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북송 개보 9년(976), 담주 태수 주동(朱洞)이 악록산 포황동(抱黃洞) 아래에 서원을 세워 강당 다섯 칸과 재서(齋序) 쉰둘 칸을 두어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이들을 수용하였고, 육천(陸川) 주부 손매(孫邁)가 이를 위해 기(記)를 지었다. 함평 2년(999), 지주 이윤칙(李允則)이 이를 넓혀 가운데 강당을 내고 그 위에 서루(書樓)를 지었으며, 문학자 왕우칭(王禹偁)이 이번 확충을 위해 기를 지었다. 함평 4년에 이윤칙이 또 조정에 상주하여 국자감[1] 소장의 여러 경전 석문(釋文)·의소(義疏)와 《사기》·《옥편》·《당운》을 하사해 달라 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대중상부 8년(1015), 송 진종이 편전(便殿)에서 서원의 산장(山長)[2] 주식(周式)을 불러 보고 국자주부(國子主簿)를 제수하였으나, 주식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산으로 돌아가 계속 제자들을 가르치니, 조정이 이에 옛 이름을 따라 「악록서원」 편액을 하사하고 궁중의 소장 책을 더하여 내렸다. 북송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서원 안에는 이미 공자당(孔子堂)·어서각(御書閣)이 있었고, 맑은 샘이 당 아래로 흘러 지났다. 당시 조정은 아직 주현(州縣)에 관학을 널리 세우지 않았으므로, 악록서원처럼 어진 사대부가 일으킨 향당지학(鄕黨之學)이 이로써 한 지방 교육의 중심이 되어 숭양(嵩陽)·수양(睢陽)·백록동(白鹿洞)과 함께 사대 서원으로 불렸다. 이 네 서원 가운데 나머지 세 곳은 모두 민간에서 일으켰고, 오직 악록만이 지방 장관이 창건하였다.
남송 소흥(紹興) 초년에 서원은 병화 속에서 불타 없어져, 살아남은 가옥이 십분의 일에 못 미쳤고, 이후 오랫동안 황폐하였다. 삼십여 년 뒤 건도(乾道) 원년(1165), 형호남로 안무사(荊湖南路安撫使) 유공(劉珙)이 서원을 다시 세우니, 주학 교수 소영(邵穎)이 그 일을 맡아 반 년이 못 되어 낙성하였고, 옥우 쉰 영(楹)으로 대체로 옛 규모를 회복하였으며, 학자 장식(張栻)을 청하여 교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건도 3년에 주희(朱熹)가 복건에서 담주에 와 장식을 찾아 두 달을 머물며, 두 사람이 서원 안에서 함께 강론하니 후세에서 이를 「주장회강(朱張會講)」이라 일컫는다. 주희는 또 손수 「충효염절(忠孝廉節)」 네 큰 글자를 썼는데, 후세에 오랫동안 서원 당벽(堂壁)에 모각(摹刻)되었다. 장식은 이번 중건을 위해 기문을 지어, 서원의 학사가 과거의 이록(利祿)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이루게 하여 이 도를 전하고 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순희(淳熙) 15년(1188), 담주 지주 반치(潘畤)가 재사(齋舍)를 늘려 고치니, 학자 진부량(陳傅良)이 또 초청에 응해 기를 지었다. 소희(紹熙) 연간에 주희가 담주 지주로 나아가,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곧 공문을 내려 서원을 정비하고, 별도로 열 명의 액외 생원(額外生員) 정원을 두어 사방에서 유학 오는 선비들을 수용하되, 매일 쌀 한 되 네 홉과 돈 예순 문을 공급하고 입학 보시(補試)를 면제해 주었다.
남송 덕우(德祐) 2년(1276), 원군이 담주성을 함락할 때 서원 학생들도 수군(守軍)을 따라 성에 올라 항거하다 죽은 자가 많았고, 서원은 다시 무너졌다. 십 년 뒤 지원(至元) 23년(1286)에 고을 사람 유필대(劉必大)가 다시 세웠고, 연우(延祐) 원년(1314)에 담주로 판관(潭州路判官) 유안인(劉安仁)이 또 수리하여, 예전(禮殿)·사재(四齋)·제현사(諸賢祠)·강당·존경각(尊經閣)·극고명정(極高明亭) 등이 모두 옛 모습을 그대로 따랐다. 원 말엽에 서원은 세 번째 병화로 무너졌고, 이후 오랫동안 황폐하였다.
명 성화(成化) 5년(1469), 창사 지부(知府) 전주(錢澍)가 서원을 다시 세웠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폐하여, 옛터는 오랫동안 승려와 세가(勢家)에게 점거되었다. 홍치(弘治) 연간에 통판(通判) 진강(陳鋼)이 녹봉을 내어 다시 고쳐 중문(中門)·좌우무(左右廡)·강당과 주희·장식을 제사하는 숭도사(崇道祠)를 세웠고, 뒤이어 부임한 지부 왕도(王瑫)가 부임한 뒤 스승과 학생들을 모아 석채례(釋菜禮)[3]를 행하니 서원이 이에 이르러 학사를 되살렸으며, 동지(同知) 양무원(楊茂元)이 뒤이어 존경각을 세워 책을 장(藏)하였다. 한림(翰林) 이동양(李東陽)이 이번 중건을 위해 기를 지었는데, 기에서 그가 일찍이 창사에 돌아와 선조의 묘를 살피고 악록에 올랐을 때 본 것이 아직도 진망(榛莽) 사이의 끊어진 비와 옛터뿐이었다고 말하였다. 정덕(正德) 2년(1507), 참의(參議) 오세충(吳世忠)이 예전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쳐 짓고 서원 왼쪽으로 옮겨 좌묘우학(左廟右學)의 격국을 이루었고, 또 반지(泮池)[4]를 파고 영성문(櫺星門)을 늘려 지었다. 이듬해에 귀주(貴州) 용장(龍場)으로 귀양 가는 길의 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창사를 지나며 서원에 와 주장사(朱張祠)에 배알하였다.
가정(嘉靖) 연간에 지부 왕병량(王秉良)·손존(孫存)이 선후로 확충을 주관하여 재사에 새로 이름을 붙이고, 당 밖에 세 문을 내고, 산 아래에 혁희대(赫曦台)를 쌓았으며, 또 학전(學田) 천사백여 무를 늘렸다. 동지 유기(俞夔)는 또 샹장 서안에 「악록서원」 네 글자를 새긴 석패방(石牌坊)을 세우니, 나루터가 이로 인해 패루구(牌樓口)라는 이름을 얻었다. 만력(萬曆) 10년(1582)에 학자 장원변(張元忭)이 서원에서 주강한 적이 있다. 숭정(崇禎) 11년(1638)에 왕부지(王夫之)가 서원에 들어와 공부하며 동창 광붕승(鄺鵬升) 등과 함께 행사(行社)를 조직하였다. 숭정 16년(1643)에 서원이 다시 병화로 무너졌고, 이듬해 명이 망하니 《악록서원지》를 집인(輯印)한 바 있는 산장 오도행(吳道行)이 단식하여 순국하였다. 청 강희 7년(1668)에 순무 주소남(周召南)이 다시 세웠고, 13년에 오삼계(吳三桂)의 반군이 상(湘)에 들어오니 서원이 다시 병화를 입었다. 23년(1684)에 순무 정사공(丁思孔)이 녹봉을 내어 고치기를 창도하니, 공정을 주관한 창사부 동지 조녕(趙寧)이 문묘(文廟)·존경각·숭도사·육군자당(六君子堂) 등 건축을 복구하고, 또 샹장 서안에서 서원으로 통하는 삼 리의 산길 도중에 자비정(自卑亭)을 세웠다. 25년(1686)에 정사공이 상소하여 서원을 위해 편액을 청하니, 예부에서 장시(江西) 백록동서원의 예에 따라 반수(頒賜)하도록 의결하였고, 강희제가 어필로 「학달성천(學達性天)」 편액을 써서 서원에 하사하고 아울러 일강해의(日講解義)와 경사(經史) 여러 책을 내려 주었다. 옹정(雍正) 11년(1733)에 청 조정이 각 성에 성회 서원(省會書院)을 설치하게 하니, 악록서원이 호남성의 성회 서원으로 열거되었다. 건륭 9년(1744)에 건륭제 어필 「도남정맥(道南正脈)」 편액을 반수하여 걸었다.
건륭 47년(1782)에 나전(羅典)이 산장으로 부임하여 스무일곱 해 동안 교육을 맡아, 잇달아 서원 팔경(八景)을 고쳐 짓고 산 앞에 애만정(愛晚亭)을 세웠다. 가경(嘉慶) 17년(1812)에 산장 원명요(袁名曜)가 원생 장중계(張中階)와 함께 「유초유재(惟楚有材) 우사위성(于斯爲盛)」의 문련(門聯)을 지어 서원 대문에 걸었다. 도광(道光) 7년(1827)에 산장 구양후균(歐陽厚均)이 전해 오기를 주희가 손수 썼다는 「충효염절」 네 글자를 모각하여 비로 만들어 강당 안쪽 벽에 박았고, 그가 교육을 맡은 이십여 년 동안 증국번(曾國藩)·좌종당(左宗棠)·곽숭도(郭嵩燾) 등이 선후로 서원에서 공부하였다. 함풍(咸豐) 2년(1852)에 태평군이 창사를 공격하니 서원 재사가 기울어 무너졌고, 산장 정선경(丁善慶)이 뒤이어 문묘·어서루(御書樓)·강당과 재사의 복구를 주관하였다. 동치(同治) 7년에서 8년(1868~1869)에 순무 유곤(劉崐)이 공금을 내어 크게 고쳐, 낡은 것을 걷어내고 새로 바꾸니 서원의 규제(規制)가 이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졌다.
광서(光緖) 29년(1903)에 호남 순무 조이손(趙爾巽)이 주청하여 윤허를 얻어, 악록서원을 시무학당(時務學堂)이 여러 차례 변천하여 온 성성대학당(省城大學堂)과 합병하여 호남고등학당(湖南高等學堂)을 조직하였다. 1912년에 학당이 폐지되고, 이후 호남고등사범학교·호남공립공업전문학교가 잇달아 서원 옛터로 옮겨와 학사를 폈으며, 1926년 2월에 공업전문학교가 법정(法政)·상업 전문학교와 합병하여 호남대학이 성립하였다. 서원 건축군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두문(頭門)·이문(二門)·강당·어서루 등 주요 건축이 청대 동치 연간 대수(大修) 뒤의 격국을 유지하고 있으며, 1988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호남대학에 속한다.
역사 문헌
《문헌통고(文獻通考)》
八年,赐潭州岳麓书院额。始,开宝中,郡守朱洞首度基创宇,以待四方学者。李允则来为州,请于朝,乞以书藏。方是时,山长周式以行义著。八年,诏见便殿,拜国子学主簿,使归教授,诏赐书院名,增赐中秘书。
8년에 담주 악록서원에 액(額)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개보 연간에 군수 주동이 비로소 기지(基址)를 헤아려 집을 지어 사방의 배우는 이를 맞이하고자 하였다. 이윤칙이 와서 주(州)를 맡아 조정에 청하여 책을 장(藏)하기를 구하였다. 바로 이때 산장 주식이 행의(行義)로 드러났다. 8년에 조서로 편전에서 보고, 국자학주부(國子學主簿)를 제수하여 돌아가 가르치게 하고, 조서로 서원의 이름을 하사하며 중서(中祕書)를 더하여 하사하였다.
右宋兴之初,天下四书院建置之本末如此。此外则又有西京嵩阳书院,赐额于至道二年;江宁府茅山书院,赐田于天圣二年。嵩阳、茅山后来无闻,独四书院之名著。是时未有州县之学,先有乡党之学。盖州县之学,有司奉诏旨所建也,故或作或辍,不免具文。乡党之学,贤士大夫留意斯文者所建也,故前规后随,皆务兴起。后来所至,书院尤多,而其田土之锡,教养之规,往往过于州县学,盖皆欲仿四书院云。
위는 송이 일어난 초에 천하 네 서원의 건치(建置)의 처음과 끝이 이와 같았음이다. 이 밖에 또 서경(西京) 숭양서원이 있어 지도(至道) 2년에 액을 하사하였고, 강녕부(江寧府) 모산서원(茅山書院)이 있어 천성(天聖) 2년에 전(田)을 하사하였다. 숭양·모산은 뒤에 알려진 바 없으나 오직 네 서원의 이름이 드러났다. 이때에는 아직 주현의 학교가 없고 먼저 향당의 학교가 있었다. 대개 주현의 학교는 유사(有司)가 조지(詔旨)를 받들어 세운 것이므로, 혹 세우고 혹 그치어 형문(具文)을 면하지 못하였다. 향당의 학교는 어진 사대부로서 사문(斯文)에 유의한 이가 세운 것이므로, 앞서 규(規)로 삼고 뒤에 따르며 모두 일으키기에 힘썼다. 뒤에 이르러 서원이 더욱 많았는데, 그 전토의 하사와 교양(敎養)의 규(規)는 왕왕 주현학(州縣學)을 넘었으니, 대개 모두 네 서원을 모방하고자 한 것이라 하였다.
《상성방고록(湘城訪古錄)》
一统志云:在善化县西岳麓山下。宋开宝中,潭州守朱洞建,实彭城刘鳌创之。渊鉴类函云:刘珙知潭州,旧有岳麓书院,真宗朝芜废,公一新之,养土数千人,延礼佳士。方舆胜览云:湖南路潭州岳麓书院,在岳麓山下。画墁集云:岳麓书院有孔子堂、御书阁,堂庑尚完,清泉经流堂下,景意极于潇湘。文献通考云:宋真宗大中祥符八年,赐潭州岳麓书院额。始开宝中,郡守朱洞首度基创宇,以待四方学者。李允则来为州,请于朝,乞以书藏方。是时,山长周式以行义著。八年,诏见便殿,拜国子学主簿,使归教授,诏赐书院名,增赐中秘书。
《일통지(一統志)》에 이르기를, 선화현(善化縣) 서쪽 악록산 아래에 있다 하였다. 송 개보 연간에 담주 수(守) 주동이 세웠으니, 실은 팽성(彭城) 유오(劉鰲)가 이를 창건하였다. 《연감유함(淵鑑類函)》에 이르기를, 유공이 담주를 다스릴 때 옛적부터 악록서원이 있었는데 진종 조에 황폐하매 공이 이를 전부 새롭게 하여 선비 수천 명을 기르고 좋은 선비를 끌어 예(禮)로 대하였다 하였다. 《방여승람(方輿勝覽)》에 이르기를, 호남로(湖南路) 담주 악록서원은 악록산 아래에 있다 하였다. 《화만집(畫墁集)》에 이르기를, 악록서원에는 공자당·어서각이 있고 당무(堂廡)가 오히려 온전하며, 맑은 샘이 당 아래로 흘러 지나니 경치의 뜻이 소상(瀟湘)에서 지극하다 하였다. 《문헌통고》에 이르기를, 송 진종 대중상부 8년에 담주 악록서원에 액을 하사하였다. 처음 개보 연간에 군수 주동이 비로소 기지를 헤아려 집을 지어 사방의 배우는 이를 맞이하고자 하였다. 이윤칙이 와서 주를 맡아 조정에 청하여 책을 장하기를 구하였다. 이때 산장 주식이 행의로 드러났다. 8년에 조서로 편전에서 보고, 국자학주부를 제수하여 돌아가 가르치게 하고, 조서로 서원의 이름을 하사하며 중서를 더하여 하사하였다 하였다.
玉海云:开宝九年,潭州守朱洞始创宇于岳麓山,抱黄洞下,以待四方学者。作讲堂五间,斋序五十三间,孙迈为记。咸平二年,潭守李允则益崇大其规模。三年,王元之为记曰:西京首述文翁,东观先书卫飒。其理蜀郡,教桂阳,率以庠序为先云云。中开讲堂,揭以书楼,塑先师十哲之象,画七十二贤。潇湘为洙泗,荆蛮为邹鲁。四年二月二十日辛卯,允则奏:岳麓山书院修广舍宇,生徒六十余人。请下国子监,赐诸经释文、义疏、史记、玉篇、唐韵。从之。祥符五年,山长周式请于太守刘师道广其居。谭绮为记。式以行义著,八年,召见便殿,拜国子主簿,使归教授,给诏因旧名赐额。
《옥해(玉海)》에 이르기를, 개보 9년에 담주 수 주동이 비로소 악록산 포황동 아래에 집을 창건하여 사방의 배우는 이를 맞이하고자 하였다. 강당 다섯 칸을 짓고 재서 쉰세 칸을 두니, 손매가 기를 지었다. 함평 2년에 담주 수 이윤칙이 그 규모를 더욱 높이고 크게 하였다. 3년에 왕원지(王元之)가 기를 지어 이르기를, 서경에서는 문옹(文翁)을 첫머리에 서술하고 동관(東觀)에서는 위삽(衛颯)을 먼저 기록하였다. 그가 촉군(蜀郡)을 다스리고 계양(桂陽)을 가르침에 모두 상서(庠序)를 으뜸으로 삼았다 하였다운운(云云). 가운데 강당을 열고 서루를 높이 세우며, 선사(先師)와 십철(十哲)의 상을 조소(塑造)하고 칠십이현(七十二賢)을 그리니, 소상이 수사(洙泗)가 되고 형만(荊蠻)이 추노(鄒魯)가 되었다 하였다. 4년 이월 이십일 신묘(辛卯)에 윤칙이 주하기를, 악록산 서원이 넓고 큰 사우(舍宇)를 고치니 생도가 예순여 명이다. 국자감에 내려 여러 경전의 석문·의소와 《사기》·《옥편》·《당운》을 하사하기를 청하니, 이를 따랐다. 상부(祥符) 5년에 산장 주식이 태수 유사도(劉師道)에게 청하여 그 거처를 넓히니, 담기(譚綺)가 기를 지었다. 주식이 행의로 드러나 8년에 편전에 불려 보고, 국자주부를 제수하여 돌아가 가르치게 하고, 조서를 내려 옛 이름을 따라 액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朱子撰南岳处士吴晦叔行状云:长沙故有岳麓书院,国初时,郡人周式为山长。教授数百人。后更变乱,院废而山长罢。五峰方辞秦氏礼命,尝请为之,不报。乾道初,建安刘公珙始复立焉,犹虚山长不置。至是,转运副使九江萧侯之敏,始以礼聘君,请为之。君曰:侯之意则美矣,然此先师之所不得为者,岂可以否德忝之哉?卒辞不能。萧侯亦高其义,不强致也。
주자(朱子)가 지은 남악처사(南嶽處士) 오회숙(吳晦叔)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장사(長沙)에 옛적부터 악록서원이 있었는데, 나라 초년에 고을 사람 주식이 산장이 되어 수백 명을 가르쳤다. 뒤에 변란을 겪으며 서원이 폐하고 산장도 파(罷)하였다. 오봉(五峰)이 바야흐로 진씨(秦氏)의 예명(禮命)을 사양할 때, 일찍이 이를 맡아 달라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건도 초에 건안(建安) 유공 공(劉公珙)이 비로소 다시 세웠으되, 오히려 산장을 비워 두고 두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전운부사(轉運副使) 구강(九江)의 소후 지민(蕭侯之敏)이 비로소 예로써 그대를 초빙하여 이를 맡아 주기를 청하니, 그대가 이르기를, 후(侯)의 뜻은 아름답지만, 그러나 이는 선사(先師)도 감히 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부덕(不德)으로 이를 더럽힐 수 있으랴 하여, 마침내 사양하여 맡지 못하였다. 소후도 또한 그 의(義)를 높이 여겨 억지로 불러오지 않았다 하였다.
장식(張栻)의 《담주중수악록서원기(潭州重修嶽麓書院記)》
潭州岳麓书院,开宝九年知州事朱洞之所作也。后四十有五年,李允则来,为请于朝,因得赐书藏焉。是时山长周式以行义著,祥符八年召见便殿,拜国子主簿,使归教授,始诏因旧名赐额,仍增给中秘书,于是书院之称闻天下。绍兴初,更兵革灰烬,十一仅存,已而遂废。乾道元年,建安刘侯珙安抚湖南,既剔蠹夷奸,民俗安靖,则葺学校,访儒雅,思有以振起之。湘人士合辞以书院请,侯竦然曰:是固章圣皇帝所以加惠一方,劝厉长养以风天下者,而可废乎?乃属州学教授金华卲颖经纪其事,未半岁而成,大抵悉还旧规。某从多士往观焉,爱其山川之胜,堂序之严,裴徊不忍去,喟而与之言曰:侯之为是举也,岂将使子群居族谭,但为决科利禄计乎?抑岂使子习为言语文词之工而已乎?盖欲成就人才,以传斯道而济斯民也。
담주 악록서원은 개보 9년에 지주사(知州事) 주동이 지은 것이다. 마흔다섯 해 뒤에 이윤칙이 와서 이를 위해 조정에 청하여, 이에 책을 하사받아 장(藏)하였다. 이때 산장 주식이 행의로 드러나, 상부 8년에 편전에 불려 보고 국자주부를 제수하여 돌아가 가르치게 하고, 비로소 조서로 옛 이름을 따라 액을 하사하며 중서를 더하여 주니, 이에 서원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소흥 초에 병혁(兵革)을 겪어 재와 잿더미가 되어 십분의 일만 겨우 남았고, 이윽고 마침내 폐하였다. 건도 원년에 건안 유후 공(劉侯珙)이 호남을 안무(安撫)하여, 이미 우두(蠹)를 가려내고 간(奸)을 평정하여 민속이 편안하고 안정되매, 이에 학교를 수리하고 유아(儒雅)를 찾으며, 이를 진기(振起)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상(湘)의 인사들이 말을 모아 서원을 청하니, 후가 엄숙히 이르기를, 이것은 진실로 장성황제(章聖皇帝)께서 한 지방에 은혜를 더하고 권려(勸厲)하고 길러 천하를 교화(風)한 것인데 어찌 폐할 수 있으랴 하였다. 이에 주학 교수 금화(金華) 소영(卲穎)에게 맡겨 그 일을 경영하게 하니 반 해도 못 되어 이루어져, 대저 모두 옛 규모를 되돌렸다. 내가 여러 선비를 따라 가서 보니, 그 산천의 아름다움과 당서(堂序)의 엄(嚴)함을 사랑하여 거닐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탄식하며 이를 말하기를, 후가 이 일을 한 것은 어찌 그대들로 하여금 떼 지어 살며 무리 지어 이야기하되 다만 과거와 이록의 계책만을 위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혹 어찌 그대들로 하여금 언어와 문사(文辭)의 공교로움을 익히게만 하려는 것이겠는가? 대개 인재를 이루게 하여 이 도를 전하고 이 백성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惟民之生,厥有常性,而不能以自达,故有赖于圣贤者出而开之,是以二帝三王之政,莫不以教学为先务。至于孔子,述作大备,遂启万世无穷之传。其传果何与?曰仁也。仁,人心也,率性立命,知天下而宰万物者也。今夫目视而耳听,口言而足行,以至于食饮起居之际,谓道而有外夫是,乌可乎?虽然,天理人欲,同行异情,毫厘之差,霄壤之缪,此所以求仁之难,必贵于学以明之与?善乎孟子之得传于孔氏,而发人深切也。齐宣王见一牛之觳,觳而不忍,则告之曰:是心足以王矣。古之人所以大过人者,善推其所为而已。论尧舜之道本于孝弟,则欲其体夫徐行疾行之间;指乍见孺子匍匐将入井之时,则曰:恻隐之心,仁之端也。于此焉求之,则不差矣。尝试察吾终日事亲从兄、应物处事,是端也,其或发见,亦知其所以然乎?诚能默识而存之,扩充而达之,生生之妙,油然于中,则仁之大体,岂不可得乎?及其至也,与天地合德,鬼神同用,悠久无疆,变化莫测,而其则初不远也。是乃圣贤所传之要,从事焉终吾身而后已,虽约居屏处,庸何损?得时行道,事业满天下,而亦何加于我哉?侯既属某为记,遂书斯言以厉同志,俾无忘侯之德,抑又以自厉云尔。二年冬十有一月辛酉日南至,右承务郎直秘阁赐紫金鱼袋广汉张某记。
무릇 백성의 삶에는 그 항상된 성(性)이 있으되, 능히 스스로 통달하지 못하므로, 이에 성현(聖賢)이 나와 이를 여는 데 의지하게 되니, 이런 까닭에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정치는 교학(敎學)을 으뜸가는 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공자에 이르러 술작(述作)이 크게 갖추어지니, 마침내 만세의 다함 없는 전(傳)을 열었다. 그 전함은 과연 무엇인가? 일러 인(仁)이라 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니, 성(性)을 따르고 명(命)을 세우며, 천하를 알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이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입으로 말하고 발로 걸으며, 먹고 마시고 일어나고 거처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도가 이 밖에 있다고 말함이 어찌 옳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행함은 같고 정(情)이 다르며, 털끝만 한 차이가 하늘과 땅의 그릇됨이니, 이것이 인을 구함의 어려움이요, 반드시 배움으로써 이를 밝힘을 귀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맹자가 공씨(孔氏)에게서 전함을 얻어 사람에게 깊고 절실하게 일깨운 것이 아름답다. 제선왕(齊宣王)이 한 마리 소가 떠는 것을 보고 차마 여기지 못하니, 곧 그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 마음이면 족히 왕(王)이 될 수 있다 하였다. 옛사람이 크게 남을 넘은 까닭은 그 하는 바를 잘 미룰 뿐이다. 요순(堯舜)의 도가 효제(孝弟)에 근본함을 논할 때는 그 서행(徐行)과 질행(疾行) 사이를 체(體)하기를 바랐고, 문득 유자(孺子)가 기어서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 할 때를 가리켜서는 곧 이르기를, 측은(惻隱)의 마음은 인의 단(端)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이를 구하면 어긋나지 않는다. 일찍이 우리가 하루 종일 부모를 섬기고 형을 따르며 사물에 응하고 일을 처함을 살펴 보라. 이 단(端)이 혹 밝혀 나타나면 또한 그 까닭을 알 것인가? 참으로 능히 묵묵히 명심하여 이를 간직하고, 넓혀서 통달하게 하면, 낳고 낳는 묘(妙)함이 우연히 그 안에서 일어나니, 그러면 인의 대체(大體)를 어찌 얻지 못하겠는가?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천지와 덕을 합하고 귀신과 쓰임을 같이하여, 유구하여 끝이 없고 변화하여 헤아릴 수 없으나, 그 법칙은 애초에 멀지 않다. 이것이 곧 성현이 전한 요(要)이니, 이에 종사하여 내 몸이 다한 뒤에 그칠 뿐이다. 비록 검약하게 살며 물러나 거처한들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때를 얻어 도를 행하여 사업이 천하에 가득한들 또한 나에게 무엇을 더하겠는가? 후가 이미 나에게 기를 맡기니, 이에 이 말을 써서 뜻을 같이하는 이를 격려하여 후의 덕을 잊지 않게 하고, 또한 이로써 스스로 격려하고자 할 따름이다. 2년 겨울 11월 신유(辛酉)일 남지(南至)에, 우승무랑 직비각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광한(廣漢) 장모(張某) 기.
진부량(陳傅良)의 《중수악록서원기(重修嶽麓書院記)》
白:唐季至于五代,用兵而教事阙。圣人作四方次第平,以俎豆胜干戈,而天下靡然日趋于文。盖宋受命四年,遂平荆湖。又十有一年,尚书朱洞来守长沙,作书院岳麓山下。朱在国史,其行事不甚较着,足以考见上意。所乡为吏者,皆承休德,知所先后,如此岂不盛哉!而其风动抑何速也!五六十载之间,教化大洽,学者皆振振雅驯,行艺修好,庶几于古。当是时,州县犹未尽立学,所谓“十九教授未有显”者,而四书院之名,独闻天下,上方崇长褒异之者甚至,则其成就之效博矣。
아뢴다. 당 말엽에서 오대에 이르기까지 군사를 쓰느라 교화의 일이 결(闕)하였다. 성인이 일어나 사방이 차례로 평정되니, 조두(俎豆)로써 간과(干戈)를 이기매 천하가 미연(靡然)히 나날이 문(文)으로 향하였다. 대개 송이 천명을 받은 지 4년에 마침내 형호(荊湖)를 평정하였다. 또 십일 년에 상서(尙書) 주동이 와서 장사를 지키며, 악록산 아래에 서원을 지었다. 주(朱)씨는 국사(國史)에 그 행사(行事)가 심히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되, 윗사람의 뜻을 살펴 알 만하다. 향(向)하여 관리가 된 자들이 모두 그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선후(先後)를 알았으니, 이와 같으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풍기(風氣)의 움직임은 또 어찌 그리 빠른가! 오륙십 년 사이에 교화가 크게 두루 미치어, 배우는 이들이 모두 떳떳하고 아사(雅馴)하며, 행실과 재예가 아름다워 대저 옛적에 가까웠다. 이 무렵 주현에는 아직 학교를 다 세우지 못하여, 이른바 「십구(十九) 교수(敎授)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네 서원의 이름이 홀로 천하에 알려졌고, 윗사람이 이를 높이 기르고 포장하고 다르게 여김이 지극하였으니, 그 이루어 낸 보람이 넓었다.
熙宁初,行三舍之法,颇欲进士尽繇学校,而乡举益重教官之选,举子家状,必自言尝受业某州教授,使不得人自为说。崇宁以后,舍法加密,虽里闾句读童子之师,不关白州学者,皆有禁。诏令诚甚美,然由是文具胜而利禄之意多,老师宿儒尽向之。书院不知起何时,以余所闻,汉初郡国往往有夫子庙而无教官,且不置博士弟子员,其学士尝课试供养与否,关不见传记。然诸儒以明经教于其乡,率从之者数十百人,辄以名其家。齐、鲁、燕、赵之间,诗书、礼、易、春秋论,论家各甚盛,则今书院近之矣。县官时时遣守相劳问,致馈为礼。其门生皆世守师说,更相传受不易业。盖至孝武帝时,郡国始稍稍有学校官。由今观汉晚出,视其初儒者术业工楛,优劣可知也已。
희녕(熙寧) 초에 삼사(三舍)의 법을 시행하여, 진사를 모두 학교에서 나오게 하고자 하였고, 향거(鄕擧)에는 더욱 교관(敎官)의 선발을 중하게 여겼으며, 거자(擧子)의 가장(家狀)에는 반드시 스스로 일찍이 어느 주 교수에게서 수업(受業)하였음을 말하게 하여, 사람이 저절로 스스로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숭녕(崇寧) 이후에 사법(舍法)이 더욱 치밀해져, 비록 리려(里閭)에서 구독(句讀)을 가르치는 동자의 스승일지라도 주학(州學)에 관백(關白)하지 않은 자는 모두 금지가 있었다. 조령(詔令)이 참으로 매우 아름다웠으나, 그러나 이로부터 문구(文具)가 성하고 이록(利祿)의 뜻이 많아져, 노사숙유(老師宿儒)가 다 이를 향하였다. 서원이 언제부터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들은 바로는 한(漢) 초에 군국(郡國)에 왕왕 부자묘(夫子廟)는 있되 교관이 없었고, 또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을 두지 않았으며, 그 학사(學士)가 일찍이 과시(課試)와 공양(供養)을 하였는지 여부는 전기(傳記)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유(儒)이 경(經)을 밝혀 그 고을에서 가르치니, 거느리고 따르는 자가 수십에서 백 명이 되어 곧 그 집을 이름하였다. 제(齊)·노(魯)·연(燕)·조(趙) 사이에서 시(詩)·서(書)·예(禮)·역(易)·춘추(春秋)를 논하는 것이 각기 매우 성하였으니, 곧 지금의 서원이 이에 가깝다. 현관(縣官)이 때때로 수상(守相)을 보내 노문(勞問)하여 음식을 보내 예로 삼았다. 그 문생(門生)들이 모두 대대로 스승의 설을 지켜, 서로 전수하여 업(業)을 바꾸지 않았다. 대개 효무제(孝武帝) 때에 이르러 군국에 비로소 조금씩 학교관(學校官)이 있었다. 지금으로써 한(漢)을 보면 늦게 나온 것이니, 그 초기 유자(儒者)들의 술업(術業)의 공고(工楛)와 우열을 알 만하다.
方大中祥符间,天子使使召见山长周氏式,拜国子王簿,诏留讲诸王宫,式固谢不应诏,卒还山,肄习如初,至赐对衣、鞍马、内府书。而宋有戚氏,吴有胡氏,鲁有孙、石二氏,各以道德为人师,不苟合于世著名。余以是益叹国初士风之孕,本之师道尊,而书院为不可废。乾道元年,故师枢密刘公珙克复门宝之旧,已浸费治,今直徽猷阁潘公畤亟践修之。某得官桂阳,于长沙为属邑,姑诣大府请事。时公至镇适数月矣,与九郡守要束,咸以宽简,阖部晏然,民吏意得,曾无凡目可以再三于有司者,因得陪别驾后至书院,谒诸先生祠下,会修事且,辑诸生穆然而志专,徘徊乐之,不忍去也。
바야흐로 대중상부 연간에 천자가 사자를 보내 산장 주씨 식(周氏式)을 불러 보고 국자주부를 제수하며, 조서로 머물러 제왕궁(諸王宮)에서 강(講)하게 하였으나, 식이 굳이 사양하여 조서에 응하지 않고, 마침내 산으로 돌아가 처음과 같이 익히고 배웠으며, 대의(對衣)·안마(鞍馬)·내부서(內府書) 하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송(宋)에는 척씨(戚氏)가, 오(吳)에는 호씨(胡氏)가, 노(魯)에는 손(孫)·석(石) 두 씨가 있어, 각기 도덕으로써 사람의 스승이 되어 세상에 구차하게 합하지 않고 이름이 드러났다. 내가 이로써 더욱 나라 초년 선비 기풍의 잉태됨을 탄복하니, 그 근본은 사도(師道)가 존귀하였음이요, 서원이 폐할 수 없음이다. 건도 원년에 옛 스승 추밀(樞密) 유공 공(劉公珙)이 문보(門寶)의 옛을 능히 회복하였는데 이미 점차 고치는 데 비용이 들었고, 지금 직휘휴각(直徽猷閣) 반공 치(潘公畤)가 자주 이어받아 수선하였다. 내가 계양(桂陽)에 벼슬을 얻었는데 장사의 속읍(屬邑)이라, 이에 대부(大府)에 나아가 일을 청하였다. 이때 공이 진(鎭)에 온 지 마침 몇 달이었는데, 아홉 군수와 요속(要束)을 정함에 모두 너그럽고 간략하게 하여, 온 관할이 편안하고 백성과 관리가 뜻을 얻어, 일찍이 무릇 유사(有司)에 거듭 아뢸 만한 조목이 없었다. 이에 별가(別駕)의 뒤를 따라 서원에 이르러 여러 선생의 사당 아래에 알현하니, 마침 수선 공사가 한창이었고, 여러 생원이 모여 화목하며 뜻이 한결같아, 거닐며 이를 즐기고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既去,州教授兼山长顾杞、堂长吴猎以讫役,属为之记。某尝获诵侍讲张先生所为记,及于治心修身之要,湖湘之俊亦既知所指归。近岁以其论述由大学礼部奏名,及对大廷,连为天下第一,他未试,可略睹矣。虽欲有言,无以出讲闻之外者,而公于今卿大夫为先进,年益高,闻望益尊重,人人能道之,又何待余言者?故但次书院所从废兴之故,繋以岁月,而强附名焉。是岁淳熙十有五年。
이미 떠난 뒤에, 주 교수 겸 산장 고기(顧杞)와 당장(堂長) 오렵(吳獵)이 공사를 마치고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 부탁하였다. 내가 일찍이 시강(侍講) 장 선생이 지은 기를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치심수신(治心修身)의 요(要)에 미쳤고, 호상(湖湘)의 준재(俊)들도 이미 그 돌아갈 바를 알았다. 근년에 그 논술로 태학(太學)과 예부에서 주명(奏名)되고 대정(大廷)에서 대(對)하여 잇달아 천하 제일이 되니, 다른 것은 아직 시험하지 않았으나 대략 엿볼 만하다. 비록 말하고자 하여도 강문(講聞) 밖에 나갈 것이 없고, 또 공은 지금의 경대부(卿大夫) 가운데 선진(先進)으로, 해가 더욱 높아지고 문망(聞望)이 더욱 존중되어 사람마다 능히 이를 말하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이에 다만 서원이 폐하고 일어난 까닭을 차례로 하고 세월을 잇달아 붙여, 억지로 이름을 붙일 따름이다. 이 해는 순희 십오 년이다.
《담주위교수조치악록서원첩(潭州委教授措置嶽麓書院牒)》
契勘本州州学之外,复置岳麓书院,本为有志之士,不远千里,求师取友,至于是邦者,无所栖泊,以为优游肄业之地。故前帅枢密忠肃刘公特因旧基,复创新馆,延请故本司侍讲张公先生往来其间,使四方来学之士,得以传道授业解惑焉。此意甚远,非世俗常见所到也。而比年以来,师道陵夷,讲论废息,士气不振,让者惜之。当职叨冒假守,蒙被训词,深以讲学教人之务为寄,顾恨庸鄙,弗克奉承。到官两月,又困簿书,未能一往谒殿升堂,延见诸生,询考所合罢行事件,庶革流弊,以还旧规。除已请到醴陵黎君贡士充讲书职事,与学录郑贡士同行措置外,今议别置额外学生十员,以处四方游学之士。依州学则例,日破米一升四合,钱六十文,更不补试,听候当职考察搜访,径行拨入者。庶几有以上广圣朝教育人才之意,凡使为学者知所当务不,专在于区区课试之间,实非小补。牒教授及帖书院照会施行,仍请一面指挥合干人排备斋舍几案床榻之属,并帖钱粮官于本州赡学料次钱及书院学粮内通融支给须至行遣。
계감(契勘)하건대 본주(本州)의 주학(州學) 밖에 다시 악록서원을 두었는데, 본래 뜻 있는 선비로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스승을 구하고 벗을 택하여 이 고을에 이르는 이가 기댈 곳이 없을까 하여, 한가로이 업(業)을 익히는 곳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앞선 수령 추밀 충숙(忠肅) 유공이 특별히 옛 터를 따라 새 관사(館)를 다시 지어, 옛 본사(本司) 시강(侍講) 장공 선생을 모셔 와 그 사이에 왕래하게 하여,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선비로 하여금 도를 전하고 업을 가르치고 의혹을 풀게 하였다. 이 뜻이 매우 멀어 세상 속된 흔한 견해가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사도(師道)가 기울어 무너지고 강론이 폐하여 끊어지며 사기(士氣)가 떨치지 못하니, 사양하는 이가 이를 애석해한다. 당직(當職)이 분에 넘치게 대리 수령(假守)이 되어 훈사(訓詞)를 입어, 강학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깊이 맡겨 주심에, 돌아보건대 부끄럽게도 용비(庸鄙)하여 받들어 이어나가지 못하였다. 관직에 이른 지 두 달에 또 문서 일에 얽매여, 한 번 전(殿)에 알현하고 당에 올라 여러 생원을 맞아 보지 못하고, 마땅히 폐하고 행할 일의 조목을 묻고 살펴, 대저 폐단을 고쳐 옛 규모로 돌아가게 하지 못하였다. 이미 예릉(醴陵)의 여(黎) 군 공사(貢士)를 청하여 강서 직사(講書職事)를 맡기고, 학록(學錄) 정(鄭) 공사와 함께 조치하게 한 것 외에, 지금 의논하여 별도로 액외 학생 열 명을 두어 사방에서 유학 오는 선비를 수용하되, 주학의 규례를 따라 하루에 쌀 한 되 네 홉과 돈 예순 문을 쓰게 하고, 다시는 보시(補試)하지 않으며, 당직이 고찰(考察)하고 수방(搜訪)함을 듣고 기다려 곧바로 발입(撥入)하게 한다. 대저 위로 성조(聖朝)의 인재를 교육하시는 뜻을 넓히고, 무릇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마땅히 힘쓸 바를 알게 하되, 오로지 졸졸한 과시(課試) 사이에만 있지 않게 한다면 실로 작은 보탬이 아니다. 첩(牒)을 교수에게 내리고 첩(帖)을 서원에 내려 조회(照會)하여 시행하게 하고, 아울러 한편으로 합건인(合干人)에게 지휘하여 재사의 안탁(几案)과 상탁(床榻) 같은 것을 갖추어 배비(排備)하게 하며, 아울러 전량관(錢糧官)에게 첩하여 본주의 첨학료차전(贍學料次錢)과 서원의 학량(學糧) 안에서 통융(通融)하여 지급하게 하되 행견(行遣)에 이르기까지 하라.
이동양(李東陽)의 《중건악록서원기(重建嶽麓書院記)》
东阳昔省墓长沙,尝渡湘江,发岳麓,访宋人所谓书院者,得断碑遗址于榛莽间。慨晦翁、南轩两先生之余风遗泽未有以复也,顾有寺存焉耳。越二十余年,通判陈君捐俸治材,为中门,为左右庑,甃石数级,上为讲堂,又上为崇道祠,以祀两先生,复名之曰岳麓书院。构亭其巅,名之曰极高明。又买田若干亩,以成陈志。比王君来知府事,帅僚属师生行舍菜礼,诸所未及,如开道路、备器用、广旁舍、储置经史、延师领教,皆次第举行,而同知某佐其事。
동양(東陽)은 옛적 장사에서 성묘(省墓)할 때 일찍이 상강(湘江)을 건너 악록에서 길을 떠나, 송 사람이 이른바 서원이라 한 것을 찾아, 진망(榛莽) 사이에서 끊어진 비와 옛터를 얻었다. 회옹(晦翁)·남헌(南軒) 두 선생의 남은 기풍과 유택(遺澤)이 회복할 바가 없음을 개탄하니, 돌아보건대 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십여 년을 지나 통판 진군(陳君)이 녹봉을 내어 재목을 마련하여, 중문을 짓고 좌우무를 짓고, 돌을 몇 층 쌓아 그 위에 강당을 짓고, 또 그 위에 숭도사를 지어 두 선생을 제사하고, 다시 이름을 악록서원이라 하였다. 그 꼭대기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극고명(極高明)이라 하였다. 또 전지 약간 무를 사들여 진군의 뜻을 이루었다. 이윽고 왕군(王君)이 와서 지부사를 맡아, 요속(僚屬)과 스승과 학생을 거느리고 석채례(舍菜禮)를 행하고, 무릇 미치지 못한 것들, 이를테면 도로를 열고 기용(器用)을 갖추며 곁의 집을 넓히고 경사(經史)를 쌓아 두고 스승을 모셔 가르침을 이끌게 하는 것을 모두 차례로 거행하였고, 동지 모(某)가 그 일을 보좌하였다.
盖兹院自宋初郡守朱洞始建,真宗时,李允则请藏书,国子监簿周式教授其间,乃请赐额,遂与应天、白鹿、石鼓并称为四大书院。及南渡,毁于兵,安抚刘公珙复建。孝宗时,两先生实会讲焉。光宗时,晦翁为安抚,更建于兹地,学者多至千人,田至五十顷,庙舍至百余间。今殿故在,遗址废田为僧卒势家所据,历三百余年,而兹院始复其旧。于是王君遣使属记于予,亦陈昔所尝请者也。
대개 이 서원은 송 초에 군수 주동이 비로소 세웠고, 진종 때에 이윤칙이 장서(藏書)를 청하였으며, 국자감주부(國子監簿) 주식이 그 사이에서 가르치매, 이에 액 하사를 청하여 마침내 응천(應天)·백록(白鹿)·석고(石鼓)와 함께 사대 서원으로 일컬어졌다. 남도(南渡)에 이르러 병화에 무너지니 안무(安撫) 유공 공이 다시 세웠다. 효종 때에 두 선생이 실로 여기에서 회강하였다. 광종 때에 회옹이 안무가 되어 이 땅에 다시 세우니, 배우는 이가 많아 천 명에 이르고 전(田)이 오십 경(頃)에 이르고 묘사(廟舍)가 백여 칸에 이르렀다. 지금의 전(殿)은 옛 터에 있고, 옛터와 폐전(廢田)은 승려와 군졸과 세가에게 점거되어 삼백여 년을 지났는데, 이 서원이 비로소 그 옛을 회복하였다. 이에 왕군이 사자를 보내 내게 기를 부탁하니, 또한 진군이 옛적 일찍이 청한 바이기도 하다.
惟古者学校徧天下,其教与学者皆圣贤之道,故能以一德同俗。及世裒政弛,道晦不明,上择官以教,下择师以学,穷什一之力而后得。世之少治而多乱,奚惑哉?今学有恒制,师有定员,第玩常愒久,不能无望乎什一之外如书院者。故士或起于乡塾,则于此为培养之地;或籍于郡学,则藉游息以广见闻。使斯道之在天下,体用一源,显微无间者,随厥穷达,皆可为成已成物之用,乃可以言学。不然,虽学于此,犹学于彼,无益也。且南轩得衡山胡氏言仁之旨,观所为书院记,亦倦倦以是为辞。晦翁之学,固有大于彼,然亦资而有之。后之学者,曾不逮其万一,而不百倍其功,恶可哉?由南轩以介晦翁,又等而上之,以希所谓古之人者,庶几为兹院重,以为山川之光。若其程格条绪,则存乎教与学,吾于吾大夫士望之矣。
무릇 옛적에는 학교가 천하에 두루 있어, 그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모두 성현의 도이므로, 이에 한결같은 덕으로 풍속을 같게 할 수 있었다. 세상이 기울고 정치가 느슨해지매 도가 어두워 밝지 않아, 위에서는 관리를 가려 가르치고 아래에서는 스승을 가려 배우며, 십일(什一)의 힘을 다한 뒤에야 얻었다. 세상이 다스려짐이 적고 어지러움이 많으니 어찌 의심스럽겠는가? 지금 학교에는 항상된 제도가 있고 스승에게는 정해진 인원이 있으되, 다만 늘 익숙하게 희롱하고 오래 게으르니, 십일 밖의 서원 같은 것에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선비가 혹 향숙(鄕塾)에서 일어나면 여기에서 배양(培養)하는 땅으로 삼고, 혹 군학(郡學)에 적(籍)을 두면 유식(游息)을 빌어 견문을 넓힌다. 이 도가 천하에 있어 체용(體用)이 한 근원이고 현미(顯微)가 사이가 없게 하여, 그 궁달(窮達)을 따라 모두 자기를 이루고 사물을 이루는 쓰임이 될 수 있어야, 이에야 배움을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여기에서 배울지라도 저기에서 배운 것과 같아 이익이 없다. 더욱이 남헌은 형산(衡山) 호씨(胡氏)의 인(仁)을 말한 뜻을 얻었으니, 그 지은 서원기를 보면 또한 권권(倦倦)히 이를 두고 말하였다. 회옹의 학문은 진실로 저보다 큰 바가 있으나, 그러나 또한 이를 자(資)로 삼아 가졌다. 뒤에 배우는 이들이 일찍이 그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백 배의 공을 들이지 않으면 어찌 옳겠는가? 남헌으로써 회옹에 이르는 매개로 삼고, 또 등차하여 위로 올라 이른바 옛사람을 바라면, 대저 이 서원을 중요하게 여기고 산천의 빛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법식(程式)과 조서(條緖)는 가르침과 배움에 달려 있으니, 나는 우리 대부와 선비들에게 바란다.
《호남통지(湖南通志)》
翠𪩘层层护讲堂,西征何幸挹辉光。湘江北去源流远,衡岳南来地脉长。昭代人文重荆楚,宋贤心学赖朱张。青衿指点峰头石,古刻相传夏禹王。
겹겹이 쌓인 푸른 바위봉우리가 강당을 둘러싸고, 서쪽으로 행군함에 어찌 다행히 그 빛나는 광휘(輝光)를 받들었는가. 상강(湘江)은 북으로 흘러 그 근원과 물줄기가 멀고, 형악(衡嶽)은 남에서 이어져 그 지맥(地脈)이 길다. 밝은 시대의 인문(人文)이 형초(荊楚)를 중히 여기고, 송나라 어진 이의 심학(心學)은 주(朱)·장(張)에 의지하였네. 청금(靑衿)들이 봉우리 위의 돌을 가리키니, 옛 석각은 전해 오기를 하우왕(夏禹王)의 것이라 하네.
《신수악록서원지(新修嶽麓書院志)》
巡抚偏沅等处地方、提督军务兼理粮饷、都察院右副都御史臣丁思孔谨题:为恭请御书赐额,颁给讲义诸书,以光旧制,以昭化成事。康熙二十五年四月初六日,臣准礼部咨开:仪制清吏司案呈,奉本部送礼科抄出,该本部覆偏沅巡抚丁题前事内称:该臣等议得:偏沅巡抚丁疏称:长沙府岳麓书院,原为四大书院之一,查第二疏巡旧志,张栻、朱熹等相继于此讲学,伏恳皇上万几之暇,御书匾额,并日讲解义诸经书,统祈颁赐。等因前来。查康熙二十四季五月内,臣部以江西南康府白鹿洞书院系唐时李渤读书,宋时朱熹讲学之处,请给御书匾额,并给经书。等因,具题,准行在案。今该抚丁疏称:旧志内有岳麓书院张栻、朱熹讲学等语。臣部移咨翰林院,查取湖广长沙府新志,书内止载有张栻在岳麓书院作记,并未载有张栻、朱熹在岳麓书院讲学之处。志书系一处之志书,旧志内有张栻、朱熹在岳麓书院讲学,该省所送翰林院新志,又未载有张栻、朱熹在岳麓书院讲学。相应敕下该抚确查明白,具题,到日再议可也。等因。康熙二十五年三月初三日题。本月初五日,奉旨依议。钦此,钦遵,抄部送司。奉此,相应移咨。为此,合咨前去,查照匜行。等因,咨移到臣。
편원(偏沅) 등처 지방을 순무(巡撫)하고 군무를 제독(提督)하며 양향(糧餉)을 겸리(兼理)하는 도찰원 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 신(臣) 정사공이 삼가 제(題)한다. 삼가 어서(御書)를 청하여 액을 하사하고 강의(講義) 여러 책을 반급(頒給)하여 옛 제도를 빛내고 교화 이룸을 밝히고자 하는 일을 위함이다. 강희 25년 4월 초엿새에 신이 예부의 자문(咨文)을 받아 여니, 의제청리사(儀制淸吏司) 안정(案呈)으로 본부(本部)에서 예과(禮科)에 보내 초출(抄出)하기를, 해당 본부에서 편원 순무 정(丁)이 전(前)에 제한 일에 복(覆)한 가운데 칭하기를, 해당 신들이 의논하기를, 편원 순무 정이 소(疏)에서 칭하기를, 장사부(長沙府) 악록서원은 원래 사대 서원의 하나이니, 제2소(第二疏)를 따라 옛 지(志)를 살피건대 장식·주희 등이 잇달아 여기에서 강학하였으므로, 엎드려 황상(皇上)의 만기(萬幾)의 틈에 어서로 편액을 쓰시고 아울러 일강해의 여러 경서를 모두 반사(頒賜)하여 주시기를 비옵니다 등의 말이 있어 앞으로 왔다. 살피건대 강희 24년 5월 안에 신부(臣部)가 강서(江西) 남강부(南康府) 백록동서원이 당 때 이박(李渤)이 독서하고 송 때 주희가 강학한 곳임을 들어 어서 편액을 주시고 아울러 경서를 주시기를 청하여 등의 말로 구제(具題)하여 윤허되어 시행된 것이 안건(在案)에 있다. 지금 해당 순무 정이 소에서 칭하기를, 옛 지 안에 악록서원에서 장식·주희가 강학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다 하였다. 신부가 한림원(翰林院)에 자(咨)를 옮겨 호광(湖廣) 장사부의 신지(新志)를 찾아 취하니, 책 안에는 오직 장식이 악록서원에서 기를 지었음만 실려 있고, 장식·주희가 악록서원에서 강학한 곳은 실려 있지 않았다. 지서(志書)는 한 곳의 지서인데, 옛 지 안에는 장식·주희가 악록서원에서 강학하였다 하고, 해당 성에서 보낸 한림원의 신지에는 또 장식·주희가 악록서원에서 강학하였음을 싣지 않았으니, 마땅히 칙(敕)을 해당 순무에게 내려 확실히 조사하여 분명하게 하고 구제하게 하며, 도착하는 날에 다시 의논함이 옳다 등의 말이 있었다. 강희 25년 3월 초사흘에 제(題)하였고, 이달 초닷새에 지(旨)를 받들기를 의논대로 하라 하셨다. 이를 받들고 삼가 받들어, 부(部)를 베껴 사(司)에 보냈다. 이를 받들어 마땅히 자(咨)를 옮겨야 하므로, 이를 위하여 합(合)히 자를 앞으로 보내, 조조(查照)하여 시행하라 등의 말로, 자(咨)가 옮겨져 신에게 이르렀다.
准此。该臣看得岳麓书院为先儒讲学之所,原其初意,以郡县庠序师生所重在制举之业,而书院之设,则待四方学者相聚切磋,专务修明道德,甚盛事也。故自始建以来,兴理修举,代不乏人。伏惟我皇上文德武功,人安区宇,宵衣旰食,念切民生,加以圣学高深,穷幽极显,绍尧、舜之正绪,阐孔孟之微言。历观史册所载,帝王之学术事功,未有北隆于我皇上者也。臣本以庸愚,特蒙简任,朝夕宣布圣德,抚育庶民,顾兹凿井耕田,咸已乐生兴事,因仰体我皇上重道崇儒之至意,惟以劝学为先务。伏查岳麓书院,系宋开宝季间,郡守朱洞始建,历四十余年,州守李允则为请于朝,乞以书藏。祥符八年,周式为山长,召见便殿,拜国子监主薄,使归教授。诏以岳麓书院为名,增赐中秘书籍。于是书院之称闻于天下,与嵩阳、白鹿洞等称四大书院。然嵩阳等皆民间所建,惟岳麓创自郡守,其名尤著。乾道元年,刘珙为安抚使,重加修葺,请张栻主教事,因为之记。时栻家于潭州。乾道三年,朱熹自闽来潭,访栻,留止两月,讲学于院中。手书忠孝廉节四字及道乡台等题额。是年,刘珙自湖南召为同知枢密院事。史称其陈圣王之学,以明理正心为纲,并荐张栻等学行于上,良有由也。绍熙四年,以朱熹知潭州,增广学舍,主百余间,田五十顷,学者千余人。故朱熹到任谢表,有学兼岳麓,壤接洞庭,假以师帅之任,责以治教之功等语,当时诚以此为重云。嗣后真德秀以安抚使知潭州,魏了翁以资政殿学士知潭州,皆以周、程、张、朱之学勉励士子,教化大行。元延祐元年,郡判刘安仁重修,有吴澄为之记。明弘治七年,通判陈钢等重修,又建崇道祠以祀张栻、朱熹,有李东阳为之记。皆历历言张栻、朱熹讲学于此甚祥。自弘治以后,间有废兴,顷遭逆乱,遂至荒芜。臣倡率司道等官,捐赀修造,规模如旧,置田三百亩,以资膏火,令四方有志之士,得共讲学其中。伏念必蒙御书赐额,并颁给解义诸经书,使士子恭睹宸章,仰窥圣学,益深忠爱之思,更明理学之统,不惟增光旧制,而于治化实有裨焉。臣前疏不敢多为援引,以滋繁冗,今令臣确查明白,因考长沙新旧府志暨宋史及文集诸书,张栻、朱熹确曾于此讲学。其新修本省通志,虽书院本条之下,未经备载,而亦散见于岳麓山图注及祠祀古迹、名宦诸条之中。用敢再疏题请。伏乞皇上睿鉴,敕部议覆施行。康熙二十五年七月初三日。
이를 받들었다. 해당 신이 살피건대 악록서원은 선유(先儒)가 강학한 곳으로, 그 처음 뜻을 헤아리건대, 군현 상서(庠序)의 사생(師生)이 중하게 여긴 것은 제거(制擧)의 업이고, 서원의 설치는 사방의 배우는 이가 모여 절차탁마(切磋)하여 오로지 도덕을 닦고 밝힘에 힘쓰게 한 것이니, 심히 성대한 일이다. 이에 처음 세운 이래로 일으키고 다스리고 고치고 거행함에 대대로 사람이 없지 않았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황상(皇上)께서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으로 사람들이 우구(區宇)에 편안하게 하시고, 새벽에 옷 입고 저녁에 식사하시며 민생을 생각하심이 간절하시고, 더하여 성학(聖學)이 높고 깊어 그윽함을 다하고 밝음을 극진히 하시며, 요·순의 바른 서(緖)를 잇고 공맹(孔孟)의 미언(微言)을 펴셨다. 사책(史冊)에 실린 것을 두루 살피건대, 제왕의 학술(學術)과 사공(事功)은 우리 황상보다 융성한 이가 없습니다. 신은 본래 용우(庸愚)하나 특별히 간임(簡任)을 입어, 조석(朝夕)으로 성덕(聖德)을 펴고 서민을 부육(撫育)하니, 돌아보건대 이 땅의 우물 파고 밭 가는 자들이 모두 이미 생업을 즐기고 일을 일으키매, 이에 우러러 우리 황상의 도를 중히 여기고 유(儒)를 숭상하시는 지극한 뜻을 체(體)하여, 오직 학문을 권함을 으뜸가는 일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살피건대 악록서원은 송 개보 연간에 군수 주동이 비로소 세웠고, 마흔여 년을 지나 주수(州守) 이윤칙이 이를 위해 조정에 청하여 책을 장하기를 구하였습니다. 상부 8년에 주식이 산장이 되어 편전에 불려 보고, 국자감주부를 제수하여 돌아가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조서로 악록서원을 이름으로 삼고 중서의 서적을 더하여 하사하였습니다. 이에 서원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 숭양·백록동 등과 함께 사대 서원으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러나 숭양 등은 모두 민간에서 세웠고, 오직 악록은 군수에게서 창건되어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건도 원년에 유공이 안무사가 되어 다시 수익(修葺)을 더하고 장식을 청하여 교사(敎事)를 맡기니, 이에 이를 위해 기를 지었습니다. 이때 장식이 담주에 집을 두었습니다. 건도 3년에 주희가 민(閩)에서 담(潭)에 와 장식을 찾아 두 달을 머물며 서원 안에서 강학하였습니다. 손수 충효염절 네 글자와 도향대(道鄕台) 등의 제액(題額)을 썼습니다. 이 해에 유공이 호남에서 불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습니다. 사(史)에서 그가 성왕(聖王)의 학문을 진술하여 명리정심(明理正心)을 강령으로 삼고, 아울러 장식 등의 학행(學行)을 위에 천거하였다 칭하니,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소희 4년에 주희로 담주를 다스리게 하여 학사(學舍)를 늘리고 넓혀 백여 칸을 이루고 전(田) 오십 경, 배우는 이 천여 명이 되었습니다. 이에 주희가 부임한 사표(謝表)에 「학(學)은 악록을 겸하고, 땅은 동정(洞庭)에 잇닿아, 사수(師帥)의 임무를 맡기시고 치교(治敎)의 공을 책하셨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당시에 참으로 이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였습니다. 그 뒤 진덕수(眞德秀)가 안무사로 담주를 다스리고, 위료옹(魏了翁)이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로 담주를 다스리니, 모두 주(周)·정(程)·장(張)·주(朱)의 학문으로 사자(士子)를 격려하고 면려(勉勵)하여 교화가 크게 행해졌습니다. 원 연우 원년에 군판(郡判) 유안인이 다시 고치니 오징(吳澄)이 이를 위해 기를 지었습니다. 명 홍치 7년에 통판 진강 등이 다시 고치고, 또 숭도사를 세워 장식·주희를 제사하니 이동양이 이를 위해 기를 지었습니다. 모두 명명백백히 장식·주희가 여기에서 강학하였음을 말하여 심히 상세합니다. 홍치 이후로 가끔 폐하고 일어남이 있더니, 근래 역난(逆亂)을 만나 마침내 황무하였습니다. 신이 사도(司道) 등의 관리를 거느리고 이끌어 재(貲)를 내어 고치고 지어 규모가 옛과 같게 하고, 전(田) 삼백 무를 두어 고화(膏火)에 이바지하게 하여, 사방의 뜻 있는 선비로 하여금 함께 그 안에서 강학하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반드시 어서로 액을 하사해 주시고 아울러 해의(解義) 여러 경서를 반급하여 주시어, 사자로 하여금 공경히 신장(宸章)을 보고 우러러 성학을 엿보아 더욱 충애(忠愛)의 생각을 깊게 하고 더욱 이학(理學)의 통(統)을 밝히게 하신다면, 옛 제도를 빛낼 뿐만 아니라 치화(治化)에 실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앞의 소(疏)에서는 감히 인용을 많이 하지 않아 번잡하고 용장(冗長)함을 더하지 않았는데, 지금 신으로 하여금 확실히 조사하여 분명하게 하라 하시니, 이에 장사의 신구(新舊) 부지(府志)와 《송사(宋史)》 및 문집 여러 책을 고증하건대, 장식·주희가 확실히 일찍이 여기에서 강학하였습니다. 그 새로 고친 본성 통지(通志)에는 비록 서원 본조(本條) 아래에 아직 갖추어 싣지 않았으나, 또한 악록산 도주(圖注)와 사사고적(祠祀古蹟)·명환(名宦) 여러 조목 가운데 흩어져 보입니다. 이에 감히 다시 소하여 제청(題請)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황상의 예감(睿鑑)으로 부(部)에 칙하여 의논하고 복(覆)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강희 25년 7월 초사흘.
衡山之峰七十二,考古志,以回雁峰为首,绵亘数百里,至星沙之西南隅,而始为山之麓,此岳麓所由名也。赵宋开宝间,刺史朱公洞创建书院至乾道三年,考亭夫子访南轩于其地,相与考道问业。时士子云集景从,正学丕振,人谓潇湘间彬彬有沬、泗之风焉。其后兴废相仍,多历年所。暨康熙甲寅,值吴逆之变,叛寇称戈,文教歇绝,书院将鞠为茂草。幸王师荡平,大中丞丁公开府湖南,首披图籍,慨然曰:郡国有先贤之遗迹而不为修。复,是在位之责也。遂捐俸为倡,片甍尺椽,不以需之闾里,庀材鸠工,浃岁告竣。自文庙尊经阁而下,与夫崇道之祠、四箴之亭,以及六君子堂,后先相望。中丞公又妙简名流以董帅之,每公余之暇,课其会业,用相鼓舞,父老扶扙感叹,以为睹记以来所未有也。
형산(衡山)의 봉우리가 일흔두 개인데, 옛 지(志)를 고증하면 회안봉(回雁峰)을 으뜸으로 삼아, 수백 리를 멈추지 않고 이어지다가 성사(星沙)의 서남쪽 모퉁이에 이르러 비로소 산의 기슭이 되니, 이것이 악록(岳麓)이 이름 얻은 까닭이다. 조송(趙宋) 개보 연간에 자사(刺史) 주공 동(朱公洞)이 서원을 창건하였고, 건도 3년에 이르러 고정부자(考亭夫子)가 그 땅에서 남헌을 찾아, 함께 도를 고하고 업을 물었다. 이때 사자(士子)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그림자처럼 따르니, 바른 학문이 크게 떨쳐, 사람들이 소상(瀟湘) 사이에 빈빈(彬彬)히 수(洙)·사(泗)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그 뒤 일어남과 폐함이 서로 이어져 여러 해를 지냈다. 이윽고 강희 갑인(甲寅)에 이르러 오역(吳逆)의 변(變)을 만나, 반역한 도적이 창을 들매 문교(文敎)가 그치고 끊어져, 서원이 장차 무성한 풀밭이 되려 하였다. 다행히 왕사(王師)가 탕평(蕩平)하고, 대중승(大中丞) 정공(丁公)이 호남에 개부(開府)하여, 먼저 도적(圖籍)을 펴고 개연(慨然)히 이르기를, 군국에 앞선 어진 이의 유적(遺蹟)이 있으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재위(在位)한 이의 책임이다 하였다. 이에 녹봉을 내어 창도(倡導)하되, 조각 기와와 자질한 서까래라도 여리(閭里)에 요구하지 않고, 재목을 갖추고 장인을 모으니 한 해가 두루 차서 준공을 고하였다. 문묘(文廟) 존경각에서 아래로, 무릇 숭도의 사(祠)와 사잠(四箴)의 정(亭)과, 육군자당(六君子堂)에 이르기까지 뒤와 앞이 서로 마주 보았다. 중승공이 또 묘하게 명류(名流)를 가려 뽑아 이를 감독하고 거느리게 하고, 매번 공무 남은 틈에 그 모인 업(業)을 과(課)하여 서로 고무(鼓舞)하게 하니, 부로(父老)들이 지팡이를 짚고 감탄하며, 기록을 본 이래 없던 일이라 하였다.
今年夏,偶大过三湘,而孝廉郭君金门踵门来请曰:愿有述。窃谓地灵与人事常相□者也。昔昌黎谓南方之山,巍然高而大者以数百,独衡为宗。中州清淑之气,蜿蟮扶舆,伤礴而郁积。而书院又适当其麓,则又气之所萃,毓灵而钟秀者也。然上下千百年,大盛于考亭,而又将复盛于今,岂偶然之数欤?闻中丞公之抚楚,整躬率属,儆贪黩,赈穷乏,□荒芜,厘行户之艰,蠲夫船之役,豪右畏威,甘澍应祷,善政不能枚举。而学校为王化所基,低徊于弦诵揖让之间,更为观风者所不能略也。况我皇上始终典学,比年来,亲洒宸翰,以万世师表之额,风厉学宫,并求先圣先儒之裔,荣以世秩。而中丞公当下车之初,早倦倦以建学育才为务,若有不期而合者焉。盖圣朝之有名世,运会所屇,一德交孚,固不徒地灵人事之相因巳也,殆亦天意将开文治之盛,化行俗美,而以比阴于唐虞三代也哉!遂拜手为之记。
올해 여름에 우연히 삼상(三湘)을 두루 지나며, 효렴(孝廉) 곽군 금문(郭君金門)이 문지방을 넘어 찾아와 청하여 이르기를, 원하건대 서술해 주시오 하였다. 삼가 이르건대 땅의 영기(靈氣)와 인사(人事)는 늘 서로 응하는 것이다. 옛적 창려(昌黎)가 이르기를, 남방의 산은 위애(巍然)히 높고 큰 것이 수백 개로 헤아리되, 오직 형(衡)이 종(宗)이 된다 하였다. 중주(中州)의 맑고 어진 기(氣)가 굽이치며 떠받들려 오르고, 넓게 퍼져 쌓이고 쌓였다. 그런데 서원이 또 마침 그 기슭에 해당하니, 곧 또 기(氣)가 모이는 곳으로, 영(靈)을 기르고 수(秀)를 모은 것이다. 그러나 위아래 천백 년에 고정(考亭)에서 크게 성하였고, 또 장차 지금에 다시 성하려 하니, 어찌 우연한 수(數)이겠는가? 듣건대 중승공이 초(楚)를 어루만짐에, 몸을 가다듬고 속(屬)을 거느리며, 탐독(貪黷)을 경계하고, 궁핍한 자를 구제하고, 황무한 땅을 개간하고, 행호(行戶)의 어려움을 바로잡고, 부선(夫船)의 역(役)을 면제하니, 호우(豪右)가 위엄을 두려워하고 감우(甘澍)가 기도에 응하였으니, 선정(善政)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더욱이 학교는 왕화(王化)의 근본이 되니, 현송(弦誦)과 읍양(揖讓) 사이를 거닐며 머무름은, 풍기를 살피는 이도 더욱 생략할 수 없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 황상께서 시종(始終) 전학(典學)하시어, 근년 이래로 친히 신한(宸翰)을 뿌려 만세사표(萬世師表)의 액으로 학궁(學宮)을 풍려(風厲)하시고, 아울러 선성선유(先聖先儒)의 후예를 구하여 세직(世秩)으로 영예롭게 하셨다. 그런데 중승공이 하차(下車)한 초에 일찍이 권권(倦倦)히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일로 삼으니, 마치 기약하지 않고도 합한 듯하다. 대개 성조(聖朝)에 명세(名世)가 있음은 운회(運會)가 이른 것이요, 한결같은 덕이 서로 믿어지니, 진실로 다만 땅의 영기와 인사가 서로 인(因)할 뿐만이 아니라, 대저 또한 하늘의 뜻이 장차 문치(文治)의 성대함을 열어,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지게 하여, 이로써 당우(唐虞) 삼대(三代)에 견줄 만큼 융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배수(拜手)하여 이를 위해 기를 짓는다.
옛 사진
1917~1926년 사이(1939년 간행)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조사하여 촬영한 이 세 폭의 사진은 1939년에 법장관(法藏館)이 간행한 《중국문화사적(中國文化史蹟)》 제3집에 수록되었다. 서원 대문 사진의 문 위에는 「호남공립공업전문학교」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학교는 1917년에 서원 옛터로 옮겨와 학사를 폈고 1926년에 새로 성립한 호남대학에 합병되었으므로, 이 사진들이 1917년에서 1926년 사이에 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도판의 설명은 「악록서원 전경」으로 제목되었고, 화면에는 산 앞 도로 위의 정자식 건축과 멀리 악록산이 담겨 있다.
둘째는 서원 대문으로, 문 앞에 긴 도포 차림의 남자 몇몇이 서 있고, 문련은 「유초유재(惟楚有材) 어사위성(於斯爲盛)」이다. 대문 너머로 안쪽 이문(二門)의 모습도 바라보인다. 셋째는 이문의 근경으로, 문련은 「납어대록(納于大麓) 장지명산(藏之名山)」이다.
1930년(간행)
《아동인화집(亞東印畫輯)》 제74회 「창사 및 그 부근」(1930년 9월 간행)에 악록산 사진 두 폭이 수록되었다. 서원 한 폭의 설명 카드에는 이를 「오늘날 이미 호남대학이 되었다」고 하고, 문벽에 주희가 쓴 「충효염절」 네 큰 글자와 당대 이옹(李邕)이 쓴 록산사비(麓山寺碑)가 새겨져 있음을 기록하였다. 다른 한 폭은 서원 문묘 앞 연못 가운데의 취향정(吹香亭)으로, 설명 카드에는 정자가 처음 송대에 세워졌다 하였다.
1932년(간행)
성가삼(成嘉森)이 편찬한 《악록소지(嶽麓小志)》(호남신문사, 1932년 10월) 권두에 혁희대(赫曦台) 사진 한 폭이 수록되었다.
참고 자료
- 역사 연혁(호남대학 악록서원)
- 《악록소지(嶽麓小志)》, 성가삼 편, 호남신문사 1932년 간행본, 국가도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