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사

북송 건덕 2년(964), 오월국(吳越國)의 관리 포수양(鮑修讓)이 푸저우 군수로 있을 때 경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오늘날 병산(屏山) 남쪽 기슭의 옛 성터 황무지에 월산길상선원(越山吉祥禪院)을 창건하였다. 남송의 명신 장준(張浚)은 푸저우로 좌천된 뒤 절에 기거하였고, 20세기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대전은 창고로 쓰인 덕분에 철거를 면하였으며, 마침내 실측·해체와 이건을 거쳐 보존되었다.

시대
북송
지역
푸젠
위치
푸젠성 푸저우시
《푸저우 옛 사진》에 수록된 화림사 대전 및 양쪽 부속 건축의 정면
《푸저우 옛 사진》에 수록된 화림사 대전 및 양쪽 부속 건축의 정면

소개

북송 건덕 2년(964), 푸저우는 아직 십국(十國)의 하나인 오월국(吳越國)의 지배 아래 있었다. 오월국의 관리 포수양(鮑修讓)이 푸저우 군수로 있을 때, 경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오늘날 병산(屏山) 남쪽 기슭, 옛 지방지에서 민월왕(閩越王) 무저(無諸)[1]의 옛 성이라 일컫는 황폐한 땅을 골라 초목을 베어 내고 비탈을 고른 뒤 월산길상선원(越山吉祥禪院)을 창건하였다. 수·당 이래 이곳은 월왕(越王)의 옛터와 관련된다는 이유로 나무를 베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절은 오랫동안 봉금(封禁)되어 온 옛 성터 유적 위에 세워진 셈이다.

남송 소흥 4년(1134), 항금(抗金)의 명신 장준(張浚)이 좌천되어 푸저우에 살게 되었다. 그는 월산길상선원에 기거하며 절 안에 작은 독서방을 하나 마련하고, 북송의 이학자 장재(張載)의 「지난 성현의 끊어진 학문을 잇는다(爲往聖繼絕學)」는 뜻을 빌려 그곳을 「절학료(絕學寮)」라 이름 지어, 비록 귀양살이 중이지만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을 버리지 않았음을 나타내었다. 다섯 해 뒤 장준은 다시 지부주(知福州)로 부임하였다. 건도 3년(1167), 남송의 개국 황제 조구(趙構)가 퇴위한 뒤 태상황(太上皇)의 신분으로 절 안의 환봉정(環峰亭)에 이름을 내려 주고 「월산(越山)」이라 친히 써 주었다.

명대에 들어, 푸젠 우참정(福建右參政)[2] 송창(宋彰)의 주청(奏請)을 거쳐 절의 이름이 「화림사(華林寺)」로 바뀌었고, 이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쓰인다. 명나라 말엽에 이르러 푸저우의 학자이자 관리인 조학전(曹學佺)은 이미 절의 4대에 걸친 주지들과 삼십여 년을 왕래해 왔다. 그는 늘 손님을 데리고 화림사에 와 솔숲을 구경하였고, 심지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고 싶어 하였다. 훗날 주지가 그에게 금불전(金佛殿)의 중수 모연을 위한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조학전은 절의 승려들과 교분이 깊었고 또한 전각 수리를 빌려 푸젠을 위해 복을 빌고자 하였으므로, 《화림사금불전원만소(華林寺金佛殿圓滿疏)》를 지었다.

청 가경 23년(1818), 화림사는 오랫동안 수리되지 못하여 기울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주지 목암(牧庵)은 절이 계속 손상될 것을 걱정하여, 먼저 자신의 저축을 꺼내 양쪽의 낭우(廊屋)를 짓고, 다시 시주들에게 자금을 모아 대전·천왕전(天王殿)과 승사(僧舍)를 손질하고 불상을 다시 조성하였다. 공사는 도광 6년(1826) 여름에 완공되었고, 목암은 푸저우 출신의 관리 임칙서(林則徐)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8년에 걸친 중수의 경과를 돌에 새겼다.

1950년대, 푸젠의 문물(文物) 관계자들이 화림사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종교 활동이 중단되고 건축물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대전을 제외한 산문(山門)·천왕전과 승사는 1960년대에 잇달아 황폐해지고 무너졌다. 1970년 전후, 대전은 기관 구내에 편입되어 한때 철거가 계획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 기관에는 창고가 부족하였으므로 대전을 잡동사니를 쌓아 두는 곳으로 쓰게 되었고, 그 덕분에 대전은 철거되지 않았다.

1979년, 칭화대학(淸華大學) 건축사 교수 막종강(莫宗江)이 샤먼(廈門)으로 고찰을 가던 길에 푸저우를 지나게 되었는데, 일찍부터 화림사 대전을 들어 알고 있던 터라 현장을 한번 보자고 제안하였다. 이 고찰로 그는 푸저우에 사흘을 더 머물렀고, 베이징으로 돌아간 뒤 막종강은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에 보호 신청을 제출할 방도를 마련하였다. 1980년, 국가문물국은 그에게 대학원생 두 명을 이끌고 대전을 다시 실측하도록 위탁하였다. 1986년부터는 고건축 전문가 이죽군(李竹君)이 복원을 주관하였다. 장인들은 지붕에서부터 기둥과 보에 이르기까지 부재를 하나하나 해체하고 다듬은 뒤 다시 조립하였고, 대전을 낮고 움푹한 옛 자리에서 옮겨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첨(單檐)[3] 대전은 6년 가까이 이어진 이 보호 공사가 남긴 결과물이다.

역사 문헌

《순희삼산지》

怀安越山吉祥禅院,乾元寺之东北,无诸旧城处也。晋太康三年,既迁新城,其地遂虚。隋、唐间,以越王故,禁樵采。钱氏十八年,其臣鲍修让为郡守,遂诛秽夷巇为佛庙,乾德二年也。御书绍兴六年,张丞相浚奉安。御书裴度传。环峰亭,绝学寮胜会亭,旧产钱三贯四十三文。

회안(懷安)의 월산길상선원은 건원사(乾元寺)의 동북쪽, 무저(無諸)의 옛 성이 있던 자리이다. 진(晉) 태강 3년에 이미 새 성으로 옮겨 그 땅은 마침내 비게 되었다. 수·당 사이에는 월왕(越王)의 옛터라는 까닭으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전씨(錢氏) 18년, 그 신하 포수양(鮑修讓)이 군수가 되어 마침내 더러운 잡초를 베어 내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여 불묘(佛廟)를 지었으니, 건덕 2년이다. 어서(御書)는 소흥 6년에 장준(張浚) 승상이 받들어 모셨다. 어서로 「배도전(裴度傳)」이 있다. 환봉정(環峰亭), 절학료(絕學寮)·승회정(勝會亭)이 있고, 옛 재산으로는 돈 3관 43문이 있다.

《淳熙三山志》(《순희삼산지》) 권 33 「사관류(寺觀類) 제1·회안 월산길상선원」, 남송 양극가(梁克家) 찬

《부주부지》

华林寺在左一坊,旧名越山吉祥禅院。闽都记:在乾元寺东北无诸旧城处。晋太康间,既迁新城,其地遂虚。隋、唐间以越王故,禁樵采。钱氏十八年,其臣鲍修让为郡守,诛秽夷巇,始创寺。西廊有转轮经藏,今圯。东廊有文昌祠、普陀岩。正殿之后为法堂、法堂西祖师殿,以越王山为斧扆。正德间赐额。国朝顺治初修。康熙七年重修。今寺僧散,改为普济堂。

화림사는 좌일방(左一坊)에 있으며, 옛 이름은 월산길상선원이다. 《민도기(閩都記)》에 이르기를, 건원사 동북쪽 무저의 옛 성터에 있다 하였다. 진 태강 연간에 이미 새 성으로 옮겨 그 땅은 마침내 비게 되었다. 수·당 사이에는 월왕의 옛터라는 까닭으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전씨 18년, 그 신하 포수양이 군수가 되어 더러운 잡초를 베어 내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한 뒤 비로소 절을 창건하였다. 서쪽 회랑에는 전륜경장(轉輪經藏)이 있었으나 지금은 무너졌다. 동쪽 회랑에는 문창사(文昌祠)와 보타암(普陀巖)이 있다. 정전(正殿) 뒤에는 법당(法堂)이 있고, 법당 서쪽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으며, 월왕산(越王山)을 부의(斧扆)로 삼았다. 정덕 연간에 편액을 하사받았다. 본조(청) 순치 초에 수리하였고, 강희 7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지금은 절의 승려들이 흩어져 보제당(普濟堂)으로 바뀌었다.

《福州府志》(《부주부지》) 권 16 상(上) 「사관(寺觀) 제1·화림사」, 청 서경희(徐景熹) 수(修), 노증욱(魯曾煜) 찬

《조대리집》

省龙自北而来,越王山为之顶,而华林寺其臂也。金佛殿虽寺中之一体,而枕此臂为甚固。余乐其风气磅礴,松林郁苍,每携客来游,欲结茅而居焉。乃其住持之僧与余兄弟相处,又更四世三十余年之久,至则如家焉,而忘其主宾也。余三山多所缘事而不克竣,其住持亦不与余言本山之缘,今年因少间而有请也。夫以省龙之臂,理宜兴隆,广作佛事,以褆福于全闽者。主僧有相知之素,而又乐善好客,余以此为搜裘焉。是一举而众善备,故不辞而为之疏。

성룡(省龍)은 북쪽에서 와서, 월왕산이 그 꼭대기가 되고 화림사는 그 팔이다. 금불전은 비록 절 안의 한 부분이지만, 이 팔을 베고 있어 매우 견고하다. 나는 그 기세가 웅장하고 솔숲이 우거져 푸른 것을 좋아하여, 늘 손님을 데리고 와 노닐며, 초막을 짓고 살고 싶어 하였다. 그 주지 승려는 나와 형제처럼 지냈고, 또 4대에 걸쳐 삼십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지내 왔으니, 가면 집에 온 것 같아 주인과 손님임을 잊곤 하였다. 나는 삼산(三山)에서 모연(募緣)한 일이 많았으나 마치지 못하였고, 그 주지 또한 나에게 이 산의 모연을 말하지 않았는데, 올해에 겨우 한가한 틈이 있어 청한 것이다. 성룡의 팔이 되는 곳은 이치상 마땅히 흥성하여, 널리 불사(佛事)를 행하여 온 민(閩) 땅에 복을 내려야 할 것이다. 주지 승려는 평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 데다 또 선을 좋아하고 손님을 잘 대접하므로, 나는 이를 모연의 밑천으로 삼는다. 이는 한 번의 거동으로 여러 선이 갖추어지는 것이므로, 사양하지 않고 이에 소(疏)를 지었다.

《曹大理集》(《조대리집》) 「화림사금불전원만소(華林寺金佛殿圓滿疏)」, 명 조학전(曹學佺) 찬

《중수월산화림선사비기》

佛浮屠之宫,闽中特盛,会城三山以数百十计。然唐宗古刹至今仅有存者,或存而上雨旁风,倾覆是惧;而越山华林寺独岿然。寺旧为吉祥禅院,钱氏有闽,郡守鲍修让创焉,明正德赐额今名,顺治初年、康熙七年两修之。月异岁迁,今改将半。乾隆初,有住持本馥者,重葺坏坠,椽角一新。三传为今主僧牧庵,虑梵宇之就颓也,出橐中金庀工建廊庑,且求诸施者修大殿暨天王殿,治僧寮,饰佛像,巩固巨丽,而寺遂还旧观。以余闻,前志所载,寺之遗规,西廊有转轮、经藏,东廊有文昌祠、普陀岩,正殿之后为法堂,法堂西为祖殿。其环诡殊绝、材美匠能者,久已荡为榛芜,不可复观矣。而牧庵独能绍述先师之绪,不吝己力,积岁经营,杰构崔嵬,精庐幽敞,课佛弟子,斋鱼粥鼓,为南中祝圣道场,不其盛欤!工兴于嘉庆二十三年四月,至今夏竣事。牧庵欲余为文刊石以志之。牧庵,名增辉,福州王氏子,曹洞鼓山永觉禅师九世孙也。道光六年六月。

부처와 불탑의 궁궐은 민중(閩中)에서 유독 성하여, 회성(會城) 삼산(三山)에는 수백 수십으로 헤아린다. 그러나 당나라 종풍(宗風)을 이은 고찰은 지금에 이르러 겨우 남아 있는 것뿐이고, 혹 남아 있다 하여도 위로 비가 새고 옆으로 바람이 들어와 기울어 무너짐을 걱정하게 되는데, 월산화림사만이 홀로 우뚝하다. 절은 옛날 길상선원이었는데, 전씨가 민 땅을 차지하였을 때 군수 포수양이 창건하였고, 명 정덕 연간에 지금 이름의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순치 초년과 강희 7년에 두 차례 수리하였다. 달이 바뀌고 해가 옮겨 가면서 지금은 바뀐 것이 장차 절반에 이른다. 건륭 초에 본복(本馥)이라는 주지가 있어 무너지고 떨어진 것을 다시 수리하여 서까래와 처마 끝이 일신되었다. 세 번을 전하여 지금의 주지 승려 목암(牧庵)에 이르렀는데, 그는 범우(梵宇)가 무너져 갈 것을 걱정하여,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 공역을 마련해 회랑(廊廡)을 짓고, 또 여러 시주에게 청하여 대전과 천왕전을 수리하고, 승료(僧寮)를 정비하고, 불상을 단장하여, 견고하고 웅장하게 아름다우니 절은 마침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내가 듣기로, 앞의 지방지에 기록된 절의 옛 규모에는, 서쪽 회랑에 전륜(轉輪)과 경장(經藏)이 있고, 동쪽 회랑에 문창사와 보타암이 있으며, 정전 뒤에는 법당이 있고, 법당 서쪽에는 조전(祖殿)이 있었다 한다. 그 기이하고 뛰어나며, 재목이 아름답고 장인이 능했던 것들은 오래전에 이미 잡초 우거진 들로 변하여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목암만이 홀로 선사(先師)의 업을 계승하여 자신의 힘을 아끼지 않고 여러 해에 걸쳐 경영하여, 뛰어난 건물은 우뚝 솟고 정사(精廬)는 그윽하고 넓으니, 불제자들을 가르치고 목어와 죽고(粥鼓)를 울려 남중(南中)의 축성도량(祝聖道場)이 되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아니한가! 공사는 가경 23년 4월에 일어나 올해 여름에 준공되었다. 목암은 내게 글을 지어 돌에 새겨 이를 기록해 달라 하였다. 목암은 이름이 증휘(增輝)이며, 부주(福州) 왕씨의 아들이고, 조동(曹洞) 고산(鼓山) 영각선사(永覺禪師)의 9세손이다. 도광 6년 6월.

《林则徐全集》(《임칙서전집》) 제5책 「문록권(文錄卷)」의 《重建华林寺碑记》(《중건화림사비기》), 도광 6년 6월, 《华林寺志》(《화림사지》) 권수(卷首)에서 옮김, 443쪽

옛 사진

1950년대

증의단(曾意丹)이 편찬한 《푸저우 옛 사진》에 수록된 사진은 대략 195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화림사 대전과 그 양쪽의 부속 건축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의 정면 옛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1956년

1956년, 임조(林釗)가 화림사 대전을 조사하였다. 《푸저우 화림사 대웅보전 조사 간보》에는 사찰의 원래 모습과 대전 정면 외에도 마당 안, 두공(斗栱) 가구와 전내(殿內) 양가(梁架) 사진이 실려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