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오늘날 사캬현 소재지에서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남사(南寺)는 사캬 사원이 처음 세워진 곳이 아니다. 1073년 쾬촉 걀포는 중취하(仲曲河) 북쪽 산비탈에 북사(北寺)를 창건하였다. 거의 두 세기 뒤에는 현 소재지의 평지에서 남사 건립이 시작되었다. 이 두 장소와 시대를 잇는 인물이 사캬 출신의 팍파이다.
13세기 중엽 팍파는 즉위 전의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쿠빌라이는 즉위한 뒤 팍파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원사』에 따르면 팍파는 새 몽골 문자를 만들라는 명을 받았다. 『근본설일체유부출가수근원갈마의범(根本說一切有部出家授近圓羯磨儀範)』 서문은 팍파가 수계 의례를 중원에 보급했고, 여러 언어에 능통한 번역자들이 황명으로 이를 한역했다고 전한다. 사캬와 원나라 조정의 관계는 승려의 왕래, 새 문자의 창제, 불교 문헌의 한역으로 이어졌다.
1268년 팍파는 사캬 지방 정부의 최고 행정관 샤캬 상포에게 남사 건립을 시작하게 하였다. 샤캬 상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후임 쿤가 상포가 공사를 계속 맡았다. 청대 야오잉(姚瑩)이 찾았을 때 남사에는 이미 “평지에 누각이 서고, 둘레 담장이 매우 견고”했으며 경전은 “서가와 함을 가득 채웠다.” 산비탈의 북사에서 평지의 남사로 이어진 사캬 사원의 확장은 13세기 티베트와 원나라 조정의 관계가 깊어진 시기에 진행되었다.
역사 문헌
『근본설일체유부출가수근원갈마의범(根本說一切有部出家授近圓羯磨儀範)』
原夫瞻部嘉运,至四佛释迦文如来遗教利见也。大元御世,第五主宪天述道仁文义武大光教皇帝登极也。天资福慧,谛信内乘,普使万邦,咸归一化。虽敷天垂拱,而至治无垠;眷支那弘道,而在躬不息。欲以自佛相承,师资继踵,迄今不替。正戒仪范,为拳拳从善之行,人俾一一恒持于净戒。精练三业,坚守四仪,此实圣皇匡正佛法之睿旨也。昔因善逝,与人天众普说无诤声闻藏教一切有部别解脱经,依此采拾未得令得律仪方便羯磨仪范,此乃圣光德师之总集也。始从天竺,次屇西番,爰有洞达五明法王大士萨思迦扮底达,名称普闻。上足苾刍拔合思巴,乃吾门法主大元帝师,道德恢隆,行位叵测。援兹仪范,衍布中原。令通解三藏比丘住思观演说正本。翻译人善三国声明辩才无碍含伊罗国翰林承旨弹压孙传华文译主生缘北庭都护府解二种音法词通辩诸路释门总统合台萨哩都通,暨翰林学士安藏总以诸国言诠,奉诏译成仪式。序本帝师之亲制,绘为华迹以编陈。始末粗彰,聊记岁月。时庚午岁至元七年冬至后二日序。
애초에 섬부주(瞻部洲, 잠부드비파)의 상서로운 운은 네 번째 부처 석가모니 여래의 유교(遺教)가 이롭게 나타남에 이른 것이다. 대원(大元)이 세상을 다스리니 다섯 번째 군주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교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教皇帝)가 즉위하셨다. 타고난 자질로 복덕과 지혜를 갖추시어 내승(內乘)을 진실로 믿으시고, 온 세상 만국으로 하여금 모두 하나의 교화로 돌아오게 하셨다. 하늘 아래 두 손을 모으고 다스리시나 지극한 정치는 끝이 없으며, 중화에서 도(道)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몸소 그치지 않으셨다. 부처로부터 대대로 이어온 가르침이 스승과 제자의 계보로 오늘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시어, 올바른 수계(授戒) 의범(儀範)이야말로 선(善)을 따르는 간절한 실천이니 사람마다 항상 청정계(淸淨戒)를 지키게 하시려 하셨다. 삼업(三業)을 정화하고 사위(四儀)를 굳건히 지키는 것, 이것이 진실로 성황(聖皇)께서 불법을 바로잡으려 하신 깊은 뜻이다. 옛적에 선서(善逝, 수가타)로 인하여, 다툼 없는 성문장(聲聞藏) 교법과 일체유부(一切有部) 별해탈경(別解脫經)이 인천대중(人天大衆)에게 널리 설하여졌다. 이에 의거하여 아직 율의(律儀)를 얻지 못한 이들이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방편으로서의 갈마(羯磨) 의범(儀範)이 모아졌으니, 이것이 곧 성광(聖光, 굽따쁘라바) 덕사(德師)의 총집(總集)이다. 처음 인도에서 시작하여 다음에 서번(西番, 티베트)에 이르렀다. 오명(五明)에 통달한 대사 법왕대사(法王大士) 사캬 판디타가 있어 그 명성이 천하에 들렸다. 그의 수제자 비구 팍파는 우리 문파의 법주(法主)이자 대원(大元)의 제사(帝師)로, 도덕이 광대하고 높아 그 처지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의범을 취하여 중원에 펼쳐 보급하였다. 삼장(三藏)에 통달한 비구 주사관(住思觀)에게 정본(正本)을 연설하도록 명하였다. 번역자들로는 세 나라의 성명학(聲明學, 문법학)에 능통하고 변재(辯才)가 거침없으며 이루라국(含伊罗国) 출신의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손(孫)이 화문(華文) 역주(譯主)로서 선도하였고, 출신이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로 두 종류의 성운(聲韻)에 밝아 용어 해석이 통달하고 명석한 제로석문총통합태살리도통(諸路釋門總統合台薩哩都通)이 함께하였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 안장(安藏)이 여러 나라의 언어를 총괄하여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한식(漢式) 의례로 번역하였다. 서문은 제사(帝師)가 친히 지으신 것으로, 화문(華文)으로 옮겨 편찬하여 올린 것이다. 처음과 끝이 대략 밝혀졌으니, 다만 날짜를 기록한다. 경오년(庚午年) 지원(至元) 7년 동지 이틀 후에 서(序)를 쓰다.
『원사(元史)』
帝师八思巴者,土番萨斯迦人,族款氏也。相传自其祖朵栗赤,以其法佐国主霸西海者十余世。八思巴生七岁,诵经数十万言,能约通其大义,国人号之圣童,故名曰八思巴。少长学富五明,故又称曰班弥怛。岁癸丑,年十有五,谒世祖于潜邸,与语大悦,日见亲礼。中统元年,世祖即位,尊为国师,授以玉印,命制蒙古新字,字成上之,其字仅千余,其母凡四十有一。其相关纽而成字者,则有韵关之法;其以二合、三合、四合而成字者,则有语韵之法,而大要则以谐声为宗也。至元六年,诏颁行于天下。诏曰:朕惟字以书言,言以纪事,此古今之通制。我国家肇基朔方,俗尚简古,未遑制作。凡施用文字,因用汉楷及畏吾字,以达本朝之言。考诸辽、金以及遐方诸国,例各有字。今文治寖兴,而字书有阙,于一代制度,实为未备。故特命国师八思巴创为蒙古新字,译写一切文字,期于顺言达事而已。自今以往,凡有玺书颁降者,并用蒙古新字,仍各以其国字副之。遂升号八思巴曰大宝法王,更赐玉印。十一年,请告西还,留之不可,乃以其弟亦怜真嗣焉。十六年,八思巴卒,讣闻,赙赠有加,赐号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辅治大圣至德普觉真智佑国如意大宝法王、西天佛子大元帝师。至治间,特诏郡县建庙通祀。泰定元年,又以绘像十一颁各行省,为之塑像云。亦怜真嗣为帝师,凡六岁。至元十九年卒。答儿麻八剌乞列嗣,二十三年卒。亦摄思连真嗣,三十一年卒。乞刺斯八斡节儿嗣,成宗特造宝玉五方佛冠赐之。元贞元年,又更赐双龙盘纽白玉印,文曰大元帝师,统领诸国僧尼,中兴释教之印。大德七年卒。明年,以辇真监藏嗣,又明年卒。都家班嗣,皇庆二年卒。相儿加思嗣,延祐元年卒。二年,以公哥罗古罗思监藏班藏卜嗣。至治三年卒。旺出儿监藏嗣,泰定二年卒。公哥列思八冲纳思监藏班藏卜嗣,赐玉印,降玺书谕天下。其年卒。天历二年,以辇真吃刺失思嗣。
제사(帝師) 팍파는 티베트 사스캬(薩斯迦) 사람으로 쾬(款) 씨 족속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조상 도르제초(朵栗赤) 이래 서해(西海) 주변 지역을 지배한 영주를 그 가르침으로 10여 세대나 보좌하였다고 한다. 팍파가 일곱 살 때 수십만 언(言)의 경전을 암송하였고 그 대의를 대략 통달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성동(聖童)이라 부르고 이름을 팍파(八思巴)라 하였다. 조금 더 자라 학문이 오명(五明)에 풍부하여 반디다(班弥怛, 판디타)라고도 불렸다. 계축년(癸丑年)에 열다섯 살로 세조(世祖)를 잠저(潛邸)에서 알현하니, 세조는 크게 기뻐하며 더욱 친밀하게 대우하였다. 중통(中統) 원년에 세조가 즉위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높이고 옥인(玉印)을 내리며 새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문자가 완성되어 올리니 그 글자 수는 천여 자에 달하였고, 자모(字母)는 모두 41자였다. 소리를 연이어 이어 만든 글자에는 운관법(韻關法)이 있고, 두 소리·세 소리·네 소리를 합쳐 만든 글자에는 어운법(語韻法)이 있으며, 요체는 성음(聲音)의 조화를 근본으로 삼았다. 지원(至元) 6년에 조서를 내려 천하에 반포하였다. 조서에 이르되: “짐이 생각건대 글자는 말을 기록하는 데 쓰이고, 말은 일을 기록하는 데 쓰이는 것이니, 이는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법도이다. 우리 왕조는 북방에서 나라를 세워 풍속이 질박하고 소박함을 숭상하여, 문물 제도를 만들 겨를이 없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곳마다 한자(漢楷)와 위구르 문자를 빌려 우리 왕조의 말을 표기하였다. 요(遼)와 금(金) 및 먼 나라들을 살펴보면 각기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문치(文治)가 점차 일어나고 있으나 문자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한 왕조의 제도로는 실로 미비하다. 이에 특히 국사(國師) 팍파에게 명하여 새 몽골 문자를 창제하게 하여 모든 문자를 번역하고, 말을 따르고 일을 전달하는 데 맞도록 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이후로 옥새 조서를 반포할 때는 모두 새 몽골 문자를 사용하고 각 나라의 문자를 부기한다.” 마침내 팍파의 칭호를 대보법왕(大寶法王)으로 높이고 다시 옥인을 내렸다. 11년에 서쪽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만류할 수 없어, 그 아우 이련진(亦怜真)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였다. 16년에 팍파가 사망하니 부음이 전해지고 부의(賻儀)를 더하여, “황천 아래 일인 위에 선문보치대성지덕보각진지우국여의대보법왕(宣文輔治大聖至德普覺真智佑國如意大寶法王) 서천불자(西天佛子) 대원제사(大元帝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지치(至治) 연간에 특히 조서를 내려 군현에 사당을 세워 널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태정(泰定) 원년에 또 초상화 11폭을 각 행성(行省)에 나누어 소상(塑像)을 만들게 하였다. 이련진이 제사를 이어 6년을 지내다가 지원 19년에 사망하였다. 달아마팔랄걸열(答兒麻八剌乞列)이 뒤를 이어 23년에 사망하였다. 역섭사련진(亦摄思連真)이 뒤를 이어 31년에 사망하였다. 걸랄사팔알절아(乞剌斯八斡節兒)가 뒤를 이으니 성종(成宗)이 특히 보옥 오방불관(五方佛冠)을 만들어 하사하였다. 원정(元貞) 원년에 다시 쌍룡반뉴백옥인(雙龍盤鈕白玉印)을 내리니 새긴 글에 “대원제사, 제국 승니(僧尼)를 통령하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인장”이라 하였다. 대덕(大德) 7년에 사망하였다. 이듬해 연진감장(輦真監藏)이 뒤를 잇고 그 다음 해 사망하였다. 도가반(都家班)이 뒤를 이어 황경(皇慶) 2년에 사망하였다. 상아가사(相兒加思)가 뒤를 이어 연우(延祐) 원년에 사망하였다. 2년에 공가라고라사감장반장복(公哥罗古罗思監藏班藏卜)이 뒤를 이어 지치 3년에 사망하였다. 왕출아감장(旺出兒監藏)이 뒤를 이어 태정 2년에 사망하였다. 공가열사팔충납사감장반장복(公哥列思八冲纳思監藏班藏卜)이 뒤를 이어 옥인을 하사받고 옥새 조서를 내려 천하에 알렸다. 그 해 사망하였다. 천력(天曆) 2년에 연진흘랄실사(輦真吃剌失思)가 뒤를 이었다.
『명실록(明實錄)』
命尚思昆、泽思巴为万竹圆融妙法最胜真如慧智弘慈广济护国宣教正觉大乘法王,西天上善金刚普应大光明佛,领天下释教。赐诰印并袈裟、幡幢、鞍马、伞盖、法器等物。
황제가 상스쿤(尚思昆)과 쩨스파(澤思巴)에게 명하여 만죽원융묘법최승진여혜지홍자광제호국선교정각대승법왕(萬竹圓融妙法最勝真如慧智弘慈廣濟護國宣教正覺大乘法王), 서천상선금강보응대광명불(西天上善金剛普應大光明佛)로 삼아 천하의 불교를 이끌도록 하였다. 관고(誥印)와 더불어 가사(袈裟), 번당(幡幢), 안마(鞍馬), 산개(傘蓋), 법기(法器) 및 기타 물품을 하사하였다.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
及查成化年间节该本部题准事例,乌思藏辅教等四王,每王名下,例该三年一贡,各许差一百人,多不过一百五十人。长河西、鱼通、宁远等处宣慰司三年一贡,每贡多不过一百人。如有国师、禅师在司住坐者,不许各剐差人进贡。其有退老事故等项,着令亲徒儿男袭替赴京进贡者,国师差一百人,禅师都指挥以下各差五十人,多不过一千人,数外,多者照例阻回。
또한 성화(成化) 연간에 본부(本部)가 항목별로 검토하여 승인된 전례를 살펴보면: 위장(烏思藏)의 보교왕(輔教王) 등 사왕(四王)은 왕의 명의 아래 3년에 한 번 조공하도록 하되, 각각 100명을 파견하도록 허락하고 150명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장하서(長河西), 어통(魚通), 녕원(寧遠) 등지의 선위사(宣慰司)는 3년에 한 번 조공하되 매 조공 사절단이 100명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사(司)에 국사(國師)나 선사(禪師)가 머무는 경우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조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거나 다른 사정이 있을 때 친척 제자나 아들에게 직위를 계승시켜 상경하여 조공하게 하는 경우, 국사는 100명을 보낼 수 있고 선사(禪師)·도지휘(都指揮) 이하는 각각 50명을 보낼 수 있으며 합계 1,000명을 초과할 수 없고, 그 수를 넘는 자는 규례에 따라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其都纲、指挥以下来替者,止许随同年例进贡。若国师、禅师数少,则自当随数而来,或三四百名,或五六百名,不待辏满千名。其大乘法王系出家高僧,无地土番民管束,不给勘合,亦无年例进贡,听其欲来,止许差僧徒十人,赍此印信番本,随同阐化等四王年例进贡。题奉圣旨:合例的全赏,违例的减去。钦此钦遵外。
도강(都綱)·지휘(指揮) 이하로 교대하러 오는 자는 다만 연례 정기 사절단과 함께 조공을 올리는 것만 허락하였다. 국사나 선사의 수가 적을 경우에는 실제 인원에 따라 와야 하니, 3, 4백 명이든 5, 6백 명이든 천 명을 채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대승법왕(大乘法王)은 출가한 고승으로 관할하는 토지나 티베트 민(番民)이 없고, 통행증(勘合)도 발급받지 못하며 연례 정기 조공도 없어 오고자 할 때 와도 되나, 다만 이 인신(印信) 티베트 원본을 지닌 승도(僧徒) 10명만 파견하도록 허락하며 선화왕(闡化王) 등 사왕의 연례 조공 사절단을 따라오게 하였다. 상주하여 황제의 조서를 받드니: “규례에 합당한 자는 상을 온전히 받고, 규례를 어긴 자는 감하도록 하라. 삼가 이를 따르라.” 이에 삼가 따른다.
『위장통지(衛藏通志)』
后藏札什伦布境内,有萨迦呼图克图,乃元时帕思巴之后,为红帽教之宗。经簿载育仁菩萨之后人昆贡确嘉卜通达经典,看得奔布山风脉佳胜,欲创建庙宇,向业主降雄固喇娃班第仲喜纳密。酌克敦三人欲乞售兹地,伊三人乃施舍,不取价值,遂建此庙,供诸佛像,招僧住持。相传至今七百二十余年。其红教喇嘛年少时娶妻生子,至生子后,不复再近室家,始登法座。按辈相传,
짱(後藏)의 타실훈포(札什伦布) 경내에 사캬 후투커투(呼圖克圖)가 있으니, 원나라 팍파의 후손으로 홍모교(紅帽敎)의 종주이다. 경보(經簿)에 의하면 보살 육인(育仁)의 후손 쾬촉 걀포(昆贡确嘉卜)가 경전에 통달하여 본부산(奔布山)의 지맥(地脈)이 뛰어남을 보고 사원을 창건하고자 하였다. 땅주인 강슝 굴라와(降雄固喇娃), 반디(班第), 중시나미(仲喜纳密), 작커둔(酌克敦) 세 사람에게 이 땅을 사고자 하였으나, 그 세 사람이 이에 시주하여 값을 받지 않았다. 이에 이 사원을 건립하고 불상을 모시며 승려를 초빙하여 주지토록 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진 지 720여 년이 된다. 홍교(紅教) 라마는 젊을 때 아내를 맞이하여 자식을 낳으며, 자식을 낳은 후에는 집안에 다시 가까이하지 않고 법좌(法座)에 오른다. 대(代)를 이어 전해진다.
『강유기행(康輶紀行)』
布达拉经簿云:萨迦庙之呼图克图,乃元帕思巴之后,为红帽教之宗,仁育菩萨之后人也。其教有家室,生子后坐床掌教,不复近家室矣。其始祖名昆贡确嘉卜,通达经典,见萨迦沟之奔布山风脉佳胜,欲创建庙宇,从业主降雄固刺陛、班第、仲喜纳密、酌克敦三人乞售。三人乃施舍其地,不取直,遂建庙,供释迦牟尼佛。附近土地人民,庙宇僧众,皆其所属。世代相传,至今七百余年。其庙平地起阁,周墙甚固,中殿楹柱皆古树,三人合抱,高三爻余,不加雕饰,其皮节文理如生树然。又有海螺,坚白如玉,左旋敛向明吹之,背现观音相。寺僧宝之,有藏经数万卷,架函充栋。庙。北依山,僧楼梵宇约数千閒,亦有浮屠金殿,供诸佛像,皆红帽刺麻居之。其所诵经,与黄教无异。西南通拉孜大道,山南通野人国界。
포탈라궁의 경서 목록에 이르기를: 사캬 사원의 후투커투는 원나라 팍파의 후손으로 홍모교의 종주이자 보살 인육(仁育)의 후손이다. 이 가르침은 가정(家室)을 허용하니 자식을 낳은 후에야 법좌(法座)에 앉아 교법을 맡고 더 이상 집안에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 초조(初祖)는 쾬촉 걀포(昆贡确嘉卜)라 하였다. 경전에 통달하여 사캬 계곡(萨迦沟)의 본부산(奔布山)의 지맥(地脈)이 뛰어남을 보고 사원을 창건하고자 하여, 땅주인 강슝 굴라비(降雄固刺陛), 반디(班第), 중시나미(仲喜纳密), 작커둔(酌克敦) 세 사람에게 땅을 사고자 청하였다. 그 세 사람이 그 땅을 시주하여 값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에 사원을 건립하고 석가모니불 상을 모셨다. 인근의 토지와 민중, 그리고 사원의 승려들이 모두 그 관할이 되었다. 대대로 전해져 지금까지 700여 년이 되었다. 이 사원은 평지에서 누각이 솟아 있고 사방 성벽이 매우 견고하며, 중전(中殿)의 기둥들은 모두 고목으로 세 사람이 팔을 뻗어야 안을 수 있고 높이는 30여 척이나 되며, 조각이나 장식을 더하지 않았는데도 껍질·마디·나무결이 살아 있는 나무처럼 보인다. 또한 법라(法螺)가 있어 굳고 희기가 옥과 같으며 왼쪽으로 감겨 있는데, 빛을 향하여 불면 등에 관음(觀音) 형상이 나타난다. 사원 승려들이 그것을 보물로 여긴다. 수만 권의 장경(藏經)이 있어 서가의 선반이 지붕까지 가득 채워져 있다. 사원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있으며 승방(僧房)과 범우(梵宇)가 수천 칸에 달하고, 또한 부도(浮屠)와 금전(金殿)이 있어 불상을 모시고 있으니 모두 홍모 라마들이 거처한다. 그들이 독송하는 경전은 황교(黃教)와 다르지 않다. 서남쪽으로는 라체(拉孜)로 통하는 큰 길과 이어지고, 산 남쪽으로는 야인국(野人國) 경계와 접한다.
『흠정곽이객기략(欽定廓爾喀紀略)』
又据福康安奏:萨迦呼图克图采办糌粑五万觔,分运济陇聂拉木运脚,自行捐出,并请捐食牛五百头等语。前因萨迦喇嘛于贼匪上年路过时,曾经递送哈达,曾谕令福康安等于撤兵之便,勒令改归黄教。今该呼图克图既有捐办糌粑、牛只之事,是尚知畏法奉公。此等红教流传日久,且人户众多,若勒令改归黄教,办理亦恐不无掣肘。福康安等不必拘泥前旨,竟当明白晓谕该喇嘛等,以尔等前此与贼递送哈达,俱干重罪,仰蒙大皇帝念尔等均系僧家,愚昧无知,不行严办,实属格外施恩。今因尔等捐办糌粑牛只,尚知急公效顺,本将军业为奏闻,仍准尔等在庙照旧焚修安业。尔等此后宜倍加感激,约束徒众,安静梵诵,不得妄生事端,方可永安乐利。并交驻藏大臣严切约束,不准仍前越界滋事,俾该喇嘛等咸知儆惕,免与黄教争竞,庶为妥善。
또한 푸캉안(福康安)의 주청(奏請)에 따르면: 사캬 후투커투가 짬파(糌粑) 5만 근을 조달하고 교룽(濟陇)과 냘람(聂拉木)에 나누어 운송하는 운반비를 자비로 부담하였으며, 또한 식용 소 500두를 헌납하겠다고 청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사캬 라마들이 작년 적비(賊匪)가 지나갈 때 하다(哈達)를 바친 일이 있어, 푸캉안 등에게 병력 철수의 기회에 그들을 황교(黃教)로 강제 개종하도록 명한 바 있었다. 이제 이 후투커투가 짬파와 소를 헌납하는 일을 하였으니 여전히 법을 두려워하고 공(公)을 받들 줄 안다. 이 홍교(紅教)는 전래된 지 오래되었고 또한 인호(人戶)가 많으니, 만약 황교로 강제 개종하게 한다면 처리하는 데 지장이 없지 않을 것이다. 푸캉안 등은 앞서 내린 조지(詔旨)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마땅히 저 라마 등에게 분명히 가르쳐 알려야 하니: “너희들이 이전에 적비에게 하다를 바친 것은 모두 중죄를 범한 것이나, 대황제(大皇帝)께서 너희들이 모두 승가(僧家)로 우매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엄히 다스리지 않으셨으니 이는 실로 특별한 은혜이다. 이제 너희들이 짬파와 소를 헌납하여 여전히 공(公)을 위해 앞장서 순종을 보일 줄 아는지라 본 장군이 이미 주청하였으니, 너희들은 여전히 사원에서 예전과 같이 향을 피우며 수행에 종사하도록 허락된다. 너희들은 이후 더욱 감사히 여기고 무리를 단속하며 조용히 범음(梵誦)을 올리고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니, 그래야만 영원히 평안하고 이롭게 지낼 수 있다.” 또한 주장(駐藏) 대신(大臣)에게 넘겨 엄격히 단속하게 하여, 이전처럼 경계를 넘어 사단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저 라마 등이 모두 경계하여 황교와 다투지 않을 줄 알게 한다면 이것이 타당한 처리가 될 것이다.
『장사거요(藏事舉要)』
후빙슝(胡炳熊)의 『장사거요』는 사캬파와 다른 비겔룩파 종파를 넓게 ‘홍교(紅教)’라 부른 청말 한문 저술의 분류 관행을 따른다. 이 기록은 사캬 사원의 조상 사원으로서의 지위, 팍파의 계보, 종카파가 젊은 시절 사캬에서 수학한 일을 강조한다.
后藏札什伦布之西,有萨迦庙,乃红教祖寺住持。此寺之胡土克图,为红教刺麻最尊者,即元帝师八思巴后人。其教先娶妻生子,为他日袭衣钵计,有后则不入室,始登法座。其经典皆来自印度。黄教祖宗喀巴初年亦学经于萨迦庙,及学成,乃自立宗,故经典略同。青海蒙古及巴塘、里塘番众,凡信黄教䎞,亦兼敬萨迦剌麻,如达赖、班禅。二教本同一原,其近日邪术之红教,乃红教末流,非萨迦庙本宗也。
짱(後藏) 타실훈포(札什伦布) 서쪽에 사캬 사원이 있으니, 홍교(紅教) 조사 사원의 주지이다. 이 사원의 후투커투는 홍교 라마 중 가장 높은 분으로, 곧 원나라 제사 팍파의 후손이다. 이 종파에서는 먼저 아내를 맞이하여 자식을 낳으니 장래 의발(衣鉢)을 계승할 것을 도모하기 위함이요, 후사가 생기면 침실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비로소 법좌(法座)에 오른다. 그 경전은 모두 인도에서 왔다. 황교(黃教)의 조사 종카파(宗喀巴)도 초년에 사캬 사원에서 경전을 배웠으며, 배움이 완성되자 비로소 자기 종파를 세웠다. 그러므로 경전은 대부분 같다. 칭하이(青海), 몽골 및 파탕(巴塘), 리탕(里塘)의 티베트 민중으로 황교를 믿는 자들도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처럼 사캬 라마를 함께 공경한다. 두 종파는 본래 같은 근원에서 비롯되었다. 근래에 말하는 사술(邪術)의 홍교는 홍교의 말류(末流)로 사캬 사원의 본종(本宗)이 아니다.
其与黄教异者,大端凡三:一、衣冠异色,二、咒语稍别,三传子与转生不同,如斯而已。
황교(黃教)와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의관(衣冠)의 색이 다르고, 둘째, 주문(咒語)이 약간 다르며, 셋째, 자식에게 전수하는 것과 윤회 전생이 다르다. 그것뿐이다.
참고 자료
- 섬서성 문물국, 「섬서 고고학 30년의 대티베트 지원」
- 다창 종파 반졀 상포(達倉宗巴班覺桑布) 저 『한장사기(漢藏史記)』 서지 정보
- 장윈(張云), 「사회 개혁가 제사 팍파 이야기」
- 응아왕 쿤가 쐐남(Ngawang Kunga Sönam) 저 『사캬 계보』 서지 정보
- 양제(楊杰), 「명대 티베트 가문사 편찬에 나타난 중앙 왕조에 대한 정치적 귀속 의식」
역사 사진
1948년
1948년, 시킴(Sikkim) 주재 영국 정무관 아서 J. 홉킨슨(Arthur J. Hopkinson)이 사캬의 사원 단지를 촬영하였다. 이 사진들은 현재 대영박물관과 피트 리버스 박물관(Pitt Rivers Museum)이 공동 편찬한 The Tibet Album: British Photography in Central Tibet 1920–1950 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캬 지역의 모든 사진에서 열람할 수 있다. 아래의 사진들에는 사캬 사원 근경, 사캬 사원 전경, 석재 운반 수리 중인 사원 안마당, 인근 산비탈에서 바라본 사캬 대전(大殿), 대전 지붕에서 캄파 종(Khampa Dzong) 방향 조망, 주 법당 입구 앞 안마당이 포함된다.
이 컬렉션에는 세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사캬 사원 파노라마도 있다. 여기서는 합성 이미지에 해당하는 세 장의 개별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한다. 순서대로 왼쪽 프레임, 가운데 프레임, 오른쪽 프레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