글씨라 한다. 전하는 공자묘당비와는 다르지만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소인사는 빈주 서쪽 팔십 리, 태종과 설거의 전장이다. 정덕 계유년 사신 일로 빈을 지나다 탁본을 얻었다. 글씨가 막 새긴 듯 온전해 보배롭다. 주공은 내 고향 선배로 당사에 전기가 있으나 글은 드물어 볼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형양외사집』
右昭仁寺碑,在今豳州宜禄镇,唐师及薛举战地也。碑为阵亡士荐福而作,世以为虞永兴公书。宋元丰、绍圣诸君子题识刻于碑阴,若欧阳公取其字法之精,而不定为何人所书,其余但纪观碑岁月,谓为世南少年书者,河南张威甫也。以予观之,此碑视庙堂碑笔锋为露,而运意略同,至于辞语亦有相类者,亦一时士大夫习气然耶。越章立可自陜右入觐,用以为贶,既装潢成什,摭其指意,系长歌于后云:
이 비는 지금 빈주 의록진, 당군과 설거의 전장에 있다. 전몰자의 복을 위해 세웠고 우영흥의 글씨라 한다. 송 원풍·소성의 여러 제기가 뒷면에 있다. 구양공은 서법을 칭찬하되 서자를 정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관람 날짜만 적었다. 우세남의 젊은 작품이라 한 이는 하남 장위보다. 내게는 묘당비보다 획끝이 드러나나 뜻은 비슷하고 문구도 닮아 당대 사대부의 습관인가 싶다. 월의 장립가가 섬서에서 입조하며 선물했다. 책으로 장황하고 뜻을 모아 장가를 붙인다.
隋家天子普六茹,五儿一气夸胤祚。噬脐追悔废立乖,忍死空惭独孤误。大业改号朝新君,北南乐土无惊尘。锦帆楼船驾河汴,琼花看遍江都春。春梦繁华眼前别,纵意淫奢宁改辙。乱离四海金铁鸣,杀人如麻川流血。咸阳不见翠华归,独夫剚刃谁其悲。寰宇皇皇望真主,秋风晋水神龙飞。秦王上将天日表,草昧群雄如电扫。锁枷械钮俘累累,献凯归来京阙晓。蕞哉小丑据豳岐,奉将天讨森熊貔。两军一战胜负决,倒戈弃甲愁疮痍。阵前骈首就诛戮,百里僵尸京观筑。惊燐明灭艳青红,长夜冥冥听鬼哭。贞观年来歌太平,恩波直欲流泉扃。丹碧楼台五云起,金身宝座联珠缨。吁嗟死者焉可作,冥福全资大皇觉。茫茫苦海渡慈航,净土西天归极乐。贝叶翻经白马驮,神人现相严㧑诃。法师上奏帝颜悦,倾心事佛真如何。龟趺螭首穹碑树,谏议文章重回护。书丹仿佛虞永兴,独怪当时名弗署。银钩铁画睹斯文,摩空鳌背愁斜曛。片言诛意凛斧钺,遐思渺渺凌秋云。自古明王严放伐,汤武吊民宁嗜杀。往事悠悠且莫论,要与书家论波磔。
수 천자는 보륙여 성, 다섯 아들은 혈통을 자랑했다. 잘못된 폐립과 독고의 실수를 뒤늦게 뉘우쳤다. 대업의 새 임금 아래 남북은 평온해 보였다. 비단 돛 누선이 변수로 가 강도의 꽃을 보았다. 번화한 꿈이 사라져도 사치를 고치지 않아 사해에 무기 소리, 삼처럼 쓰러진 사람, 피의 강. 황기들은 함양에 돌아오지 못했고 찔린 독부를 누가 슬퍼할까. 천하는 진주를 기다리고 진수 가을바람에 용이 날았다. 진왕은 해 같은 얼굴로 군웅을 번개처럼 쓸어 포로와 승리를 새벽 궁궐에 바쳤다. 빈·기의 작은 적에게 천벌의 군사가 갔다. 한 싸움에 승패가 갈리고 무기와 갑옷은 버려져 상처가 남았다. 머리가 나란히 베이고 백 리 시체는 경관이 되었다. 푸르고 붉은 인광, 긴 밤 귀곡. 정관에는 태평을 노래하고 은혜는 무덤에 닿으려 했다. 오색 구름의 단청 누각, 금불과 보좌의 구슬. 죽은 이를 누가 살리랴, 명복은 부처에 의지한다. 자비의 배가 고해를 건너 서방 극락에 간다. 백마의 경전, 엄숙한 신상. 법사의 상주에 황제는 기뻐하니 이 불심은 무엇인가. 귀부와 이수의 큰 비, 간의의 글은 거듭 변호한다. 우영흥 같은 서체에 이름이 없어 이상하다. 은 갈고리 철 획을 보고 자라 등에 저녁 해가 기운다. 의도를 꾸짖는 한마디는 도끼처럼 엄하고 생각은 가을 구름을 넘는다. 명왕은 정벌을 신중히 했고 탕무는 백성을 위로했지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옛일은 놓고 서가와 획을 논하자.
『석묵전화』
碑在长武县,朱子奢撰,无书者姓氏。余观其笔法,大类庙堂,庙堂丰逸,此稍瘦劲。庙堂五代重勒,此伯施真迹也。欧公亦不言谁书,郑樵直以为伯施,都玄敬谓必有据,而曹明仲曰欧阳通书。通书道因诸碑,殊与此不类。按旧唐书:贞观三年,诏建义以来交兵处,为殒身戎阵者,各立一寺,令虞世南、朱子奢等为之碑,此破薛举处也。又通本传,少孤,母徐氏教以父书,仪凤中始知名。贞观三年至仪凤元年,四十八年。道因碑书在龙朔三年,去贞观三年亦三十五年,则此非通书明甚。而虞与朱同事,其为虞书无疑。曹明仲又以虞恭公碑在宜禄巡检司。虞恭公,温彦博也,陪葬昭陵,碑正在醴泉。宜禄巡检司,即今长武县,明仲盖误以昭仁为恭公耳。且恭公碑亦是信本书,非通也。明仲之误如此,据其言者,可谓无目矣。
비는 장무현, 주자사 글이며 서자 이름은 없다. 묘당비와 비슷하나 저것은 풍부하고 자유롭고 이것은 가늘고 강하다. 묘당은 오대의 중각, 이것이 백시의 진적이다. 구양공은 말하지 않았고 정초는 백시, 도현경은 근거가 있으리라 했으나 조명중은 구양통이라 했다. 통의 도인비 등과는 전혀 다르다. 『구당서』는 정관 3년 전장에 전몰자를 위한 절을 짓고 우세남·주자사 등에 비를 명했다고 한다. 여기는 설거 격파지다. 통의 전기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 서씨에게 아버지 글씨를 배워 의봉에 유명해졌다고 한다. 정관 3년부터 의봉 원년은 사십팔 년, 용삭 3년 도인비도 삼십오 년 뒤다. 통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우와 주는 동료니 우의 글씨가 확실하다. 조명중은 우공공비를 의록 순검사에 둔다지만 우공공은 온언박으로 소릉에 배장되어 비는 예천에 있다. 의록 순검사는 지금 장무현이니 소인을 공공으로 착각했다. 그 비도 신본 글씨이지 통이 아니다. 이런 오류를 따르는 것은 눈이 없는 셈이다.
『경자소하기』
昭仁寺碑为朱子奢文,不著书者名。郑樵金石略以为虞世南。细阅之,笔致娟秀尔雅,非永兴不能也。旧唐书载贞观三年诏建义以来交兵处,为陨身戎阵者各立一寺,令虞世南、朱子奢等为之碑。此碑立于豳州,乃破薛举处也。文既为朱,则字为虞,更足据耳。
소인사비는 주자사 글이며 서자는 적지 않았다. 정초 금석략은 우세남이라 한다. 자세히 보면 우아하고 정제된 필치가 영흥 아니면 불가능하다. 『구당서』의 정관 3년 전장 사찰과 우세남·주자사 등의 비문 명령, 그리고 설거를 격파한 빈주에 세운 이 비를 보면, 글은 주, 글씨는 우라는 데 더욱 근거가 있다.
『옹주금석기』
昭仁寺碑正书,今在长武县城东隅。碑首篆书大唐豳州昭仁寺之碑九字,题曰豳州昭仁寺碑文,守谏议大夫、骑都尉臣朱子奢奉敕撰。碑文三千余字,完好如新,残缺者十余字耳。集古录云:字画甚工,信不虚也。按旧唐书:贞观三年,诏建义交兵之处,各立一寺,此其一也。而碑中无年月。金石文字记云:贞观四年十一月。
소인사비는 해서이며 장무현성 동쪽 모퉁이에 있다. 비수에는 전서로 ‘대당빈주소인사지비’ 아홉 자, 제목은 ‘빈주소인사비문’, 수간의대부·기도위 신 주자사 봉칙찬이라 적혔다. 삼천여 자가 새것처럼 온전하고 십여 자만 결손이다. 『집고록』의 칭찬은 사실이다. 『구당서』 정관 3년 전장마다 절을 세우라는 명령의 하나다. 비에는 연월이 없으며 『금석문자기』는 정관 4년 11월이라 한다.
『평진독비기』
右豳州昭仁寺碑在长武县。碑与郑州等慈寺碑同时敕建。元和郡县志:昭仁寺在宜禄县西十步浅水原上。王师讨平薛仁杲,诏于此置寺。碑,谏议大夫朱子奢之词也,即此。旧唐书高祖本纪:武德元年六月,薛举寇泾州。八月壬午,薛举死,其子仁杲复称帝,命秦王为元帅以讨之。十一月己酉,秦王大破薛仁杲于浅水原,降之,陇右平。碑云:于时摄提在岁,黄钟纪月,又云仍于战地,爰搆神居,碑所言皆与史合。
빈주 소인사비는 장무현에 있고 정주 등자사비와 동시에 칙명으로 세워졌다. 『원화군현지』는 의록현 서쪽 열 걸음 천수원에 소인사가 있으며 설인고 평정 뒤 명으로 두고 주자사가 비문을 지었다고 하니 이것이다. 『구당서』 고조본기는 무덕 원년 6월 설거의 경주 침입, 8월 임오 설거 사망과 인고의 칭제, 진왕의 원수 임명을 기록한다. 11월 기유 진왕이 천수원에서 크게 이겨 항복시키고 농우를 평정했다. 비의 ‘섭제의 해 황종의 달’, ‘전장에 신거를 지었다’는 말은 역사와 맞는다.
『금석췌편』
又,昶于乾隆甲辰四月,值宁夏回人之叛,率兵防御于长武者五阅月,军事暇即往观之,通体完好。盖因寺中斫石材丈余,方正巩固,乃立亭其上,置碑于中,牧童敲火,牛厉角皆不能及,所以全无损坏。凡守土好古之君子,所当仿而行之也。
건륭 갑진 4월, 영하 회민 반란 때 나 왕창은 군을 이끌고 장무를 다섯 달 지켰다. 군무 틈에 가 보니 비는 온전했다. 절에서 한 장이 넘는 단단한 사각 돌을 다듬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워 안에 비를 놓았기 때문이다. 목동의 불똥 내기나 소의 뿔 갈기도 닿지 않아 손상이 전혀 없었다. 고물을 사랑하는 지방관은 본받아야 한다.
『관중승적도지』
昭仁寺。一统志:在长武县治东。元和郡县志:寺在宜禄县西十步浅水原上。太宗平薛仁杲,诏于此置寺。碑文谏议大夫朱子奢之辞也。
소인사. 『일통지』는 장무현 관아 동쪽이라 한다. 『원화군현지』는 의록현 서쪽 열 걸음 천수원 위이며, 태종이 설인고를 평정하고 절을 명했고 간의대부 주자사가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옛 사진과 탁본
1927년(간행)
1927년 일본 서예가 히다이 덴라이가 편집한 『소인사비』가 서학원후원회에서 간행되었다. 당비의 전체 탁본을 나누어 책장 형태로 장황한 자료다. 같은 해 도키와 다이조·세키노 다다시의 『중국 불교사적』 제3평해도 이 비를 수록하고 해설했다. 아래는 『소인사비』의 한 장으로, 해서 글씨와 돌 표면의 박락을 볼 수 있다.
1932년(간행)
1932년 일본 아시아사진대관사의 조사대는 룽하이 철도와 시안–란저우 도로를 따라 허난에서 산시·간쑤로 들어갔다. 『아시아 대관』 제9집이 이 여정을 기록한다. 시안과 융서우를 거쳐 창우에 도착한 뒤 현성에서 삼십 리 떨어진 야오뎬 역참을 지나 간쑤 징저우로 갔다. 길가에는 청대 좌종당이 심기를 권한 ‘좌공류’가 남아 있었다. 창우현에서 찍은 두 사진은 황토 고원 가장자리의 동굴 주거 마을과 절벽의 석굴 사찰로, 현내 황토 골짜기와 동굴 취락을 담았다.
1940년(간행)
1940년 6월 호조칸이 도키와 다이조·세키노 다다시 편 『중국 문화사적』 제9집을 출판했다. 창우 소인사에 남은 당비, 주자사가 지은 「대당 빈주 소인사비」의 전체 탁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