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남송 순희(淳熙) 초년, 발운사(發運使)[1]와 이부시랑(吏部侍郎)을 지낸 사정지(史正志)가 쑤저우 대성교(帶城橋) 일대에 택지(宅第)와 화푸(花圃)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곧 왕사원의 전신이다. 집 안에는 장서당(藏書堂)을 지어 만권당(萬卷堂)이라 이름하였는데, 책이 마흔두 궤짝에 빙 둘러 늘어서 있고 대부분이 필사본이었다. 화푸는 어은(漁隱)이라 불렀고, 사씨 집안에는 또한 모란 오백 그루를 심었다. 봄날 꽃이 피면 오중(吳中) 사람들이 자리를 베풀고 손님을 청해 꽃을 감상하니, 장서와 꽃 심기와 연회 유흥이 이 택원(宅園)의 가장 이른 생활을 이루었다.
전하기를 사정지가 막 고향에 돌아왔을 때, 따라온 배가 앞뒤로 이어져 봉문(葑門)에서 줄곧 그의 집 앞까지 미쳤다 한다. 그러나 이 택원은 사씨 집안에서 겨우 한 대를 전할 뿐이었다. 먼저 화푸가 황폐해지고, 이어 택지가 십만 민[2](緡, 동전을 꿴 꾸러미의 단위)의 값으로 팔린다 하였으나 오래도록 묻는 이가 없다가, 마침내 만 오천 민으로 창저우(常州)의 정씨(丁氏)에게 팔렸는데——그것을 지을 때에는 백오십만 민이 들었던 것이다. 남송 소정(紹定) 말년에 정씨 형제가 가산을 나누며 택산(宅産)을 넷으로 쪼개었고, 절서(浙西)의 제형관(提刑官) 조여춘(趙汝櫄)이 이어서 옛 택을 점유하여 관산(官産)으로 삼고, 백만창(百萬倉)과 화적장(和糴場)[3]으로 고쳐 곡식을 비축하고 거두어들이는 데 쓰게 하였다. 만권당의 장서도 점차 흩어져, 처음에는 헌 종이로 여겨져 근(斤)으로 헤아려 팔려 나갔고, 뒤에는 세력 있는 집이 궤짝마다 겨우 십 천(千)을 치르고 휩쓸어 갔다. 명 정덕(正德) 초년에 이르러 만권당은 여전히 사정지의 옛 거처로서 쑤저우 택택(第宅)의 반열에 기록되었으나, 옛 택의 석기(石記)는 이미 승려에게 갈려 없어졌고, 송대의 화푸는 일찍이 남아 있지 않았다.
청 건륭 연간, 광록사 소경(光祿寺少卿) 송종원(宋宗元)이 만권당의 옛터를 사들였다. 그는 아직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옛 원푸에 당(堂)을 쌓고 누(樓)를 짓게 하고 연못과 정자와 작은 배를 마련하게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준비를 하였다. 정원의 이름을 왕사소축(網師小築)이라 하였으니——‘왕사(網師)’는 곧 어부로, 옛 원푸의 ‘어은(漁隱)’의 뜻을 이었을 뿐 아니라 정원 곁 ‘왕사(王思)’ 골목의 이름과도 소리가 통하니, 송종원이 이를 스스로 호(號)로 삼고 또 이로써 정원을 이름한 것이다. 나이 쉰이 못 되어 그는 어머니가 늙으심을 들어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였고, 맑은 날에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굽이진 길을 따라 거닐며, 한가할 때는 벗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정원 안에는 북산초당(北山草堂)·탁영수각(濯纓水閣)·소산총계헌(小山叢桂軒)·도향정(度香艇) 등 열두 경(景)이 있었고, 송종원이 스스로 「왕사소축십이영(網師小築十二詠)」을 지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복(服喪)을 마친 뒤 그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톈진도(天津道)에 제수되었다. 사람이 쑤저우를 떠나매 정원 안의 노래와 읊조림도 이에 그쳤다.
송종원이 세상을 떠난 뒤 정원은 날로 기울어 무너져, 큰 나무와 오래된 돌이 태반이 손실되고 오직 한 웅덩이 못물만이 여전히 맑았다. 건륭 말년, 부유한 상인 구원촌(瞿遠村)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탄식하며 정원을 사들여, 원래의 규모를 따라 다시 배치하고 돌을 쌓고 나무를 심으며 정자와 집을 늘려 지었으니, 정원은 이로 인해 구원(瞿園)이라고도 불렸다. 새로 이루어진 정원에는 월도풍래정(月到風來亭)·운강정(雲岡亭)·죽외일지헌(竹外一枝軒) 등의 경치가 있었고, 낙성한 날에 주인은 벗들을 불러 모아 그 안에서 노닐며 연회하였다. 가경(嘉慶)·도광(道光) 연간에 정원 안의 작약이 가장 성하여 ‘오중에서 으뜸’이라는 칭송이 있었고, 구씨 후손은 꽃 필 때마다 손님을 불러 모아 감상하며 즐겼다. 도광 연간에 이르러 왕사원은 졸정원(拙政園)·한벽장(寒碧莊) 등과 더불어 오중의 유원(遊園) 명승이 되어, 봄가을 좋은 날에 구경꾼에게 문을 열었다. 정원 안의 ‘풍풍우우·난난한한(風風雨雨·暖暖寒寒)’으로 시작하는 주련(楹聯)은 꽃과 잎, 꾀꼬리와 제비, 아침과 저녁을 함께 써 넣어, 구경꾼이 정자와 회랑 사이를 오가는 정경에 꼭 어울린다.
도광 연간에 정원은 주인이 바뀌어 휘저우(徽州) 사람 오가도(吳嘉道)에게 돌아갔고, 동치(同治) 연간에 또 장쑤 안찰사(江蘇按察使) 이홍예(李鴻裔)에게 돌아갔다. 그는 귓병으로 벼슬을 버린 뒤 쑤저우로 옮겨 살며 정원을 수리하였다. 정원 안의 오래된 나무와 괴석(怪石), 연못과 정자·관(館)은 예전 그대로였고, 또 책 수만 권을 쌓아 금석(金石)과 서화와 더불어 나날을 보냈다. 광서 11년(1885) 이홍예가 세상을 떠난 뒤 정원은 여러 차례 주인을 바꾸었고 한때 일원(逸園)이라 고쳐 불렸다. 1940년에 수장가 하징(何澄, 자는 아농亞農)이 정원을 사들여 왕사원의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1950년에 하씨 후손이 정원을 국가에 기증하였고, 1958년에 쑤저우시 원림관리처가 인수하여 정원을 정비한 뒤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1980년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정원 안의 전춘이(殿春簃) 정원을 본떠 뜰 하나를 복원하여 지었으니, 이는 중국 고전 정원이 세계로 나아간 첫 사례이다.
오늘날의 왕사원은 구쑤구(姑蘇區) 활가두항(闊家頭巷)에 있으며, 여전히 동쪽에 택(宅)이요 서쪽에 원(園)인 배치이다. 주택 안의 만권당(萬卷堂)과 협수루(擷秀樓)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고, 서쪽의 정자와 회랑은 채하지(彩霞池)를 둘러싸고 펼쳐진다. 남송 장서당의 이름은 대청(大廳) 위에 남아 있고, 현존하는 택원의 배치 기초는 청대의 송(宋)·구(瞿) 두 집안의 조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 문헌
『오중구사(吳中舊事)』
史发运宅,在带城桥。淳熙初,宅成,计其费一百五十万𦈏,仅一传不能保,僦直十万𦈏,久不售,后为丁季卿以一万五千𦈏得之。绍定末,丁又不能保。赵汝櫄来为浙西提刑官,占为百万仓和籴场。故老说发运初归时,舳舻相衔,凡舟自葑门直接至其宅前,用发运司按纸黏窗煮黏面六七石,自后仅易目前耳。万卷堂环列书四十二厨,写本居多。始则论斤买为故纸,其后势家每厨止得一十千,席卷而去。
사발운(史發運)의 택(宅)은 대성교(帶城橋)에 있다. 순희(淳熙) 초년에 택이 이루어졌는데, 그 비용을 헤아리니 백오십만 민(緡)이었다. 겨우 한 대를 전하고 지켜내지 못하여, 팔이 값을 십만 민으로 매겼으나 오래도록 팔리지 않다가, 뒤에 정계경(丁季卿)이 만 오천 민으로 이를 얻었다. 소정(紹定) 말년에 정씨도 또한 지켜내지 못하였다. 조여춘(趙汝櫄)이 와서 절서 제형관(提刑官)이 되매 이를 점유하여 백만창(百萬倉)과 화적장(和糴場)으로 삼았다.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발운(發運)이 처음 돌아왔을 때 배가 앞뒤로 이어져 무릇 배가 봉문(葑門)에서 곧장 그의 택 앞까지 미쳤고, 발운사(發運司)의 공문 종이로 창을 바르고 끈적한 풀 반죽을 예닐곱 석(石)이나 삶았으나, 그 뒤로는 겨우 눈앞의 살림을 꾸려 나갔을 뿐이라 하였다. 만권당(萬卷堂)에는 책이 빙 둘러 마흔두 궤짝에 늘어서 있었는데 필사본이 많았다. 처음에는 근(斤)을 헤아려 헌 종이로 사들였고, 그 뒤에는 세력 있는 집이 궤짝마다 겨우 십 천(千)을 치르고 휩쓸어 갔다.
吴俗好花,与洛中不异。其地土亦宜花,古称长洲茂苑,以苑目之,盖有由矣。吴中花木不可殚述,而独牡丹、芍药为好尚之最,而牡丹尤贵重焉。旧寓居诸王皆种花,往往零替,花亦如之。盛者唯蓝叔成提刑家最好事,有花三千株,号万花堂。尝移得洛中名品数种,如玉盌白、景云红、瑞云红、胜云红、玉间金之类,多以游宦,不能爱护,辄死。今惟胜云红在。其次林得之知府家有花千株。胡长文给事、成居仁太尉、吴谦之待制家种花亦不下林氏。史志道发运家亦有五百株。如毕推官希文、韦承务俊心之属,多则数百株,少亦不下一二百株,习以成风矣。至谷雨为花开之候,置酒招宾就坛,多以小青盖或青幕覆之,以障风日。父老犹能言者,不问亲疏,谓之看花局。今之风俗不如旧,然大槩赏花则为宾客之集矣。
오(吳)의 풍속은 꽃을 좋아하여 낙양과 다르지 않다. 그 땅의 흙 또한 꽃에 알맞아 옛날부터 장주무원(長洲茂苑)이라 칭하였으니, 원(苑)으로써 이를 부른 것은 대개 까닭이 있다. 오중(吳中)의 화목(花木)은 다 헤아려 말할 수 없으나, 오직 모란과 작약이 숭상(好尙)의 으뜸이며 모란이 특히 귀중히 여겨진다. 옛적 이곳에 기거(寄居)하던 여러 왕(王)은 모두 꽃을 심었으나 종종 쇠락하였고, 꽃 또한 그러하였다. 성한 자로는 오직 남숙성(藍叔成) 제형(提刑)의 집이 꽃을 가장 좋아하여 꽃 삼천 그루가 있어 만화당(萬花堂)이라 불렀다. 일찍이 낙양의 명품(名品) 여러 종을 옮겨 왔으니 옥완백(玉盌白)·경운홍(景雲紅)·서운홍(瑞雲紅)·승운홍(勝雲紅)·옥간금(玉間金) 같은 것인데, 대부분 벼슬살이로 돌아다니며 사랑하고 돌보지 못하여 곧 죽었다. 지금은 오직 승운홍만 남아 있다. 그 다음으로 임득지(林得之) 지부(知府)의 집에 꽃 천 그루가 있다. 호장문(胡長文) 급사(給事)·성거인(成居仁) 태위(太尉)·오겸지(吳謙之) 대제(待制)의 집에 심은 꽃도 또한 임씨에게 못지않다. 사지도(史志道) 발운(發運)의 집에도 또한 오백 그루가 있다. 필희문(畢希文) 추관(推官)·위준심(韋俊心) 승무(承務) 같은 무리는 많으면 수백 그루요, 적어도 이백 그루를 밑돌지 않으니, 익혀서 풍조가 되었다. 곡우(穀雨)에 이르러 꽃 피는 시기가 되면 술을 베풀고 손님을 불러 단(壇)에 나아가는데, 대부분 작은 푸른 덮개나 푸른 장막으로 덮어 바람과 햇빛을 가렸다. 늙은 어른으로서 능히 말할 수 있는 이는 친소(親疏)를 묻지 않으니 이를 간화국(看花局)이라 한다. 지금의 풍속은 옛날만 못하나, 대체로 꽃을 감상함은 곧 빈객의 모임이 된다.
『고소지(姑蘇志)』
万卷堂,侍郎史正志所居,在带城桥南,旧有石记,为僧磨毁。施氏丛抄云:正志,扬州人,造带城桥宅及花圃,费百五十万𦈏,仅一传。圃先废,宅售与常州丁卿昆季,仅得一万五千𦈏。绍定末,丁折为四,其后提举赵汝櫄占为百万仓籴场。
만권당(萬卷堂)은 시랑(侍郎) 사정지(史正志)가 살던 곳으로 대성교(帶城橋) 남쪽에 있으며, 옛적 석기(石記)가 있었으나 승려가 갈아 없앴다. 『시씨총초(施氏叢抄)』에 이르기를, 정지(正志)는 양저우(揚州) 사람으로 대성교에 택(宅)과 화푸(花圃)를 지었는데 비용이 백오십만 민(緡)이었고 겨우 한 대를 전하였다. 원푸(圃)가 먼저 폐하고 택이 창저우(常州)의 정경(丁卿) 형제에게 팔렸는데 겨우 만 오천 민을 얻었다. 소정(紹定) 말년에 정씨가 넷으로 나누었고, 그 뒤 제거(提舉) 조여춘(趙汝櫄)이 점유하여 백만창과 적장(糴場)으로 삼았다.
『왕사원도기(網師園圖記)』
予读欧阳文忠公思颍诗,叹士大夫一执仕版,欲遂其山林之乐而不易得也。公留守东都,即思买田颍上,阅二十载,愿迄未遂。自序云:有志于强健之年,未偿于衰老之后,良可悯也。同年观察宋君悫庭,以名孝廉为令畿辅,有廉能声。数年中瀳历监司,政和民治,大吏重之,天子知之,行将畀以节钺,入参机务,如文忠之致位两府。乃年未五十,以太夫人年老陈情,飘然归里。先是,君在官日,命其家于网师旧圃,筑室构堂,有楼有阁,有台、有亭,有沜、有陂,有池、有艇,名网师小筑,赋十二景诗,豫为奉母宴游之地。至是果符其愿。既归,循陔采兰,凌波捕鲤,奉太夫人晨餐夕膳。每当风日晴美,侍鱼轩,扶鸠杖,周行曲径,以相娱悦。时或招良朋,设旨酒,以觞以咏,凭高瞻眺,幽崖耸峙,修竹檀栾,碧流渺弥,芙蕖娟靓,以及疏梧蔽炎,丛桂招隐,凡名花奇卉,无不萃胜。于园中指点少时游钓之所,抚今追昔,分韵赋诗。座客啧啧叹羡,谓君遭逢之威,邱壑之佳,当与子美、沧浪、仲瑛、玉山并传。子谓子美仕宦不得志,扁舟来吴,买木石以寄其诧傺无聊之感。仲瑛饩馆声伎,甲于东南,然时丁末造,轻财结客,比于燕雀处堂而已。孰若君中岁抽簪,啸歌自得,处太平之世,展将母之怀,无累于中,不求乎外,此其乐文忠公所不能遽遂者,而君早遂之,虽遭逢使然,而亦君之知几恬退,有以自致乎此也。园名网师,比于张志和、陆天随,放浪江湖,盖其自谦云尔。命画师绘图,又以师卢鸿乙王摩诘,欲使图画之并传于后也。予与君比屋而居,昕夕过从,咏少陵高枕乃吾庐句,殆有因君之乐以乐予之乐者乎?故不辞而为之记。
나는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의 「사영시(思潁詩)」를 읽고, 사대부가 한번 벼슬의 반열에 오르면 그 산림의 즐거움을 뜻대로 이루기 어려움을 탄식하였다. 공(公)은 동도(東都)를 유수(留守)하면서 곧 영상(潁上)에 밭을 사려 하였으나, 이십 년을 지나도록 소원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강건한 해에 뜻을 두었으나 쇠락한 뒤에 이루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가련하다” 하였다. 같은 과거 급제자(同年)인 관찰사(觀察) 송군(宋君) 각정(愨庭)은 이름난 효렴(孝廉)으로 기보(畿輔)의 현령(令)이 되어 청렴하고 능하다는 명망이 있었다. 몇 해 사이에 감사(監司)의 직을 두루 거치며 정사가 화하고 백성이 다스려져, 큰 관리가 그를 중히 여기고 천자가 그를 알아, 장차 절월(節鉞)을 내리고 들어와 기무(機務)에 참여하게 하여 문충공이 양부(兩府)의 지위에 오른 것과 같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나이 쉰이 못 되어 태부인(太夫人)이 늙으심을 들어 진정(陳情)하고 훌훌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그(君)가 벼슬에 있을 때 집안 사람에게 명하여 왕사(網師)의 옛 원푸에 집을 짓고 당(堂)을 지으며, 누(樓)도 있고 각(閣)도 있고, 대(臺)도 있고 정(亭)도 있으며, 반(沜)도 있고 피(陂)도 있고, 지(池)도 있고 정(艇)도 있게 하여, 이름을 왕사소축(網師小築)이라 하고 열두 경(景)의 시를 지어 미리 어머니를 봉양하고 연회하며 노닐 곳으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과연 그 소원에 부합하였다. 돌아온 뒤로 언덕을 거닐며 난초를 캐고 물결을 넘어 잉어를 잡으며, 태부인의 아침밥과 저녁 반찬을 받들었다. 바람과 햇살이 맑고 고울 때마다 어머니의 수레를 모시고 비둘기 지팡이(鳩杖)를 부축하여, 굽이진 길을 두루 거닐며 서로 기쁘게 하였다. 때로는 좋은 벗을 불러 좋은 술을 베풀어 잔치하고 읊조리며,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그윽한 절벽이 우뚝 솟고 길죽한 대나무가 아름답게 휘감겼으며, 푸른 물결이 아득히 넓고 연꽃이 맑고 곱다. 그리고 성근 오동이 더위를 가리고 뭉친 계수나무가 은자를 부르니, 무릇 이름난 꽃과 기이한 화초는 빼어남을 모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원 안에서 젊을 적 노닐고 고기 잡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금을 어루만지고 옛날을 좇아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지었다. 자리의 손님들이 쩍쩍 감탄하며 부러워하여, 그의 만남의 성대함과 구협(邱壑)의 아름다움은 마땅히 자미(子美)의 창랑(滄浪), 중영(仲瑛)의 옥산(玉山)과 함께 전해지리라 하였다. 내가 말하건대, 자미는 벼슬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작은 배로 오(吳)에 와서 나무와 돌을 사들여 그 실의하고 쓸쓸한 감정을 기탁하였고, 중영은 객사(餼館)와 성기(聲伎)가 동남에서 으뜸이었으나 때가 말세(末造)에 당하여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손님을 사귀었으니, 제비와 참새가 당(堂)에 깃든 것에 비길 뿐이었다. 어찌 그(君)처럼 중년에 벼슬을 물러나며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태평한 세상에 살며 어머니를 받드는 회포를 펼치고, 속에 걸림이 없고 밖에 구함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 이 즐거움은 문충공도 능히 곧 이루지 못한 것인데 그(君)는 일찍이 이루었으니, 비록 만남이 그렇게 한 것이나 또한 그의 기미(幾)를 알고 담담히 물러남이 스스로 이에 이르게 한 것이다. 정원의 이름을 왕사(網師)라 한 것은 장지화(張志和)·육천수(陸天隨)에 견주어 강호(江湖)에 방랑한 것이니, 대개 스스로 겸손한 말일 따름이다. 화사(畫師)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또 노홍(盧鴻)과 왕마힐(王摩詰)을 스승으로 삼아, 그림으로 하여금 후세에 함께 전해지게 하고자 하였다. 나는 그와 담장을 마주하고 살며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였으니, 소릉(少陵, 두보)의 ‘베개 높이 베니 곧 내 오두막(高枕乃吾廬)’이라는 구절을 읊조리는 것은 대개 그의 즐거움으로 나의 즐거움을 삼는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양하지 않고 이를 위해 기(記)를 짓는다.
『원화현지(元和縣志)』
网师小筑,宋副使宗元构以养母者。内有北山草堂、无喧庐、小山、丛桂轩、濯缨水阁、梅花、铁石山房、蹈和室、溪西小隐、度香艇、花影亭、半巢居、斗屠、丽瞩楼十二景。
왕사소축(網師小築)은 송(宋) 부사(副使) 종원(宗元)이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지은 것이다. 안에 북산초당(北山草堂)·무훼려(無喧廬)·소산(小山)·총계헌(叢桂軒)·탁영수각(濯纓水閣)·매화(梅花)·철석산방(鐵石山房)·도화실(蹈和室)·계서소은(谿西小隱)·도향정(度香艇)·화영정(花影亭)·반소거(半巢居)·두도(斗屠)·려주루(麗矚樓)의 열두 경(景)이 있다.
『왕사소축십이영(網師小築十二詠)』
北山草堂
북산초당(北山草堂)
树萱堂之北,结屋山之南。屋敝谋还葺,山幽许更探。为贫归未得,济胜具犹堪。比舍多贤达,花时兴正酣。
훤초를 심은 당(萱堂)의 북쪽에, 산의 남쪽에 집을 지었네. 집이 낡으면 다시 수리할 것을 꾀하고, 산이 그윽하니 더 답사할 것을 허락하네. 가난 때문에 아직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명승에 오를 기량(濟勝之具)은 오히려 감당할 만하네. 이웃집에 어질고 뛰어난 이가 많아, 꽃 필 때의 흥이 한창 무르익네.
梅花铁石山房
매화철석산방(梅花鐵石山房)
敢托余芬远,芳型属在兹。赋中窥骨干,花外想丰姿。韵自开元胜,香宁邓尉差。肝肠期共证,只索可人知。
감히 남은 향기를 멀리 맡기겠는가, 향기로운 격(芳型)이 바로 여기에 있네. 부(賦) 가운데서 골간(骨干)을 엿보고, 꽃 밖에서 풍성한 자태를 그려 보네. 운치는 스스로 개원(開元)의 시절보다 뛰어나고, 향기는 어찌 등위(鄧尉)의 매화보다 못하겠는가. 간장(肝腸)을 함께 증험하기를 기약할 뿐, 다만 알아줄 만한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네.
濯缨小阁
탁영소각(濯纓小閣)
倒影吞飞阁,波澄似镜明。晨光涵其洁,晚唱溜同清。脱帽三杯醉,枕肱一榻横。觉来临槛照,咄咄尚尘缨。
거꾸로 드리운 그림자가 날 듯 높은 각(閣)을 삼키고, 물결이 맑게 갠 것이 거울처럼 밝네. 아침빛이 그 깨끗함을 품고, 저녁 노랫소리가 미끄러지듯 함께 맑네. 모자를 벗어 던지고 세 잔에 취하고, 팔을 베개 삼아 한 침상에 가로눕네. 깨어 난간에 다가가 비추어 보니, 아이고, 아직도 속세의 갓끈이네.
花影亭
화영정(花影亭)
孤亭空所有,笛弄落花天。雁漏云间字,苔沉石上泉。筠帘风细细,镜槛月娟娟。好共歌喉转,蹁跹趁舞筵。
외로운 정자는 모든 것을 비워 두었고, 피리 가락이 꽃 지는 하늘에서 울리네. 기러기가 구름 사이에 글자를 드러내고, 이끼가 돌 위의 샘물에 잠기네. 대나무 발에 바람이 가늘게 불고, 거울 같은 난간에 달이 단아하네. 좋은 것은 노랫목소리와 함께 돌며, 가벼이 춤추어 춤자리를 따르는 것이네.
丽瞩楼
려주루(麗矚樓)
底似凭楼好,南园淑景回。日筛花影碎,莺逗柳烟开。四野霞成幄,千村锦作堆。谁当一揽尽,取次付敲推。
무엇이 누각에 기댐만큼 좋으랴, 남쪽 정원의 아름다운 경치가 돌아오네. 햇살이 체질하듯 하여 꽃 그림자가 부서지고, 꾀꼬리가 희롱하여 버들 안개가 열리네. 사방 들판에 노을이 장막을 이루고, 천 개 마을이 비단 무더기를 이루네. 누가 마땅히 한 번에 모두 거둘까, 차례로 취하여 시상(敲推)의 다듬음에 맡기리.
度香艇
도향정(度香艇)
信宿怜渔父,生涯足钓船。萧疏一箬雨,杳霭半池烟。遮莫浮家久,相将系艇偏。风来香满座,何似棹前川。
두 번 묵으며 어부를 사랑하니, 일생은 낚시 배로 족하네. 쓸쓸한 가운데 갓 하나로 비를 맞고, 아득한 안개에 반 못이 연기로 가득하네. 비록 떠도는 집이 오래될지라도, 서로 데리고 배를 곁에 묶어 두네. 바람이 불어와 향기가 자리에 가득하니, 앞의 냇물에 노를 젓는 것에 무엇이 비기겠는가.
半巢居
반소거(半巢居)
古风怀木处,野性惬巢居。借得一枝足,依然三匝余。妥红裀自满,生白室偏虚。只欲摩吾腹,凭高好晒书。
옛 풍속에 나무 위에 깃들어 삶(木處)을 그리워하고, 들판 같은 성정이 깃집 삶(巢居)에 만족하네. 한 가지를 빌려 얻으면 족하고, 여전히 세 바퀴를 감아 돌고도 남음이 있네. 붉은 꽃잎 깔린 자리는 절로 가득 차고, 흰 빛이 드는 방은 오히려 비어 있네. 다만 내 배를 쓸고 싶을 뿐, 높은 곳에 기대어 책을 말리기 좋네.
溪西小隐
계서소은(谿西小隱)
小有天何在,源深径欲迷。双扉开隐现,一水界东西。虹夏林悄渡,云锄屋角畦。浇书閒觅酒,隔岸唤山妻。
소유천(小有天)이 어디 있는가, 샘이 깊어 길이 아득히 미혹되네. 두 문이 열리면 숨고 닫히면 드러나고, 한 줄기 물이 동서를 경계 짓네. 무지개가 여름 숲에 조용히 걸리고, 구름을 괭이 삼아 집 모퉁이 밭을 가네. 책에 술을 부어(澆書) 한가히 술을 찾고, 저편 언덕에서 산처(山妻)를 부르네.
小山丛桂轩
소산총계헌(小山叢桂軒)
结山不厌小,种桂却成丛。位置三椽屋,婆娑一亩宫。影摇歌扇月,香趁酒旗风。更爱轩东望,排青蔽远空。
산을 쌓음에 작음을 싫어하지 않고, 계수나무를 심으니 도리어 뭉치를 이루네. 세 기둥의 집(三椽屋)을 배치하고, 한 무의 궁실(一畝宮)에서 유유히 거니네. 그림자는 노래 부채의 달에 흔들리고, 향기는 주막 깃발의 바람을 타네. 더욱 사랑하는 것은 헌(軒) 동쪽을 바라봄이니, 푸름이 늘어서서 먼 하늘을 가리네.
斗屠庑
두도무(斗屠廡)
山静日逾永,消磨寄一廛。打头成率尔,容膝便悠然。吟罢焚香坐,酣来倚枕眠。何须营广厦,只此足安禅。
산이 고요하니 날이 더욱 길고, 세월을 닳게 하며 한 집에 몸을 맡기네. 마주친 대로 소박하게 지었으나, 무릎을 댈 만하면 곧 유유하네. 읊조리고 나서 향을 사르고 앉고, 취해 오면 베개에 기대어 자네. 어찌 넓고 큰 집을 지을 필요가 있으랴, 다만 이것으로 선(禪)을 편안히 하기에 족하네.
无喧庐
무훼려(無喧廬)
避喧漫道幽栖稳,心达何妨近市居。好鸟劝人一尊酒,清风窥我半床书。萧疏竹影初晴候,历落棋声午梦余。除把未偿诗债了,应无剥啄到吾庐。
소란함을 피한다고 망령되이 그윽한 깃듦만이 편안하다 말하지 말라, 마음이 통달하면 시장 가까이 살아도 무슨 상관이랴. 좋은 새가 사람에게 한 잔 술을 권하고, 맑은 바람이 내 반 침상의 책을 엿보네. 쓸쓸한 대나무 그림자, 갓 갠 무렵이요, 탁탁 울리는 바둑 소리, 낮잠에서 깬 뒤네. 아직 갚지 못한 시 빚을 다 갚고 나면, 마땅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내 오두막에 미치지 않으리.
蹈和馆
도화관(蹈和館)
自笑栖栖谋室处,书生头脑故冬烘。大裘万丈香山老,广厦千间锦里翁。怜我一寒聊自异,愧他三昧与人同。构来燠馆犹蜗舍,也假人工辅化工。
스스로 웃노라, 부산하게 집 자리를 꾀하는 선비의 머리가 본래 우둔함을(冬烘). 만 길 큰 겉옷을 원한 향산노(香山老, 백거이)요, 천 칸 넓은 집을 원한 금리옹(錦里翁, 두보)이네. 나의 한결같은 곤궁함을 가엾게 여겨 잠시 스스로 다름을 삼고, 저들의 삼매(三昧)가 남과 같음을 부끄러워하네. 지어 온 따뜻한 관(館)이 오히려 달팽이 집과 같으나, 또한 인공을 빌려 조화(化工)를 도왔네.
『오문원서문헌(吳門園墅文獻)』
予妻弟鲁儒,字宗元,筑园于沧浪亭之东,名曰网师,沈尚书曾为之记。方其以养亲归也,有隐居晦之志。既亲没,终丧,再上长安,授天津道,鞅掌王事,而田园之乐荒矣。适予归里,复裴裛至止,俯仰之间,鸟啄于林,鱼游沼,而昔时丝竹之声,咏吟之会,不可复得,为怃然者久之。子尝泛舟五湖之滨,见彼之为网师者,终其身出没于风涛倾侧中而不知止,徒志石得鱼而已矣。乃如古三闾大夫之所遇者,又何其超然志远也。鲁儒于斯二者将何从马?
내 처남 노유(魯儒)는 자(字)가 종원(宗元)인데, 창랑정(滄浪亭) 동쪽에 정원을 쌓아 이름을 왕사(網師)라 하였고, 심(沈) 상서(尙書)가 일찍이 이를 위해 기(記)를 지었다. 그가 부모 봉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은거하여 빛을 감출 뜻이 있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상(喪)을 마친 뒤 다시 장안에 올라가 톈진도(天津道)에 제수되었으니, 왕실의 일에 바빠 전원의 즐거움이 황폐해졌다. 마침 내가 고향에 돌아와 다시 이곳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우러러보고 굽어보는 사이에 새가 숲에서 쪼아 먹고 물고기가 연못에 노니나, 옛날의 노래 소리와 읊조리는 모임은 다시 얻을 수 없어, 망연함이 한참이었다. 나는 일찍 오호(五湖) 가에서 배를 띄우며 저 왕사(網師, 어부)가 되는 자들을 보았는데, 몸을 마칠 때까지 바람과 물결 속을 기울어지며 나오고 들어가도 멈출 줄 모르고, 다만 돌에 표시하여 물고기를 얻을 뿐이었다. 그런데 옛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만난 바와 같은 자는 또한 어찌 그리 초연히 뜻이 멀었는가. 노유(魯儒)는 이 둘 가운데 어디를 따를 것인가?
古人为园以树果,为圃以种菜。诗三百篇言园者田有桃、有棘、有树擅,非以侈游观之美也。汉魏西下,西园冠盖之游,一时夸为盛事,而士大夫亦各有家园,罗致花石,以豪举相尚。至宋而洛阳名园之记,传播艺林矣。然亭台树石之胜,必待名流䜩赏,诗文唱酬以传,否则辟疆驱客,徒资后人嗢噱而已。
옛사람은 정원(園)을 만들어 과실을 심고, 포(圃)를 만들어 채소를 심었다. 시(詩) 삼백 편에 정원을 말한 것은 밭에 복숭아가 있고, 산사나무가 있고, 심은 단(檀)이 있다 하였으니, 유람과 관람의 아름다움을 사치하려 한 것이 아니다. 한(漢)·위(魏) 서쪽으로 내려와, 서원(西園)의 관개(冠蓋)의 모임이 한 시대에 성대한 일로 자랑되었고, 사대부 또한 각자 집의 정원이 있어 꽃과 돌을 두루 불러 모아 호쾌한 거행으로 서로를 숭상하였다. 송(宋)에 이르러 낙양 명원(名園)의 기(記)가 예림(藝林)에 전해 퍼졌다. 그러나 정자와 대(臺), 나무와 돌의 명승은 반드시 명류(名流)의 연회 감상과 시문의 창화(唱酬)를 기다려야 전해지니, 그렇지 않으면 벽강(辟疆)이 손님을 내쫓은 것처럼 다만 뒷사람에게 웃음거리를 빌려줄 따름이다.
吴中为都会,城郭以内,宅第骈间,肩摩趾错。独东南隅负郭临流,树木丛蔚,颇有半村半郭之趣。带城桥之南,宋时为史氏万卷堂故址,与南园沧浪亭相望,有卷曰网师者,本名王思,曩三年前宋光禄悫庭购其地,治别业,为归老之计,因以网师号,并颜其园,盖托于鱼隐之义,亦取卷名,音相似也。
오중(吳中)은 도회(都會)로, 성곽 안에 택지(宅第)가 나란히 줄지어 어깨가 부딪히고 발뒤꿈치가 겹친다. 오직 동남쪽 모퉁이가 성곽을 등지고 물에 임하여 수목이 우거지니, 자못 반은 촌락이요 반은 성곽인 정취가 있다. 대성교(帶城橋)의 남쪽은 송대에 사씨(史氏) 만권당(萬卷堂)의 옛터로, 남원(南園) 창랑정(滄浪亭)과 마주 보는데, 왕사(網師)라 하는 골목이 있으니 본래 이름은 왕사(王思)이다. 예전 삼 년 전에 송(宋) 광록(光祿) 각정(愨庭)이 그 땅을 사들여 별업(別業)을 다스려 늙음에 돌아갈 계책으로 삼고, 이에 왕사로 호(號)를 삼고 아울러 그 정원에 편액(額)하였으니, 대개 어부가 숨는다는 어은(魚隱)의 뜻에 기탁하고 또 골목 이름을 취한 것은 소리가 서로 비슷한 까닭이다.
光禄既没,其园就颓圮,乔木古石大半损失,惟池水一泓,尚清澈无恙。瞿君远村偶过其地,惧其鞠为茂草也,为之太息问。旁舍者知主人方求售,遂买而有之。因其规模,别为结构,叠石种木,布置得宜,增建亭宇,易旧为新。既落成,招予辈四五人说䜩为竟之集。
광록(光祿)이 세상을 떠나매 그 정원이 기울어 무너져, 큰 나무와 오래된 돌이 태반이 손실되고, 오직 못물 한 웅덩이만이 오히려 맑고 무사하였다. 구군(瞿君) 원촌(遠村)이 우연히 그 땅을 지나다가 그것이 무성한 풀밭이 될까 두려워하여, 이를 위해 탄식하며 물으니, 이웃집이 주인이 바로 팔기를 구한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사들여 소유하였다. 그 규모를 따라 별도로 구조를 이루어 돌을 쌓고 나무를 심고 배치가 알맞게 하며, 정자와 집을 늘려 짓고 옛것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이미 낙성하매 우리 무리 대여섯 사람을 불러 연회를 베풀어 하루 종일 모임을 삼았다.
石径屈曲,似往,而沧浪渺然,一望无际。有堂曰梅花,铁石山房,曰小丨丛树轩,有阁、濯缨水阁。有燕居之室,曰𧽻和馆。有亭于水者曰到风来,有亭于厓者曰云冈,有斜轩曰竹外一枝,有斋曰集处。皆远村营手画而名之者也。
돌길이 굽이쳐 가는 듯하면서 돌아오고, 푸른 물이 아득하여 한눈에 끝이 없다. 당(堂)이 있으니 매화철석산방(梅花鐵石山房)이라 하고, 소산총계헌(小山叢桂軒)이 있으며, 각(閣)이 있으니 탁영수각(濯纓水閣)이다. 편안히 거처할 실(室)이 있으니 도화관(蹈和館)이라 한다. 물 위에 정자가 있으니 월도풍래(月到風來)라 하고, 언덕에 정자가 있으니 운강(雲岡)이라 하며, 비스듬한 헌(軒)이 있으니 죽외일지(竹外一枝)라 하고, 재(齋)가 있으니 집처(集處)라 한다. 모두 원촌이 몸소 경영하고 그려 이름한 것이다.
地祗数亩,而有纡回不尽之致,居虽近尘,而有云水相忘之乐,柳子厚所谓奥如旷如者,殆兼得之矣。园已非昔,而犹存网师之名,不忘旧也。予尝读松陵集,赋任氏园池云:池容淡而古,树意苍然僻,不知清景在。尽什任君宅,辄欣然神往,令乃于斯园遇之。予虽无皮、陆之诗才,而远村之胜情雅尚,视任晦实有过之。爰记其事,以继二游之复古,今人何遽不相及也。
땅이 겨우 몇 무(畝)이나 굽이쳐 다함이 없는 정취가 있고, 거처가 비록 속세에 가까우나 구름과 물에 서로 잊는 즐거움이 있으니, 유자후(柳子厚)가 이른바 오여(奧如) 광여(曠如)한 것을 대개 겸하여 얻었다 하겠다. 정원은 이미 옛날이 아니나 오히려 왕사(網師)의 이름을 남겼으니 옛것을 잊지 않음이다. 나는 일찍 『송릉집(松陵集)』을 읽으며 임씨(任氏)의 원지(園池)를 읊은 것을 보니 “못의 모습은 담담하고 옛스럽고, 나무의 뜻은 창연히 외져, 맑은 경치가 어디 있는지 몰랐더니 모두 임군(任君)의 택에 다하였네” 하였는데, 곧 기뻐하며 정신이 달려갔더니 이제 마침 이 정원에서 그것을 만났다. 나는 비록 피(皮, 피일휴)·육(陸, 육구몽)의 시재(詩才)는 없으나, 원촌의 뛰어난 정(情)과 고상한 숭상은 임회(任晦)에 견주어 실로 지나침이 있다. 이에 그 일을 기록하여 두 사람이 노닌 것의 복고(復古)를 잇게 하니, 지금 사람이 어찌 서로 미치지 못하겠는가.
『영련총화(楹聯叢話)』
谢默卿云:吴下园亭最胜,如齐门之吴氏拙政园,阊门之刘氏寒碧庄,葑门之瞿氏网师园,娄门之黄氏五松园。其尤著者,每春秋佳日,辄开园纵人游观,扇如云,蝶围蜂绕,裙屐年少,恣其评骘,于衣香人影之间,了不为忤。金閰名姬,反以此增声价焉。各园楹帖不少,今仅记网师园中有一联云:风风雨雨,暖暖寒寒,处处寻寻觅觅,莺莺燕燕,花花叶叶,卿卿暮暮朝朝。语涉纤巧,而状艳冶之景,如在目前,固自妙丽无匹也。按此联与西湖花神庙一联相仿,而简炼稍逊之。
사묵경(謝默卿)이 말하기를, 오하(吳下)의 원정(園亭)이 가장 뛰어난데, 제문(齊門)의 오씨(吳氏) 졸정원(拙政園), 창문(閶門)의 유씨(劉氏) 한벽장(寒碧莊), 봉문(葑門)의 구씨(瞿氏) 왕사원(網師園), 누문(婁門)의 황씨(黃氏) 오송원(五松園)과 같은 것이다. 그 더욱 빼어난 자는 봄가을 좋은 날마다 곧 정원을 열어 사람을 마음껏 유람하게 하니, 부채가 구름처럼 모이고 나비처럼 둘러싸고 벌처럼 휘돌며, 치마와 나막신의 젊은이들이 마음껏 품평(評隲)하여도 옷의 향기와 사람 그림자 사이에서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다. 금창(金閶)의 이름난 기녀(名姬)가 도리어 이로써 명성의 값을 더하였다. 각 정원의 영첩(楹帖)이 적지 않으나, 지금은 겨우 왕사원 가운데 한 주련(聯)이 있다 기록하니 이렇다. “바람이고 비이고, 따뜻하고 쌀쌀하고, 가는 곳마다 찾고 또 찾으며, 꾀꼬리에 제비, 꽃에 잎, 그대와 저녁마다 아침마다.” 말이 섬세하고 교묘함에 걸리나, 요염한 경치를 형상하여 눈앞에 있는 듯하니 진실로 스스로 묘려(妙麗)하여 짝할 것이 없다. 살피건대 이 주련은 서호(西湖) 화신묘(花神廟)의 한 주련과 비슷하나, 간결하고 세련됨은 그것에 조금 못 미친다.
『홍북강시문집(洪北江詩文集)』
才从识面便忘形,饭我城东水上亭。老友瘦真同野寉,残荷多尚比天星。百身未易酬恩遇,一石偏教吐性灵。归去且营耕钓好,得闲陇畔便横经。
막 얼굴을 알고 나서 곧 격식을 잊었네, 성 동쪽 물 위 정자에서 나를 먹여 주었네. 오랜 벗은 말라 참으로 들학과 같고, 남은 연잎은 많아 오히려 하늘 별에 비기네. 온몸 백 번으로도 은혜와 만남을 갚기 어렵고, 한 돌이 도리어 성령(性靈)을 토하게 하네. 돌아가서 마땅히 밭갈이와 낚시를 꾸려 좋게 하고, 한가로우면 밭두렁 가에서 곧장 경전을 펼치리.
『선산시초(船山詩草)』
即网师园,丙辰夏日曾寄题二诗。
곧 왕사원(網師園)이니, 병진(丙辰) 여름날 일찍이 두 수의 시를 부쳐 제(題)하였다.
题诗曾寄网师园,万里来游一践言。何止画图开绣轴,真从城市见桃源。诗书气涌山逾秀,花竹丛深鸟不喧。十八年如春梦杳,照人春水尙潺湲。
왕사원에 시를 부쳐 제하였더니, 만 리를 와 노닐어 한 번 그 말을 지켰네. 어찌 그림 두루마리에 수놓인 축(繡軸)을 펼침뿐이랴, 참으로 성시(城市)에서 도원(桃源)을 보았네. 시서(詩書)의 기운이 솟아 산이 더욱 빼어나고, 꽃과 대나무가 깊어 새가 떠들지 않네. 십팔 년이 봄꿈처럼 아득한데, 사람을 비추는 봄물이 오히려 졸졸 흐르네.
『권유음(倦游吟)』
三月廿八日,瞿亦陶公子招往网师园赏玩芍药,因李桐皋赞府亦订是日看花,遂由李园顺过结草庵,小憩三处花光目不给赏,步芝岩兄原韵。饮酒犯重叠折简,殿春正放皆围栏。更闻禅房有嘉植,中道小憩许叩关。后先赴约向晨起,次第品题较红紫。李园乍过草庵连,一角天孙割锦绮。网师四面花作筵,浓香丽色泛杯船。座中有客拜花下,以酒饮花酒似泉。鲁阳驻日倘常午,行乐无涯岂小补。
삼월 이십팔일, 구역도(瞿亦陶) 공자(公子)가 왕사원에 가서 작약을 감상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동고(李桐皋) 찬부(贊府)도 이 날 꽃 구경을 약속하였으므로, 이에 이원(李園)에서 들러 결초암(結草庵)을 지나 세 곳에서 조금 쉬니 꽃빛이 눈이 미처 다 볼 수 없었다. 지암(芝岩) 형의 원운(原韻)을 따라 지었다. 술자리에서 거듭 청하는 쪽지를 꺾어 보내고, 전춘(殿春, 작약)이 한창 피어 모두 울타리를 둘렀네. 다시 듣건대 선방(禪房)에 아름다운 식물이 있어, 중도에 조금 쉬며 문을 두드려 보라 하네. 뒤와 앞으로 약속에 달려 아침에 일어나, 차례로 품평(品題)하며 붉음과 자줏빛을 겨루네. 이원을 갓 지나 초암이 이어지고, 한 모퉁이에 하늘 손녀(天孫)가 비단을 잘라 놓았네. 왕사(網師) 사면에 꽃이 잔치를 베풀고, 진한 향기와 고운 빛깔이 술잔에 넘치네. 자리 가운데 손님이 꽃 아래에 절하며, 술로 꽃을 마시게 하니 술이 샘물 같네. 노양(魯陽)이 해를 머물게 하여 항상 정오이게 한다면, 행락이 끝이 없으니 어찌 작은 도움이겠는가.
对花试问种花年。鹒蟀迭更巳十五,今朝观止记葑溪。蝶舞𧊵狂花影迷。底事吟笺分优劣,人间好景本难齐。网师园芍药甲于吴中,不亚扬州。前诗意有未尽,叠韵再赋。
꽃을 마주하고 물어보노라, 꽃 심은 해가 언제인가. 꾀꼬리와 귀뚜라미가 번갈아 바뀐 지 벌써 열다섯 해, 오늘 아침 봄이 다함(觀止)을 봉계(葑溪)에 기록하네. 나비 춤추고 벌이 미치니 꽃 그림자가 어지럽네. 무슨 까닭으로 읊은 종이에 우열을 나누는가, 인간 세상의 좋은 경치는 본래 같기 어렵네. 왕사원의 작약은 오중(吳中)에서 으뜸이요 양저우(揚州)에 못지않다. 앞의 시에 뜻이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 운을 겹쳐 다시 짓는다.
茂苑名葩徧芳圃,惜少红药围雕栏。城南网师独擅胜,主人爱护门常关。将离惜别每早起,为殿千红与万紫。朵朵娇娆备色香,丛丛烘染张云绮,列坐开尊艳舞筵,如乘绣被鄂君船。一年一度名花放,旧游不让第五泉,春日已阑花正午。广陵佳丽吴中补,平山堂下祠贤三。蜀都冈上楼尺五。仙源今复到渔溪,老眼花看雾里迷。芳醽共举婪尾盏,一醉应教物我齐。再叠前韵。
무원(茂苑)의 이름난 꽃이 향기로운 포(圃)에 두루 퍼졌으나, 아쉽게도 붉은 작약이 조각 난간을 두른 것이 적네. 성 남쪽의 왕사(網師)가 홀로 뛰어남을 독차지하고, 주인이 사랑하고 보호하여 문을 늘 닫았네. 장리(將離, 작약)와 이별을 아쉬워하여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천 개 붉음과 만 개 자줏빛의 맨 뒤(殿)를 이루네. 송이송이 교요하여 빛깔과 향기를 갖추고, 무더기무더기 물들여 구름 비단을 펼치네, 좌석을 나란히 하고 술통을 열어 요염한 춤의 자리니, 수놓은 이불을 탄 악군선(鄂君船)을 탄 듯하네. 일 년에 한 번 이름난 꽃이 피니, 옛 노님은 제오천(第五泉)에 양보하지 않네, 봄날이 이미 저물고 꽃이 정오에 한창이네. 광릉(廣陵)의 아름다움을 오중이 보충하고, 평산당(平山堂) 아래 세 현인(賢)의 사당이 있네. 촉도강(蜀都岡) 위에 척오(尺五)의 누각이 있네. 신선의 근원이 지금 다시 어계(漁溪)에 이르렀으니, 늙은 눈이 꽃을 보니 안개 속에서 미혹되네. 향기로운 술을 함께 들어 람미잔(婪尾盞)을 올리니, 한 번 취하면 마땅히 사물과 나를 같게 하리. 앞의 운을 다시 겹친다.
丁丑送春已七日,牡丹翦罢空凭栏。米囊虽艳亦凡品,惟有殿春犹心关。名园忽报光华起,孰定公侯耀朱紫。招来旧雨谊如云,咏到新诗句必绮,非缘金带欲开筵。不问今朝过客船,入座耆英同隐逸。闭门城市即林泉,步障周遮日忘午。频年会少今年补。绿莎芳软径开三,翠黛玲珑峰列五。尘境桃源亦有溪,盈盈一水岂愁迷。贪心岁岁花前到,携杖相期不速齐。
정축(丁丑)에 봄을 보낸 지 이미 이레, 모란이 잘려 나가니 빈 난간에 기대네. 미낭(米囊, 양귀비)이 비록 고우나 또한 범품(凡品)이요, 오직 전춘(殿春)만이 오히려 마음에 걸리네. 이름난 정원에 홀연 광화(光華)가 일어났다 알리니, 누가 정하여 공후(公侯)가 붉은빛과 자줏빛을 빛내는가. 옛 벗을 불러 모으니 의리가 구름과 같고, 새 시 구절에 이르면 반드시 고운데, 금대(金帶, 재상의 징조라는 작약) 때문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고자 함이네. 오늘 아침 지나는 손님 배를 묻지 않고, 자리에 든 기영(耆英)이 은일(隱逸)과 같네. 문을 닫으니 성시(城市)가 곧 임천(林泉)이요, 장막이 두루 가리우니 해가 정오임을 잊네. 여러 해 모임이 적었으나 올해에 보충하네. 푸른 사초(莎草)가 향기롭고 부드러워 길이 세 갈래 열리고, 푸른 산이 영롱하여 봉우리가 다섯 늘어섰네. 속세의 도원(桃源)에도 또한 시내가 있으니, 맑게 고인 한 줄기 물에 어찌 미혹됨을 근심하랴. 탐내는 마음으로 해마다 꽃 앞에 이르고, 지팡이를 지고 서로 기약하여 부르지 않아도 함께 이르리.
『청가록(淸嘉錄)』
阔街头巷网师园,本为淸河道宋宗元搆以养母,有网师小筑十二咏,今归太仓瞿氏,俗称瞿园。
활가두항(闊街頭巷)의 왕사원(網師園)은 본래 청하도(淸河道) 송종원(宋宗元)이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지은 것으로, 「왕사소축십이영(網師小築十二詠)」이 있고, 지금은 태창(太倉) 구씨(瞿氏)에게 돌아갔으며, 속칭 구원(瞿園)이라 한다.
『이원총화(履園叢話)』
瞿园,即宋氏网师园故址,嘉定瞿远村氏增筑之,其西数十步,即前大宗伯沈归愚先生旧宅也。嘉庆戊寅四月,余尝同范芝岩、潘榕皋、吴槐江诸先生看园中芍药,其花之盛,可与扬州尺五楼相埒。范有诗云:“看花车马声如沸,谁问尚书旧第来。”今又归天都吴氏矣。
구원(瞿園)은 곧 송씨(宋氏) 왕사원(網師園)의 옛터로, 가정(嘉定)의 구원촌(瞿遠村)씨가 늘려 쌓았으며, 그 서쪽 수십 보는 곧 전 대종백(大宗伯) 심귀우(沈歸愚) 선생의 옛 택(宅)이다. 가경(嘉慶) 무인(戊寅) 사월에 나는 일찍이 범지암(范芝岩)·반용고(潘榕皋)·오괴강(吳槐江) 여러 선생과 함께 정원 안의 작약을 보았는데, 그 꽃의 성함이 양저우(揚州)의 척오루(尺五樓)와 견줄 만하였다. 범(范)에게 시가 있어 이르기를 “꽃 보는 수레와 말 소리가 끓는 듯한데, 누가 상서(尙書)의 옛 택에 왔는지 묻는가” 하였다. 지금은 또 천도(天都)의 오씨(吳氏)에게 돌아갔다.
『낭적속담(浪跡續談)』
苏州之瞿园,即宋氏网师园故址,后归嘉定瞿远村,复增筑之。园中结构极佳,而门外途径极窄,陶文毅公最所不喜。盖其筑园之初心,即借此以避大官之舆从也。余在苏藩任内,曾招潘吾亭、陈芝楣、吴棣华、朱兰坡、卓海帆、谢椒石在园中看芍药,其西数十步即沈归愚先生旧庐,尝约同人以诗纪之,且拟绘图以张其事,而迁延不果作。此数君子皆老斫轮,果皆有诗,必可以传,今则如抟沙一散,不可聚矣。越十馀年重到,为之慨然!
쑤저우(蘇州)의 구원(瞿園)은 곧 송씨 왕사원의 옛터로, 뒤에 가정(嘉定)의 구원촌에게 돌아가 다시 늘려 쌓았다. 정원 안의 구조가 지극히 좋으나 문 밖의 길이 지극히 좁아, 도문의공(陶文毅公)이 가장 좋아하지 않았다. 대개 그가 정원을 쌓은 처음 마음이 곧 이를 빌려 큰 벼슬의 수레와 수행원(輿從)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내가 소번(蘇藩)의 임기 안에 있을 때, 일찍이 반오정(潘吾亭)·진지미(陳芝楣)·오제화(吳棣華)·주란파(朱蘭坡)·탁해범(卓海帆)·사초석(謝椒石)을 불러 정원 안에서 작약을 보았는데, 그 서쪽 수십 보는 곧 심귀우 선생의 옛 오두막이니, 일찍이 동인(同人)과 약속하여 시로 기록하고자 하고 또 그림을 그려 그 일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미루고 늦추어 끝내 짓지 못하였다. 이 몇몇 군자(君子)는 모두 늙은 장인(斫輪)이니, 만약 모두 시가 있다면 반드시 전해질 만하였을 것을, 지금은 모래를 뭉친 것처럼 한 번 흩어져 모을 수 없게 되었다. 십여 년을 지나 다시 이르러, 이를 위해 개탄한다!
『졸존원총고(拙尊園叢稿)』
君讳鸿裔,字眉生,别号香严,晚以居近苏子美沧浪亭,又号苏邻,四川中江李氏。曾祖纯,祖敦鲁,考崧霖,举人,崇世蕴德。君以拔贡生中咸丰辛亥顺天乡试举人,旋入赀为兵部主事。才高而学赡,声誉翔起,公卿多折节枉交。有达官讽使出其门,许以鼎甲,不应。某相国素与君善,君见其权势日盛,亦谢绝。咸丰十年,不乐在京,将南游江淮,未至鄂,为胡文忠公林翼奏调赴英山大营。未几胡公薨,从曾文正公国藩于安庆。君本文正门下士,文正开幕府治事,辟召天下英俊,程其器能,君恒为之冠,参与机要。文正尝曰:眉生豁达精敏,应世才也。密疏荐君,堪任大受。江南平,明年遂权十府粮道。及北征勦捻,又奏补君徐海道。徐州绾毂南北,时湘淮各军之讨贼者数万人,更番休替,粮械军火皆以徐州为总汇。君内筦胥储,外充营务,又以余力治民,所设施方略甚具。淮勇锐气正新,铭字营勇尝杀人,君擒而治之,卒张军法。与诸将接纳,抚以欢好,主客大和。逾年,擢江苏按察使,论功晋加布政使衔,赏戴花翎。寖寖大用矣,而君遽以耳疾再请开缺,竟不复出云。君既罢官,闲居乐吴中山水,徙家苏州,得瞿氏网师园葺治之。园故有老树怪石、池沼亭馆之胜,积书数万卷,益蓄三代彝鼎、汉唐以来金石碑版、法书名责以自娱。闭门谢客,倘祥物外,身与世不复相关。性内介,无妄交,交必有终始。生平游宴甚广,而其契谊最笃,若吴县潘尚书祖荫、湘乡曾袭侯纪泽、开县李制军宗羲、嘉兴钱太仆应溥、吴县潘方伯曾玮、归安吴观察云、剑州李方伯榕、湖口高大令心夔、独山莫徵君友芝,此尤海内共知者,可以观所与已。君卒于光绪十一年八月十五日,春秋五十有五。娶敖氏,荣昌望族,遘心疾不瘉。妾二,俱吴氏。无子,以从兄子赓猷嗣,廪贡生候选道。孙五人:惊,候选知县;鹄、鹓、鹗、鹍。某年月日,葬君吴县四都十二图善人桥金牛坞。君书法甚精,诗古文亦窥古人堂奥,晚又好释典,皆以为寄。没后,赓猷仅得诗二百余首刻之。君之至鄂也,与庶昌从兄伯庸善,即弟视余,越二十六年矣。铭君之墓,其曷有辞。铭曰:高才步追,渊云躅厥踪,治彭麟一角,急流不居,此其卓。退栖吴中山水曲,灵岩之宫与木渎,精魄永绥藏此麓。
그(君)의 휘(諱)는 홍예(鴻裔)요, 자(字)는 미생(眉生)이며, 별호(別號)는 향엄(香嚴)이고, 만년에 거처가 소자미(蘇子美)의 창랑정(滄浪亭)에 가까워 또 호를 소린(蘇鄰)이라 하였으니, 쓰촨(四川) 중장(中江)의 이씨(李氏)이다. 증조(曾祖)는 순(純)이요, 조(祖)는 돈노(敦魯)요, 고(考)는 숭림(崧霖)으로 거인(擧人)이니, 대대로 덕을 쌓았다. 그(君)는 발공생(拔貢生)으로 함풍(咸豐) 신해(辛亥) 순천향시(順天鄕試)의 거인이 되었고, 곧 돈(貲)을 바쳐 병부주사(兵部主事)가 되었다. 재주가 높고 학문이 넉넉하여 명성과 평판이 높이 일어나, 공경(公卿)이 대부분 절개를 꺾고 굽혀 사귀었다. 높은 관리가 그로 하여금 자기 문하에서 나오기를 시사하며 정갑(鼎甲)을 허락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어떤 상국(相國)이 평소 그와 좋았으나, 그가 그 권세가 날로 성함을 보고 또한 절연하고 끊었다. 함풍 10년에 경사(京師)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않고 장회(江淮)에 남쪽으로 노닐고자 하였는데, 악(鄂, 후베이)에 이르지 못하여 호문충공(胡文忠公) 임익(林翼)에게 주조(奏調)되어 영산(英山) 대영(大營)에 부임하였다. 얼마 안 되어 호공(胡公)이 세상을 떠나매, 증문정공(曾文正公) 국번(國藩)을 안칭(安慶)에서 따랐다. 그(君)는 본래 문정(文正)의 문하사(門下士)로, 문정이 막부(幕府)를 열어 일을 다스리며 천하의 영준(英俊)을 불러 모아 그 기량과 능력을 헤아릴 때, 그(君)가 늘 그 으뜸이 되어 기요(機要)에 참여하였다. 문정이 일찍이 이르기를 “미생(眉生)은 활달하고 정민하여 세상에 응할 재주이다” 하였다. 은밀히 소(疏)를 올려 그(君)를 추천하여 큰 부임(大任)을 감당할 만하다 하였다. 강남이 평정되고 이듬해에 곧 십부양도(十府糧道)를 권대(權代)하였다. 북벌하여 염(捻)을 토벌할 때 또 주(奏)하여 그(君)를 서해도(徐海道)에 보임하였다. 서주(徐州)는 남북을 잇는 요충지로, 그때 상(湘)·회(淮) 각군의 적을 토벌하는 자가 수만 명이어서 번갈아 쉬고 교체되며, 양식과 무기와 군화(軍火)가 모두 서주를 총집결지로 삼았다. 그(君)는 안으로 창고의 비축을 관장하고 밖으로 영무(營務)를 충당하며, 또 남는 힘으로 백성을 다스려 베푼 바 방략이 심히 갖추어졌다. 회용(淮勇)의 예기가 한창 새로울 때 명자영(銘字營)의 용사(勇)가 일찍이 사람을 죽이매, 그(君)가 잡아 다스려 마침내 군법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사귀어 받들어 화목하게 대접하니, 주인과 손님이 크게 화합하였다. 해를 지나 장쑤 안찰사(江蘇按察使)로 올라가고, 공을 논하여 포정사함(布政使銜)을 더하고 화령(花翎)을 하사받았다. 점점 크게 등용되려 하였으나 그(君)가 갑자기 귓병으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마침내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그(君)는 이미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살며 오중(吳中)의 산수를 즐겨, 집을 쑤저우(蘇州)로 옮겨 구씨(瞿氏)의 왕사원(網師園)을 얻어 수리하고 다스렸다. 정원에는 본래 오래된 나무와 괴석(怪石), 연못과 정자와 관(館)의 명승이 있었고, 책 수만 권을 쌓아 더욱 삼대(三代)의 이정(彝鼎)과 한당(漢唐) 이래의 금석비판(金石碑版),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를 모아 스스로 즐겼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한가로이 만물 밖을 노닐어 몸이 세상과 다시 서로 관련되지 않았다. 성정이 속으로 곧아 망령되이 사귀지 않았고, 사귀면 반드시 처음과 끝이 있었다. 평생 유람과 연회가 심히 넓었으나 그 맞물린 의리가 가장 두터운 이로, 오현(吳縣) 반(潘) 상서(尙書) 조음(祖蔭), 상상(湘鄕) 증(曾) 습후(襲侯) 기택(紀澤), 개현(開縣) 이(李) 제군(制軍) 종희(宗羲), 가흥(嘉興) 전(錢) 태복(太僕) 응박(應溥), 오현(吳縣) 반(潘) 방백(方伯) 증위(曾瑋), 귀안(歸安) 오(吳) 관찰(觀察) 운(雲), 검주(劍州) 이(李) 방백(方伯) 용(榕), 호구(湖口) 고(高) 대령(大令) 심기(心夔), 독산(獨山) 막(莫) 징군(徵君) 우지(友芝)이니, 이들은 더욱 해내(海內)가 함께 아는 자로, 그가 사귄 바를 볼 수 있다. 그(君)는 광서 11년 팔월 보름에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春秋) 쉰다섯이다. 오씨(敖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영창(榮昌)의 망족(望族)으로 심질(心疾)에 걸려 낫지 않았다. 첩이 둘 있어 모두 오씨(吳氏)이다. 아들이 없어 종형(從兄)의 아들 경유(賡猷)로 후사를 삼았으니, 림공생(廩貢生) 후보도(候補道)이다. 손자 다섯이니 경(驚)은 후보지현(候補知縣)이요, 곡(鵠)·연(鵷)·악(鶚)·곤(鵾)이다. 어떤 해 어떤 달 어떤 날에 그(君)를 오현(吳縣) 사도십이도(四都十二圖) 선인교(善人橋) 금우오(金牛塢)에 장사지냈다. 그(君)의 서법(書法)이 심히 정교하고 시고문(詩古文) 또한 옛사람의 당오(堂奧)를 엿보았으며, 만년에 또 불전(釋典)을 좋아하여 모두 기탁으로 삼았다. 세상을 떠난 뒤 경유(賡猷)가 겨우 시 이백여 수를 얻어 새겼다. 그(君)가 악(鄂)에 이르렀을 때 서창(庶昌)의 종형(從兄) 백옹(伯庸)과 좋았는데, 곧 나를 아우로 삼은 지 이십육 년을 넘겼다. 그(君)의 무덤에 명(銘)하니 내가 어찌 사양할 말이 있겠는가. 명(銘)에 이르기를: 높은 재주로 걸어 좇아 연운(淵雲)의 자취를 밟았고, 팽(彭, 서주)을 다스림은 기린의 한 뿔처럼 빼어났으며, 급류에 머물지 않음이 이것이 그의 뛰어남이다. 물러나 오중의 산수 굽이에 깃드니, 영암(靈巖)의 궁(宮)과 목독(木瀆)이여, 정혼(精魄)이 길이 편안하여 이 산기슭에 감추어졌네.
옛 사진
1949년 이전
촬영 출처: Osvald Sirén, Gardens of China, New York: The Ronald Press Company, 1949. 같은 조의 영상은 구구문(谷久文)·사원풍(史元豐)·가산(賈珊)의 「서사의 변천: 시룽런(喜龍仁) 사진이 근대 중국 정원 연구를 형성함」에도 실려 있다.
오스발드 시렌(Osvald Sirén, 중국어로는 ‘희인룡(喜仁龍)’, ‘희룽런(喜龍仁)’으로도 옮김)이 촬영한 왕사원 영상은 『중국 정원』(Gardens of China, 1949)에 수록되어 있다. 아래 여섯 장은 월도풍래정(月到風來亭)의 세 시점과 인정교(引靜橋)·사압랑(射鴨廊)·전춘이(殿春簃)를 기록한다. 사진 속 나뭇가지는 못 위로 뻗어 있고, 정자와 회랑, 산석(山石)이 서로 가리우고 비친다.
참고 자료
- 쑤저우시 원림녹화관리국(蘇州市園林和綠化管理局): 《왕사원》 “원림명록(園林名錄)”.
- 쑤저우시 원림녹화관리국: 《왕사원》 “세계유산(世界遺産)”.
- 쑤저우시 원림녹화관리국: 《담서어은(潭西漁隱)》.
- 쑤저우시 원림녹화관리국 편: 『왕사원지(網師園志)』, 상하이: 원후이출판사(文匯出版社), 2014년.
- 동준(童寯): 『강남원림지(江南園林誌)』, 베이징: 중국건축공업출판사(中國建築工業出版社), 1984년.
- 구구문(谷久文)·사원풍(史元豐)·가산(賈珊): 「서사의 변천: 시룽런(喜龍仁) 사진이 근대 중국 정원 연구를 형성함」, 『풍경원림(風景園林)』 2025년 제32권 제1기, 133-140쪽.
- Osvald Sirén: Gardens of China 원서 스캔본, New York: The Ronald Press Company,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