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루

악양루는 후난성 웨양시 웨양루구에 있다. 당대에 이미 악주성에서 동정호에 임한 성루였고, 북송에 등종량이 중수하고 범중엄이 《악양루기》를 지었으며, 지금 남은 주루는 청 광서 6년의 중건에서 확립된 형식을 잇는다. 이 글은 당·송에서 명·청에 이르는 시·기·비기와 지방지를 원문으로 수록하고, 약 1900년부터 일본군 점령 시기까지의 옛 사진으로 그 성곽·호안·거리와 뜨락의 옛 모습을 보존한다.

시대
당
지역
후난
위치
후난성 웨양시 웨양루구
《아세아대관》 제3집: 동정호 쪽에서 멀리 바라본 악양루와 성곽의 전경 옛 모습, 1926년 촬영
《아세아대관》 제3집: 동정호 쪽에서 멀리 바라본 악양루와 성곽의 전경 옛 모습, 1926년 촬영

소개

당 개원 4년(716), 재상 장열(張說)이 악주의 태수로 나아가 문사들을 자주 불러 동정호에 임한 서쪽 성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본래 성방위에 속하던 이 누각문은 이로써 악양루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뒤에 악주를 지난 시인들은 또 대부분 귀양 온 이들이라, 오르며 지은 작품에는 늘 나그니 길과 시세가 남긴 근심이 배어 있다. 대력 3년(768) 겨울, 두보(杜甫)는 병든 몸으로 떠돌아 악주에 이르러 마침내 오래전부터 듣던 악양루에 올랐다. 눈앞에는 오(吳)와 초(楚)를 가른 호수가 펼쳐지고 곁에는 외로운 한 척의 배뿐이며, 북쪽의 전란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봄, 두보는 그 고을의 장관과 함께 다시 악양루에 올랐는데, 호안에는 매화가 이미 피고 진흙 속에는 새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 끝의 한 구절 “이로부터 다시 남으로 가리라(从此更南征)”는 그가 계속 남으로 갈 뜻을 적은 것이다.

삼백여 년이 지난 뒤, 등종량(滕宗諒)이 죄를 얻어 악주의 지주로 부임하였다. 그는 누각에 오른 뒤 옛 규모가 좁다고 여길 뿐 아니라, 문집과 누각 벽 사이에 흩어진 역대의 제영(題詠)이 훗날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먼저 속관들에게 명하여 당·송 문사들의 문집에서 등림(登臨)의 작품 일흔여덟 수를 뽑아 시대 순서로 돌에 새겨 누각 안 남북 두 벽에 끼워 넣게 하였다. 경력 5년(1045) 봄, 등종량은 장인들을 모아 옛 누각을 넓혀 지었다. 같은 해 유월, 그는 또 《동정추만도(洞庭秋晚圖)》를 범중엄(范仲淹)에게 보내어, 멀리 등주(鄧州)에 있는 이 벗에게 새 누각의 기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범중엄은 몸소 악주에 오지 않았으나 동정호의 맑음과 흐림, 바람과 비를 빌어 “천하의 근심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忧而忧,后天下之乐而乐)”라고 썼으니, 한 지방의 성루가 이로부터 이 글과 함께 세상에 전해졌다.

삼십여 년이 지난 뒤, 원풍 원년(1078) 시월에 악주 주치(州治)가 있는 내성의 서남 모퉁이에서 불이 나 불길이 악양루에까지 미쳤다. 누각 안의 석각은 쓰러지고 갈라져 다만 “사선(謝仙)” 두 글자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고, 불이 난 까닭은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이듬해 봄, 악주 지주를 대리하던 정민첨(鄭民瞻)이 속관들과 함께 옛 모습을 회복하기로 의논하니, 마침 동정호에서 거대한 통나무 백여 개가 떠내려와, 그는 곧 고을 사람들에게 명하여 건져 올려 누각을 고치는 재목으로 쓰게 하였다. 남송 가희 원년(1237)에 악주 지주 이증백(李曾伯)은 여전히 공무의 틈틈이 누각에 올랐다. 십사 년 뒤, 그가 형주(荊州)에 부임하는 길에 악주를 다시 지나니 지난날의 건물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고, 불이 난 해와 까닭은 모두 더는 상고할 수 없었다. 또 한 해가 지나 악주 지주 조여귀(趙汝歸)가 폐허에 새 누각을 지어 그 도양을 이증백에게 보내며 이번 중건의 기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성화 3년(1467), 악주 지부 오절(吳節)은 당시의 악양루가 규모가 좁음을 보고 낡은 것을 헐고 새로 짓고자 하였다. 그 고을이 마침 기근을 만났고 부고(府庫)에도 남는 재정이 없어, 오절은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성화 7년(1471), 곳간에 쌓인 곡식이 있고 부고에도 쌓인 여분이 있으매, 오절은 속관들과 더불어 부고의 남은 돈을 거둬들이고 또 자기 녹봉을 보태어, 그해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완성하였다. 숭정 12년(1639) 유월, 악양루에 다시 불이 났는데 불이 난 까닭은 여전히 기록이 없다. 악주 추관 도종공(陶宗孔)과 지부 대광유(戴光裕)가 곧 중건을 발의하여 도종공이 공사를 주관하였다. 장인들이 누각 기단의 동남 모퉁이에서 매화 무늬를 띤 돌 하나를 파내자, 누각 왼쪽에 이 돌을 간직할 선매당(仙梅堂) 한 채가 다시 더해졌다.

명·청이 바뀔 때, 악주성은 전란 속에 기왓장 더미가 되고 인구가 흩어졌으며, 악양루는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몸체가 기울고 헤어졌다. 순치 8년(1651), 강방(江防)을 맡은 누성(樓晟)과 악주 지부 이약성(李若星)은 곧바로 누각을 고치지 않고 먼저 유민을 불러 모으고 주둔 군사를 단속하였다. 성 안에 다시 인기가 돌자 두 사람이 비로소 돈을 내어 일꾼을 모으고 누각 몸체를 보수하였다. 강희 18년(1679), 이우시(李遇時)가 악주 지부로 부임했을 때 그 고을은 막 오삼규(吳三桂)의 난과 이어진 기근을 겪어 성 안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악양루 또한 기울어 무너지려 하였다. 이우시는 누각 고치기를 잠시 미루고 먼저 농사·구제와 치안을 처리하기로 하였다. 지방이 조금 안정된 뒤 그는 파릉 지현 조사형(趙士珩)과 함께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뜻밖에도 강희 22년에 악주 서문에 다시 큰불이 나 악양루가 또 손상되어, 이듬해에 이르러서야 수리가 완성되었다. 사 년 뒤 또 다른 성내 화재가 누각을 불태웠고, 악주 지부 손도림(孫道林)이 강희 40년(1701)에 중건에 착수하였으나 미처 다 못 끝낸 공사가 다시 홍수에 무너졌다. 파릉 지현 왕국영(王國英)과 호광 순무 포란태(布蘭泰)가 뒤에 각기 강희 54년(1715)과 옹정 4년(1726)에 잇달아 고쳐 지었다.

건령 5년(1740), 호광 총독 반제(班第)가 상주하여 돈을 발급하여 악주성을 손질하고 악양루를 중수하기를 청하니, 악주 지부 전이역(田爾易)과 파릉 지현 장세방(張世芳)이 공사를 주관하였다. 이듬해 낙성된 새 누각은 모두 세 층으로, 사면에 복도와 현(軒)이 뻗어 나와 평면이 십자(十字)와 같았다. 건령 39년(1774), 악주 지부 난제석(蘭第錫)과 파릉 지현 웅위장(熊慰獎)이 또 상주하여 누각 고치기를 청하였다. 이듬해, 누각 왼쪽에 선매정(仙梅亭)을 다시 세우고 오른쪽에 망선각(望仙閣)을 늘려 지어, 주루 양옆에 이로부터 각각 하나의 부속 누정이 갖추어졌다.

함풍 2년(1852), 악주 지부 염창(廉昌)과 파릉 지현 호방곡(胡方穀)이 서문 밖의 옹성(月城)[1]을 고쳐 쌓을 때 악양루도 아울러 수리하였다. 함풍 중엽에 청군과 태평군이 악주에서 십여 차례 싸우며 주루와 주변 성곽이 모두 파괴되었다. 동치 6년(1867)에 이르러 호북 순무 증국관(曾國荃)이 악주 관문의 세금을 거둬들이매 주루·두모각(斗姆閣)과 선매정이 비로소 중수되었고, 두모각도 이번 공사에서 삼취정(三醉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십여 년이 지난 뒤 동정호 물이 또 누각 기단을 갈라지게 하였다. 악주 지부 장덕용(張德容)은 제자리에서 계속 기워 고치지 않고, 광서 6년(1880)에 주루와 두 정자를 성 안쪽으로 여섯 장(丈) 남짓 옮기고 호수에 임한 쪽에 호안(駁岸)[2]을 쌓았다. 오늘날의 주루가 잇는 것은 바로 이번 중건으로 확립된 형식이다.

민국 시기에 군벌이 뒤섞여 싸우며 악양루 안이 병영과 마굿간으로 쓰였고, 문과 창·편액과 주련·비각이 끊임없이 손상되었다. 민국 21년(1932), 후난성 정부가 돈을 발급하고 지방에 모금하여, 웨양 경비사령 단형(段珩)과 현 교육국장 뇌신경(廖莘耕)이 대수리를 주관하였고, 이 년 뒤 주루·선매정·삼취정과 문루가 함께 수리되어 완성되었다. 민국 27년(1938) 십일월, 일본군이 웨양 현성을 침점하고 누각 안을 다시 웨양에서 우한 일대의 군사·경제 정보를 수집하는 경찰 분서(分署)로 삼아 탄약과 연료를 쌓아 두고 중국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일본군이 웨양을 점령한 칠 년 동안 누각 안의 귀중한 문물도 대량으로 도둑맞았다. 민국 34년(1945) 일본이 항복한 뒤, 국민정부군 제18군 제18사가 구월 초에 주악(駐岳)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사단본부를 누각 안에 두었다. 같은 해 십일월, 후난성 정부 주석 왕동원(王東原)이 명승을 보호하는 고시를 내려 군대가 계속 점용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였다.

1950년, 웨양현 인민정부가 처음으로 돈을 발급하여 악양루를 수리하고, 썩은 목부재를 갈아 내고 기둥과 보를 보강하며 누각 몸체에 다시 칠을 하고, 누각에 오르는 길도 정비하였다. 1955년 성문과 호수에 임한 기안(岸基)을 수리할 때, 남아 있던 시문(詩文)·도상(圖像) 석비 마흔두 개를 다시 주루 뒷벽에 끼워 넣었다. 1975년과 1978년에 삼취정과 이미 기울어진 선매정이 차례로 낙가(落架)하여 중수되었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흰개미와 오랜 누수가 또 주루의 많은 기둥과 보를 썩게 하였다. 국가 문물 부문의 비준을 거쳐, 웨양시는 1983년 3월 15일부터 악양루를 통째로 낙가하기 시작하여, 해체한 부재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계속 쓸 수 있는 옛 부재는 가급적 고쳐 남긴 뒤, 광서 6년에 이루어진 청대의 형식에 따라 다시 조립하였다. 1984년 5월 1일, 복원된 악양루가 다시 개방되었다. 천여 년 동안 누각 몸체는 거듭 수화(水火)와 병화(兵燹)를 겪고 기둥과 보가 바뀌며 위치는 안쪽으로 옮겨졌다. 대대로 사람들이 옛 터와 옛 형식 사이에서 누각을 다시 세웠고, 당·송 이래의 등림과 제영도 그에 따라 오늘날까지 남았다.

역사 문헌

《두공부집(杜工部集)》

昔闻洞庭水,今上岳阳楼。吴楚东南坼,乾坤日夜浮。

예로부터 동정호 물을 듣기만 하더니,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오(吳)와 초(楚)가 동남으로 갈라지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물 위에 떠도네.

亲朋无一字,老病有孤舟。戎马关山北,凭轩涕泗流。

친척과 벗에게서는 한 자 소식도 없고, 늙고 병든 몸에 외로운 배 한 척뿐이네. 북쪽 관산에는 아직 군마가 달리니, 난간에 기대어 눈물이 흐르네.

《두보집》 권 5 《등악양루》, 당 두보 지음, 사부총간에 남해 반씨 소장 송간본을 영인한 판본

湖阔兼云雾,楼孤属晚晴。礼加徐孺子,诗接谢宣城。

호수는 넓어 구름 안개를 아우르고, 누각은 외로이 저녁의 개임에 이르네. 예를 더해 주심은 서유자(徐孺子)에게 미친 것 같고, 시를 이어 지음은 사선성(謝宣城)에 잇닿았네.

雪岸丛梅发,春泥百草生。敢违渔父问,从此更南征。

눈 덮인 기슭에 뭇 매화가 피고, 봄 진흙에 온갖 풀이 돋아나네. 감히 어부의 물음을 어기겠는가, 이로부터 다시 남으로 가리라.

《두공부집》 권 18 “근체시 예순한 수” 《배배사군등악양루》, 당 두보 지음, 각본

《악양루기(岳陽樓記)》

庆历四年春,滕子京谪守巴陵郡。越明年,政通人和,百废具兴,乃重修岳阳楼,增其旧制,刻唐贤今人诗赋于其上,属予作文以记之。予观夫巴陵胜状,在洞庭一湖。衔远山,吞长江,浩浩汤汤,横无际涯,朝晖夕阴,气象万千。此则岳阳楼之大观也,前人之述备矣。然则北通巫峡,南极潇湘,迁客骚人,多会于此,览物之情,得无异乎?若夫霪雨霏霏,连月不开。阴风怒号,浊浪排空。日星隐耀,山岳潜形。商旅不行,樯倾楫摧。薄暮冥冥,虎啸猿啼。登斯楼也,则有去国怀乡,忧谗畏讥,满目萧然,感极而悲者矣。至若春和景明,波澜不惊,上下天光,一碧万顷,沙鸥翔集,锦麟游泳,岸芷汀兰,郁郁青青。而或长烟一空,皓月千里,浮光跃金,静影沉璧,渔歌牙答,此乐何极!登斯楼也,则有心旷神怡,宠辱偕忘,把酒临风,其喜洋洋者矣。嗟夫!予尝求古仁人之心,或异二者之为,何哉?不以物喜,不以己悲。居庙堂之高,则忧其民;处江湖之远,则忧其君。是进亦忧,退亦忧。然则何时而乐耶?其必曰:“先天下之忧而忧,后天下之乐而乐乎!”噫!微斯人,吾谁与归?时六年九月十五日。

경력 4년 봄, 등자경(滕子京)이 귀양되어 파릉군의 태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이르러 정사가 통하고 백성이 화합하며 온갖 폐한 것이 모두 일어나자, 이에 악양루를 중수하여 그 옛 규모를 넓히고, 당의 어진 이들과 오늘날 사람들의 시부를 그 위에 새기며, 나에게 글을 지어 이를 기록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내가 보건대 파릉의 아름다운 경관은 동정호 하나에 있다. 먼 산을 입에 물고 장강을 삼켜, 물결이 넓고 거세게 끝없이 펼쳐지며, 아침의 햇살과 저녁의 음기에 기상이 천변만화한다. 이것이 악양루의 큰 경관이니, 앞사람들의 서술이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북으로 무협(巫峽)에 통하고 남으로 소상(瀟湘)에 이르매, 귀양 온 나그네와 시인들이 대부분 여기에 모이니, 경물을 보는 마음이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만일 긴 비가 흩날려 몇 달이고 개지 않고, 음산한 바람이 울부짖으며 탁한 물결이 하늘로 치솟고, 해와 별이 빛을 감추며 산악이 형체를 숨기고, 장사꾼과 나그네가 다니지 못하고 돛대는 기울고 노는 부러지며, 저물 무렵 어두워져 범이 울고 원숭이가 우는 때에, 이 누각에 오르면 곧 나라를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참소를 걱정하고 비방을 두려워하여, 눈에 가득한 쓸쓸함에 감회가 지극하여 슬퍼하게 된다. 이른 봄 화창하고 경치 밝을 적에는 물결이 놀라지 않고, 위아래 하늘빛이 한 조각 푸름에 만 경이며, 갈매기가 날아 모이고 비단 같은 물고기가 헤엄치며, 물가의 지초와 섬의 난초가 울창하고 푸르다. 혹은 긴 연기가 한꺼번에 걷히고 밝은 달이 천 리를 비추면, 뜬빛은 금처럼 뛰놀고 고요한 그림자는 가라앉은 구슬 같으며, 고기잡이 노래가 서로 화답하니, 이 즐거움이 어찌 끝이 있으랴. 이 누각에 오르면 곧 마음이 넓고 정신이 상쾌하여 총애와 치욕을 함께 잊고, 술잔을 들어 바람을 마주하니 그 기쁨이 넘쳐흐르게 된다. 아! 내가 일찍이 옛 어진 사람의 마음을 구하니, 혹은 이 두 가지와 다르니 무슨 까닭인가. 물물로 기뻐하지 않고 자신으로 슬퍼하지 않으며, 조정의 높은 곳에 있으면 그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의 먼 곳에 있으면 그 임금을 근심한다. 이것이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이니, 그러나 언제 즐거워할 것인가. 반드시 “천하의 근심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보다 뒤에 즐거워하라”라고 말하리라. 아! 이 사람이 아니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때는 6년 9월 15일.

《범문정공집》 《악양루기》, 북송 범중엄 지음, 사부총간본

《구기서(求記書)》

六月十五日,尚书祠部员外郎、天章阁待制、知岳州军州事滕宗谅,谨驰介致书,恭投邠府四路经略安抚资政谏议节下:窃以为天下郡国,非有山水瑰异者,不为胜,山水非有楼观登览者,不为显,楼观非有文字称记者,不为久,文字非出于雄才巨卿者不成著。今古东南郡邑,当山水间者比比,而名与天壤同者,则有豫章之滕阁,九江之庾楼,吴兴之消暑,宣城之叠嶂,此外无过二三所而巳。虽寝历于岁月,挠剥于风雨,潜消于兵火,圯毁于难患,必须崇复而不使随圯者,盖由韩吏部、白宫傅以下,当时名贤辈各有纪述,而取重于千古者也。巴陵西跨城𬮱,揭飞观,署之曰岳阳楼,不知倜落于何人。自有唐以来,文士编集中无不载其声诗赋咏,与洞庭君山率相表里。宗谅初诵其言,而疑且未信,谓作者夸说过矣。去秋以罪得兹郡,入境而疑与信俱释,及登楼,而恨向之作者所得仅毫末尔。惟有吕衡州诗云:襟带三千里,尽在岳阳楼。此粗标其大致。自是日思以宏大隆显之,亦欲使久而不可废,则莫如文字。乃分命僚属,于韩、柳、刘、白、二张、二杜逮诸大人集中,摘出登临寄咏,或古或律,歌咏并赋七十八首,暨本朝大笔如太师吕公、侍郎丁公、尚书夏公之作,榜于梁栋间。又明年春,鸠材僝工,稍增其旧制。古今诸公于篇咏外,率无文字称纪。所谓岳阳楼者,徒见夫屹然而踞,岈然而负,轩然而竦,伛然而顾,曾不若人具肢体而精神未见也,宁堪久焉?恭惟执事文章器业,凛凛然为天下之时望,又雅意在山水之好,每观送行还远之什,未尝不神游物外,而心与景接。矧兹君山、洞庭,杰然为天下之最胜,切度风旨,岂不摅遐想于素尚,寄大名于清赏者哉!冀戎务尠退,经略暇日,少吐金石之论,发挥此景之美,庶漱芳润于异时,知我朝高位辅臣,有能淡味而远托思于湖山数千里外,不其胜与!谨以洞庭秋晚图一本,随书贽献,涉毫之际,或有所助。干冒清严,伏惟惶灼。

유월 십오일, 상서사부원외랑·천장각대제·지악주군주사 등종량이 삼가 편지를 급히 보내어, 공손히 빈부 사로 경략안무 자정건의 절하께 아뢰옵니다. 제가 삼가 생각하건대, 천하의 군국은 기이한 산수가 있지 않으면 빼어나지 못하고, 산수라도 오르고 바라볼 누관이 있지 않으면 드러나지 못하며, 누관이라도 기리고 기록하는 글이 있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글이라도 웅재와 거경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저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과 옛날 동남의 군읍으로 산수 사이에 있는 곳이 비록 많으나, 이름이 하늘과 땅과 함께하는 것으로는 예장의 등각, 구강의 유루, 오흥의 소서루, 선성의 첩장루가 있고, 그 밖에는 두세 곳을 넘지 못합니다. 비록 세월 속에 오래도록 지나고 비바람에 깎이며 병화 속에 스러지고 난환에 기울어 부서져도, 반드시 높이 일으켜 회복하여 따라 무너지지 않게 한 것은, 대개 한이부·백궁부 이하로 당시 이름난 어진 이들이 각기 기술이 있어 천고에 중시된 까닭입니다. 파릉은 서쪽으로 성곽을 걸치고 날아갈 듯한 누관을 세워 이를 악양루라 붙였으나, 어느 사람이 솟구쳐 세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 이래로 문사들의 문집에는 그 소리와 시와 부를 싣지 않음이 없어, 동정호·군산과 서로 겉과 속을 이루었습니다. 종량이 처음 그 말을 읽고서는 의심하여 믿지 않아, 지은 이들이 과장하여 말한 것이 심하다 하였습니다. 지난가을 죄로 이 군을 얻어 경계에 들어서니 의심과 믿음이 함께 풀렸고, 누각에 오르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지난날의 지은 이들이 얻은 것이 겨우 털끝만 함을 애석히 여겼습니다. 오직 여형주의 시에 이르기를 “삼천 리의 띠와 띠매가 모두 악양루에 있다”라고 하니, 이것이 겨우 그 대강을 표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날마다 생각하기를 그것을 크고 높게 드러내고, 또 오래도록 폐하지 못하게 하려면 글보다 나은 것이 없어, 이에 속관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한유·유종원·유우석·백거이, 두 장씨, 두 두씨에서 여러 대인들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등림하여 읊은 것을 뽑아내어 고체이거나 율체이거나 가영과 부를 아울러 일흔여덟 수요, 아울러 본조의 큰 필치인 태사 여공·시랑 정공·상서 하공의 작품을 들보와 기둥 사이에 펴 걸었습니다. 또 이듬해 봄에 재목을 모으고 공역을 벌여 그 옛 제도를 조금 넓혔습니다. 고금의 여러 공들은 편영 밖에 대부분 기록하는 글이 없습니다. 이른바 악양루는 다만 우뚝하게 웅거하고 벌어지게 짊어지며, 높이 솟고 굽어 우러르는 것이 보일 뿐이니, 오히려 사람이 지체를 갖추었으되 정신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만 못하매, 어찌 오래 견디겠습니까. 공손히 삼가건대 집사의 문장과 기업은 두렵도록 천하의 시망이요, 또 높은 뜻이 산수를 좋아함에 있으매, 보내고 돌려보내며 먼 길의 시편을 볼 때마다 일찍이 정신이 만물 밖에 노닐며 마음과 경치가 서로 접함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이 군산·동정은 우뚝하게 천하의 가장 빼어난 것이니, 그 풍취를 헤아려 보면 어찌 멀리 생각을 펼쳐 평소 숭상함에 기대고 큰 이름을 맑은 감상에 기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라건대 군무가 조금 물러나 경략하시는 여가의 날에 조금이나마 금석의 논을 토하시어 이 경치의 아름다움을 펴 주시면, 다른 때에 그 향기로운 윤기를 머금어 우리 조정의 높은 보신 중에 담담한 멋으로 수천 리 밖의 호산에 생각을 멀리 기탁하실 수 있는 분이 있음을 알게 하리니, 그것이 빼어나지 않겠습니까. 삼가 동정추만도 한 부를 편지에 따라 예물로 바치오니, 붓을 적시실 때에 혹시 도움이 있을까 합니다. 청엄하심을 감히 범하오니, 엎드려 두렵고 조급할 뿐입니다.

《[건령]호광통지》 권 96 《구기서》, 북송 등종량 지음, 청 매주 등이 감수하고 하역서 등이 찬수

《악양기승회편(岳陽紀勝彙編)》

东南之国富山水,惟洞庭于江湖名最大,环占五湖,均视八百里。据湖面势,惟巴陵最胜。濒岸风物,日有万态,虽渔樵云鸟,栖隐出没,同一光影中,惟岳阳楼最绝。古今才人巨公,登临寄傲,流叹声藻,散在编简,或传诵于人口者,才不过一二。惟唐相张燕公文字最著,询之耆旧,则曰:楼得名始命于公矣。

동남의 고을들은 산수가 풍부하나, 오직 동정호가 강호 가운데 이름이 가장 크다. 오호를 두루 점유하여 팔백 리로 골고루 보인다. 호면의 형세에 의거하건대 오직 파릉이 가장 빼어나다. 물가의 풍물은 날마다 만 가지 모습이 있어, 비록 어부와 나무꾼, 구름과 새가 숨고 드러내며 같은 빛과 그림자 속에 있을지라도, 오직 악양루가 가장 뛰어나다. 고금의 재인과 거공이 오르고 내려가며 높은 뜻을 기탁하고 흘러가며 탄식한 소리와 문장이 편간에 흩어지거나 사람들 입에 전하여 읊어지는 것이 겨우 한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당의 재상 장연공의 글이 가장 드러나니, 기구에게 물으면 곧 말하기를, 누각이 이름을 얻음은 처음으로 공에게서 명명되었다 한다.

即指导往迹,参传其说,皆略而不书。顷罹三国,兹实战冲,镇守者间有贤杰,非尚智力,则任权术,处清境,殆距炉炭,岂暇优游坐啸,摅发清蕴也哉?六朝通三百三十七年,惟颜延年、阴子铿见于章句,余皆寂寥无闻。李唐恢宇,享祚甚宏远。岳去长安尤僻,在当时名贤辈出,能至此者,率自迁谪而来,故所属篇,类多离骚叹惋之意,然于徘徊幽觉,未尝出盈厌之语。殊俗移人,果如是乎?天宝中,苏源明刺东明,因石潴仿佛遐致,号小洞庭,芳晨良夜,以为留客宴喜之地。每冠盖盛集,酒行思缨,苏必雅吟自放,四顾赓唱,雕词丽句,传诵不泯。粤自元和五年,令狐楚节制汝上,相去方八十载,咨考故处,已茫然无得矣。既叹而愤,乃引金石以永好事之意。切寻古人之旷怀高韵,缅慕天末,写千里于一局之水,使彼时风月独异于他郡,所乐也犹如此,后贤惜其遗音逸事,孜孜重显之,盖于赏情爱景之心无少负也。

곧 옛 자취를 가리켜 인도하고 그 설을 참고로 전하나, 모두 간략히 하고 쓰지 않았다. 근래 삼국의 난을 입으니, 이곳은 실로 전란의 요충지요, 지키던 자 가운데 어진 걸출함이 있었으되, 지력을 숭상하지 않으면 권술에 맡겨, 맑은 경지에 처하면서도 거의 풀로를 멀리 여겼으니, 어찌 여유롭게 앉아 휘파람 불며 맑은 속뜻을 펼칠 겨를이 있었겠는가. 육조가 통틀어 삼백삼십칠 년이나 오직 안연년·음자경이 장구에 보일 뿐, 나머지는 모두 적요하여 듣는 바가 없다. 이당이 널리 우주를 펴고 향유한 국작이 매우 넓고 멀었다. 악주는 장안을 떠나 더욱 외져, 그때에 이름난 어진 이가 배출되었으되 능히 이곳에 이른 자는 대부분 귀양에서 왔으므로, 그 소속된 편이 대부분 《이소》와 같은 탄식과 애석함의 뜻이 많았으나, 배회하며 그윽히 느낌에 일찍이 넘치거나 싫어하는 말을 내지 않았다. 다른 풍속이 사람을 옮김이 과연 이와 같은가. 천보 연간에 소원명이 동명의 자사가 되어, 돌담의 물가를 인하여 아득한 정취를 모방하여 작은 동정호라 불렀고, 아름다운 아침과 좋은 밤에 손님을 머물게 하여 연회를 즐기는 곳으로 삼았다. 관개가 크게 모여 술이 돌고 갓끈을 생각할 때마다, 소씨는 반드시 우아하게 읊으며 스스로를 놓아, 사방을 둘러보며 화창하니, 다듬은 구절과 아름다운 글귀가 전하여 읊어져 꺼지지 않았다. 원화 5년으로부터 영호초가 여상을 절제하였으니, 서로 떨어진 지 겨우 팔십 년인데, 옛 처소를 자문하고 상고하니 이미 아득하여 얻은 바가 없었다. 이미 탄식하고 분하여, 이에 금석을 끌어들여 아름다운 일의 뜻을 오래도록 하였다. 간절히 옛사람의 넓은 품회와 높은 운치를 찾아 하늘 끝을 사모하고, 천 리를 한 웅덩이의 물에 옮겨 써서, 그때의 풍월로 하여금 홀로 다른 군과 다르게 하였으니, 즐긴 바가 또한 이와 같았다. 뒤의 어진 이가 그 남긴 소리와 놀라운 일을 아껴, 부지런히 거듭 드러내니, 대개 경치를 즐기고 풍경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도 저버림이 없는 것이다.

况仆忝宰于今,旦暮为湖山主事,弗虑乎?一旦众作,与桡栋同沦委,则后之议我者以为何如,亦将恐风月仇人不浅矣。遂用崇新基址,遍索墙堵间,及本朝诸公歌诗古赋,纪以时代,次以岁月,不以官爵贵贱为升降,俾镵石置于南北二壁中,庶几他日有闻韶忘味,君子知仆之志也。然历世寝远,必多遗难备,直以所存者笔之。如其删繁撷英,请俟来者焉。

하물며 나는 지금 이곳의 다스림을 욕되게 맡아 아침저녁으로 호산의 주사가 되었으니,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루아침에 여러 작품이 무너지는 들보와 함께 가라앉아 버려지면, 뒤에 나를 논하는 자가 어떻게 여기겠으며, 또 풍월의 원수가 적지 않음이 두려울 것이다. 이에 마침내 기지를 높이 새롭게 하고, 담장 사이를 두루 찾아, 본조 여러 공의 가시와 옛 부에 이르러, 시대로 기하고 세월로 차례하여, 관작의 귀천으로 오르내리게 하지 않고, 돌을 새겨 남북 두 벽 가운데 두게 하였다. 거의 훗날 소를 듣고 맛을 잊는 일이 있기를 바라며, 군자가 나의 뜻을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러 세대가 점점 멀어져 반드시 잃어버려 갖추기 어려운 것이 많으니, 다만 남아 있는 것으로 붓을 삼는다. 만약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뛰어난 것을 뽑는 일은, 청컨대 오는 이를 기다릴 따름이다.

《악양기승회편》 권 4 《악양루시집서》, 북송 등종량 지음, 청 방공혜 편집, 벽린랑관총서본

岳阳楼在洞庭之滨,延庚挹辛,于登临最胜,创者寝不可考。自唐相张燕公出守于此,其名始著。庆历中,滕子京作而新之,时人以范记、苏书、邵篆,与兹楼号为天下四绝。元丰元年十月,不幸火起于牙城之西南隅,延及于楼。已而同宾僚登古址,石刻皆仆地而裂,独谢仙二字存焉。夫谢仙者,雷部中之神也。神能保其碑,而不能及其屋,何其异也!明年春,议复旧观,适湘神涌水浮至巨木百余,亟命邦人取以为用,若相厥役者,又何异耶?楼成,因镵诸石,一以彰雷笔之灵,一以侈湘神之助。他如登临知胜概者,自得之心目,何待予言。亦有范公记。

악양루는 동정호의 물가에 있어, 경(庚)을 늘이고 신(辛)을 머금어 오르고 내려가기에 가장 빼어나며, 창건한 이는 점차 상고할 수 없다. 당의 재상 장연공이 이곳에 나와 지킨 뒤로 그 이름이 비로소 드러났다. 경력 연간에 등자경이 지어 새롭게 하니, 당시 사람들은 범의 기·소의 글씨·소의 전서를 이 누각과 함께 천하의 사절이라 불렀다. 원풍 원년 시월에 불행히 아성의 서남 모퉁이에서 불이 나 누각에까지 미쳤다. 이윽고 빈료와 함께 옛 터에 오르니, 석각이 모두 땅에 쓰러져 갈라지고 오직 “사선”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 무릇 사선이란 뇌부 가운데의 신이니, 신이 능히 그 비를 지키면서도 그 집에는 미치지 못함이 어찌 그리 이상한가. 이듬해 봄에 옛 경관을 회복하기를 의논하니, 마침 상신이 물을 솟구쳐 거대한 나무 백여 개를 띄워 이르매, 급히 고을 사람들에게 명하여 건져 쓰게 하니, 저 역사를 돕는 듯함이 또한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누각이 완성되매 이에 여러 돌에 새겨, 하나는 뇌필의 신령함을 드러내고, 하나는 상신의 도움을 넓히기 위함이다. 그 밖에 오르고 내려가 빼어난 경개를 아는 것은 마음과 눈에 스스로 얻을 뿐이니, 어찌 나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또한 범공의 기가 있다.

《악양기승회편》 권 4 《중건악양루기》, 북송 정민첨 지음, 청 방공혜 편집, 벽린랑관총서본

《가재잡고(可齋雜稿)》

洞庭天下之胜,岳阳楼又擅洞庭之胜。庆历之记尽矣,后有作者,未易加一辞。岁嘉熙丁酉,曾伯守是邦,每公余登眺,令人浮沤溟渤,培塿大块。缅怀唐开元而后,李、杜、张、孟诸贤,更赋迭咏,不可胜数。

동정호는 천하의 빼어남이요, 악양루는 또 동정호의 빼어남을 거느린다. 경력의 기가 다 하였으니, 뒤에 짓는 자는 한마디 말도 더하기 어렵다. 가희 정유의 해에 증백이 이 고을을 지켜, 항상 공무의 여가에 올라 바라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명발 위의 물거품 같고 큰 땅 위의 작은 언덕 같게 하였다. 멀리 당 개원 이후를 회모하니, 이·두·장·맹 여러 어진 이들이 번갈아 부를 짓고 잇달아 읊어 헤아릴 수 없다.

至我朝文正范公,惓惓焉以天下为忧乐,斯文一出,斯楼之伟观增重。去今二百载,星回物换,而江涛滚滚,与公风烈,盖巍然独存也。后十有四祀,曾伯以牧荆道过之,亟访徙倚,殆山川不可复识,乃知昔之栋宇久已灰烬,今楼非故楼矣,怆然为之感慨。越明年九月,郡侯浚仪赵汝归书来,以图示,则危栏杰观,葺废址而新之,君山本来面目,欣然如对立,属为之记。曾伯俯仰畴昔,虽不能忘情于此,率尔援笔,多见其不知量也。顾人事有因革,地势无古今,世之出新奇之见者,每至越故常,安简陋者又惮于改作,此天下事不能尽如人意者十八九。非有英材磊落之士,心眼轩豁,起古意于寂寥,舒世虑之郁勃,将视此为传舍,岂屑置念哉?如侯之心,足以经营四方,不以一楼而止。侯帝室之胄,所至有治行,及是楼与政俱成,会命提点本路刑狱,仍郡牧,徂重湖,泛巨波,川后山灵方尽听弹压,匪是亦畴克胜?余虽未获从侯凭高举酒,挹胜概于几席,意岳之人士将复见庆历气象,已于斯占之,庸记岁月云。楼之楹若干,暨费计若干,抑末耳,不书。

우리 조정의 문정 범공에 이르러서는 정성스레 천하를 근심과 즐거움으로 삼으니, 이 글이 한번 나오매 이 누각의 웅장한 경관이 더욱 무거워졌다.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을 지나 별이 돌고 만물이 바뀌었으되, 강의 물결은 구르듯 흘러 공의 풍절과 함께, 대개 높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십사 년 뒤, 증백이 형주의 목을 지나며 이곳을 지나, 급히 찾아 배회하니, 거의 산천을 다시 알아볼 수 없어, 이에 지난날의 건물이 오래전에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지금의 누각은 옛 누각이 아님을 알고, 슬프게 이를 위해 감개하였다. 이듬해 구월에 지나, 군후 준의 조여귀가 편지를 보내어 그림으로 보여주니, 곧 높은 난간과 뛰어난 누관이 폐터를 손질하여 새롭게 하였고, 군산의 본래 면목이 기쁘게 마주 서 있는 듯하여,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증백이 지난날을 오르내리며 돌아보니, 비록 이에 정을 잊지 못하나 경솔히 붓을 들어, 대개 자기 분수를 모름이 드러날 따름이다. 돌아보건대 인사에는 계승과 혁신이 있고 지세에는 고금이 없으니, 세상에 새롭고 기이한 견해를 내는 자는 늘 옛 법도를 넘기에 이르고, 낡고 졸함에 편안한 자는 또 고쳐 짓기를 꺼리매, 이것이 천하의 일이 사람의 뜻을 다 따르지 못하는 것이 십중팔구이다. 영재(英才)의 넓고 환한 선비가 아니면, 마음과 눈이 툭 터져 적요한 가운데 옛 뜻을 일으키고 세상의 근심의 울울함을 펼치며, 장차 이것을 여관처럼 여길 것이니, 어찌 생각을 둘 것을 꺼리겠는가. 후(侯)의 마음과 같으면 사방을 경영하기에 족하여 한 누각으로 그치지 않으리라. 후는 제실의 자손으로 가는 곳마다 다스린 행적이 있어, 이 누각과 정사가 함께 이루어지매, 마침 본로의 형옥을 제점하고 여전히 군목을 겸하라는 명을 받으니, 겹호수에 나아가 큰 물결에 떠서, 천후(川后)와 산령(山靈)이 바야흐로 다 탄압을 듣나니, 이가 아니면 또 누가 능히 이기겠는가. 나는 비록 후를 따라 높이 올라 술잔을 들며, 빼어난 경개를 자리 사이에 머금지는 못하였으나, 악주의 인사들이 장차 경력의 기상을 다시 볼 것을 이미 이에 점쳤다. 쓸데없이 세월을 기록한다. 누각의 기둥이 얼마이고 아울러 비용의 계산이 얼마인지는, 억지로 말미일 뿐이니 쓰지 않는다.

淳祐辛亥良月,覃怀李某记。

순우(淳祐) 신해의 해 좋은 달에, 담회의 이씨가 기록하다.

《가재잡고》 권 21 《중건악양루기》, 남송 이증백 지음

《악양풍토기(岳陽風土記)》

岳阳楼,城西门楼也。下瞰洞庭,景物宽阔。唐开元四年,中书令张说除守此州,每与才士登楼赋诗,自尔名著。其后,太守于楼北百步复创楼,名曰燕公楼。山海经言:洞庭沅、澧之交,潇湘之渊,是为九江之门。按澧、鼎、沅、湘合诸蛮、黔南之水,汇为洞庭,至巴陵与荆江合而东,州据其上。水经云:湘水右会小青口,资水也,世谓之益阳江,右则沅水注之,谓之横房口,东到微湖,世谓之糜湖,西流注为江,谓之糜湖口。左则澧水,谓之武陵江。凡此五水,注为洞庭,北会为大江,名曰五潴。战国策曰:秦与荆战,大破之,袭郢,取洞庭五潴。楚辞帝子降兮北潴。皆其地也。寰宇记云:郡有青草、洞庭、巴丘二湖,青草湖中有青草山,冬春水■,皆■■也。洞庭,洞府之庭,上有洞庭真君庙堂,巴丘之名今不著。

악양루는 성의 서문루이다. 아래로 동정호를 내려다보니 경물이 넓고 넓다. 당 개원 4년에 중서령 장열이 이 주의 태수에 제수되어, 늘 재사와 더불어 누각에 올라 시를 지었으니, 이로부터 이름이 드러났다. 그 뒤 태수가 누각 북쪽 백 보에 다시 누각을 창건하여 이름을 연공루라 하였다. 《산해경》에 이르기를 “동정은 원(沅)·예(澧)의 만남이요, 소상의 못이니, 이것이 구강의 문이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예·정·원·상이 여러 만(蠻)·검남(黔南)의 물과 합하여 동정호로 모이고, 파릉에 이르러 형강과 합하여 동으로 가니, 주가 그 위에 있다. 《수경》에 이르기를 “상수(湘水)의 오른쪽에 소청구(小青口)가 만나니, 자수(資水)이며 세상에서는 익양강이라 이른다. 오른쪽에 원수(沅水)가 쏟아지니 횡방구(橫房口)라 하고, 동쪽으로 미호(微湖)에 이르러 세상에서는 미호(糜湖)라 하고, 서쪽으로 흘러 쏟아져 강이 되니 미호구(糜湖口)라 한다. 왼쪽에는 예수(澧水)이니 무릉강이라 한다. 무릇 이 다섯 물이 쏟아져 동정호가 되고, 북으로 모여 큰 강이 되니, 이름하여 오저(五潴)라 한다”라고 하였다. 《전국책》에 이르기를 “진(秦)이 형(荊)과 싸워 크게 깨뜨리고, 영(郢)을 습격하여 동정 오저를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초사》에 “제자가 내리시네 북저(北潴)에”라고 하였으니, 모두 그 땅이다. 《환우기》에 이르기를 “군에 청초(青草)·동정, 파구(巴丘) 두 호수가 있고, 청초호 가운데 청초산이 있어 겨울·봄에 물이 ■하니, 모두 ■■이다”라고 하였다. 동정은 동부(洞府)의 뜰이니, 그 위에 동정진군의 묘당이 있고, 파구의 이름은 지금 드러나지 않는다.

《악양풍토기》, 북송 범치명 지음, 명 오관 교정, 오관 각본

《중건악양루기(重建岳陽樓記)》

岳阳楼在岳州府治西南右瞰洞庭左挹君山波光峦影万景在目诚一郡伟观也图志莫详创始然考之唐李杜诸贤皆有赋岳阳楼诗其来巳久至宋庆历间郡守滕宗谅子京重建范文正公希文作记而后岳阳楼之名益显于世庆历至是四百余年中间兴废不知其几矣成化丁亥进士眉山吴节以郎官有声出守兹郡登览之余怃然有感谓湖山景象不减旧闻而楼之规模大非昔比询之则后来郡人所构卑陋弗称亟欲改作还于旧观适视篆之初年饥用乏力未暇及久之政务渐举𡻕时渐稔廪有积粟库有积贰乃谋诸僚住稍出羡余兼助巳俸募工饬材撤其旧而新之始事于辛卯冬十一月讫工于壬辰夏五月杰栋峥嵘层檐翚飞高宏壮丽有加于前落成之日众皆欣悦以为盛事不可无述于是太守具事状介太仆寺丞邓君廷瓒来征予记嗟乎物不自美因人而美此理也夫以岳阳为楼据有洞庭之胜既云美矣而范公为记又历叙阴晴变态之妙以寓夫先忧后乐之心使人诵而味之非惟不出户庭而湖山景物尽在目中凡素存忧国忧民之念者自将惕然警省而油然兴起矣然则是楼之建岂为游观之好哉盖深有慕于公之为人而追寻芳躅思欲企而及之者也予闻太守治岳廉慎有为九载之间士安其教民安其政而吏亦怡然于禁令之下无敢侈然以肆者夫为郡而能仁于其民无愧于公之心也建楼无愧于公之文也公何人也希之则是子于太守有取焉于是乎书

악양루는 악주부 치소의 서남에 있어, 오른쪽으로 동정호를 굽어보고 왼쪽으로 군산을 끌어당겨, 물빛과 봉우리의 그림자에 만 가지 경관이 눈앞에 있으니, 참으로 한 군의 웅장한 경관이다. 도지(圖志)에 그 창건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상고하건대 당의 이·두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악양루의 시를 지었으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송 경력 연간에 군수 등종량 자경(子京)이 중건하고 범문정공 희문(希文)이 기를 지은 뒤로 악양루의 이름이 세상에 더욱 드러났다. 경력에서 이에 이르기까지 사백여 년, 그 사이의 흥폐를 그 몇 번인지 알 수 없다. 성화 정해년에 진수 미산 오절이 낭관으로 명성이 있어 나와 이 군을 지키니, 오르고 바라본 나머지에 망연히 느낌이 있어, 이르기를 호산의 경상은 옛 들음에 줄지 않았으나 누각의 규모는 크게 옛날과 다르다 하였다. 물으니 곧 뒤에 온 군 사람이 지은 것이 낮고 졸하여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간절히 고쳐 지어 옛 경관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마침 관사를 맡아 본 첫해에 기근이 들고 비용이 없어 미처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어 정사가 점차 일어나고 해가 점차 풍년이 들어, 곳간에 쌓인 곡식이 있고 고고(庫)에 쌓인 재물이 있으매, 이에 여러 속관과 의논하여 조금 남은 여분을 내고 아울러 자기 녹봉을 보태며, 일꾼을 모으고 재목을 갖추어, 그 낡은 것을 걷어 내고 새로 하였다. 신묘 겨울 십일월에 일을 시작하여 임진 여름 오월에 공역을 마치니, 뛰어난 마룻대가 험준하게 솟고 겹겹의 처마가 꿩이 나는 듯 날아, 높고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워 앞보다 더하였다. 낙성되는 날에 무리가 모두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이 성대한 일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태수가 사정을 갖추어 태복시승 등군 정찬(鄧廷瓚)을 통해 나에게 기를 청하러 왔다. 아! 사물이 스스로 아름답지 않고 사람으로 인하여 아름다우니, 이것이 이치이다. 무릇 악양을 누각으로 삼아 동정호의 빼어남을 거느린 것은 이미 아름답다 하였으되, 범공이 기를 지어 또 음양의 변화된 모습의 묘함을 차례로 서술하여 그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거워하는 마음을 기탁하매, 사람으로 하여금 읽고 음미하게 하여, 다만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호산의 경물이 모두 눈앞에 있고, 무릇 평소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생각을 간직한 자는 스스로 바야흐로 두렵게 경성(警醒)하고 울연히 일어나리니, 그러나 이 누각의 세움이 어찌 노니 보며 구경하는 즐김을 위함이겠는가. 대개 공의 됨됨이를 깊이 사모하여 그 아름다운 자취를 추구하고 찾아 생각하기를 바라 닿고자 함이다. 내가 듣건대 태수가 악주를 다스림에 청렴하고 신중하며 할 바가 있어, 아홉 해 사이에 선비는 그 가르침에 편안하고 백성은 그 정사에 편안하며, 관리도 금지와 명령 아래에서 기쁜 듯하여 감히 방자하게 제멋대로 하는 자가 없었다. 무릇 군을 다스려 능히 그 백성에게 인(仁)하면 공의 마음에 부끄럽지 않고, 누각을 세움이 공의 글에 부끄럽지 않다. 공이 어떤 사람인가. 그를 바라니 이에 그대가 태수에게 취할 바가 있으므로, 이에 쓴다.

《상문의공집》 권 7 《중건악양루기》, 명 상력 지음, 융경 6년 간본

《선매당기(仙梅堂記)》

崇祯十二年六月晦,岳阳楼灾。其明年冬,余衔天子命至其地,则郡守告成事矣。楼左筑掌大室,附耳为仙梅亭。讯之云:建楼时,掘东南隅数拏,获石,长尺许,阔三之一,石上有墨迹,斜折一枝,错落数萼,墨高于石,可半米,凌凌然具衔霜茹雪之致,观者诧为神物。此仙梅堂所由与楼伊始也。今其石故在壁间,予熟视之,良然。予闻之,掘土得石,譬则破肉得骨也。石之有画文,譬天之有云气,万象百怪,无所不可,何独于梅而异之。天下岂真有神仙出没人间哉?予于此窃有感也。

숭정 12년 유월 그믐에 악양루에 재화가 있었다. 그 이듬해 겨울에 내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 땅에 이르니, 군수가 공사 완성을 아뢰었다. 누각 왼쪽에 손바닥만 한 방을 쌓아 귀처럼 붙여 선매정이라 하였다. 물으니 이르기를, 누각을 지을 때 동남 모퉁이를 몇 뼘 파서 돌을 얻었는데, 길이가 한 자 남짓이요 너비가 그 삼분의 일이며, 돌 위에 먹 자국이 있어 비스듬히 한 가지가 꺾이고 어긋나게 몇 꽃받침이 있으며, 먹이 돌보다 높아 반 자 남짓이 되니, 서릿발 같은 기운이 서리를 물고 눈을 머금은 정취를 갖추어, 보는 이가 놀라 신물(神物)이라 하였다 한다. 이것이 선매당이 누각과 함께 비로소 시작된 연유이다. 지금 그 돌이 벽 사이에 그대로 있어, 내가 자세히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내가 듣건대, 흙을 파서 돌을 얻음은 비유하자면 살을 터뜨려 뼈를 얻는 것과 같다. 돌에 그림 무늬가 있음은 비유하자면 하늘에 구름 기운이 있음과 같아, 온갖 모습과 백 가지 괴이함이 있어 어느 것이든 안 됨이 없는데, 어찌 홀로 매화에 대하여 이상히 여기는가. 천하에 어찌 참으로 신선이 인간 세상에 출몰하겠는가. 나는 이에 남몰래 느낀 바가 있다.

当夫赤焰浃月,寒烬经年,湖山黯淡,乌鹊栖迟,潸然顾之,大难为怀。一日而役千夫,兴百堵,居人过客,怂恿观成,而瑞呈若此,盈城罢市,相顾动色,人人如有所获,岂偶然之故乎?自昔祸福同门,其来莫测。是故,涸川可以得珠,崩崖可以得玉,亦莫不以其所损为其所益,以其所不祥为其所祥。引而伸之,外宁者必内忧,先忧者必后乐,理势实然,天下事皆应作如是观也。

무릇 붉은 불길이 한 달을 채우고 찬 잿더미가 해를 넘기던 때에, 호산이 어둡고 까마귀와 까치가 머무니, 눈물겹게 돌아보며 큰 어려움을 마음에 품었다. 하루에 천 인부를 부리고 백 담을 일으키니, 사는 사람과 지나는 나그네가 서로 부추기며 완성을 보았는데, 상서로움이 이와 같이 나타나매, 온 성이 장사를 그만두고 서로 보며 낯빛이 변하여, 사람마다 얻은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어찌 우연한 까닭이겠는가. 예로부터 화복이 같은 문에서 나오니, 그 옴을 헤아릴 수 없다. 이러므로, 마른 냇물에서 구슬을 얻을 수 있고 무너진 절벽에서 옥을 얻을 수 있으니, 또한 그 손해로 이익을 삼지 않음이 없고, 그 불길함으로 상서로움을 삼는다. 이를 끌어 미치면, 밖이 편안한 자는 반드시 안에 근심이 있고, 먼저 근심하는 자는 반드시 뒤에 즐거우니, 이치와 형세가 실로 그러하매, 천하의 일이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且夫以梅之从来久远也,商、周之际,往往言之。然《说命》言味,《召南》言实,而皆略其华。故桃李舜英,竞胜于《国风》;江蓠杜若,齐芳于《楚骚》。独千百余年,梅无显者。崎岖六朝南北,而梅一日以花闻于天下。积渐至唐与宋,然后极盛。今兹之成形于石,埋光于土,迟之又久,达可而后大行,岂养晦待时,天地亦自然欤?君子观一物之得所、一物之失所,莫不有盛衰兴废之感焉!才人嗟遇,劳臣忧国,睹此将无动心欤!

또한 매화의 유래가 오래됨을 말하건대, 상·주(商周) 사이에 왕왕 이를 말하였다. 그러나 《설명(說命)》은 그 맛을 말하고, 《소남(召南)》은 그 열매를 말하며, 모두 그 꽃을 생략하였다. 그러므로 도리(桃李)와 순영(舜英)이 《국풍(國風)》에서 다투어 이겼고, 강리(江蘺)와 두약(杜若)이 《초소(楚騷)》에서 함께 향기로웠다. 홀로 천백여 년 동안 매화는 드러난 적이 없었다. 험준한 육조 남북을 지나 매화가 하루아침에 꽃으로 천하에 알려졌다. 쌓이고 점차 당과 송에 이르러 그제야 극도로 성하였다. 지금 이 돌 속에 형상을 이루고 흙 속에 빛을 묻었다가, 늦고 오래 지나 통할 수 있게 된 뒤에 크게 행해지니, 어찌 빛을 기르고 때를 기다림이 천지의 또한 자연인가. 군자가 한 사물의 자리를 얻음과 한 사물의 자리를 잃음을 보면, 성쇠와 흥폐의 느낌이 없음이 없다. 재인이 만남을 탄식하고, 수고로운 신하가 나라를 근심하며, 이를 보고 장차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予闻之,物之神者,其生也必有以,其出也必有为。云门之桃,可以疗饥;太原之枣,可以克贼,其往事也。今日者,戎马生郊,饥馑荐至。登斯楼也,诵杜老“凭轩涕泗”之句,聚麋子国循良之吏与介胄之士,究图荒政,箸筹牧圉,后乐先忧,梅其与有助焉。吾以是为梅祝,梅果仙矣!若为是区区藏石在土、画文在石而异之,而神仙之也,天下岂真有神仙在人间哉!

내가 듣건대, 사물의 신령한 것은 그 나옴에 반드시 까닭이 있고, 그 드러남에 반드시 하는 바가 있다. 운문(雲門)의 복숭아는 주림을 치료할 수 있고, 태원(太原)의 대추는 적을 이길 수 있으니, 그 옛일이다. 오늘날에는 군마가 교외에 나고 기근이 거듭 이른다. 이 누각에 오르면, 두 노인의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린다”는 구절을 읽고, 미자국(麋子國)의 순량한 관리와 갑옷 입은 선비를 모아, 황년의 정사를 궁구하고 도모하며, 수레와 목축을 헤아리고, 뒤에 즐기고 먼저 근심하니, 매화가 그것에 도움이 있으리라. 나는 이로써 매화를 축원하니, 매화가 과연 신선이다! 만약 이 사소한 돌이 흙에 숨겨지고 그림 무늬가 돌에 있음을 이상히 여겨, 이를 신선으로 여긴다면, 천하에 어찌 참으로 신선이 인간 세상에 있겠는가!

今天子文武,维后太平可俟,老成过计,或以外宁为忧,而好事者将侈谈蓬莱,以广大帝德。予不佞,断断然不敢以仙名梅,以自附于不著封禅之义,即以是记仙梅堂可矣!

지금 천자가 문무를 겸비하시니, 다만 태평을 기다릴 수 있으되, 노련한 이가 지나치게 헤아려 혹 밖의 편안함을 근심으로 삼고, 좋은 일을 벌이는 자가 장차 봉래(蓬萊)를 과장하여 이야기하며 황제의 덕을 넓히려 하리라. 나는 재주가 없으나, 결연히 감히 신선으로 매화를 이름하지 않아, 스스로 봉선(封禪)을 쓰지 않는 뜻에 기대고, 곧 이로써 선매당의 기를 삼을 뿐이다!

《동정호지》 권 9 《선매당기》, 명 엄수승 지음, 청 기세기 편집

《염원존고(念園存稿)》

湖之有洞庭,楼之有岳阳,东南巨观也,详宋范文正公记中。历今数百年,兵燹之后,山川不改,而人民已非。楼虽岿然仅存,亦倾圯非故。顺治八年,江防兵备楼公晟、知府李公某来莅岳郡,郡则虚无人焉。盖自明末群盗所薮,虎狼榛莽,争此瓦砾之场。大清受命,王师底定楚疆,始留兵戍守,灶垒之外,虚无人犹昔也。赖两公竭力招徕之,然后负耒占茆者稍集。逾年,烟火渐繁,又以威辑兵,俾民与兵画然相安,郡称无事。两公乃登楼纵观而叹曰:域民不以封疆之界,固国不以山溪之险,威天下不以兵革之利,信乎吾与吾民乃今而后乐有斯楼也。于是捐金募役,因其坏缺而修葺之,计费不征派,劳不动众,楼之旧观顿复。

호수에 동정이 있고 누각에 악양이 있음은 동남의 큰 경관이니, 송 범문정공의 기에 자세하다. 지금까지 수백 년을 지나, 병화(兵燹) 뒤에 산천은 바뀌지 않았으나 인민은 이미 아니다. 누각은 비록 우뚝하게 겨우 남았으나, 또 기울고 무너져 옛것이 아니다. 순치 8년에 강방병비(江防兵備) 누공 성(晟)과 지부 이공 모(某)가 와서 악군에 임하니, 군은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대개 명 말년에 뭇 도적이 우거지고 범과 이리와 잡목과 들풀이 이 기왓장의 벌판을 다투었기 때문이다. 대청이 천명을 받아 왕사(王師)가 초(楚)의 강토를 평정하매, 비로소 군사를 남겨 수비하였으나, 부뚜막과 보루 밖에는 텅 비어 사람이 없기가 옛날과 같았다. 두 공이 힘을 다하여 불러 모으매, 그제야 쟁기를 지고 띠를 베는 자가 조금 모였다. 해를 넘겨 연기와 불이 점차 번성하고, 또 위엄으로 군사를 안정시켜, 백성과 군사가 갈라서서 서로 편안하게 하니, 군이 일 없다 일컬어졌다. 두 공이 이에 누각에 올라 마음껏 바라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백성을 경계함에 봉강(封疆)의 경계로 하지 않고, 나라를 굳게 함에 산계(山谿)의 험준함으로 하지 않으며, 천하에 위엄을 떨침에 병혁(兵革)의 날카로움으로 하지 않는다 하니, 참으로 나와 우리 백성이 이제야 이 누각을 가짐을 즐겁게 여기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금을 내어 역사를 모으고, 그 헤어지고 이지러진 것을 따라 수리하니, 비용을 헤아려 징발하지 않고 백성을 수고롭게 움직이지 않으며, 누각의 옛 경관이 곧바로 회복되었다.

八年孟冬,予以使过而登之,两公具述其役,因属予为记。今夫孩提之童,父母爱之,不徒欲其饱暖之而已,或导之游戏之区,授之玩乐之具,凡以教之适心志,忘疲病也。岳父老子弟困极矣,彼习见知其地有大湖之奇、楼观之美,一旦沦废,未有不愀然伤之,不后其衣食者。今即嗷嗷者未息,而斯楼既复,郡之荒陋,楼之崇丽,足以盖之。朝夕登楼一望,犹见湖波晏然,估舶渔艇,往来停泊于楼之下,伊何人之赐邪?则两公今日之役,固所以率作其乐生之心,而两公之能乐民之乐,亦可知已。愿以嗣文正先忧后乐之旨。

8년 초겨울에 내가 사신으로 지나며 이에 올랐는데, 두 공이 그 역사를 자세히 진술하여, 이에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제 무릇 젖먹이 아이를 부모가 사랑함에, 다만 그 배부르고 따뜻함을 바랄 뿐만 아니라, 혹 놀이의 구역으로 이끌어 주고 노는 기구를 주니, 무릇 이로써 그 마음과 뜻을 편안하게 가르치고 지치고 병듦을 잊게 함이다. 악주의 노인과 자제가 곤궁함이 극에 이르렀으나, 저들이 익히 보고 그 땅에 큰 호수의 기이함과 누관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무너져 폐하니, 수심하여 슬퍼하지 않고 그 의식을 뒤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지금 곧 애처롭게 우는 자가 그치지 않았으나, 이 누각이 이미 회복되니, 군의 황폐하고 졸함을 누각의 높고 아름다움이 족히 덮는다. 아침저녁으로 누각에 올라 한번 바라보면, 오히려 호수의 물결이 태연하고, 장사 배와 고기잡이 배가 왕래하며 누각 아래에 정박함을 보니, 이 누구의 은혜인가. 그러면 두 공의 오늘의 역사는 진실로 저들의 삶을 즐기는 마음을 거느려 일으키는 까닭이며, 두 공이 백성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음도 또한 알 수 있다. 원컨대 문정(文正)의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거워하는 뜻을 잇기를 바란다.

《염원존고》 권 4 《중수악양루기》, 청 백윤겸 지음

《악주부지(岳州府志)》

山首衡岳,波首洞庭,此吾楚之大观也。洞庭浩淼八百里,纳九水而吞吐之,而惟岳阳收揽湖山之气,以约束其精华,故形胜甲于天下,此楼所由昉乎?楼之创始莫考,自子京增其式廓,希文力为表章,楼观直与湖山并传。后此兴废靡常,陵谷变迁,而兹楼如日星河岳之不可易。

산은 형악(衡岳)을 으뜸으로 하고 물결은 동정을 으뜸으로 하니, 이것이 우리 초(楚)의 큰 경관이다. 동정호는 아득하고 넓어 팔백 리요, 아홉 물을 받아 삼키고 토하매, 오직 악양이 호산의 기를 거두어 모아 그 정화를 약속하니, 그러므로 형승(形勝)이 천하에서 으뜸이니, 이것이 이 누각이 비롯된 까닭인가. 누각의 창시와 시작은 상고할 수 없으되, 자경이 그 형식과 테두리를 넓히고 희문이 힘써 표창한 뒤로, 누관이 곧 호산과 함께 전해졌다. 이후 흥폐가 일정하지 않고 언덕과 골짜기가 변천하였으나, 이 누각은 해와 별과 강과 악산처럼 바꿀 수 없다.

今上偃武修文,图成王会。我郡伯李公,于退食之暇,登临怀古,慨然以修复为己任,鸠工庀材,踵华增美,规模宏敞,顿复旧观。既成,属予纪其事。予惟湖山胜概,昔人已先我言之,何敢以不文续貂焉。读先忧后乐之语,未尝不三复流连也。姑即以往事证之:荆山铸鼎,骑龙上升,是帝子之所凭依也;张乐广野,钧天奏响,是神人之所窟宅也;湘灵鼓瑟,泪竹成斑,是妃子之所倘佯也。厥后祖龙浮湘,风涛大作,焚山赭树;武帝索酒香山,竟为东方生窃饮。两人求仙,而仙卒不至,山川似亦有灵焉。

지금 황제가 무를 거두고 문을 닦아 왕회(王會)의 이룸을 도모하신다. 우리 군백(郡伯) 이공(李公)이 퇴관하여 쉬는 여가에, 오르고 내려가 옛것을 그리며, 개연히 수복함을 자기 책임으로 삼아, 장인을 모으고 재목을 갖추어, 화려함을 이어 아름다움을 더하니, 규모가 넓고 환하여 곧 옛 경관을 회복하였다. 이미 완성되매,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나는 다만 호산의 빼어난 경개를 옛사람이 이미 나보다 먼저 말하였으니, 어찌 감히 문장 없는 것으로 담비 꼬리를 잇겠는가.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기는 말을 읽으면, 일찍이 세 번 거듭하며 머무르지 않음이 없다. 잠시 곧 옛일로 증명해 보자. 형산(荊山)에서 솥을 주조하고 용을 타고 하늘에 올랐으니, 이는 제자(帝子)가 의지한 곳이다. 넓은 들에서 음악을 벌이니 균천(鈞天)의 연주가 울렸으니, 이는 신인(神人)이 움거로 삼은 곳이다. 상령(湘靈)이 거문고를 타니 눈물에 대나무가 얼룩이 되었으니, 이는 비자(妃子)가 서성인 곳이다. 그 뒤 조룡(祖龍, 진시황)이 상수에 배를 띄우니 바람과 물결이 크게 일어, 산을 불태우고 나무를 붉게 하였다. 무제가 향산(香山)에 술을 구하니 마침내 동방생(東方生, 동방삭)이 몰래 마셔 버렸다. 두 사람이 신선을 구하였으나 신선이 마침내 이르지 않았으니, 산천에 또한 신령함이 있는 듯하다.

夫山川之气,与天地相为表里。天地之所爱惜者,山川亦输诚效款;天地之所妒忌者,山川亦惨淡改观。勿谓此薮泽之微,无关于治乱剥复之数。由斯以观,有道之世,天河绳,器车出,醴泉涌,非虚语也。小范先忧后乐之旨,不旷世而同揆乎!比者河清海晏,湖光时露蜃楼之奇,是亦山川效灵之一证。

무릇 산천의 기는 천지와 서로 겉과 속이 된다. 천지가 아끼고 아끼는 것은 산천도 정성을 바치고 효심을 드리며, 천지가 시새워 미워하는 것은 산천도 쓸쓸히 모습을 바꾼다. 이 못과 늪의 보잘것없음이 다스림과 어지러움과 벗겨짐과 회복의 수에 관계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로써 보건대, 도(道) 있는 세상에는 천하(天河)가 줄을 이루고 기거(器車)가 나오며 단샘이 솟으니, 빈말이 아니다. 소범(小范)의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기는 뜻이 세대를 멀리하지 않고 같은 자취가 아닌가. 근래에 황하가 맑고 바다가 고요하여, 호수의 빛이 때때로 신기루의 기이함을 드러내니, 이 또한 산천이 신령함을 보이는 한 증거이다.

我公以政通人和之余,为此修废举坠之事,于以作镇方州,绍休芳轨,裨益于风俗、人心者不小,岂南楼之风月、黄鹄之烟云所能颉颃哉!是役也,力不劳于民,财不取于帑,经始于癸亥首春,落成于甲子仲夏。遥望层城,丹楼如霞,目之者不能发一语。游者熙熙,如登春台。吾有以卜:公之后天下之乐而乐矣!

우리 공이 정사가 통하고 백성이 화합한 여유로, 이 폐한 것을 고치고 무너진 것을 일으키는 일을 하니, 이로써 방주(方州)를 진정으로 진압하고 아름다운 자취를 이어, 풍속과 인심에 보탬이 적지 않으니, 어찌 남루(南樓)의 풍월, 황학(黃鵠)의 연운(煙雲)이 능히 겨루겠는가. 이 역사는 힘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재물이 창고에서 취하지 않았으며, 계해 첫 봄에 경영을 시작하여 갑자 한여름에 낙성되었다. 멀리서 겹성을 바라보니 붉은 누각이 노을과 같아, 보는 이가 한마디 말도 내지 못한다. 노니는 자들이 화락하여 마치 봄대(春臺)에 오른 듯하다. 나는 이로써 점치건대, 공이 천하의 즐거움보다 뒤에 즐거워하리라!

《[강희]악주부지》 권 27 하 《중수악양루기》, 청 양주조 지음

岳郡介在湖滨,西城上有岳阳楼,历年永久,兴废无常。予于己未秋叱驭至此,见楼欹斜将圯,宜葺而新之。然而君子居是官,则当尽是职。太守一官,主于勤农、赈贫、察奸、决讼、兴革利弊、鼓舞人文。昔贾琮升车褰裳,而百姓震悚;孙成赈发救饥,而户口益增;文翁兴学校于成都,能令风同齐鲁;龚遂卖剑刀于渤海,辄使俗务农桑。凡此政绩,迄今颂述不衰,未闻以楼台亭阁为事而播声誉于无穷也。况郡当逆陷,后继以饥馑,荆榛遍野,瓦砾盈城,窜者未归,窃者未靖,朴者不暇耕耘,秀者不遑弦诵,劳于王事者不得休息。若以修楼为先务,毋乃轻重失衡、缓急倒置,而大违致泽之初心乎?于是作而止,议而寝,以专精其思于吏治,不顾斯楼之日就圯。

악군(岳郡)은 호수 가에 끼어 있어, 서쪽 성 위에 악양루가 있고, 지나온 해가 오래되어 흥폐가 일정하지 않다. 내가 기미(己未) 가을에 말을 몰아 이곳에 이르러, 누각이 기울어져 장차 무너짐을 보니, 마땅히 고쳐 새로 해야 하겠다. 그러나 군자가 이 관직에 있으면 마땅히 이 직분을 다해야 한다. 태수라는 한 벼슬은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간사한 자를 살피고 송사를 결단하며 이로움을 일으키고 폐단을 없애고 인문을 고무함을 주로 한다. 옛날 가종(賈琮)이 수레에 올라 옷을 걷으니 백성이 두려워 떨었고, 손성(孫成)이 구제하여 기근을 구하니 호구가 더욱 늘었으며, 문옹(文翁)이 성도(成都)에 학교를 일으켜 능히 풍속을 제·노(齊魯)와 같게 하였고, 공수(龔遂)가 발해(渤海)에서 검도(劍刀)를 팔게 하니 곧 풍속이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게 하였다. 무릇 이 정적(政績)은 지금까지 칭송하고 진술함이 쇠하지 않으나, 누대와 정각을 일삼아 성명을 무궁에 떨쳤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군이 역적에게 함락되고 뒤이어 기근이 들어, 형진(荊榛)이 들에 가득하고 기왓장이 성에 넘치며, 도망친 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훔치는 자가 아직 평정되지 않으며, 소박한 자는 경작할 겨를이 없고 수재(秀才)는 독서할 여유가 없으며, 왕사에 수고로운 자는 쉬지 못한다. 만약 누각 고치기를 먼저 할 일로 삼는다면, 경중이 저울을 잃고 완급이 뒤바뀌어, 크게 은택을 베풀 처음 마음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지으려다가 그치고, 의논하다가 그만두어, 오직 그 생각을 치리(吏治)에 정성껏 하고, 이 누각이 날로 무너져 감을 돌보지 않았다.

越三年,滇黔荡涤,四境晏如,疮痍起色,以暇以宁,融融然,彬彬然,非复昔日景象。夫然后登君山,瞻乌石,览洞庭,眺天岳,倍饶佳致,惜斯楼益欹斜不堪。予惟揽辔问俗以来,兴废举坠,罔敢传舍视也,独斯楼任其倾颓,宁不获罪创修诸先辈耶?乃从万难拮据中,点金匡正之,俾勿即于废。苦更桷加榜,置楹易楠,增陶瓦,立墉垣,施黝垩,图厥完壮,费实不赀,予何能胜任?恭请上台,捐囊首倡,谋诸僚庶,各输镪有差。远近欣然,而集者又复有人。遂购材募匠,弗烦民力,并日鸠工,而次第竣事焉。

삼 년을 지나 전(滇)·검(黔)이 씻겨 평정되고 사방 경계가 태연하며, 상처가 일어나 기운이 나아지고, 여유가 있고 편안하여, 융융히 화락하고 빈빈히 단정하여, 다시 지난날의 경상이 아니었다. 무릇 그런 뒤에 군산에 오르고, 오석(烏石)을 바라보고, 동정을 굽어보고, 천악(天岳)을 바라보니, 배로 아름다운 정취가 풍부하되, 애석하게도 이 누각이 더욱 기울어져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다만 고삐를 잡고 풍속을 물은 이래, 폐한 것을 일으키고 무너진 것을 듦에 감히 여관처럼 여기지 않았는데, 홀로 이 누각이 그 기울어 무너짐을 맡겨 두니, 어찌 창건하고 고친 여러 선배에게 죄를 얻지 않겠는가. 이에 만 가지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 점금(點金)하여 바로잡아, 그것으로 하여금 곧 폐하지 않게 하였다. 서까래를 바꾸고 들보를 더하며, 기둥을 세우고 박달나무로 갈고, 질그릇 기와를 늘리고, 담장을 세우고, 검고 흰 칠을 베풀어, 그 완전하고 장대함을 도모하니, 비용이 실로 헤아릴 수 없는데,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공손히 상대(上臺)에게 청하여 주머니를 털어 처음으로 창의하고, 여러 관속과 서민과 의논하여 각기 돈을 바치되 차등이 있었다. 가깝고 먼 곳이 기뻐하며, 모인 자가 또 다시 있었다. 이에 재목을 사고 장인을 모으되,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날을 겹하여 공사를 모으니, 차례로 일이 완성되었다.

考斯楼,唐以前不甚显。自开元初,中书令张燕公出守是郡,登临歌咏,日相播扬。暨宋庆历间,郡守滕子京重建,希文范公作记,流传海内。高人名士、缙绅先生,无不愿见之也。先是楼右有净土庵,废之久矣;今复构室三间,召浮屠栖之,则循古以为辙也。先是楼左有屋数楹,以有纯阳之梅在,谓之仙梅亭,然而其实非亭;今于故址建亭,以副厥名,此则更新以为弦也。岁在甲子,运届上元,斯楼焕然一新。士女讴吟,渔樵唱答,游人辐辏,则又天人之会合也。诸父老请予以示永久。嘻,有范公之记,予妄言之,岂非听白雪之音、观绿水之节,而东野巴人不自觉其蚩鄙,载笑载言也哉!诸父老固请无已,笔斯以勒于石,又置二碑:一以重刊文正公之记,一以胪列各捐修之数。俟后君子征前事,复征今事也。

상고하건대 이 누각은 당 이전에 심히 드러나지 않았다. 개원 초년부터 중서령 장연공이 나와 이 군을 지켜, 오르고 내려가 읊고 부르니, 날로 서로 퍼뜨려 드러냈다. 송 경력 연간에 이르러 군수 등자경이 중건하고 희문 범공이 기를 지으니, 해내에 전해 흘렀다. 높은 인사와 이름난 선비·진신(縉紳) 선생이 보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전에 누각 오른쪽에 정토암(淨土庵)이 있어 폐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다시 방 세 칸을 지어 승려를 불러 머물게 하니, 이는 옛것을 따라 자취로 삼은 것이다. 이전에 누각 왼쪽에 집 몇 칸이 있어, 순양(純陽)의 매화가 있는 까닭으로 이를 선매정이라 불렀으나, 그러나 그 실체는 정자가 아니었다. 지금 옛 터에 정자를 세워 그 이름에 부합하게 하니, 이는 다시 고쳐 줄로 삼은 것이다. 해가 갑자에 있고 운수가 상원(上元)에 이르러, 이 누각이 일신하여 눈부시게 새로워졌다. 선비와 여인이 노래하고 읊고, 어부와 나무꾼이 부르고 화답하며, 노니는 나그네가 수레바퀴 살처럼 모이니, 이는 또 하늘과 사람의 만남이다. 여러 부로(父老)가 나에게 청하여 영구히 보이고자 한다. 희, 범공의 기가 있는데 내가 망령되이 말하니, 어찌 백설(白雪)의 소리를 듣고 녹수(綠水)의 절주를 보며, 동야(東野)의 파인(巴人)이 스스로 그 치졸함을 깨닫지 못하여 웃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부로가 굳이 청하기를 그치지 않아, 붓으로 이를 써서 돌에 새기고, 또 두 비를 세웠으니, 하나는 문정공의 기를 다시 간행한 것이요, 하나는 각각 헌금하여 고친 수를 늘어놓은 것이다. 뒤의 군자가 앞의 일을 징험하고, 다시 지금의 일을 징험하기를 기다린다.

《[강희]악주부지》 권 27 하 《군후이공중수기》, 청 이우시 지음

《대명일통명승지(大明一統名勝志)》

岳阳楼著名海内,创始不知为谁。唐开元年,张说出守是邦,日与才士登临,赋咏其中,自尔名著。宋庆历间,膝宗谅作而新之,范希文为之记,苏子美书丹,邵竦篆额,时称四绝。

악양루는 해내에 이름이 드러났으나, 창건한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당 개원 연간에 장열이 나와 이 고을을 지켜, 날마다 재사와 함께 오르고 내려가며 그 가운데서 부(賦)를 짓고 읊었으니, 이로부터 이름이 드러났다. 송 경력 연간에 슬종량(滕宗諒)이 지어 새롭게 하고, 범희문(范希文)이 이를 위해 기를 지으며, 소자미(蘇子美)가 주단(書丹)하고 소송(邵竦)이 전액(篆額)하니, 당시에 사절(四絕)이라 일컬었다.

诗记云:中书今张说,徙知岳州,为文凄婉,人以为得江山之助。贾至贬岳州司马,初至马陵,兴李白泛洞庭诗:枫岸纷纷落叶多,洞庭秋水晚来波。乘兴经舟无远近,白云明月吊湘娥。太白诗:洞庭西望楚江分,水尽南天不见云。日落长沙秋色远,不知何处吊湘君。孟浩然诗:八月湖水平,涵虚混太清。气蒸云梦尘,波撼岳阳城。欲济无舟楫,端居耻圣明。坐观垂钓者,徒有羡鱼情。杜子美诗:昔闻洞庭水,今上岳阳楼。吴楚东南圻,乾坤日夜浮。亲朋鱼一字,老病有孤舟。戒马关山北,凭轩涕泗流。按元稹作杜甫墓铭曰:子美扁舟荆楚间,竟以寓卒,旅殡岳阳。后四十年,子美之孙嗣业启枢葬于偃师,时元和之癸巳岁也。

《시기(詩記)》에 이르기를, 중서령 장열이 옮겨 악주를 알게 되어, 글을 지음이 처완(凄婉)하매, 사람들이 강산의 도움을 얻었다 여겼다. 가지(賈至)가 악주 사마로 좌천되어 처음 마릉(馬陵)에 이르러, 이백과 함께 동정에 배를 띄운 시를 지었다: “단풍 기슭에 흩날리는 낙엽이 많고, 동정의 가을 물에 저녁 물결이 이는구나. 흥을 타고 배를 타니 멀고 가까움이 없네, 흰 구름과 밝은 달에 상아(湘娥)를 조상하네.” 태백의 시: “동정호 서쪽을 바라보니 초강이 갈라지고, 물이 다한 남쪽 하늘에 구름이 보이지 않네. 해가 장사에 져 가을 빛이 멀어가니, 어디에서 상군(湘君)을 조상할지 알 수 없네.” 맹호연의 시: “팔월에 호수 물이 고르고, 허공을 머금어 태청(太清)과 섞이네. 기운이 운몽(雲夢)에 김이 나고, 물결이 악양성을 흔드네. 건너려 하나 배와 노가 없고, 단정히 앉아 성명한 임금을 부끄러워하네. 앉아서 낚시 드리운 자를 보니, 헛되이 물고기를 부러워하는 마음뿐이네.” 두자미의 시: “예로부터 동정호 물을 듣기만 하더니,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오와 초가 동남으로 갈라지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물 위에 떠도네. 친척과 벗에게서는 한 자 소식도 없고, 늙고 병든 몸에 외로운 배 한 척뿐이네. 북쪽 관산에는 아직 군마가 달리니, 난간에 기대어 눈물이 흐르네.” 살피건대 원진(元稹)이 지은 두보 묘명에 이르기를, “자미가 형초(荊楚) 사이에 작은 배를 띄우더니, 마침내 기거한 채 세상을 마쳐, 악양에 가빈(旅殯)하였다. 사십 년 뒤에 자미의 손자 사업(嗣業)이 영을 열어 언사(偃師)에 장사 지냈으니, 때는 원화의 계사년이다”라고 하였다.

滕子京岳阳集序云:六朝通三百三十七载,惟颜延年、阴子坚见于章句子。按延之有始安郡还都兴,张湘州登巴陵作,阴铿有渡青草湖诗,似非颛指岳阳楼者。然初盛唐诗但作巴陵城楼,未当名岳阳楼也。大历间,杜子美有今上岳阳楼之句,故后人颛目为岳阳耳。宋范致明有岳阳风土记三卷,国朝有岳阳纪胜巢编四卷。

등자경의 악양집 서(序)에 이르기를, “육조가 통틀어 삼백삼십칠 년이나 오직 안연년·음자견(陰子堅)이 장구에 보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연지(延之)에게 시안군(始安郡)에서 돌아와 수도에서 흥이 있고 장상주(張湘州)가 파릉에 오른 작품이 있으며, 음경(陰鏗)에게 청초호를 건넌 시가 있으나, 오로지 악양루를 가리킨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초당·성당의 시는 다만 파릉 성루라 하였을 뿐, 마땅히 악양루라 이름하지 않았다. 대력 연간에 두자미에게 “오늘 악양루에 오른다”는 구절이 있으니, 그러므로 후인이 오로지 악양으로 눈여겨본 것이다. 송 범치명에게 《악양풍토기》 삼 권이 있고, 국조(國朝, 명)에 《악양기승편(岳陽紀勝編)》 사 권이 있다.

风土记云:岳阳楼,城西门楼也。南楼、杨公台,皆见岳阳诗。访今并无遗迹可践。或云楚泽门,旧南楼也。又云:楚泽门、碧湘门,皆瓮城门,而楚泽门以经火不复治。

《풍토기》에 이르기를, “악양루는 성의 서문루이다. 남루(南樓)·양공대(楊公臺)가 모두 악양의 시에 보인다. 지금 찾아보면 아울러 밟을 수 있는 옛 자취가 없다. 혹은 초택문(楚澤門)이 옛 남루라 하고, 또 이르기를 초택문·벽상문(碧湘門)이 모두 옹성의 문이며, 초택문은 불을 겪어 다시 고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명승지》 “악주부”, 명 조학전 지음, 숭정 3년 각본

《왕태초선생오악유초(王太初先生五岳遊草)》

楼阁古有名者,仲宣楼在荆州城上,所见惟平楚,亦非其旧址也。太白楼在济宁州城上,济、汶、泗水横络其前,帆樯千百,过酒楼下,时有胜致。及登南昌王阁,章贡大水西来注北,阁与水,称杰然大观,然不若武昌黄鹤楼。虽水与王来公不殊,而楼制工巧奇丽,立黄鹄矶上,且三面临水,又西对晴川楼、汉阳城为佳。总之又不若岳州岳阳楼。君山一发,洞庭万顷,水天一色,杳无际涯,非若滕王、黄鹤,眼界可指,故其胜为家。三楼皆西向,岳阳更雄

누각으로 옛날부터 이름난 것으로, 중선루(仲宣樓)는 형주성 위에 있어 보이는 것이 다만 평평한 초(楚)의 들이요, 또한 그 옛 터가 아니다. 태백루(太白樓)는 제녕주(濟寧州) 성 위에 있어, 제(濟)·문(汶)·사(泗)의 물이 그 앞을 가로질러 얽히고, 돛과 돛대가 천백으로 술집 누각 아래를 지나니, 때때로 빼어난 정취가 있다. 남창의 왕각(王閣)에 오르기에 이르러, 장수(章水)와 공수(貢水)의 큰물이 서쪽에서 와서 북으로 쏟아지니, 누각과 물이 일컬어져 웅장한 큰 경관이 되었으나, 그러나 무창의 황학루만 못하다. 비록 물이 왕래함이 다르지 않으나, 누각의 구조가 공교하고 기묘하며 아름다워 황학기(黃鵠磯) 위에 서 있고, 또 삼면이 물에 임하며, 또 서쪽으로 청천루(晴川樓)·한양성과 마주하여 좋다. 총괄하건대 또 악주의 악양루만 못하다. 군산이 한 가닥 실타래처럼 떠 있고, 동정호가 만 경(頃)이며, 물과 하늘이 한 빛깔로 아득하여 끝과 가장자리가 없으니, 등왕(滕王)·황학과 같이 눈의 경계를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빼어남이 집안(家)을 이룬다. 세 누각이 모두 서쪽을 향하되, 악양이 더욱 웅장하다.

《왕태초선생오악유초》 권 12, 명 왕사성 지음, 강희 풍소 각본

《호남통지(湖南通志)》

岳阳楼在县西。风土记:城西门楼也。下瞰洞庭,景物宽阔。唐开元四年,中书令张说除守此州,每与才士登楼赋诗,自尔名著。其后,太守于楼北百步复创楼,名日燕公楼。三才图会:岳阳楼,其制三层,四面突轩,状如十字,面各二溜水。方舆胜览:岳阳楼宋滕宗谅作而新之,范希文为之记,苏子美书丹,邵竦篆额,时称四绝。府志:岳阳楼自明成化以后,屡圯。康熙二十二年重建,复灾。乾隆五年复修,始还旧观。

악양루는 현(縣) 서쪽에 있다. 《풍토기》: 성의 서문루이다. 아래로 동정호를 내려다보니 경물이 넓고 넓다. 당 개원 4년에 중서령 장열이 이 주의 태수에 제수되어, 늘 재사와 더불어 누각에 올라 시를 지었으니, 이로부터 이름이 드러났다. 그 뒤 태수가 누각 북쪽 백 보에 다시 누각을 창건하여 이름을 연공루라 하였다. 《삼재도회(三才圖會)》: 악양루는 그 구조가 세 층이요, 사면에 뻗어 나온 현(軒)이 있어 모양이 십자(十字)와 같고, 면마다 두 줄기의 물받이가 있다. 《방여승람(方輿勝覽)》: 악양루는 송의 등종량이 지어 새롭게 하고, 범희문이 이를 위해 기를 지으며, 소자미가 주단하고 소송이 전액하니, 당시에 사절이라 일컬었다. 《부지(府志)》: 악양루는 명 성화 이후로 여러 차례 무너졌다. 강희 22년에 중건하고 다시 재화를 입었다. 건령 5년에 다시 고치매, 비로소 옛 경관을 돌려놓았다.

《[건령]호남통지》 권 137 “악주부·파릉현”, 청 진굉모 감수, 범함·구양정환 찬수, 건령 22년 각본

옛 사진

약 1900—1912년

브리스틀 대학의 Historical Photographs of China 플랫폼은 세 시기의 호숫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Banister Family 소장품 Ba-s050은 약 1900년에 촬영되었고, G. Warren Swire가 1906—1907년에 촬영한 Sw13-043과 1911—1912년에 촬영한 Sw16-055의 원판은 모두 런던 대학교 SOAS 기록·특별 소장에 있으며 저작권은 John Swire & Sons Ltd에 있다. 세 사진은 서로 다른 거리에서 악양루·성문·긴 성곽·호숫가의 민가·정박한 배와 동정호 수면의 관계를 보존한다. 플랫폼은 이 저해상도 영상을 CC BY-NC-ND 4.0 라이선스로 공개한다.

1926년

《아세아대관(亞細亞大觀)》 제3집에는 동정호 쪽에서 멀리 바라본 악양루와 성곽의 전경 옛 모습이 수록되어 있으며, 원간에는 1926년에 촬영되었다고 적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도키와 다이조·세키노 다다시 편 《중국문화사적(中國文化史蹟)》 제3집에는 악양루의 길에 임한 외관과 누각 안의 옛 모습이 수록되어 있다.

1932—1938년

웨양시 당안관 소장의 두 악양루 옛 사진은 각각 민국 21년 대수리 후와 민국 27년에 촬영되었다. 앞의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주루·곁정자와 뜨락의 형태를 보존하고, 뒤의 것은 “남극소상(南極瀟湘)” 문 밖에서 문루·곁정자와 주루를 촬영하였다. 이 관이 2025년 “악양루의 날”에 공개한 이 소장 특집에는 송·원·명·청 역대 《악양루도》 그림, 1983—1984년 낙가 대수리 전후의 사진과 도면, 그리고 미불(米芾)·축윤명(祝允明)·문징명(文徵明) 등 역대 서가가 쓴 《악양루기》 사진도 모아 실렸다.

1938년

《아동인화집(亞東印畫輯)》 제10책 제163회 “동정호 부근”에는 1938년 2월의 악주성 조감이 실려 있으며, 빽빽한 민가가 호안을 따라 펼쳐진다.

1938—1945년

일본군 점령 시기에 발행된 악양루 엽서 한 장으로, 누각 앞 뜨락에서 주루와 곁정자를 촬영하였다. 원본 영상은 현재 Wikimedia Commons에서 공유재 자료로 제공된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