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왕부

베이징 공왕부(恭王府)의 전신은 건륭 연간 화신(和珅)의 저택으로, 저택 안의 남목(楠木) 가옥은 영수궁(寧壽宮)의 제도를 모방하여 화신의 이십 대 죄목 중 하나로 꼽혔으니, 곧 오늘날의 석진재(錫晉齋)이다. 1799년 적몰(籍沒)된 뒤 저택의 절반은 화효공주부(和孝公主府)가 되고 절반은 경군왕 영린(慶郡王 永璘)에게 하사되었으며, 1852년 함풍제(咸豐帝)가 공친왕 혁흔(恭親王 奕䜣)에게 내려 부(府)를 세우게 하였고, 동치 연간에 부 북쪽의 저택 정원이 낙성하였으며, 1937년 부인대학(輔仁大學) 여자학원으로 바뀌었다. 1982년 제2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공왕부박물관이다. 이 글에는 『청실록(淸實錄)』 『청사고(淸史稿)』 등 문헌 원문과 20세기 옛 사진을 수록한다.

시대
청조
지역
베이징
위치
베이징시 시청구 전해서가 17호
공왕부

소개

스차하이(什剎海) 서쪽 기슭, 전해서가(前海西街)에 자리한 이 부저(府第)는 가장 이르게는 건륭 연간 권신 화신(和珅)의 택지(宅第)로 확인된다. 화신은 저택 안에 영수궁(寧壽宮)의 제도를 모방하여 남목(楠木) 가옥을 지었는데, 다보각(多寶閣)과 격단(隔段)이 모두 그 양식을 따랐고, 원우(園寓)의 장식은 원명원(圓明園)의 봉도요대(蓬島瑤臺)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전하기를 건륭 말년에 여러 왕(王)이 함께 모여 제위(儲位)의 귀속을 논의하였는데, 자리에서 화신을 말하자 모두들 다투어 그를 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한다. 그런데 건륭제의 열일곱째 아들 영린(永璘)은 도리어 자신은 황위에 분수 넘는 생각이 없으며, 훗날 분봉(分封)될 때 화신의 집을 얻어 살 수 있다면 마음에 족하다고 하였다. 가경 4년(1799) 화신이 죄를 얻어 가산을 조사하고 몰수할 때 겹벽(夾墻)에 숨긴 금 이만 육천여 냥과 땅굴에 묻은 은 이백여만 냥을 적발해 냈고, 죄상을 선포할 때 남목 가옥과 원우는 열세 번째 큰 죄로, 숨긴 금과 묻은 은은 열여덟 번째로 열거되었다. 화신은 남목 집은 자신이 태감(太監)을 영수궁에 보내어 양식을 보고 모방하여 지은 것이라고 공술하였다. 그 뒤 이 택지는 반으로 나뉘어, 절반은 화신의 며느리 화효공주(和孝公主)에게 남겨 주고, 절반은 경군왕 영린——가경제(嘉慶帝)의 동복(同母) 아우——에게 하사하였다. 화신의 원우는 별도의 산업으로 성친왕 영성(成親王 永瑆)에게 하사하였다.

영린이 이곳에 산 이십 년 동안, 부 안에는 화신이 남긴 비로모문(毗盧帽門)[1] 네 기, 태평강(太平缸)[2] 쉰네 개, 동로등(銅路燈) 서른여섯 쌍이 줄곧 남아 있었으나 한 번도 주명(奏明)한 적이 없었다. 가경 25년(1820) 영린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면민(綿愍)이 작위를 이었는데, 이어받자마자 사실대로 주보(奏報)하였다. 어지(諭旨)는 이들이 모두 화신이 그해에 사사로이 마련한 위제(違制)의 물건이라고 인정하였다. 비로모문은 부 안에서 헐어 고치고, 태평강과 동로등은 내무부(內務府)에 올려 보내 따로 안치하게 하였는데, 뒤에 자금성(紫禁城)의 경운문(景運門)·융종문(隆宗門) 밖에 나누어 설치하였다. 면민은 도광 16년(1836)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없었다. 청대 규제로는 작위가 한 대를 전할 때마다 한 등급씩 낮아져야 하나, 도광제는 파격으로 양자로 들어온 종실(宗室) 혁채(奕綵)에게 여전히 군왕(郡王)을 잇게 하였다. 도광 22년(1842), 혁채가 상복(服喪) 기간에 첩을 들여 종인부(宗人府)[3]에 넘겨져 의처(議處)를 받게 되었는데, 또 뇌물을 주어 면하기를 구하였고, 영린의 여섯째 아들 면성(綿性)도 뇌물을 주어 왕작(王爵)을 잇고자 꾀하였다. 일이 드러나자 혁채는 작위를 빼앗기고 면성은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으로 귀양 가서, 작위가 빈자리가 되었다. 영린의 다섯째 아들 면제(綿悌)가 명을 받들어 제사를 맡았으나 얼마 안 되어 진국장군(鎭國將軍)으로 강등되었고, 도광 29년(1849)에 세상을 떠났다.

함풍 2년(1852), 함풍제는 이 택지를 아우인 공친왕 혁흔(恭親王 奕䜣)에게 내려 부(府)를 세우게 하였다. 부저 서로(西路)의 경의당(慶宜堂)은 경왕(慶王)이 살 때의 옛 편액이라 전하는데, 곧 그해 열세 번째 큰 죄가 말한 남목 가옥이다. 혁흔은 또 부저 북쪽에 화원(花園)을 조영하였다. 동치 연간에 화원이 낙성하자, 그는 함풍제가 하사한 「낭윤(朗潤)」 편액을 정원 안에 걸었으므로, 정원은 이 이름을 따라 쓰게 되었다. 정원 안에는 자리를 베풀어 손님을 연회하는 당당(廳堂)이 하나 있어 이신소(怡神所)라 하는데, 편액은 가경제의 어서(御書)이다. 광서 연간에 대학사(大學士) 보윤(寶鋆)이 정원의 단골 손님이 되어, 이신소에서 조금 마시며 연극을 보고 혁흔과 창화(唱和)하였다. 혁흔은 동치 초년 두 궁의 태후(兩宮太后)가 의지하여 중용한 의정왕(議政王)으로, 광서 24년(1898) 봄 그의 병이 위중할 때 광서제가 자희태후(慈禧太后)를 모시고 선후로 두 차례 몸소 부중에 와서 병을 문안하였다. 사월에 혁흔이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충(忠)이라 하고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였으며, 조정은 닷새 동안 조회를 그만두었다.

작위와 부저는 혁흔의 손자 부위(溥偉)가 계승하였다. 부위와 그의 아우이자 화가인 부유(溥儒)는 모두 이 부저 안에서 살았다. 부 안의 『평복첩(平復帖)』은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친필이라 전하며 「법첩의 조상(法帖之祖)」이라는 명예가 있는데, 광서 7년(1881) 혁흔이 성친왕부(成親王府) 후손의 부무(府務)를 대신 관리할 때 부 안으로 가져온 것이다. 선통 2년(1910), 부위가 첩(帖) 끝에 제발(題跋)을 써 소장한 명적(名迹) 백이십 종 가운데 「이 첩을 으뜸으로 삼는다」 하고, 이에 「석진(錫晉)」으로 재(齋)를 이름하여, 경의당은 이때부터 석진재(錫晉齋)로 고쳐 불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민국에 들어온 뒤 부위는 청실(淸室) 복벽(復辟)의 경비를 마련하려고 1921년에 부저를 천주교회 서십고(西什庫) 성당에 저당 잡혔는데, 빚에 이자가 붙어 십여 년 뒤에는 갚을 힘이 없어 부동산을 팔아 치울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공왕부는 천주교회가 세운 부인대학(輔仁大學)의 여자학원이 되어, 다복헌(多福軒)은 여학원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 부유가 어머니의 상(喪)을 치르기 위해 『평복첩』을 장백구(張伯駒)에게 양도하였는데, 이 법첩(法帖)은 뒤에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들어가 소장되었다. 1949년 이후 부저는 여러 예술 기관이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1952년 전국 대학 원계(院系) 조정 때 부인대학이 폐지되어 원계가 베이징사범대학 등 학교에 합쳐졌다. 2002년부터 공왕부 관리로 거두어들여, 현재는 공왕부박물관(恭王府博物館)이다.

역사 문헌

『청실록(淸實錄)』

○又谕:昨经降旨,将和珅罪状,宣谕各督抚,令其议罪。兹据直隶总督胡季堂奏称:和珅丧尽天良,非复人类,种种悖逆不臣,蠹国病民,几同川楚贼匪,贪黩放荡,真一无耻小人,丧心病狂,目无君上,请依大逆律凌迟处死,并查出和珅蓟州坟茔,僭妄违制,及附近州县置有当铺资财,现饬查办各等语。又据连日续行抄出和珅金银等物,特再行谕众知之。朕于乾隆六十年九月初三日,蒙皇考册封皇太子,尚未宣布谕旨,而和珅于初二日即在朕前先递如意,漏泄机密,居然以拥戴为功,其大罪一。上年正月,皇考在圆明园召见和珅,伊竟骑马直进左门,过正大光明殿,至寿山口,无父无君,莫此为甚,其大罪二。又因腿疾,乘坐椅轿台入大内,肩舆出入神武门,众目共睹,毫无忌惮,其大罪三。并将出宫女子娶为次妻,罔顾廉耻,其大罪四。自勦办教匪以来,皇考盼望军书,刻萦宵旰,乃和珅于各路军营递到奏报,任意延搁,有心欺蔽,以致军务日久未竣,其大罪五。皇考圣躬不豫时,和珅毫无忧戚,每进见后,出,向外廷人员叙说,谈笑如常,丧心病狂,其大罪六。昨冬皇考力疾披章批谕,字画閒有未真之处,和珅胆敢口称不如撕去,竟另行拟旨,其大罪七。前奉皇考谕旨,令伊管理吏部、刑部事务,嗣因军需销算,伊系熟手,是以又谕令兼理户部题奏报销事件,伊竟将户部事务一人把持,变更成例,不许部臣参议一字,其大罪八。上年十二月内,奎舒奏报循化、贵德二厅贼番聚众千余,抢夺达赖喇嘛商人牛只,杀伤二命,在青海肆劫一案,和珅竟将原奏駮回,隐匿不办,全不以边务为事,其大罪九。皇考升遐后,朕谕令蒙古王公未出痘者不必来京,和珅不遵谕旨,令已未出痘者俱不必来京,全不顾国家抚绥外藩之意,其居心实不可问,其大罪十。大学士苏凌阿两耳重听,衰迈难堪,因系伊弟和琳姻亲,竟隐匿不奏。侍郎吴省兰、李潢、太仆寺卿李光云,皆曾在伊家教读,并保列卿阶,兼任学政,其大罪十一、军机处记名人员,和珅任意彻去,种种专擅,不可枚举,其大罪十二。昨将和珅家产查抄,所盖楠木房屋,僭侈逾制,其多宝阁及隔段式样,皆仿照宁寿宫制度,其园寓点缀,竟与圆明园蓬岛瑶台无异,不知是何肺肠,其大罪十三、蓟州坟茔,居然设立享殿,开置隧道,附近居民有和陵之称,其大罪十四。家内所藏珍宝,内珍珠手串竟有二百余串,较之大内多至数倍,并有大珠,较御用冠顶尤大,其大罪十五。又宝石顶并非伊应戴之物,所藏真宝石顶有数十余个,而整块大宝石不计其数,且有内府所无者,其大罪十六。家内银两及衣服等件,数逾千万,其大罪十七。且有夹墙藏金二万六千余两,私库藏金六千余两,地窖内并有埋茂银两百余万,其大罪十八。附近通州、蓟州地方,均有当铺钱店,查计资本又不下十余万。以首辅大臣,下与小民争利,其大罪十九。伊家人刘全,不过下贱家奴,而查抄赀产,竟至二十余万,并有大珠及珍珠手串,若非纵令需索,何得如此丰饶?其大罪二十。其余贪纵狂妄之处,尚难悉数,实从来罕见罕闻者。著将胡季堂原折发交在京文武三品以上官员,并翰詹科道阅看,即著悉心妥议具奏。此内如有自抒所见者,不妨另折封陈,若意见皆合,即连衔具奏。至福长安祖父叔侄兄弟,世受厚恩,尤非他人可比。其在军机处行走,与和珅朝夕聚处,凡和珅贪黩营私,种种不法罪款,知之最悉。伊受皇考重恩,常有独对之时,若果将和珅纵恣藐玩各款,据实直陈,较之他人举劾,尤为确凿有据。皇考心早将和珅从重治罪正法,如从前办理讷亲之案,何尝稍有宽纵,岂尚任其贻误军国重务,一至于此?即谓皇考高年,不敢仰烦圣虑,亦应在朕前据实直陈。乃三年中并未将和珅罪迹奏及,是其扶同徇隐情弊显然。如果福长安曾在朕前有一字提及,朕断不肯将伊一并革职拏问。现在查抄伊家资物,虽不及和珅之金银珠宝,数逾千万,但已非伊家之所应有。其贪黩昧良,仅居和珅之次,并著一并议罪。

○또 유지(諭旨)하여 이르기를: 어제 이미 칙지를 내려 화신의 죄상을 각 총독·순무에게 선유(宣諭)하여 그 죄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번에 직예총독(直隸總督) 호계당(胡季堂)이 주하여 이르기를 「화신은 천리(天良)를 다 잃어 다시는 인간의 무리가 아니며, 온갖 패역(悖逆)하고 신하답지 않아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거의 천초(川楚)의 적비(賊匪)와 같고, 탐욕스럽고 부정하며 방탕하여 참으로 부끄러움 없는 소인이요, 미쳐 날뛰어 눈에 임금이 없으니, 대역률(大逆律)에 의거하여 능지처사(凌遲處死)할 것을 청하며, 아울러 조사해 낸 바 화신의 계주(薊州) 분영(墳塋)이 참망(僭妄)하게 제도를 어겼고, 부근 주현에 전당포의 자재(資財)를 두었으니, 지금 명하여 조사 처리한다」 등의 말이 있었다. 또 연일 이어서 화신의 금은 등 물건을 적발해 낸 것에 근거하여, 특별히 다시 여러 사람에게 알려 알게 한다. 짐이 건륭 60년 구월 초삼일에 황고(皇考)께로부터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아직 어지를 포고하지 않았는데, 화신이 초이틀에 곧 짐 앞에 먼저 여의(如意)를 바치고, 기밀을 누설하여 버젓이 옹립(擁戴)을 공으로 삼았으니, 그 큰 죄 첫째이다. 지난해 정월에 황고께서 원명원에서 화신을 불러 보셨는데, 그가 마침내 말을 타고 곧장 좌문(左門)으로 들어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을 지나 수산구(壽山口)에 이르렀으니, 아비 없고 임금 없음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그 큰 죄 둘째이다. 또 다리 병을 까닭으로 의교(椅轎)를 타고 대내(大內)로 들어가고, 가마를 타고 신무문(神武門)을 드나들었으니, 뭇 사람이 두 눈으로 함께 보았건만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그 큰 죄 셋째이다. 아울러 궁에서 나온 여자를 맞아 차처(次妻)로 삼아 염치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큰 죄 넷째이다. 교비(敎匪)를 토벌하여 처리한 이래 황고께서 군서(軍書)를 바라시며 새벽과 저녁으로 마음에 걸어 두셨는데, 오히려 화신이 각로(各路) 군영에서 차례로 도착한 주보(奏報)를 임의로 미루고 묵혀, 일부러 속이고 가렸으므로, 이에 군무가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으니, 그 큰 죄 다섯째이다. 황고의 성공(聖躬)이 불어(不豫)하실 때 화신은 조금도 근심하고 슬퍼함이 없이, 들어가 뵙고 난 뒤마다 나와서 외조(外廷) 인원에게 이야기하며 평소처럼 담소하고 웃었으니, 미쳐 날뜀이니, 그 큰 죄 여섯째이다. 지난 겨울 황고께서 병을 무릅쓰시고 장(章)을 펴 어지를 비답(批答)하실 때 글자와 획 사이에 온전하지 않은 곳이 있으매, 화신이 담히 입으로 차라리 찢어 버리는 것만 못하다고 하며 마침내 따로 칙지를 초(草)하였으니, 그 큰 죄 일곱째이다. 이전에 황고의 어지를 받들어 그에게 이부(吏部)·형부(刑部)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고, 뒤에 군수(軍需) 소산(銷算) 때문에 그가 익숙한 손이므로, 이에 또 유지하여 호부(戶部)의 제주(題奏) 보소(報銷) 사건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가 마침내 호부 사무를 한 사람이 틀어쥐고, 이루어진 규례를 변경하여, 부신(部臣)이 한 글자도 참의(參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큰 죄 여덟째이다. 지난해 십이월 안에 규서(奎舒)가 주보하기를 순화(循化)·귀덕(貴德) 두 청(廳)의 적번(賊番)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달라이라마의 상인의 소를 빼앗고 두 목숨을 죽이고 다치게 하여 청해(靑海)에서 마음대로 겁탈한 한 건인데, 화신이 마침내 원주(原奏)를 박회(駮回)하여 숨기고 처리하지 않았으니, 전혀 변경의 일을 일로 삼지 않았으니, 그 큰 죄 아홉째이다. 황고께서 승하(昇遐)하신 뒤 짐이 유지하여 몽골 왕공(王公) 가운데 두창(痘)을 앓지 않은 자는 경사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는데, 화신이 어지를 따르지 않고 이미 앓은 자와 앓지 않은 자가 모두 경사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전혀 국가가 외번(外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는 뜻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마음씀은 실로 물을 수 없으니, 그 큰 죄 열째이다. 대학사 소릉아(蘇凌阿)는 두 귀가 어두워 쇠하고 늙어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의 아우 화림(和琳)의 인친(姻親)이기 때문에 마침내 숨기고 주하지 않았으며, 시랑 오성란(吳省蘭)·이황(李潢)·태복사경(太僕寺卿) 이광운(李光雲)은 모두 일찍이 그의 집에서 가르치고 읽었는데, 아울러 보천(保薦)하여 경계(卿階)에 나열하고 학정(學政)을 겸임하게 하였으니, 그 큰 죄 열한째이며, 군기처(軍機處) 기명(記名) 인원을 화신이 임의로 철거(徹去)하였으니, 온갖 전횡(專擅)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니, 그 큰 죄 열두째이다. 어제 화신의 가산을 조사하여 몰수하였는데, 지은 남목 가옥이 참람하게 사치하여 제도를 넘었고, 그 다보각(多寶閣)과 격단(隔段)의 양식이 모두 영수궁(寧壽宮)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며, 그 원우(園寓)의 장식이 마침내 원명원 봉도요대(蓬島瑤臺)와 다를 바가 없으니, 무슨 폐장(肺腸)인지 알 수 없으니, 그 큰 죄 열세 번째이며, 계주(薊州)의 분영(墳塋)에 버젓이 향전(享殿)을 세우고 수도(隧道)를 내어 놓았으니, 부근 주민이 화릉(和陵)이라는 칭호가 있으니, 그 큰 죄 열넷째이다. 집 안에 소장한 진보(珍寶) 가운데 진주 수관(手串)이 마침내 이백여 관이 있어, 대내(大內)에 견주어 몇 배에 이르고, 아울러 큰 구슬이 있어 어용(御用) 관정(冠頂)보다 더 크니, 그 큰 죄 열다섯째이다. 또 보석정(寶石頂)은 그가 마땅히 쓸 물건이 아닌데, 소장한 진짜 보석정이 수십여 개가 있고, 통째로 된 큰 보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내부(內府)에도 없는 것이 있으니, 그 큰 죄 열여섯째이다. 집 안의 은량(銀兩)과 의복 등 물건이 수가 천만을 넘으니, 그 큰 죄 열일곱째이다. 또한 겹벽(夾墻)에 금을 숨긴 것이 이만 육천여 냥, 사고(私庫)에 금을 숨긴 것이 육천여 냥, 땅굴 안에 아울러 묻어 쌓은 은이 이백여만이 있으니, 그 큰 죄 열여덟째이다. 부근 통주(通州)·계주(薊州) 지방에 모두 전당포와 전점(錢店)이 있으니, 조사하여 헤아리니 자본이 또 십여만에 못 미치지 않는다. 수보(首輔) 대신으로 아래로 작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었으니, 그 큰 죄 열아홉째이다. 그의 집 사람 유전(劉全)은 지나지 않는 천하고 비천한 가노(家奴)인데, 조사하여 몰수한 자산(貲産)이 마침내 이십여만에 이르고, 아울러 큰 구슬과 진주 수관이 있으니, 만약 방종하여 요구하고 가져가도록 시킨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처럼 풍요로울 수 있겠는가? 그 큰 죄 스무째이다. 그 나머지 탐욕스럽고 방종하며 미치고 망녕된 곳은 오히려 모두 헤아리기 어려우니, 실로 지난날부터 드물게 보고 드물게 들은 것이다. 호계당의 원첩(原折)을 재경(在京) 문무 삼품(三品) 이상 관원에게 발교(發交)하고, 아울러 한첨(翰詹)·과도(科道)가 열람하게 하며, 곧 마음을 다하여 타당하게 의논하여 갖추어 주(奏)하게 하라. 이 가운데 만약 스스로 보는 바를 펴는 자가 있으면 따로 첩(折)을 봉하여 진(陳)해도 괜찮고, 만약 의견이 모두 합하면 곧 연함(連銜)으로 갖추어 주하라. 복장안(福長安)의 조부·숙부·조카·형제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더욱 다른 사람이 견줄 바가 아니다. 그가 군기처에서 행주(行走)하며 화신과 아침저녁으로 모여 지냈으니, 무릇 화신이 탐욕하고 부정하며 사사로이 꾸민 온갖 불법의 죄조(罪款)를 가장 자세히 안다. 그가 황고의 중한 은혜를 입어 늘 홀로 아뢸 때가 있었으니, 만약 과연 화신의 방자(縱恣)하고 업신여기며 깃든 각 조(款)를 사실대로 곧장 진술하였다면, 다른 사람의 들어 탄핵함에 견주어 더욱 확실하고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황고께서 마음속으로 일찍이 화신을 중하게 다스려 죄를 바로잡으려 하셨는데, 예전에 눌친(訥親)의 안건을 처리하신 것처럼,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방종하셨겠는가? 어찌 오히려 그가 군국의 중무(重務)를 그르치게 내버려 두셔서 이에 이르렀겠는가? 설령 황고께서 연로하시어 감히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짐 앞에서 사실대로 곧장 진술하였어야 한다. 그런데 삼 년 동안 아울러 화신의 죄적(罪迹)을 주하여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붙들어 같이하고 따라 숨긴 정폐(情弊)가 분명하다. 만약 복장안이 일찍이 짐 앞에서 한 글자라도 말하였다면, 짐은 결단코 그를 아울러 혁직하고 잡아 심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집 자물(資物)을 조사하여 몰수하니, 비록 화신의 금은주보(金銀珠寶)가 수가 천만을 넘은 것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미 그의 집이 마땅히 가질 바가 아니다. 그 탐욕하고 부정하여 양심을 속임은 겨우 화신의 다음에 놓이니, 아울러 함께 죄를 의논하게 하라.

《清实录·仁宗睿皇帝实录》(《청실록·인종예황제실록》) 권37, 가경 4년(1799) 정월 갑술

○谕内阁:前据萨彬图奏:和珅财产甚多,断不止查出之数,必有埋藏寄顿、侵蚀挪移等项情獘。刑部查审时,司员等意存含混,应请密派大臣研讯追究等语。朕以其言不足取,当即详加开导,不可苛求。昨又据萨彬图具奏,向伊亲戚问出和珅家掌管金银内帐使女四名,请交伊一人至慎刑司提讯,所言更属乖谬。萨彬图系副都统,并非原派籍没和珅之员,乃忽思越俎,欲以一人独讯数女子,且开列使女之名,形之奏牍,达于朕前,实为从来未有之事。朕若即加駮饬,转恐不足以服其心。是以特派怡亲王永琅、尚书布彦达赉,同萨彬图提集使女等,再三究讯,仍无指实,果不出朕之所料。永琅、布彦达赉素称公正和平,萨彬图亦会同研鞫,更有何人为之徇隐?岂伊尚不凭信,必请朕廷讯使女乎?是萨彬图无知妄渎之罪,百喙难辞矣。朕所以办理和珅者,原因其蠹国病民,专擅狂悖,和珅一日不除,则纲纪一日不肃,是以即于正月初八日,将各珅革职拏问,宣示罪状,用申国宪。犹念其在皇考前扶掖奔走微劳,不忍肆诸市朝,节降谕旨甚明,天下臣民,自必咸知朕意。自办理此案后,军机王大臣及大臣中,如朱圭等,从未于朕前奏及和珅财产隐寄,乃萨彬图屡以为言,竟似利其私蓄者然。岂萨彬图视朕为好货之主,敢以此尝试乎?或伊心欲陷朕等。于唐之德宗,伊亦未必有此伎俩也。向来治罪之员,多有应行查抄者,况和珅获罪重大,焉有不行抄藉之理?自古有籍没之例,所以惩戒贪黩,初不计多寡而事株连。即和珅家仆刘全、呼什图等,亦因平日倚恃和珅声势,横肆不法,招摇受贿,不可不一并查抄治罪。在朕方以办理此案,为日已久,已觉过当,是以谕令速结,不为已甚。而无识之徒,鳃鳃计较和珅财产,不惟不知政体,实太不知仰体朕之本意矣。朕在藩邸时,则一切财用,犹有人己之别。今以天下为家,岂仅以藏诸府库者视为己有?此项查抄资物,纵有隐寄,自朕观之,亦不过在天之下、地之上耳,何必辗转根求,近于搜括间架陌钱等事耶?萨彬图又以内务府、步军统领官员均意存袒护,并疑及刑部,亦不肯认真究问,则承审各衙门举不足信乎?又萨彬图折内有和珅窖埋金银,大概不离住宅之语,和珅之宅,已赏给庆郡王永璘居住,和珅之园已赏给成亲王永瑆居住,若将所指管帐使女严切刑求,必致畏刑妄供:某物埋藏某处,以庆郡王府第、成亲王寓园,令番役多人遍行掘视,断无此事,岂有令成亲王、庆郡王自行刨挖之理?现在朕赐公主物件甚多,累日携运不尽,焉肯转向公主、额驸追问寄顿?况连日阅查抄物件,即随时颁赐者,亦复不少耶?萨彬图原以阁学兼副都统,因其未娴清语,恐以读本错误,护咎,故开阁学之缺,令其专管旗务,得资廉俸养瞻。前盛京兵部侍郎出缺时,朕本欲将萨彬图补授,复念其家计艰难,恐与伊父达椿分居两地,日用或致不给,故令铁保前往。又达椿于本年超升阁学,并授蒙古副都统,旋调满洲旗分,且将伊缘事监禁之女乌苏氏释放。是朕之体恤萨彬图父子,加恩不啻再三。萨彬图不知感戴,辄以此等谬妄之言渎听,竟以欲藉追究和珅财产为图报之地,实为卑鄙不堪聚敛之臣。朕断不用。前严饬给事中明绳开矿一事,旨内详言及此,萨彬图宁不知之耶?又萨彬图曾奏请派京兵五千名,交伊一人带往勦贼,今又奏请独审此事。萨彬图才具平庸,有何阅历,而于出师谳狱之事,自任不疑若此,其谬妄冒渎之咎,实难宽贷。萨彬图著交部严加议处,先将副都统开缺另简。至所奏伊戚告知管帐使女之语,乃刑部员外郎哈丰阿所言。哈丰阿系刑部司员,既有所闻,何不禀知堂官,乃私向亲戚议论,实属意存取巧。哈丰阿亦著交部严加议处,即行开缺。嗣后大小臣工,不得再以和珅资产妄行渎奏。将此通谕知之。

○내각에 이르기를: 이전에 살빈도(薩彬圖)가 주하기를 「화신의 재산이 심히 많아 결코 조사해 낸 수에 그치지 않으니, 반드시 매장하고 기탁하며 침식하고 옮긴 등의 정폐(情弊)가 있을 것입니다. 형부(刑部)가 조사하여 심리할 때 사원(司員) 등이 뜻에 애매함을 품었으니, 마땅히 은밀히 대신을 파견하여 캐어 심문하고 추궁할 것을 청합니다」 등이라 하였다. 짐은 그 말이 취할 만하지 않다고 여겨, 마땅히 곧 자세히 타이르고 인도하여 지나치게 구하지 않게 하였다. 어제 또 살빈도가 갖추어 주하기를, 그의 친척에게 물어 화신의 집에서 금은 내장(內帳)을 관장한 사녀(使女) 네 명을 알아내었으니, 그 한 사람에게 넘겨 신형사(愼刑司)로 데려가 심문하게 할 것을 청한다 하였으니, 말한 바가 더욱 괴벽(乖謬)에 속한다. 살빈도는 부도통(副都統)으로, 본래 화신을 적몰(籍沒)하도록 파견된 원원(原員)이 아닌데, 오히려 홀연히 월조(越俎)할 생각을 하여 한 사람으로 홀로 몇몇 여자를 심문하려 하고, 또한 사녀의 이름을 나열하여 주독(奏牘)에 나타내어 짐 앞에 이르게 하였으니, 실로 지난날부터 없던 일이다. 짐이 만약 곧 박책(駮飭)을 가하면 도리어 그의 마음을 복종시키기에 족하지 않을까 두렵다. 이에 특별히 이친왕 영랑(怡親王 永琅)·상서 포언달뢰(尙書 布彥達賚)를 파견하여, 살빈도와 함께 사녀 등을 불러 모아 거듭 캐어 심문하였으나 오히려 가리켜 실증할 것이 없었으니, 과연 짐이 헤아린 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영랑·포언달뢰는 평소 공정하고 화평하다고 칭해지는데, 살빈도 또한 함께 모여 캐어 심문하였으니, 더구나 어떤 사람이 이를 위해 따라 숨기겠는가? 어찌 그가 오히려 믿지 않아, 반드시 짐에게 조정에서 사녀를 심문할 것을 청하겠는가? 이는 살빈도의 무지하고 망령되이 더럽힌 죄이니, 백 개의 입으로도 사양하기 어렵다. 짐이 화신을 처리한 까닭은 본래 그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며 전횡하고 미쳐 거슬렀기 때문이니, 화신이 하루라도 제거되지 않으면 강기(綱紀)가 하루도 숙연해지지 않으므로, 이에 곧 정월 초팔일에 화신을 혁직하고 잡아 심문하여, 죄상을 선포하고 이로써 국헌(國憲)을 편 것이다. 오히려 그가 황고 앞에서 부축하며 분주히 뛴 작은 공로를 생각하여, 차마 시조(市朝)에 벌어 놓지 못하여, 마디마디 내린 어지가 심히 밝으니, 천하의 신민(臣民)은 스스로 반드시 모두 짐의 뜻을 알 것이다. 이 안건을 처리한 뒤로 군기(軍機) 왕대신(王大臣) 및 대신 가운데 주규(朱圭) 등은 지금까지 짐 앞에서 화신의 재산을 숨기고 기탁한 것을 주하여 미친 적이 없는데, 오히려 살빈도가 거듭 이를 말로 삼아 마침내 그 사축(私蓄)을 이롭게 하는 듯하다. 어찌 살빈도가 짐을 재물을 좋아하는 임금으로 보아 감히 이로써 시험해 보겠는가? 혹은 그의 마음이 짐을 함정에 빠뜨려 당(唐)나라 덕종(德宗)과 같게 하려는 것일까? 그에게도 반드시 이런 재간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날부터 죄를 다스린 관원은 대부분 마땅히 조사하여 몰수할 바가 있었는데, 하물며 화신이 얻은 죄가 중대하니, 어찌 조사하여 몰수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옛적부터 적몰(籍沒)의 규례가 있었으니, 탐욕하고 부정한 것을 징계하고 경계하기 위함이요, 처음부터 다과(多寡)를 헤아리지 않고 연좌(株連)를 일삼은 것이 아니다. 곧 화신의 가복(家僕) 유전(劉全)·호십도(呼什圖) 등도 또한 평소 화신의 성세(聲勢)를 믿고 의지하여 함부로 불법을 베풀고, 요란하게 뇌물을 받았으니, 함께 조사하여 몰수하고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짐이야말로 바로 이 안건을 처리함이 날이 이미 오래되어 이미 지나침을 느꼈으므로, 이에 유지하여 속히 결(結)하게 하여 지나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식견 없는 무리가 두려워하며 화신의 재산을 따지니, 오직 정체(政體)를 모를 뿐 아니라 실로 지나치게 짐의 본뜻을 우러러 헤아릴 줄 모른다. 짐이 번저(藩邸)에 있을 때는 곧 일체의 재용(財用)에 오히려 남과 나의 구별이 있었다. 지금 천하를 집으로 삼았으니, 어찌 겨우 부고(府庫)에 감춘 것을 자기 소유로 보겠는가? 이 조(項) 조사하여 몰수한 자물(資物)은 비록 숨기고 기탁한 것이 있더라도, 짐이 보기에 또한 지나지 않아 하늘 아래 땅 위에 있을 따름이니, 어찌 반드시 뒤지고 캐어 뿌리를 구하여, 간가세(間架稅)·막전(陌錢) 같은 것을 뒤져 거두는 일에 가깝게 하겠는가? 살빈도는 또 내무부(內務府)·보군통령(步軍統領) 관원이 모두 뜻에 편들어 보호함이 있다 하고, 아울러 형부(刑部)까지 의심하여 역시 참으로 캐어 묻지 않는다 하니, 그러면 심리를 맡은 각 아문(衙門)이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또 살빈도의 첩(折) 안에 「화신이 땅굴에 금은을 묻은 것이 대개 주택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화신의 집은 이미 경군왕 영린에게 하사하여 살게 하였고, 화신의 정원은 이미 성친왕 영성에게 하사하여 살게 하였으니, 만약 가리킨 바 장부를 관리한 사녀를 엄하고 급하게 형구(刑求)하면 반드시 형벌을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공하여 「어떤 물건을 어디에 매장하였다」고 할 것이니, 경군왕의 부저와 성친왕의 우원(寓園)에 번역(番役)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두루 파서 살피게 한다는 것은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어찌 성친왕·경군왕으로 하여금 스스로 파서 캐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지금 짐이 공주(公主)에게 하사한 물건이 심히 많아 여러 날 가져다 옮겨도 다하지 못하는데, 어찌 도리어 공주·액부(額駙)를 향해 기탁한 것을 캐묻겠는가? 하물며 연일 조사하여 몰수한 물건을 열람하고 곧 수시로 내리어 하사한 자도 또한 적지 않은데? 살빈도는 본래 각학(閣學)으로 부도통(副都統)을 겸하였는데, 그가 청어(淸語)에 익숙하지 않아 독본(讀本)의 착오로 허물을 감싸게 될까 두려워하므로, 이에 각학의 결원을 열어 그로 하여금 기무(旗務)를 전담하게 하여 염봉(廉俸)을 얻어 부양하게 하였다. 이전에 성경(盛京) 병부시랑(兵部侍郞)이 결원이 났을 때 짐이 본래 살빈도를 보수(補授)하려 하였으나, 다시 그의 가계(家計)가 곤란함을 생각하여 그의 아비 달춘(達椿)과 두 곳에 나뉘어 살아 일용(日用)이 혹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이에 철보(鐵保)로 하여금 가게 하였다. 또 달춘이 본년에 각학으로 초승(超升)하고 아울러 몽골 부도통에 수여되었으며, 곧 만주(滿洲) 기분(旗分)으로 전임되었고, 또한 그의 일에 연루되어 감금된 딸 오소씨(烏蘇氏)를 석방하였다. 이는 짐이 살빈도 부자를 체휼(體恤)하여 은혜를 더함이 거듭거듭 그치지 않은 것이다. 살빈도가 감사하여 받들 줄 모르고 곧 이런 그릇되고 망령된 말로 듣는 것을 더럽히며, 마침내 화신의 재산을 추궁하는 것을 빌어 보답할 바탕으로 삼으려 하니, 실로 비열하여 견딜 수 없는 취렴(聚斂)의 신하이다. 짐은 결단코 쓰지 않는다. 이전에 급사중(給事中) 명승(明繩)이 광산을 여는 한 건을 엄하게 책하였는데, 칙지 안에 이를 자세히 말하였으니, 살빈도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또 살빈도가 일찍이 주하여 경병(京兵) 오천 명을 파견하여 그 한 사람에게 넘겨 데려가 도적을 토벌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지금 또 주하여 홀로 이 일을 심리할 것을 청한다. 살빈도의 재구(才具)가 평범하고 용서할 만한데 무슨 경력이 있어, 군대를 내고 옥(獄)을 판결하는 일에 스스로 맡아 의심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그 그릇되고 망령되며 함부로 더럽힌 허물은 실로 너그럽게 용서하기 어렵다. 살빈도는 부(部)에 넘겨 엄하게 의처(議處)하게 하고, 먼저 부도통의 결원을 열어 따로 가려 뽑으라. 주한 바 그의 친척이 장부를 관리한 사녀를 알려 주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곧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합풍아(哈豐阿)가 말한 것이다. 합풍아는 형부 사원(司員)으로 이미 들은 바가 있으면 어찌 당관(堂官)에게 고하여 알리지 않고, 오히려 사사로이 친척에게 의론하였으니, 실로 뜻에 교묘함을 취하려 함이 있음에 속한다. 합풍아도 또한 부에 넘겨 엄하게 의처하게 하고, 곧 결원을 열어라. 이후로 대소(大小) 신공(臣工)은 다시 화신의 자산(資産)으로 망령되이 더럽혀 주하지 못한다. 이를 두루 알려 알게 하라.

《清实录·仁宗睿皇帝实录》(《청실록·인종예황제실록》) 권43, 가경 4년(1799) 사월 계축

○庚午,谕内阁:本日据阿克当阿代庆郡王绵愍转奏,伊府中有毗卢帽门口四座,太平缸五十四件,铜路灯三十六对,皆非臣下应用之物,现在分别改造呈缴。国家设立制度,辨别等威,一名一器,不容稍有僭越。庆亲王永璘府第,本为和珅旧宅,此等违制之物,皆系当日和珅私置,及永璘接住以后,不知奏明更改,相沿至二十年之久。设当永璘在日查出,亦有应得之咎。今伊子绵愍甫经袭爵,即知据实呈报,所办甚是。所有毗卢帽门口,该府业已自行拆改,其交出之太平缸、铜路灯,著内务府大臣另行择地安设,并通谕亲王、郡王、贝勒、贝子及各大臣等:会典内王公百官一应府第器具,俱有定则,以昭限制。如和珅之骄盈僭妄,必至身罹重罚,后嗣陵夷。各王公大臣等均当引以为戒。凡邸第服物,务恪遵定宪,敬慎自持,宁失之不及,不可稍有僭逾,庶几久膺爵禄,永保令名也。

○경오일, 내각에 이르기를: 본일 아극당아(阿克當阿)가 경군왕 면민(慶郡王 綿愍)을 대신하여 돌려 주하기를, 그의 부 안에 비로모문(毗盧帽門) 네 기, 태평강(太平缸) 쉰네 개, 동로등(銅路燈) 서른여섯 쌍이 있는데 모두 신하가 마땅히 쓸 물건이 아니므로, 지금 나누어 개조하여 바쳐 올린다 하였다. 국가가 제도를 세운 것은 등위(等威)를 변별하기 위함이니, 한 명칭 한 그릇도 조금이라도 참월(僭越)을 용납하지 않는다. 경친왕 영린의 부저는 본래 화신의 옛 집으로, 이런 제도를 어긴 물건은 모두 그날에 화신이 사사로이 마련한 것인데, 영린이 이어 산 뒤로 주명(奏明)하여 고칠 줄을 알지 못하고 서로 이어 이십 년의 오램에 이르렀다. 만약 영린이 살아 있을 때 조사해 냈더라면 또한 마땅히 얻을 허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아들 면민이 막 작위를 이어 곧 사실대로 바쳐 보고할 줄을 알았으니, 처리한 바가 심히 옳다. 모든 비로모문은 그 부에서 이미 스스로 헐어 고쳤고, 그 바쳐 낸 태평강·동로등은 내무부 대신으로 하여금 따로 땅을 가려 안설(安設)하게 하고, 아울러 친왕·군왕·패륵(貝勒)·패자(貝子) 및 각 대신 등에게 두루 알린다: 회전(會典) 안에 왕공과 백관의 일응(一應) 부저와 기구는 모두 정해진 규칙이 있어 한제(限制)를 밝힌다. 화신처럼 교만하고 가득 차서 참망(僭妄)하면 반드시 몸이 중한 벌에 걸리고 후사(後嗣)가 기울어 무너진다. 각 왕공 대신 등은 마땅히 이를 인용하여 경계로 삼아야 한다. 무릇 저택과 복물(服物)은 반드시 공손히 정해진 법을 따르고, 공경하고 삼가며 스스로 지켜, 차라리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조금이라도 참월할 수 없으니, 그러면 오래 작록(爵祿)을 입고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을 보전할 것이다.

《清实录·仁宗睿皇帝实录》(《청실록·인종예황제실록》) 권370, 가경 25년(1820) 오월 경오

○乙丑,上奉慈禧端佑康颐昭豫庄诚寿恭钦献崇熙皇太后幸恭亲王府视疾。

○을축일, 황상(皇上)께서 자희단우강이소여장성수공흠헌숭희태후(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皇太后)를 받들어 공친왕부에 거둥(幸)하여 병을 문안하셨다.

○丁卯,上奉慈禧端佑康颐昭豫庄诚寿恭钦献崇熙皇太后幸恭亲王府视疾。

○정묘일, 황상께서 자희단우강이소여장성수공흠헌숭희태후를 받들어 공친왕부에 거둥하여 병을 문안하셨다.

《清实录·德宗景皇帝实录》(《청실록·덕종경황제실록》) 권417, 광서 24년(1898) 윤삼월 을축·정묘

『청사고(淸史稿)』

庆僖亲王永璘,高宗第十七子。乾隆五十四年封贝勒。嘉庆四年正月,仁宗亲政,封惠郡王,寻改封庆郡王。三月,和珅诛,没其宅赐永璘。

경희친왕(慶僖親王) 영린(永璘)은 고종(高宗)의 열일곱째 아들이다. 건륭 54년에 패륵(貝勒)에 봉해졌다. 가경 4년 정월에 인종(仁宗)이 친정(親政)하여 혜군왕(惠郡王)에 봉하고, 곧 경군왕(慶郡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삼월에 화신이 주살되자, 그의 집을 몰수하여 영린에게 하사하였다.

《清史稿》(《청사고》) 열전 8(제왕 7) 「경희친왕영린전」, 중화민국 조이신 등 찬

子绵愍袭郡王。绵愍奏府中有毗卢帽门山四座,太平缸五十四件,铜路镫三十六对。上谕曰:庆亲王府第本为和珅旧宅,凡此违制之物,皆和珅私置。嗣后王贝勒、贝子当依会典服物,宁失之不及,不可僭逾,庶几永保令名。府置谙达二,亦命裁汰。

아들 면민(綿愍)이 군왕을 이었다. 면민이 주하기를 부 안에 비로모문(毗盧帽門) 네 기, 태평강(太平缸) 쉰네 개, 동로등(銅路鐙) 서른여섯 쌍이 있다 하였다. 황상께서 유지하여 이르시기를 「경친왕의 부저는 본래 화신의 옛 집으로, 무릇 이런 제도를 어긴 물건은 모두 화신이 사사로이 마련한 것이다. 이후로 왕·패륵·패자는 마땅히 회전(會典)의 복물(服物)에 의거하여, 차라리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참월할 수 없으니, 그러면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을 보전할 것이다」 하셨다. 부에 둔 담달(諳達) 둘도 또한 명하여 재도(裁汰)하게 하였다.

《清史稿》(《청사고》) 열전 8(제왕 7) 「경희친왕영린전」, 중화민국 조이신 등 찬

道光三年正月,赐绵愍三眼孔雀翎管雍和宫中正殿。十六年十月薨,赐银四千治丧,谥曰良。上命再袭郡王一次。以仪顺郡王绵志子奕彩为后,袭郡王。十七年正月,命在御前行走。二十二年十月,奕彩以服中纳妾,下宗人府议处。奕彩行赇请免。永璘第六子辅国公绵性亦行赇,觊袭王爵。事发,奕彩夺爵,绵性戍盛京,以永璘第五子不入八分镇国公绵悌奉永璘祀。旋又坐事,降镇国将军。二十九年卒,以绵性子奕劻为后。三十年,袭辅国将军。

도광 3년 정월에 면민에게 삼안공작령(三眼孔雀翎)을 하사하고 옹화궁(雍和宮) 중정전(中正殿)을 관장하게 하였다. 16년 시월에 훙(薨)하니, 은 사천 냥을 하사하여 상(喪)을 치르게 하고 시호를 량(良)이라 하였다. 황상께서 명하여 다시 군왕을 한 번 잇게 하셨다. 의순군왕(儀順郡王) 면지(綿志)의 아들 혁채(奕綵)를 후사(後嗣)로 삼아 군왕을 이었다. 17년 정월에 명하여 어전(御前)에서 행주(行走)하게 하였다. 22년 시월에 혁채가 상중(服中)에 첩을 들인 일로 종인부(宗人府)에 내려 의처(議處)하게 하였다. 혁채가 뇌물을 주어 면하기를 청하였다. 영린의 여섯째 아들 보국공(輔國公) 면성(綿性)도 또한 뇌물을 주어 왕작(王爵)을 잇기를 넘보았다. 일이 드러나자 혁채는 작위를 빼앗기고, 면성은 성경(盛京)에 귀양 보내졌으며, 영린의 다섯째 아들 불입팔분진국공(不入八分鎭國公) 면제(綿悌)로 하여금 영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곧 또 일에 연좌되어 진국장군(鎭國將軍)으로 강등되었다. 29년에 졸(卒)하니, 면성의 아들 혁광(奕劻)을 후사로 삼았다. 30년에 보국장군(輔國將軍)을 이었다.

《清史稿》(《청사고》) 열전 8(제왕 7) 「경희친왕영린전」, 중화민국 조이신 등 찬

『효정속록(嘯亭續錄)』

庆亲王府在三转桥,系和珅宅。

경친왕부는 삼전교(三轉橋)에 있는데, 화신의 집이다.

《啸亭续录》(《효정속록》) 권2 「경사왕공부제」, 청 소련 찬

『경사방항지고(京師坊巷志稿)』

啸亭续录:庆亲王府在三转桥,系和珅宅又云:庆僖亲王讳永璘,纯庙十七子,乾隆末年,或有。私议储位者,王曰:天下至重,何敢妄觊?惟冀他日将和珅邸第赐居,则愿足矣。故睿庙籍没和珅,即将其宅赐王以酬。昔言谨案:庆王府今为恭亲王府。王为宣宗六子,同治初任议政,后复任军机大臣。

『효정속록(嘯亭續錄)』에 「경친왕부는 삼전교(三轉橋)에 있는데 화신의 집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경희친왕의 휘(諱)는 영린(永璘)이요 순묘(純廟)의 열일곱째 아들인데, 건륭 말년에 혹 사사로이 제위(儲位)를 의논하는 자가 있자, 왕이 말하기를 『천하는 지극히 중하니 어찌 감히 망령되이 넘보겠는가? 다만 바라건대 훗날 화신의 저택을 하사하여 살게 한다면 소원이 족하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예묘(睿廟)가 화신을 적몰(籍沒)할 때 곧 그 집을 왕에게 하사하여 갚은 것이다」 하였다. 옛 기록에 삼가 안(案)하건대: 경왕부(慶王府)는 지금 공친왕부이다. 왕은 선종(宣宗)의 여섯째 아들로, 동치 초에 의정(議政)을 맡았고, 뒤에 다시 군기대신(軍機大臣)을 맡았다.

《京师坊巷志稿》(《경사방항지고》) 권상 「내성북성·삼좌교」, 청 주일신 찬, 무전손 보, 광서 23년 의오보진당 각본

梁章钜归田琐记:和珅籍没后,分其第半为和孝公主府,半为庆亲王府。公主盖和之子丰伸、殷德所尙者也。嘉庆二十五年,庆亲王薨,管府事阿克当阿代嗣郡王,呈出昆庐帽门口四座,太平缸五十有四,铜路灯三十六对,皆亲王所不应有之。物,而和珅有之。铜路灯,较大内所陈尤为精致。今分设景运隆宗两门外。

양장거(梁章鉅)의 『귀전쇄기(歸田瑣記)』에 「화신이 적몰된 뒤 그의 저택을 나누어 절반은 화효공주부(和孝公主府)로 삼고 절반은 경친왕부로 삼았다. 공주는 대개 화신의 아들 풍신·은덕(丰伸·殷德)이 부마로 맞이한(尙) 분이다. 가경 25년에 경친왕이 훙(薨)하매, 부의 일을 관리하는 아극당아(阿克當阿)가 계승한 군왕을 대신하여 곤려모문(昆盧帽門) 네 기, 태평강 쉰네 개, 동로등 서른여섯 쌍을 바쳐 내었으니, 모두 친왕이 마땅히 가져서는 안 될 물건인데 화신이 가지고 있었다. 동로등은 대내에 진열한 것보다 더욱 정교하다. 지금 경운(景運)·융종(隆宗) 두 문 밖에 나누어 설치하였다」 하였다.

《京师坊巷志稿》(《경사방항지고》) 권상 「내성북성·삼좌교」에 인용된 《귀전쇄기》, 청 주일신 찬, 무전손 보

『천지우문(天咫偶聞)』

恭忠亲王邸在银定桥,旧为和珅第,从李公桥引水环之,故其邸西墙外小溪清驶,水声霅然。其邸中山池,亦引溪水,都城诸邸,惟此独矣。珅败,以赐庆亲王。相传乾隆之末,诸王相聚,语及和珅,争欲致之法,王独无言。仁宗及诸王诘之,王曰:我自顾无此大志,但欲异日分封时,得居其第足矣。一笑而罢。珅败,上竟如其言。恭邸分府,乃复得之。邸北有鉴园,则恭邸所自筑。宋牧仲有过银定桥旧居诗,或即此第乎?

공충친왕(恭忠親王)의 저택은 은정교(銀定橋)에 있는데, 옛날 화신의 저택으로, 이공교(李公橋)에서 물을 끌어와 이를 둘러싸게 하였으므로, 그 저택의 서쪽 담장 밖에 작은 시내가 맑게 흘러 물소리가 살랑살랑 난다. 그 저택 안의 산지(山池)도 또한 시냇물을 끌어들였으니, 도성(都城)의 여러 저택 가운데 오직 이것뿐이다. 화신이 패한 뒤 이를 경친왕에게 하사하였다. 전해오기를 건륭 말년에 여러 왕이 함께 모여 화신을 이야기하며 다투어 그를 법에 부치려 하였는데, 왕만 홀로 말이 없었다. 인종(仁宗)과 여러 왕이 그를 캐묻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스스로 돌아보아 이런 큰 뜻이 없고, 다만 다른 날 분봉될 때 그의 저택을 얻어 살면 족할 뿐이다」 하니, 한 번 웃고 그쳤다. 화신이 패하매 황상께서 마침내 그의 말대로 하셨다. 공저(恭邸)가 부(府)를 나눌 때에야 비로소 다시 이를 얻었다. 저택 북쪽에 감원(鑑園)이 있는데, 곧 공저가 스스로 쌓은 것이다. 송목중(宋牧仲)에게 은정교 옛 거처를 지나며 지은 시가 있으니, 혹시 곧 이 저택인가?

《天咫偶闻》(《천지우문》) 권4 「북성」, 청 진균 찬

『죽엽정잡기(竹葉亭雜記)』

和珅查抄议罪后,分其第半为和孝公主府,半为庆亲王府。及嘉庆二十五年,庆亲王薨,五月十五日,管府事阿克当阿、代郡王愍绵呈出毗卢帽门口四座,太平缸五十有四,铜路镫三十六对,皆和家故物也。此顶亲王尚不应有,而和乃有之,庆亲王未及奏者。且二十年,缸较大,内稍小,镫则较内为精致,因分设于紫禁。今景运、隆宗两门外,凡所陈设铁缸及白石座、细铜丝罩之路镫,皆其物也。

화신을 조사하여 몰수하고 죄를 의논한 뒤, 그의 저택을 나누어 절반은 화효공주부로 삼고 절반은 경친왕부로 삼았다. 가경 25년에 이르러 경친왕이 훙(薨)하매, 오월 보름에 부의 일을 관리하는 아극당아(阿克當阿)가 군왕 면민(愍綿)을 대신하여 비로모문(毗盧帽門) 네 기, 태평강 쉰네 개, 동로등(銅路鐙) 서른여섯 쌍을 바쳐 내었으니, 모두 화씨 집안의 옛 물건이다. 이것은 친왕이라도 오히려 마땅히 가져서는 안 될 것인데 화신이 오히려 가졌던 것이요, 경친왕이 미처 주(奏)하지 못하고 또 이십 년이었다. 강(缸)은 대내의 것보다 크고 조금 작으며, 등(鐙)은 대내의 것보다 정교하므로, 이에 자금(紫禁)에 나누어 설치하였다. 지금 경운(景運)·융종(隆宗) 두 문 밖에, 무릇 진열한 철강(鐵缸)과 백석(白石) 받침, 가는 동실(銅絲) 덮개의 로등(路鐙)은 모두 그 물건이다.

《竹叶亭杂记》(《죽엽정잡기》) 권2, 청 요원지 찬

『예풍당잡초(藝風堂雜鈔)』

一问和珅,现在查钞你家产,所盖楠木房屋,僭侈逾制,并有多心。

한 가지 화신에게 묻는다. 지금 네 가산을 조사하여 몰수하니, 지은 남목 가옥이 참람하게 사치하여 제도를 넘었고, 아울러 다른 마음이 있다.

奴才城内原不该有楠木房子,多宝阁及福段式样,是奴才打发太监胡什同到宁寿宫看的式样仿照盖造的。至楠木都是奴才自己买的,玻璃柱子内陈设都是有的,总是奴才糊涂该死。

노재(奴才)는 성 안에 본래 남목 집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다보각(多寶閣)과 복단(福段)의 양식은 노재가 태감 호십동(胡什同)을 보내 영수궁에 가서 양식을 보고 모방하여 지은 것입니다. 남목은 모두 노재가 스스로 사들인 것이고, 유리 기둥 안의 진열은 모두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노재가 미련하여 죽을죄입니다.

《艺风堂杂钞》(《예풍당잡초》) 권3 「화치재상국사집」에 수록된 화신 공사, 청 무전손 편

『문정공유집(文靖公遺集)』

山色远悠然,心遐地自偏。有情欣竹拜,无用爱匏悬。园杏红披锦,阶苔翠晕钱。衢歌闲击壤,浩荡帝尧天。

산빛은 멀리 유유하고, 마음이 멀어지니 땅도 스스로 외떨어지네. 다정하여 대에 절함(拜竹)을 기뻐하고, 쓸모없음에 박 매달림(匏懸)을 사랑하네. 정원의 살구꽃 붉음이 비단을 두른 듯하고, 섬돌의 이끼 푸름이 엽전을 번지게 하네. 네거리 노래에 한가히 흙덩이를 치고(擊壤), 드넓은 요임금(帝堯)의 하늘이네.

《文靖公遗集》(《문정공유집》) 권8 「경차감원주인지증원운」, 청 보윤 찬

中秋前三日,赴鉴园主人雅约,欢然畅叙。

중추(中秋) 사흘 전, 감원(鑑園) 주인의 아약(雅約)에 나아가 기쁘게 마음껏 서로 나누다.

时在坐者为李兰荪协揆荣仲华司空绍葛民都护崇受之少空。率成一律,聊志欣感。

그때 자리에 앉은 이는 이란손(李蘭蓀) 협규(協揆)·영중화(榮仲華) 사공(司空)·소갈민(紹葛民) 도호(都護)·숭수지(崇受之) 소공(少空)이다. 솜씨 없이 한 율(律)을 이루어 잠시 기뻐하고 감격한 바를 기록한다.

掀髯一笑广寒游,十二红栏百尺楼。天上桂花香雪海,云边枫叶锦屏秋。放怀飒爽风生袖,顾影萧骚霜满头。共祝团豳好朋月,年年诗酒列仙俦。

수염을 들어 올리며 한 번 웃으니 광한궁(廣寒宮) 노님, 열두 붉은 난간에 백 척 누각이네. 하늘 위 계수꽃 향기가 눈 바다를 이루고, 구름 가 단풍잎이 비단 병풍의 가을이네. 회포를 풀어 씩씩하게 소매에 바람이 일고, 그림자를 돌아보니 쓸쓸하게 서리가 머리에 가득하네. 함께 비는커니 단란한 좋은 벗의 달이어, 해마다 시와 술로 열선(列仙)의 무리에 나란히 하리.

《文靖公遗集》(《문정공유집》) 권12 「중추전삼일부감원주인아약환연창서」 시 및 자서, 청 보윤 찬

怡神所小饮观剧,敬和鉴园主人原韵。

이신소(怡神所)에서 조금 마시며 연극을 보고, 감원 주인의 원운(原韻)을 공경히 화(和)하다.

不知今夕是何年,锦瑟峥嵘五十弦。箫倚凤凰歌并妙。觞飞鹦鹉酒争传。蕊珠宫峻尊诗圣,群玉峰高悦众仙。我亦蟠桃花底客,岁星学步大罗天。

오늘 밤이 무슨 해인지 알지 못하겠네, 아름다운 금슬(錦瑟)이 높이 울려 쉰 줄이네. 피리는 봉황에 기대어 노래와 함께 묘하고, 잔은 앵무에 날아 술이 다투어 전해지네. 예주궁(蕊珠宮)이 높아 시성(詩聖)을 존경하고, 군옥봉(群玉峰)이 높아 뭇 신선이 기뻐하네. 나 또한 반도화(蟠桃花) 아래의 손님, 세성(歲星)이 걸음마를 배워 대라천(大羅天)이네.

再叠怡神所招饮观剧元韵。

다시 이신소에서 불러 마시며 연극 본 원운(元韻)을 겹치다.

喜值羲皇熙皞年,雅宜急管趁繁弦。春生竹叶金杯漾,夜永莲花玉漏传。素履安閒真古佛,红尘游戏即飞仙。怡神得所宫庭法,远胜三唐白乐天。

기쁘게 희황(羲皇)의 태평한 해를 만났으니, 아름답고 마땅히 빠른 관(管)이 성긴 현(弦)을 따르네. 봄이 죽엽(竹葉)에 생겨 금잔에 일렁이고, 밤이 길어 연꽃(蓮花)이 옥루(玉漏)에 전해지네. 담백한 삶(素履)이 편안하여 참으로 옛 부처요, 붉은 티끌 세상의 유희가 곧 날아오른 신선이네. 마음을 편안히 하여 바른 곳을 얻음은 궁정(宮庭)의 법, 멀리 삼당(三唐)의 백낙천(白樂天)을 뛰어넘네.

《文靖公遗集》(《문정공유집》) 권12 「이신소소음관극경화감원주인원운」 「재첩이신소초음관극원운」 두 수, 청 보윤 찬

『췌금음(萃錦吟)』

庆宜堂避暑偶作。

경의당(慶宜堂)에서 더위를 피하며 우연히 짓다.

积善欣余庆,安闲更得宜。留欢殊自惬,出语总成诗。竹翠烟深锁,荷喧雨到时。乐天庶知命,此外复何为。

선을 쌓으니 남은 경사(餘慶)가 기쁘고, 편안하고 한가하니 더욱 알맞네. 즐거움을 머무르게 하니 심히 스스로 만족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시를 이루네. 대나무 푸름은 안개가 깊이 잠그고, 연꽃이 시끄러우니 비가 올 때이네. 낙천(樂天)이 거의 명(命)을 알았으니, 이 밖에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邸第西斋,颜曰庆宜堂。传闻系庆邸居时旧额。

저택 서쪽 재(齋)의 편액을 경의당(慶宜堂)이라 하였다. 전해오기를 경저(慶邸)가 살 때의 옛 편액이라 한다.

堂内敬悬道光闲成庙御书,赐额曰:乐寿安身。

당 안에는 도광 한성묘(道光 閑成廟)의 어서(御書)를 공경히 걸었는데, 하사한 편액은 「악수안신(樂壽安身)」이라 하였다.

《萃锦吟》(《췌금음》) 권5 「경의당피서우작」 시 및 자주, 청 혁흔 찬; 원서의 소자(小字) 자주는 시 뒤에 따로 열거함

佩蘅相国、醖卿大司农今岁皆八旬正寿,因于邸中朗润园置酒为贺。翌日相国寄赠一律,即次元韵奉和。

패형(佩蘅) 상국(相國)과 온경(醖卿) 대사농(大司農)이 올해 모두 여든의 정수(正壽)이므로, 이에 저택 안 낭윤원(朗潤園)에 술을 베풀어 축하하였다. 이튿날 상국이 한 율(律)을 부쳐 주셨으므로 곧 원운(元韻)을 차례로 받들어 화(和)한다.

怡神在灵府,高卧偃羲皇。皓彩中宵合,金釭凝夜光。盐梅已佐鼎,绮席遰华觞。寿爵传三礼,明星映碧堂。

마음을 편안히 함은 영부(靈府)에 있고, 높이 누우니 희황(羲皇)의 세상이네. 밝은 빛이 한밤중에 합하고, 금등(金釭)이 밤빛을 응고시키네. 소금과 매실(鹽梅)이 이미 솥(鼎)을 도왔고, 아름다운 자리에 화려한 잔이 전해지네. 장수의 잔이 세 번 예(禮)를 전하니, 밝은 별이 푸른 당에 비치네.

园内设席处,敬悬仁庙御书匾额,曰怡神所。

정원 안에 자리를 베푼 곳에는 인묘(仁廟)의 어서 편액을 공경히 걸었으니, 「이신소(怡神所)」라 하였다.

遰,一作递。

체(遰)는 한 판본에서는 체(遞)로 되어 있다.

《萃锦吟》(《췌금음》) 권3 「패형상국온경대사농금세개팔순정수」 시서·시 및 자주, 청 혁흔 찬; 소자 자주는 시 뒤에 따로 열거함

朗润观荷,并志。

낭윤(朗潤)에서 연꽃을 보고, 아울러 기록한다.

海淀园寓为咸丰辛亥显庙赐居,锡名朗润,当即镌额恭悬,并自撰记,以志殊恩。已刊入乐道堂文钞,兹不复赘。嗣于同治年间,邸园落成,敬将御书墨宝装裱悬挂,故亦名曰朗润。年来淀园多故,未能尝往盘桓,遂至半就荒芜。今岁命园丁稍为修葺,补种芰荷数亩,虽未能尽复旧观,聊可小住居停,藉消长夏。抚今忆昔,不能无感慨之意云:

해전(海淀)의 원우(園寓)는 함풍 신해(辛亥)년에 현묘(顯廟)가 하사하여 살게 한 곳으로, 이름을 낭윤(朗潤)이라 내리셨으므로, 마땅히 곧 편액을 새겨 공경히 걸고, 또 스스로 기(記)를 지어 특별한 은혜를 기록하였다. 이미 『낙도당문초(樂道堂文鈔)』에 실어 간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뒤에 동치 연간에 저택 정원이 낙성하매, 어서(御書) 무보(墨寶)를 공경히 표구하여 걸었으므로, 또한 이름을 낭윤이라 하였다. 그동안 전원(淀園)에 변고가 많아 늘 가서 머물지 못하여, 이에 절반이 거의 황무해졌다. 올해 원정(園丁)에게 명하여 조금 수리하고 기하(芰荷) 몇 무(畝)를 보충하여 심었으니, 비록 옛 모습을 다 회복하지는 못하였으나 잠시 머물며 살 만은 하여, 이로써 긴 여름을 보낸다. 지금을 어루만지고 옛날을 생각하니 감개(感慨)의 뜻이 없을 수 없다:

点溪荷叶叠青钱,半采红莲半白莲。姬姹含情娇不语,东西分艳蒂相连。落花舞絮成春梦,感物吟诗对暮天。低槛晚晴笼翡翠,鹭鸶飞破夕阳烟。

시냇가의 연잎이 푸른 동전을 겹겹이 쌓고, 반은 붉은 연꽃 반은 흰 연꽃을 채취하네. 아리따운 여인이 정을 품고 곱게 말이 없으니, 동서로 빛깔을 나누어도 꽃받침은 서로 이어졌네. 떨어지는 꽃과 춤추는 버들 솜털이 봄꿈을 이루고, 사물에 감동하여 시를 읊으며 저녁 하늘을 마주하네. 낮은 난간에 개인 저녁이 비취(翡翠)를 휘감고, 해오라기가 저녁 노을 연기를 가르고 나네.

《萃锦吟》(《췌금음》) 권5 「낭윤관하병지」 시서 및 시, 청 혁흔 찬

『고도변천기략(故都變遷記略)』

辅仁大学在定阜大街,为涛贝勒府旧址。辅仁中学。男部在大学东侧,门临李广桥西街。恭王府旧在李广桥南街,近亦售归辅仁大学。司铎书院在恭王府南三座桥之西北,内五区。区署在刘海胡同。恭王府东墙外。大翔凤胡同,旧名大墙缝胡同;小翔凤胡同,旧名小墙缝胡同。

부인대학(輔仁大學)은 정부대가(定阜大街)에 있는데, 도패륵부(濤貝勒府)의 옛터이다. 부인중학(輔仁中學) 남자부는 대학 동쪽에 있고, 문이 이광교서가(李廣橋西街)에 임해 있다. 공왕부(恭王府)는 옛날 이광교남가(李廣橋南街)에 있었는데, 근래에 역시 팔려 부인대학에 귀속되었다. 사택서원(司鐸書院)은 공왕부 남쪽 삼좌교(三座橋)의 서북쪽, 내오구(內五區)에 있다. 구서(區署)는 유해호동(劉海胡同)에 있다. 공왕부 동쪽 담장 밖. 대상봉호동(大翔鳳胡同)은 옛 이름이 대장봉호동(大墻縫胡同)이요, 소상봉호동(小翔鳳胡同)은 옛 이름이 소장봉호동(小墻縫胡同)이다.

《故都变迁记略》(《고도변천기략》) 권7 「내오구」, 중화민국 여계창 편, 민국 30년(1941) 연인본

옛 사진

약 20세기 전반기

도집(圖集)에 실린 초기 왕부(王府) 영상의 출처에 근거하여 약 20세기 전반기로 분류한다. 도집 최초 보도는 그 가운데 많은 사진이 이 시기의 출판물에 실렸음을 기술한다. 이 사진은 『옛 사진 속의 대청 왕부(老照片中的大清王府)』에서 나왔고, 공왕부박물관 영상고가 공개하였다. 화면은 수화문(垂花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문 양쪽에 꽃살벽(花格牆)을 두었으며, 문굴(門洞) 안에서 또 다른 건축의 처마 부분과 문·창을 볼 수 있다.

1922—1930년간

위 여덟 사진은 희인룡(喜仁龍, Osvald Sirén)의 『중국 정원』(Gardens of China)에 수록되었으며, 뉴욕 Ronald Press Company에서 1949년에 출판하였다. 공왕부박물관 연구관원 학려(郝黎)는 그가 부에 들어가 사진을 찍은 것이 1922—1930년 사이라고 기술하였다. 원서는 장마다 촬영 연도를 표기하지 않았다. 사진은 각각 당 앞 못가, 적취암(滴翠岩), 시화방(詩畫舫), 관어대(觀魚臺) 및 입구의 첩석(疊石)의 옛 모습을 보여 준다. 「품감|편산이 경치를 다하고 촌석이 정을 낸다(片山多致 寸石生情)」를 참조할 것.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옛 사진: 안선당(安善堂) 앞 버드나무, 못가와 낭무(廊廡).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옛 사진: 적취암(滴翠岩), 비운동(秘雲洞) 동굴 입구와 산 위의 대사(臺榭).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옛 사진: 시화방(詩畫舫), 못가와 늘어진 버들.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옛 사진: 관어대(觀魚臺) 근경.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옛 사진: 관어대(觀魚臺), 뜰과 동쪽 긴 회랑.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옛 사진: 화원 입구의 문 모양 첩석(疊石).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화원 평정정(平頂亭) 옛 사진: 정자 지붕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앞쪽에 수목과 산석(山石)이 있다.

희인룡의 『중국 정원』에 수록된 공왕부 화원 포지(鋪地) 옛 사진: 작은 돌을 맞추어 낙타 행렬 무늬를 이루고, 주변을 기하 무늬로 받쳤다.

약 1932—1940년

『중국고건축도전(中國古建築圖典)』의 서문은 선정된 사진이 영조학사(營造學社)의 1932—1940년 조사에서 나왔음을 설명하며, 이 사진은 그 범위에 근거하여 연대를 표기한다. 제2권에 이 사진을 수록하여 제목을 「베이핑 공왕부 한 모퉁이(北平恭王府一角)」라 하였다. 화면은 회랑 아래에서 뜰을 바라보고, 가까이는 회랑 기둥과 조각 장식이며, 뜰 안에 누각(樓閣)·난간과 산석(山石)을 볼 수 있다.

1940년(간행)

두 사진의 출처: 「‘다복헌(多福軒)’의 역사 연혁과 수선 보호」. 연대 및 영상 식별은 「공왕부 다복헌 실내 진열 복원 연구」를 참조할 것.

다복헌(多福軒)이 부인대학 도서관으로 바뀐 시기의 외경으로, 당 앞 층계·회랑 기둥과 문·창을 볼 수 있다. 공왕부박물관의 「‘다복헌’의 역사 연혁과 수선 보호」가 이 사진을 공개하였고, 관(館) 측의 진열 복원 연구는 이를 1940년 부인대학 동창회 회간(會刊)에 실린 사진으로 열거하였다. 1940년은 간행 연도이다.

다복헌이 부인대학 여학부 도서관으로 바뀐 뒤의 실내로, 학생들이 긴 탁자를 둘러앉아 열람하고, 위쪽에 여전히 천장과 「상덕연희(尙德延禧)」 편액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관 측의 「‘다복헌’의 역사 연혁과 수선 보호」가 공개하였고, 진열 복원 연구는 이를 1940년 회간에 실린 여학부 도서관 내부라고 밝혀 두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