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궁

자소궁은 후베이성 단장커우 우당산 전기봉 남쪽에 위치한 우당산의 도교 궁관이다. 원대 『무당복지총진집』은 북송 선화 연간에 창건되었다고 기록한다. 원 말에 궁관이 전란으로 파괴되었고, 명성조는 영락 10년에 옛 궁에 태현자소궁을 지었다. 청 동치 연간에는 도사 양라이왕이 제자들을 이끌고 십방당·동서 도원과 용호전의 도방을 복수했다. 이 글에는 『무당복지총진집』, 『상선지기』, 명대 어제비와 1934년 자소전 옛 사진을 수록했다.

시대
북송
지역
후베이
위치
후베이성 스옌시 단장커우시
1934년 우당산 자소전 정면 옛 사진
1934년 우당산 자소전 정면 옛 사진

소개

자소궁은 북송 선화 연간(1119—1125)에 처음 세워졌다. 남송 순희 원년(1174), 궁관이 화재를 입었다. 이후 자소궁은 한때 황폐해져 15~16년 동안 인적이 끊겼다.

원 지원 12년(1275), 자소궁은 다시 산문을 열었다. 당시 궁 안에는 정전만 남아 있어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었다. 2년 뒤, 도사 리서우충이 먼저 전 앞의 형극을 제거했다. 지원 15년(1278), 거란 출신의 여도사 샤오서우통이 이어서 궁 뒤에 전을 지었다. 그녀는 이후 밖으로 나가 모화[1]하며 사방의 공양을 받았다.

원 지화 원년(1328), 궁 안에서 연륜이 깊은 도인 거다오진이 비용을 내놓아 석공을 불러 상선지와 흑룡지를 수리하게 했다. 그의 제자 왕다오칭·장다오위안도 출자하여 균주 행궁과 옌좡에 각각 우물 하나를 팠다. 두 우물은 궁 안 도인들의 일용을 공급하고 지나가는 행인이 물을 긷기에도 편리했다. 같은 해 6월, 궁무를 맡은 도관 천다오밍·셰다오칭이 이 공사들을 위해 비를 세웠다. 비문은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로 상선지라는 이름을 설명하고, 연못을 고치고 우물을 만든 뜻을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로 요약했다.

원 말, 전란이 다시 자소·남암 등 궁관을 파괴하여 자소궁 옛터에는 형극과 기왓장만 남았다. 명성조는 아버지 명태조가 천하를 평정한 일과 자신이 정난의 역[2]에서 승리한 일이 모두 진무 대제[3]의 은밀한 보호를 받았다고 여겼다. 이 보호에 보답하기 위해 그는 우당산 궁관의 재건을 명했고, 완성된 궁관은 황실과 천하 신민을 위해 복을 비는 데에도 쓰였다. 영락 10년(1412), 조정 관원들이 명을 받들어 자소 옛 궁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에는 현제를 모신 정전, 조사전, 현제의 부모를 모신 성부모전, 산문, 회랑과 어제비를 모신 좌우 비정, 그리고 신고·신주·방장·재당·발당·운당·환당·부엌·창고·지정 등의 공간이 포함되어 모두 106칸이었다. 영락 16년(1418), 우당산의 이 궁관 공사가 완성되자 명성조는 자소궁에 “태현자소궁”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궁전이 완성된 뒤, 조정은 후구야·메이웨쉬안·리쉬안위 세 도관을 제점[4]으로, 쉬푸가오를 주지로 임명하고, 또 6품 관인을 내려 네 사람이 궁 안 일을 관리하게 했다. 성화 15년(1479), 명헌종은 선조의 진무 제사를 잇고 황실·국가·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자 장인들에게 동주 도금 신상 일곱 존을 주조하게 했다. 진무상 한 존, 수시 신상 네 존, 그리고 수신·화신상 각 한 존이다. 또 향로·병발·종경 등 공양 기물 열한 점을 만들어 태감 천시가 자소궁으로 보내 안치하고 봉양하게 했다.

청 동치 초년(1862년경), 산시성 바이허현 사람 양라이왕이 우당산에 와서 전진교 용문파[5] 도사 허양춘을 스승으로 모셨고, 나중에 자소궁 주지로 추대되었다. 산속의 무너진 궁관을 마주하고, 그는 왕푸먀오·먀오푸칭·청허싱 등 제자들과 도손 쉬번산을 데리고 곳곳에서 수선 비용을 모금했는데 앞뒤로 10여 년이 걸렸다. 이로써 자소궁의 십방당이 복수되었고, 동도원은 전당 5칸·도방 22칸을, 서도원은 전당 5칸·도방 42칸을 복수했으며, 용호전 일대에서도 도방 70칸을 복수했다. 양라이왕은 수선을 이끄는 것 외에도 자소궁 등지에서 제자를 받아 설도했으며, 문하 제자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광서 27년(1901), 자소궁은 십방총림[6]을 열어 각지의 유랑 도인들이 단과를 걸기 시작했다. 쉬번산과 쩡리첸·류리칭 등 궁 안 도인들이 차례로 자금을 모아 만성루·공덕사·영관전과 동서 양쪽 20여 칸의 가옥을 증축했다. 쉬번산은 나중에 자소궁의 동서 도원과 부모전도 수리했다.

1931년 봄, 홍3군[7]은 홍후 소비에트 구를 떠나 후베이 북서부로 이동했고, 음력 4월 20일 허룽이 부대를 이끌고 우당산에 들어왔다. 쉬번산은 궁 안 도인들을 이끌고 자소궁 동천문 밖에서 맞이하여, 부모전의 방을 비워 허룽의 거처와 집무실로 내주고, 서궁 도원을 임시 후방병원으로 바꾸었다. 쉬번산은 수이허이·뤄자오페이·우자오윈·왕자오화 네 도인에게 간호를 돕게 하고, 다른 도인들은 약초를 캐고 궁 안 비축 물자를 꺼내어 부상병의 식사를 마련했다. 그해 가을 홍3군이 이동한 뒤에도 부상병이 서궁 도원에 남아 있었고, 쉬번산은 계속 도인들을 배치해 돌보다가 부상병이 나으면 나누어 팡현으로 보내 부대에 복귀하게 했다. 1938년 이후 후베이 북부 항전을 담당한 제5전구 사령장관 사령부는 처음 라오허커우에 주둔하다가 나중에 우당산 위의 도관 저우푸안으로 옮겼고, 산속 많은 도관이 주둔지·학교·병원·창고로 쓰였다. 작가 장커자는 쥔현에서 근무할 때 자소궁을 찾아, 궁문에 “사령장관을 환영합니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2025년 3월, 우당산 세계문화유산관리센터는 자소 대전 보호수선 공정을 시작했다. 문물 전문가들이 전 옥상 중앙의 4층 유리 보정[8]을 열고 그 안에서 역대 동전 343매를 확인했는데, 그중 은화 125매, 동전 218매였다. 전문가들은 가장 이른 시기의 동전이 북송 숭녕 연간에 주조된 숭녕통보라고 초보적으로 판정했다. 작업자들은 이어서 이 동전들을 정리해 창고에 봉인해 넣었다.

역사 문헌

『무당복지총진집』

紫霄宫

자소궁

紫霄者,玄天之别名也。宫在大顶之北,展旗峰之东,威烈庙之西,太子岩之南。前对三公万仞玉笋倚天之峰,后坐远嶂七岩皂纛横星之势,松杉挺特,花木芬芳,殿宇崇高,堂庑拱接,帝容尊肃,神灵威严,一仿五龙之制度。然地势豁敞,未易相侔。神仙炼性修心之所,国家祈福之庭。

자소(紫霄)는 현천(玄天)의 별칭이다. 궁은 대정의 북쪽, 전기봉의 동쪽, 위열묘의 서쪽, 태자암의 남쪽에 있다. 앞으로는 삼공의 만 길 옥죽순처럼 하늘에 기댄 봉우리를 마주하고, 뒤로는 먼 산과 일곱 암벽이 검은 깃발처럼 별을 가로지르는 형세에 앉았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빼어나게 솟고 꽃과 나무가 향기로우며, 전우가 높고 숭엄하고 당우가 호접하고, 제의 용모는 존숙하며 신령은 위엄이 있어, 모두 오룡의 제도를 본땄다. 다만 지세가 탁 트여 있어 감히 견주기는 어렵다. 신선이 성품을 닦고 마음을 닦는 곳이요, 국가가 복을 비는 뜰이다.

宋宣和中创建,其敕额文据,甲午劫火,主者挈之南游。庚申之前,迁州于此,人民皆卜居焉。继后,宣慰孙嗣举众内附,十五六年,窅无人迹。至元乙亥,山门重开,正殿仅存,犹可瞻仰。岁在丁丑,道士李守冲辟荆于前;戊寅岁中,契丹女官萧守通建殿于后,行缘受供,一如五龙。

송 선화 연간에 창건되었고, 그 칙액 문서는 갑오년 겁화에 주지하는 이가 남쪽으로 가지고 갔다. 경신년 이전에 주를 이곳으로 옮겨 백성들이 모두 점쳐 살았다. 뒤이어 선위 손사가 무리를 이끌고 내귀하자 15~16년 동안 아득히 인적이 없었다. 지원 을해년에 산문이 다시 열렸고 정전만 남아 있었으나 오히려 우러러볼 만했다. 정축년에 도사 리서우충이 앞의 형극을 개척했고, 무인년에 거란 여관 샤오서우통이 뒤에 전을 지었으며, 연을 따라 공양을 받은 것이 오룡과 같았다.

《武当福地总真集》 (무당복지총진집), 권 중 “궁관본말”, 원 유도명 찬

『상선지기』

上善池记

상선지기

大万寿紫霄元圣宫,按经云:天下之至柔,莫过于水。水善利万物而不争,犹川谷之与江海。古之善为士者,濬石为池,以上善之名矣。本宫尊宿革道谨,居善地,心善渊,谨抽衣资,命匠石砌斯池及黑龙池,咸皆落成,革故新之,乃至大顺。先伊徒王道清、张道源施财于均州行宫并堰庄二处,各造砌水井,为道众日用,以便往来。以斯刻石,扬其善功,记其岁月。后来者,能知古始,惟济世利人,何千万年云尔。致和元年岁在戊辰六月日,冲正守真明素法师、大万寿紫霄元圣宫提点宫事陈道明,真应纯素凝和法师、大万寿紫霄元圣宫提点谢道清立石。

대만수자소원성궁에서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니, 마치 시내와 골짜기가 강과 바다와 같은 것이다. 옛날 선비 노릇을 잘한 이는 돌을 파 연못을 만들어 상선(上善)이라는 이름으로 삼았다. 본궁의 존숙 거다오진은 좋은 땅에 살며 마음이 선하고 깊어, 삼가 의자(衣資)를 거두어 석공에게 이 못과 흑룡지를 쌓게 하였고, 모두 완성되어 옛것을 고쳐 새롭게 하여 크게 순조로웠다. 앞서 그의 제자 왕다오칭·장다오위안이 균주 행궁과 옌좡 두 곳에 재물을 베풀어 각각 우물을 만들어 쌓으니, 도중의 일용이 되고 왕래하는 이들에게 편리하였다. 이에 돌에 새겨 그 선공을 널리 알리고 세월을 기록한다. 뒤에 오는 이가 옛 시작을 알 수 있게 하니, 오직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이롭게 할 뿐, 어찌 천만 년이라 하겠는가. 지화 원년 무진년 6월 일, 충정수진명소법사·대만수자소원성궁 제점궁사 천다오밍, 진응순소응화법사·대만수자소원성궁 제점 셰다오칭이 입석하였다.

《大岳太和山志》 (대악태화산지), 권 12 “상선지기”, 원 지화 원년(1328)

『명대악태화산도궁비기』

国朝永乐十六年御制碑

국조 영락 16년 어제비

盖闻大而无迹之谓圣,充周无穷;妙不可测之谓神。是故行乎天地,统乎阴阳,出有入无,恍惚翕张,骖日驭月,鼓风驾霆,倏而为雨,忽而为云,御灾捍患,驱沴致祥,调运四时,橐籥万汇,陶铸群品,以成化工者,若北极玄天上帝真武之神是已。按道书:神本先天始炁五灵玄老,太阴天一之化,生而神灵,聪以知远,明以察微,潜心念道,志契太虚。乃入武当山,修真内炼,心一志凝,遂感玉清元君,授以无极上道,功满道备,乘龙天飞,归根复位,显名亿劫,与天地悠久,日月齐并。

듣건대 크고 자취가 없는 것을 성(聖)이라 하니 충만하여 끝이 없고, 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이에 천지 사이를 행하고 음양을 통솔하며, 유(有)에서 나와 무(無)로 들어가고, 황홀히 펴고 오므리며, 해를 병거로 삼고 달을 부리고, 바람을 일으키고 뇌정을 몰아, 문득 비가 되고 홀연 구름이 되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막아내며, 사기를 몰아내고 상서를 불러들이고, 사시를 조율하여 만물을 부레로 축이듯 모아 주물러 조화의 공을 이루는 자는 북극 현천상제 진무의 신과 같다. 도서에 살피건대: 신은 본래 선천 시기(始炁)의 오령현노(五靈玄老)이며, 태음천일(太陰天一)의 화(化)로서,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총명하여 먼 것을 알고 밝아 미세한 것을 살폈으며, 마음을 잠기어 도를 생각하고 뜻이 태허에 부합하였다. 이에 무당산에 들어가 수진하고 내련하니 마음이 하나이고 뜻이 응집하여, 마침내 옥청원군을 감동시켜 무극상도(無極上道)를 전수받았고, 공이 차고 도가 갖추어지자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 뿌리로 돌아가 자리를 회복하여 억겁에 이름을 드러내어 천지와 함께 유구하고 일월과 나란히 하였다.

武当旧名太和,谓非玄武不足以当之,故名曰武当。蟠踞八百余里,高列七十二峰,三十六岩之奇峭,二十四涧之幽邃。峰之最高曰天柱,境之最胜曰紫霄、南岩。上出游氛,下临绝壑,跨洞天之清虚,凌福地之深窅。紫霄、南岩皆有宫。又自南岩北下三十里,有五龙宫;又四十里抵山趾,有真庆宫,俱为祀神祝厘之所。元末悉毁于兵燹,荆榛瓦砾,废而不举。

무당의 옛 이름은 태화(太和)인데, 현무(玄武)가 아니면 이에 감당할 만한 것이 없다 하여 무당(武當)이라 이름하였다. 800여 리를 엎드려 자리 잡고, 높이 늘어선 것이 72봉이며, 36암의 기암절벽과 24계의 그윽한 깊이가 있다.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을 천주(天柱)라 하고, 경치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을 자소(紫霄)·남암(南岩)이라 한다. 위로는 떠도는 기운을 넘어서고 아래로는 끊어진 골짜기에 임하여, 동천(洞天)의 맑고 빈 곳을 건너고 복지(福地)의 깊고 아득한 곳에 우뚝하다. 자소·남암에는 모두 궁이 있었다. 또 남암에서 북쪽으로 30리 내려가면 오룡궁이 있고, 또 40리에 산기슭에 이르면 진경궁이 있으니, 모두 신에게 제사하고 복을 비는 곳이었다. 원 말에 모두 병화에 파괴되어 형극과 기왓장이 되어 폐허가 되고 일으키지 못하였다.

天启我国家隆盛之基。朕皇考太祖高皇帝以一旅定天下,神阴翊显佑,灵明赫奕。肆朕起义兵,靖内难,神辅相左右,风行霆击,其迹甚著。暨即位之初,茂锡景贶,益加炫耀。至若榔梅再实,岁功屡成,嘉生骈臻,灼有异征。朕夙夜祗念,罔以报神之休。仰惟皇考、皇妣,劬劳恩深,昊天罔极,亦罔以尽其报。惟武当,神之攸栖。肃命臣工,即五龙之东数十里,得胜地焉,创建玄天玉虚宫;于紫霄、南岩、五龙,创建太玄紫霄宫、大圣南岩宫、兴圣五龙宫。又即天柱之顶,冶铜为殿,饰以黄金,范神之像,享祀无极。神宫仙馆,焕然维新。经营之始,至于告成之日,神屡显像,祥光烛霄,山峰腾辉,草木增色,灵气聚散,变化万状,众目咸睹,跽拜唶唶。榔梅垂实,加前数倍。九地启秘,金杵跃出,阴阳储精,玄质流润,灵异纷纭,莫能殚纪。神之响应,有如此者。

하늘이 우리 국가의 융성한 기반을 열었다. 짐의 황고 태조고황제가 한 무리로 천하를 평정할 때 신이 어두운 가운데 보좌하여 밝은 보호를 베풀어 영명이 혁혁하였다. 이에 짐이 의병을 일으켜 내란을 평정할 때도 신이 좌우에서 보좌하여 바람처럼 나아가고 벼락처럼 치니 그 자취가 매우 드러났다. 즉위 초에 이르러서는 큰 하사를 넉넉히 내리고 더욱 빛나게 하였다. 낭매가 다시 열리고 세공이 여러 번 이루어지며 좋은 곡물이 나란히 이르니 분명히 기이한 징조가 있었다. 짐이 아침저녁으로 삼가 생각하건대 신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었다. 우러러 황고·황비를 생각하니 고생의 은혜가 깊어 호천이 극이 없음과 같아 역시 그 보답을 다할 수 없었다. 오직 무당은 신이 깃드는 곳이다. 엄히 신공에게 명하여 오룡의 동쪽 수십 리에 아름다운 땅을 얻어 현천옥허궁을 창건하고, 자소·남암·오룡에 태현자소궁·대성남암궁·흥성오룡궁을 창건하였다. 또 천주의 꼭대기에 동을 녹여 전을 만들어 황금으로 장식하고 신의 상을 주조하여 끝없이 제사하게 하였다. 신궁과 선관이 찬연히 새로워졌다. 경영을 시작한 때부터 고성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신이 여러 번 형상을 나타내고 상서로운 빛이 하늘을 비추며 산봉우리가 빛을 솟구치고 초목이 색채를 더하며 영기가 모이고 흩어져 만 가지로 변화하니 뭇 눈이 모두 보고 꿇어 절하며 감탄하였다. 낭매가 열매를 드리우니 이전보다 여러 배로 많았다. 구지(九地)가 비밀을 열어 금출(金杵)이 뛰어나오고 음양이 정을 저축하며 현질(玄質)이 윤기를 흐르니 영이하고 기이한 것이 어우러져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신의 감응이 이와 같았다.

遂命道士为提点,主领各宫,饬严祀事,昭答神贶,上资荐扬皇考太祖高皇帝、皇妣孝慈高皇后在天之灵,下为天下臣庶祈迓繁祉。虽然,神之浮游混沌,变化无方,此感彼应,无往不然。非此无以达朕之诚与夫天下虔敬之心也。况山川冲和之气,融结于斯,与神相为表里。神之陟降往来,飘飖挥霍,顾瞻旧游,岂不徘徊于斯乎?则是宫观之建,有不可无。谨为文刻石山中,以彰神功,永永无穷焉。

이에 도사를 제점으로 삼아 각 궁을 주령하게 하고, 제사를 엄중히 정돈하여 신의 하사에 밝게 보답하게 하였다. 위로는 황고 태조고황제와 황비 효자고황후의 재천지령을 천양하는 자산이 되게 하고, 아래로는 천하의 신서를 위하여 번성한 복을 기원하게 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이 혼돈을 떠다니고 변화가 법도가 없어, 이것이 감하면 저것이 응하여 가는 곳마다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아니면 짐의 정성과 천하의 경건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 하물며 산천의 중화한 기운이 이곳에 융결되어 신과 서로 표리가 된다. 신이 오르내리며 왕래하고 표요하여 휘발하며 옛 유적을 돌아보면 어찌 이곳에서 배회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궁관의 건립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삼가 글을 지어 산중 돌에 새겨 신의 공을 드러내어 영원히 무궁하게 하고자 한다.

《大岳太和山志》 (대악태화산지), 권 2 “국조 영락 16년 어제비”, 명성조 어제, 영락 16년(1418)

『헌종황제자소궁신상기』

宪宗皇帝紫霄宫神像记

헌종황제자소궁신상기

朕闻自开天以来,即有此山;自元始以来,即有此神。神乃北极玄天上帝真武是也,山乃大岳太和是也。神非兹山,无以为栖真之所;山非兹神,无以侈灵胜之名。是故历代构造殿宇,钦崇之不衰。我太祖高皇帝平定海宇,惟神默相,灵明赫奕,尝于南京建庙奉祀之矣。太宗文皇帝肃靖内难,惟神阴佑,厥迹诞著,特于兹山大造宫祠;及于北京,复建行宫奉祀之矣。英考睿皇帝光复大位,惟神屡现奇应,亦既命官,函香奠币,致敬尤笃。朕继绍大统,十有五年,仰思先志,敢不祗承?矧家国乂安,夷夏怀服,无为之治,于斯为盛,岂不赖于神之翊赞而能尔邪?昭答之典,在所必行。肆命工为像,往安于太玄紫霄宫。圣像一,从官像四,皆范铜为之,而镀以金;水火神二,亦铜体金饰,而各类其像。供器、香炉、瓶盂、钟磬,总十一事,既坚既完,载鲜载洁。特遣太监陈喜,送诣宫所奉安,永享四方之香火,永壮世人之观瞻。夫神分身降世,变化无穷,恍惚翕张,出无入有,御灾捍患,济物度人,数出祯祥,祚我家国。继自今,愿丕扬神道,斡运化机,俾上而圣母福寿无穷,于以昭朕之孝;下而储嗣繁衍未艾,于以昭朕之仁;宫闱清吉,于以昭朕治内之严;臣僚效忠,于以昭朕使臣之礼;黔黎于变,于以昭朕之化;夷狄来王,于以昭朕之威。以迄四时行,百谷登,群生遂,化工成,庶乎神有感必应,而朕虔奉之诚,亦不虚矣。虽然,朕之所望庇于神者,岂止一时如是而已哉?谨为文刻碑,以彰神功于不朽云。

짐이 듣건대 하늘이 열린 이래로 곧 이 산이 있었고, 원시 이래로 곧 이 신이 있었다. 신은 곧 북극 현천상제 진무이고, 산은 곧 대악 태화이다. 신은 이 산이 아니면 참을 깃들일 곳이 없고, 산은 이 신이 아니면 영이하고 뛰어난 이름을 넓힐 수 없다. 이 때문에 대대로 전우를 조영하고 흠숭함이 쇠하지 않았다. 우리 태조고황제가 천하를 평정할 때 오직 신이 묵묵히 보좌하여 영명이 혁혁하였고, 일찍이 난징에 묘를 세워 봉사하였다. 태종문황제가 내란을 숙정할 때 오직 신이 어둡게 보호하여 그 자취가 크게 드러났고, 특별히 이 산에 궁사를 크게 지었으며, 베이징에 이르러서는 다시 행궁을 세워 봉사하였다. 영고예황제가 대위를 광복할 때 오직 신이 여러 번 기이한 감응을 나타냈고, 이미 관원에게 명하여 향을 담고 폐백을 올려 경의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짐이 대통을 이은 지 십오 년이 되어 우러러 선조의 뜻을 생각하니 감히 삼가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가국이 안정되고 이하가 회복되어, 무위의 다스림이 이에 융성하니 어찌 신의 협찬에 의지하지 않고 이럴 수 있겠는가? 밝게 보답하는 전례는 반드시 행해야 할 바이다. 이에 장인에게 명하여 상을 만들어 태현자소궁에 가서 안치하게 하였다. 성상 하나와 종관상 넷은 모두 동을 주형으로 만들어 금을 입혔고, 수화신 둘도 동체에 금으로 장식하여 각기 그 상을 종류별로 하였다. 공기·향로·병발·종경이 모두 열한 가지이니 견고하고 완전하며 신선하고 깨끗하다. 특별히 태감 천시를 보내 궁소에 보내어 봉안하게 하여 영원히 사방의 향화를 누리고 영원히 세인의 관람을 장엄하게 하였다. 무릇 신은 몸을 나누어 세상에 내려와 변화가 다함이 없고, 황홀히 펴고 오므리며 무에서 나와 유로 들어가,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막아내며, 물을 구제하고 사람을 건지며, 여러 번 정상을 내어 우리 가국에 복을 내렸다. 지금부터 원컨대 신도를 크게 드날리고 화기를 돌려, 위로는 성모의 복수가 무궁하게 하여 짐의 효를 밝히고, 아래로는 후사가 번식하여 그치지 않게 하여 짐의 인을 밝히며, 궁위가 청길하게 하여 짐이 내부를 다스리는 엄함을 밝히고, 신료가 충성을 다하게 하여 짐이 신하를 부리는 예를 밝히며, 검려가 변화하게 하여 짐의 교화를 밝히고, 이적이 와서 왕에게 조공하게 하여 짐의 위엄을 밝히게 하소서. 이에 사시가 행해지고 백곡이 오르며 뭇 생명이 뜻대로 되고 조화의 공이 이루어지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신이 감하면 응하고 짐의 경건히 받드는 정성도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 하더라도, 짐이 신에게 비는 보호는 어찌 한때 이와 같음에 그치겠는가? 삼가 글을 지어 비에 새겨 신의 공을 불후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大岳太和山志》 (대악태화산지), 권 2 “헌종황제자소궁신상기”, 명헌종 어제

『대악태화산지』

太玄紫霄宫

태현자소궁

即旧之紫霄元圣宫,正在展旗峰之阳。前有三公峰、五老峰、宝珠峰、福地峰、赐剑、禹迹桥、万松亭,后有太子岩,即玄帝紫霄圆道之处。西有七星岩,东有炼丹岩,中有真一泉、上善池。其地高低叠障,怪石奇峰。山之外,直与云霄相接。若羽士居于石室丹房则三九夏清凉,真仙人之窟宅也。永乐十年,国朝大兴,敕建玄帝大殿、山门、廊庑、左右圣旨碑亭、神库、神厨、祖师殿、圣父母殿、方丈、斋堂、钵堂、云堂、圜堂、厨室、仓库、池亭一百六个间,赐名曰太玄紫霄宫。钦除江西建昌府道纪胡古崖、池州府道纪梅月轩、湖广安陆州道正李玄玉为提点,南昌府奉新县道士徐复高为住持,赐六品印,统领宫事。

곧 옛 자소원성궁으로, 바로 전기봉의 남쪽에 있다. 앞에는 삼공봉·오로봉·보주봉·복지봉·사검·우적교·만송정이 있고, 뒤에는 태자암이 있으니 곧 현제가 자소에서 도를 원만히 이룬 곳이다. 서쪽에는 칠성암, 동쪽에는 연단암이 있고, 가운데에는 진일천·상선지가 있다. 그 땅은 높고 낮음이 겹쳐 장벽을 이루고 괴석과 기봉이 있다. 산 바깥은 곧장 구름과 하늘에 이어져 있다. 우사가 석실이나 단방에 살면 삼구의 추위와 여름에도 청량하니 진정 신선의 굴택이다. 영락 10년, 국조가 크게 일으켜, 칙으로 현제 대전·산문·낭무·좌우 성지비정·신고·신주·조사전·성부모전·방장·재당·발당·운당·환당·주방·창고·지정 106칸을 세우고, 이름을 내려 태현자소궁이라 하였다. 칙으로 장시 젠창부 도기 후구야·츠저우부 도기 메이웨쉬안·후광 안루저우 도정 리쉬안위를 제점으로 제수하고, 난창부 펑신현 도사 쉬푸가오를 주지로 삼아, 6품 인을 내려 궁사를 통령하게 하였다.

《大岳太和山志》 (대악태화산지), 권 2 “태현자소궁”, 명 임자원 찬

『명태종실록』

武当山宫观成,赐名曰太岳太和山。山有七十二峰,三十六岩,二十四涧,峰之最高者曰天柱,境之最胜者曰紫霄。南岩,上轶游气,下临绝壑。紫霄、南岩旧皆有宫,南岩之北有五龙宫,俱为祀神祝厘之所。元季兵毁,至是悉新建宫五龙之东十余里,名玄天玉虚宫,紫宵曰太玄紫霄宫,南岩曰大圣南岩宫,五龙曰兴圣五龙宫。又即天柱峰顶冶铜为殿,饰以黄金,范真武像于中。选道士二百人供洒扫,给田二百七十七顷,并耕户以赡之。仍选道士任自垣等九人为提点,秩正六品,分主宫观,严祀事。上资太祖高皇帝、孝慈高皇后之福,下为臣庶祈弭灾沴。凡为殿观、门庑、享堂、厨库千五百余楹,上亲制碑文以纪之。

무당산 궁관이 완성되자, 이름을 내려 대악태화산이라 하였다. 산에는 72봉, 36암, 24계가 있고,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을 천주라 하며, 경치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을 자소라 한다. 남암은 위로는 떠도는 기운을 넘어서고 아래로는 끊어진 골짜기에 임한다. 자소·남암에는 옛날부터 모두 궁이 있었고, 남암의 북쪽에는 오룡궁이 있어, 모두 신에게 제사하고 복을 비는 곳이었다. 원 말에 전란으로 파괴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모두 새로 건립하였다. 궁은 오룡 동쪽 10여 리에 있어 이름은 현천옥허궁이고, 자소는 태현자소궁, 남암은 대성남암궁, 오룡은 흥성오룡궁이라 하였다. 또 천주봉 꼭대기에 동을 녹여 전을 만들어 황금으로 장식하고 그 안에 진무상을 주조하였다. 도사 200명을 뽑아 청소를 맡기고, 전 277경을 주고 경작 호를 함께 주어 부양하게 하였다. 또 도사 런쯔위안 등 9명을 뽑아 제점으로 삼아 품계를 정6품으로 하여 각각 궁관을 주관하게 하고 제사를 엄중히 하였다. 위로는 태조고황제·효자고황후의 복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서를 위하여 재액을 없애기를 기원하였다. 모두 전관·문무·향당·주고가 1,500여 칸이었고, 황제가 몸소 비문을 지어 이를 기록하였다.

《明太宗实录》 (명태종실록), 영락 16년 12월 병자삭 조

『현천상제계성록』

记云:大唐贞观间,岁值苦旱。朝廷下诏有司,祷于天下名山大川。是时,武当军节度使姚简,奉命躬诣武当紫霄宫,齐醮致祷。建坛之夕,有五儒士,丰貌殊异,敬来谒简。延坐久之,从容语简曰:予五君,非凡之儒,乃五气龙君也。准玄帝敕命,守护此山,非一日矣。为子正直寡欲,祈祷精严,故来相访。少顷,云气迷目,甘雨霈然,遂失五君所在矣。

기에 이르기를: 대당 정관 연간에 해가 심한 가뭄을 만났다. 조정이 유사에 조서를 내려 천하의 명산대천에 기도하게 하였다. 이 때 무당군 절도사 야오젠이 명을 받들어 몸소 무당 자소궁에 나아가 재초하여 기도하였다. 단을 세운 저녁에 다섯 유사(儒士)가 있었는데 풍모가 매우 달라 공손히 야오젠을 알현하러 왔다. 오래 앉혀 두자 태연히 야오젠에게 말하기를: 우리 다섯 군은 범상한 유가 아니라 오기(五氣)의 용군이다. 현제의 칙명을 받들어 이 산을 지켜온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대가 정직하고 욕심이 적으며 기도가 정밀하고 엄숙하므로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잠시 뒤 구름 기운이 눈을 어지럽히고 단비가 넉넉히 내리더니, 마침내 다섯 군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玄天上帝启圣录》 (현천상제계성록), 권 1 “감림응도”, 『정통도장』본

「무당쇄화」

紫霄宫乃武当山最大的宫殿,有东宫西宫前殿后殿,规模极为宏大,庄严美观,真不愧为“金宇瑶宫”。大殿前有碑亭数个,高约三丈,内有约二丈高之大石碑,上刻永乐皇帝亲撰文字,碑置于一大石龟之背上,龟身长约丈余,高约六尺,刻工十分精细。正殿内有一条杉椽,约一尺见方,长约二丈,放于两约三尺之二木架上。用手摸这端,则那端可闻嗡嗡之声,一时传为神奇,凡来拜必摸之,所以两端凹入甚深。据道人说:当日兴筑紫霄大殿时,此根由四川飞来,可惜运到三分□,已用了其□,大概故庙置于此,以资纪念。殿内明代铜器及其他遗物甚多,足供考古家之玩赏。

자소궁은 무당산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동궁·서궁·전전·후전이 있고 규모가 지극히 크며 장엄하고 아름다워 진정 “금우요궁”에 부끄럽지 않다. 대전 앞에는 비정이 몇 개 있는데 높이가 약 3장이고, 그 안에는 약 2장 높이의 큰 석비가 있으며, 그 위에 영락황제가 직접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비는 큰 돌거북 등 위에 놓여 있는데, 거북 몸의 길이는 약 1장 남짓, 높이는 약 6척으로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다. 정전 안에는 삼나무 서까래 하나가 있는데 약 1자 사방, 길이 약 2장으로, 약 3척의 두 나무 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 손으로 이쪽 끝을 만지면 저쪽 끝에서 윙윙하는 소리가 들려서, 한때 신기하다고 전해져 참배하러 오는 사람마다 반드시 만져 보았기에 양쪽 끝이 깊이 패여 있다. 도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자소 대전을 지을 때 이것은 쓰촨에서 날아온 것인데, 아쉽게도 옮길 때 삼분□이 이미 그□를 써버려, 대략 옛 사당이 기념으로 여기에 두었다고 한다. 전 안에는 명대 동기와 기타 유물이 매우 많아 고고학자들이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紫霄有道士二百多人。有几个虽着道装,但并未正式出家,都是在此隐居的。其间有无家可归的年老商人,有些是逃避服役的年青农夫。他们完全是自食其力,有的兼司炊爨,有的专司耕种的,也有专作杂役的。分工严密,所以生活亦井井有条。

자소에는 도사가 200여 명 있다. 몇몇은 도장을 입고 있지만 정식으로 출가한 것은 아니고, 모두 이곳에 은거하는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에는 돌아갈 집이 없는 늙은 상인도 있고, 어떤 이들은 복역을 피하는 젊은 농부도 있다. 그들은 전적으로 스스로 일해 먹고살며, 어떤 이는 취사를 겸하고, 어떤 이는 전담하여 경작하고, 어떤 이는 잡역을 전담한다. 분업이 치밀하여 생활 또한 질서정연하다.

《旅行杂志》 (여행잡지), 제18권 제3호 “무당쇄화”, 친쉐성, 1944년 3월 31일

옛 사진

1934년

이 자소전 정면 영상은 리다커가 1934년 봄여름 무렵 우당산을 여행한 기록에 실린 것으로, 나중에 1936년 10월 『여행잡지』 제10권 제10호 「무당산유기」에 발표되었다. 원 간행물 스캔은 『여행잡지』 1936년 제10권 제10호에서 볼 수 있다.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