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명 홍무 7년(1374), 동창(東昌)의 성을 지키던 무관 진용(陳鏞)이 성을 쌓고 남은 목재로 부성(府城) 한가운데에 경고루(更鼓樓)[1]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여목루(餘木樓)”라 불렀다. 성을 지키는 이들은 이 높은 누각을 빌려 성 밖을 바라보고 적의 동정을 살폈으며, 북소리로 성 안에 경점(更點)을 알리기도 하였다. 성화(成化) 연간에 지부(知府) 양능(楊能)이 누각을 수리하였고, 이 누각은 또한 부의 이름을 따라 “동창루(東昌樓)”라 불리기도 하였다. 홍치(弘治) 9년(1496), 이부(吏部)의 관리 이찬(李贊)이 동창 지부 금천석(金天錫)을 따라 최상층에 올라 성곽을 굽어보며, 이 높은 누각에 걸맞은 이름이 하나도 없음을 감탄하였다. 두 사람이 “광악루(光岳樓)”라는 이름을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노(魯) 땅에 가깝고 대악(岱嶽)[2]에 빛을 더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가정(嘉靖) 12년(1533), 지부 진유(陳儒)가 누각에 올라 동량(棟樑)이 이미 손상되었음을 보고, 이에 공료(工料)를 모으고 장인을 불러 중수하니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완공되었다. 누각의 높은 대 아래에는 통로가 있고, 목조 누각이 대 위로 네 층을 쌓아 올렸다. 누각에 오르려면 먼저 돌계단을 걸은 뒤 누각 안의 나선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야 하며, 누각의 속은 위아래로 뚫려 있고 사방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높은 곳에서 창을 열어 멀리 바라보면, 성 동쪽 조운하(漕河) 위의 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맑은 날 남쪽으로는 금량제산(金梁諸山)[3]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태산(泰山)을 바라볼 수 있다. 낙성한 그날, 진유가 빈객을 청하여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고, 여럿이 창에 기대어 잔을 들고 달을 기다렸다.
건륭(乾隆) 20년(1755), 광악루의 돌대(石臺)가 이미 기울고 목재도 점차 썩어가고 있었다. 누각 아래는 또한 사방의 도로가 만나는 곳이라 행인이 지나기에 이미 위험하였다. 이전의 몇몇 지부가 누각 수리를 의논한 적 있으나, 공사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들어 착공하지 못하였다. 채학이(蔡學頤)가 부임한 뒤 마침 보리 수확이 두 해 연속 좋았으므로, 먼저 녹봉을 내놓고 다음으로 지방 사신(士紳)과 성 안의 인사들에게 출자를 청하였다. 그는 또 향신(鄕紳)을 가려 뽑아 공사와 자재를 나누어 맡게 하여, 일을 손에 넣은 관리가 중간에서 이익을 낚거나 공사가 부실해지는 것을 막았다. 공사는 그해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고, 채학이가 준공을 앞두고 전근하자 부사(府事)를 대리하는 관리가 계속 마무리를 재촉하였다. 처마·기둥·문창(門窓)을 옛 모습대로 수리하여, 누각은 여전히 네 층을 간직하였다.
건륭 30년(1765), 건륭제가 남순(南巡) 길에 동창을 지나 동문으로 성에 들어와 광악루에 올라, 성 밖의 들녘과 수륙(水陸)의 도로를 굽어보고 누각을 위해 편액을 써 주었다. 성 안에서 오른 것은 광악루인데, 지지(志書)에는 또 성 동북쪽 모퉁이에 망악루(望岳樓)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누각이 도대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건륭제는 이후 여러 차례 누각에 오르며 시에서 분별하였다. 건륭 49년(1784), 그는 “광악성사망악무(光岳城斯望岳無)”라 써서, 성 안에서 오를 수 있는 것은 광악루이고 성 동북쪽의 망악루는 이미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건륭 때 중수한 뒤 팔십여 년이 지나, 누각의 지붕 골조가 또다시 부러지고 무너질 위험에 처하였다. 랴오청의 무거인(武擧人) 첨은(詹恩)은 이때 수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뿐이라 여기고, 동창 지부 축경곡(祝慶穀)과 랴오청 지현(知縣) 장효(章斅)에게 누각 수리를 제청하였다. 부와 현의 관리, 랴오청에서 장사하던 산시(山西)와 섬서(陝西)의 상인, 그리고 지방 인사들이 함께 자금을 기부하였고, 첨은이 공사를 감독하여 도광(道光) 20년(1840) 8월부터 25년(1845) 10월까지 줄곧 수리하였으며, 제전(制錢) 일만 이천사백 민(緡)[4]을 들였다. 이번 중수에서는 석조 기단과 벽돌 받침, 목조 구조를 바로잡고 굳혔으며, 처마·기둥·문창도 새로 칠하였다. 도광 28년(1848), 랴오청 사람 양이증(楊以增)이 이 공사를 위해 《중수동창광악루기(重修東昌光岳樓記)》를 지었으며, 뒤에 새겨 세운 비는 지금도 대지(臺基) 남문 서쪽에 서 있다.
1938년 11월, 일본군이 랴오청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포탄이 잇달아 전원공서(專員公署)의 뜰에 떨어지자, 성을 지키던 장령 범축선(范筑先)이 지휘부를 광악루 일대로 옮겨 계속 네 문의 방어를 지휘하였다. 이튿날 동문이 뚫린 뒤 범축선과 수비군은 광악루로 물러나 저항하고, 다시 만수관(萬壽觀)으로 옮겨 골목전을 벌였으며, 범축선은 마침내 만수관에서 순국하였다.
1967년에 대지를 보강할 때 벽돌로 쌓은 외벽과 대 위의 바닥에 시멘트가 발라졌다. 이십여 년 뒤 시멘트 층이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며 물이 스미는 현상이 나타났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시공자들은 먼저 겉의 시멘트를 벗겨 내고 손상된 벽체를 파내어 보수한 뒤, 다시 청전(靑磚)으로 외벽을 둘러싸고 방전(方磚)으로 대 위 바닥을 새로 깔았다.
역사 문헌
《동창부지(東昌府志)》
光岳楼
광악루
楼在城中央。洪武七年,东昌卫指挥佥事陈镛以修城余木建,名余木楼,以料敌望远。后西平李赞名之日光岳,取其近鲁有光于岱岳也。成化丙午,知府杨能修,有梁玺记。嘉靖间知府陈儒,万历间知府莫与齐重修。国朝顺治十七年知府卢𬭎,乾隆二十年知府蔡学颐重修。
누각은 성 한가운데에 있다. 홍무 7년에 동창위(東昌衛) 지휘첨사(指揮僉事) 진용(陳鏞)이 성을 쌓고 남은 목재로 지어 여목루(餘木樓)라 이름하였으니, 적의 동정을 살피고 멀리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뒤에 서평(西平)의 이찬(李贊)이 이를 광악(光岳)이라 이름하니, 노(魯)에 가까워 대악(岱嶽)에 빛을 더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성화 병오(丙午)에 지부 양능(楊能)이 수리하였고, 양새(梁璽)의 기(記)가 있다. 가정 연간에 지부 진유(陳儒)가, 만력 연간에 지부 막여제(莫與齊)가 중수하였다. 국조(國朝, 청) 순치(順治) 17년에 지부 노횡(盧鋐)가, 건륭 20년에 지부 채학이(蔡學頤)가 중수하였다.
《광악루기(光岳樓記)》
皇上御极之十有二年,惟献臣越我庶邦御事,罔不祗恊。维时海岳效灵,百度顺轨,而道化雝然以洽,君子日嘻,此大顺之实也。先是,嘉靖已丑,儒以大司徒之属出守东郡,爰按图籍,得所谓光岳楼者,乃窃叹曰:猗欤体哉!光岳之义大矣哉!南望兴思,恍若凭虚御风,独立于泰山乔岳之上。暨庚寅入郡,岁且告饥,儒乃匍匐往救之不暇,矧敢逸?越明年辛卯,贤隽汇征,冠诸列郡。时则与诸君子徘徊登眺,俯察仰观,欲一记诸,未能也。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지 십이 년, 헌신(獻臣)들과 우리 여러 고을의 어사(御事)들이 공손히 화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때 바다와 산이 신령함을 드러내고 온갖 제도가 순리를 따르며, 도화(道化)가 화목하게 두루 미치매, 군자들이 날마다 감탄하여 “이는 대순(大順)의 실상이다”라고 하였다. 그보다 앞서 가정 기축(己丑)에, 내가 대사도(大司徒)의 속관으로서 동군(東郡)의 태수로 나가, 이에 도적(圖籍)을 살펴 이른바 광악루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몰래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 아름답도다! 광악(光岳)의 뜻이 크도다! 남쪽을 바라보며 생각이 일어나니, 황홀히 허공에 기대어 바람을 몰아 홀로 태산의 높은 악(岳) 위에 서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경인(庚寅)에 이르러 고을에 들어가니 그 해는 마침 기근이 들었다 고하매, 내가 이에 급히 달려가 구휼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하물며 감히 편안히 지냈으랴. 다음 해 신묘(辛卯)에 이르러서는 현준(賢儁)한 이들이 함께 불려 나와 여러 열군(列郡)의 으뜸이 되었다. 이때에 여러 군자와 더불어 거닐며 올라 바라보고 아래로 살피고 위로 쳐다보며, 한 번 기(記)를 짓고자 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하였다.
又明年壬辰暨癸巳,雨旸时若,民物熙熙。时维九月,乃复偕诸君子以登,则见栋宇翚飞,檐阿雾隐,凌空纾瞩,东岳增辉,兹光岳之所以名乎?客曰:未也。又从而跻之,则见其灿然而列岫者,云物兴也;晶然而垂象者,日月丽也。左顾而群峰崒嵂,如距如伏者,泰岳之毓奇也;右盼而羊肠迤逦,如拱如障者,太行之呈秀也。又南睇而衡湘吞吐,北望而燕云闪烁者,诸岳之辉映于两閒也。兹光岳之所以名乎?客曰:似也,请更跻之曰:圣人兴神物以前民用,王者全至德以昭太和。昔者成周定鼎于洛邑,曰:此天地之中也,四时之所交也,风雨之所会也,而万世仰文明之治不衰。是故光岳气完,则贤圣出而天下治;光岳气分,则天地闭而贤人隐。兹光岳之所以名乎?诸君子乃作而言曰:嘻!
또 이듬해 임진(壬辰)과 계사(癸巳)에 이르러, 비와 개임이 때에 순하고 백성과 만물이 화평하였다. 때가 구월이 되어 이에 다시 여러 군자와 함께 올랐는데, 보니 마룻대와 처마가 꿩이 날듯 하고 처마 아래가 안개에 감추어져 있었다. 허공에 능하여 느긋이 바라보니 동악(東岳)에 빛을 더하니, 이것이 광악이라 이름한 까닭인가? 객이 말하기를 “아직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따라 올라가 보니, 그 찬연히 봉우리를 벌여 놓은 것은 구름과 기운이 일어남이요, 맑고 밝게 상(象)을 드리운 것은 해와 달이 빛남이다. 왼쪽을 돌아보며 뭇 봉우리가 높이 솟아 닭의 발톱처럼 벌어진 듯 엎드린 듯한 것은 태악(泰岳)이 기이함을 길러냄이요, 오른쪽을 바라보며 양창(羊腸)처럼 굽이굽이 이어져 공손히 맞이하는 듯 병풍처럼 둘러친 듯한 것은 태행(太行)이 빼어남을 드러냄이다. 또 남쪽을 굽어보며 형상(衡湘)이 삼켰다 뱉고, 북쪽을 바라보며 연운(燕雲)이 번쩍이는 것은 여러 악(岳)이 두 사이에서 서로 비추어 빛남이다. 이것이 광악이라 이름한 까닭인가? 객이 말하기를 “비슷합니다. 다시 올라 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성인이 신물(神物)을 일으켜 백성의 쓰임에 앞서게 하고, 왕이 지극한 덕을 온전히 하여 태화(太和)를 밝혔다. 옛적에 성주(成周)가 낙읍(洛邑)에 정정(定鼎)하여 이르기를 “이는 천지의 한가운데이요, 사시(四時)가 만나는 곳이요, 비바람이 모이는 곳이다”라고 하여, 만세가 문명의 다스림을 우러러 쇠하지 아니하였다. 이런 까닭에 광악의 기(氣)가 온전하면 현성(賢聖)이 나와 천하가 다스려지고, 광악의 기가 갈라지면 천지가 닫혀 현인(賢人)이 숨는다. 이것이 광악이라 이름한 까닭이옵니다. 여러 군자가 이에 일어나 말하기를 “아!” 하였다.
育是哉!夫鲁介在东藩,泰岳奠一其极,汶洄导其流,是故春秋贤圣繇此其兴,而万世道时学是宗焉。乃兹东郡,实据上游,则所以钟灵孕秀,以上二继千载之绪者,将无其人乎?儒尝阅志而品题于百世二之上,或以德业,或以文章,或以节义,遐哉邈乎,光映史策,吾不得而见之矣。乃今昭代人文,乘运以出,洋洋如也,侃侃如也,其所以对扬先烈而奋庸熙载者,亦既有其人矣。吾又安知百世之下,所以上继鲁、邹者,将无其人乎?乃遂书之,用昭不朽,而复系以诗曰:于维我明,奠兹鳌极。奄有龟蒙,泰山壁立。东有长河,壮兹金汤。源流浩渺,洙泗之将。中起危楼,古称光岳。伟哉形胜,伊谁之作?天祐我邦,诞兴文运。光岳储祥,乘时思奋。爰有作者,上继鲁邹。道垂千载,岂伊人谋。
아, 그러하도다! 무릇 노(魯)는 동쪽 번(藩)에 한켠으로 있으나, 태악이 그 극(極)을 하나로 세우고 문(汶)과 회(洄)가 그 흐름을 이끌었으니, 이런 까닭에 춘추(春秋)의 현성이 이로써 일어났고, 만세의 도(道)와 시학(時學)이 이를 으뜸으로 삼았다. 이 동군은 실로 상류를 차지하였으니, 그런즉 영기(靈氣)를 모으고 빼어남을 품어 위로 천 년의 실마리를 이을 자가 어찌 없겠는가? 내가 일찍이 지지(志)를 읽고 백세(百世) 위의 인물을 품평하니, 혹은 덕업(德業)으로, 혹은 문장(文章)으로, 혹은 절의(節義)로, 아득하고도 멀어 사책(史冊)에 빛을 비추었으나, 나는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이제 이 밝은 시대의 인문(人文)이 운을 타고 나오니, 넓고도 넓으며 곧고도 곧도다. 그 선열(先烈)에 답하여 드높이고 분발하여 공을 이루어 업을 밝게 할 이도 이미 그 사람이 있다. 내가 또 어찌 알리오, 백세 아래에서 위로 노(魯)와 추(鄒)를 이을 자가 어찌 없겠는가? 이에 마침내 이를 써서 썩지 않음을 밝히고, 다시 시를 이어 말한다. “아, 우리 명(明)이여, 자오(鰲)의 극(極)을 여기에 세웠도다. 구몽(龜蒙)을 덮어 가지고, 태산이 병풍처럼 섰도다. 동쪽에 긴 강이 있어, 이 금탕(金湯)을 장엄케 하는도다. 근원과 흐름이 넓고 아득하여, 주수(洙水)와 사수(泗水)를 이어가는도다. 가운데 높은 누각이 솟아, 옛적부터 광악이라 불렸도다. 웅장하도다 형승(形勝)이여, 이 누구의 지음인가?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우사, 문운(文運)을 크게 일으키는도다. 광악이 상서를 쌓아, 때를 타서 분발하는도다. 이에 짓는 이 있어, 위로 노·추(魯鄒)를 이었도다. 도(道)가 천 년에 드리워지리니, 어찌 그 사람의 꾀만이겠는가.”
我莅东藩,于兹四纪。大有频仍,贤豪胥继。爰荷天休,会逢其适。我士我民,乐且无极。明明天子,建乃中和。昭兹大顺,元气匪磨。敢用大书,阐兹微义。于万斯年,永绥厥治。
“내가 동쪽 번(藩)에 이르러, 이곳에서 네 해를 지냈도다. 큰 풍년이 거듭 이어지고, 어진 이와 호걸이 서로 이어졌도다. 이에 하늘의 아름다움을 입어, 마침 그 알맞은 때를 만났도다. 우리 선비 우리 백성이, 즐거움이 다함이 없도다. 밝고 밝은 천자께서, 중화(中和)를 세우셨도다. 이 대순(大順)을 밝히시니, 원기(元氣)가 닳지 아니하는도다. 감히 크게 써서, 이 미세한 뜻을 밝히는도다. 만 년에 이르도록, 길이 그 다스림을 편안히 하소서.”
허성명 《중수광악루기(重修光岳樓記)》
癸巳之秋八月辛酉,芹山陈子政平之暇,登光岳而览焉。顾栋宇摧折,惧曰:守兴百废,眷兹胜迹,实维具瞻,而栋桡,其谁之责?吾闻之,待敝者艰,蒙旧者易。于是相势筹资,罗诸工役,而播告日若。惟专攻无泛乃力而玩时;若;惟揆材,无舛乃施而滥费若;惟远图无绚乃文而具观。无亟而疲,无倦而惩,无方,予尔咎。巳。乃区材治廪,凡取诸公羡,及裁诸市贾,而官帑靡丝于故,猷奋响臻,费廉工迅,不弥月而事集,殆炳乎非旧观矣。陈子业育著光岳楼之幽,余复状其略日:楼中城而立,距河里许,河自巽下,抱城之左背,出乾,若涣弗结者。惟光岳既崇,四方景附,获翕受之义焉。楼之台,高数丈,下空洞旁达,上四叠,而峻楹准易卦,再叠符大衍,又再缩之三,末缩之五,翚举鹄冲,状削芙蓉,曲斗斜触,折回曼衍。
계사(癸巳)의 해 가을 팔월 신유(辛酉)일, 개산(芹山) 진자(陳子)가 정사가 평안한 겨를에 광악(光岳)에 올라 굽어보았다. 돌아보니 마룻대와 처마가 무너져 꺾여 있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태수는 온갖 폐(廢)한 것을 일으키는데, 이 아름다운 자취를 돌보는 것은 실로 뭇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인데, 마룻대가 휘어졌으니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내가 듣건대, 해어지기를 기다리면 어렵고 옛것을 입으면 쉽다”라고 하였다. 이에 형세를 살펴 비용을 마련하고 여러 장인과 역부를 모아, 널리 알리고 날을 가렸다. 다만 공역에 오로지 힘쓰되 그 힘을 널리 쓰지 말고 때를 희롱하지 말 것이며, 다만 재목을 헤아려 베풂에 어그러짐이 없게 하고 함부로 낭비하지 말 것이며, 다만 먼 그림을 그려 그 문채를 자랑하여 구경거리로 삼지 말 것이다. 다그쳐 지치게 하지 말고, 게으름으로 벌받을 일을 만들지 말며, 방도가 없으면 너희에게 허물을 주리라. 이에 재목을 나누고 곳간을 정비하니, 무릇 관청의 남는 재물에서 취하고 시장의 상인에게서 재단하여 취하매, 관고(官帑)에서 실오라기 하나 들지 아니하였다. 계획이 떨쳐 일어나 메아리처럼 모여들어, 비용은 적고 공사는 빨라, 한 달이 차기도 전에 일이 마쳐지니, 거의 빛나게 옛 모습이 아니었다. 진자가 이미 광악루의 그윽함을 드러내었으므로, 내가 다시 그 대략을 형용하여 말한다. 누각은 성 한가운데 서 있고, 강에서 한 리 남짓 떨어져 있다. 강은 손(巽, 동남) 아래에서 나와 성의 왼쪽 등을 감싸, 건(乾, 서북)으로 빠져나가니, 흩어진 듯 엉기지 않는 듯하다. 오직 광악이 이미 높이 솟으매, 사방이 그림자처럼 붙어 흡수(翕受)의 뜻을 얻었다. 누각의 대는 높이가 몇 길이요, 아래는 텅 비어 곁으로 통하고, 위로 네 겹을 쌓았다. 높은 기둥은 《주역》의 괘 수에 맞추고, 두 겹은 대연(大衍)의 수에 부합하며, 다시 거기서 셋을 줄이고 마지막에는 다섯을 줄였다. 꿩이 날고 고니가 치솟으며, 모양은 연꽃을 깎은 듯하고, 굽은 공포(斗栱)가 비스듬히 맞물려 꺾이고 돌아 길게 펼쳐졌다.
构梯盘互,始达其巅,虚中彻上,缭以方栏,俯而股栗。启窗延眺,邈周数百里。伫抚流云,动接飞鸟,浦村溪树,历析秋毫。城之东隅,万艘鳞贯,霄澄雨霁,南见金梁诸山,亘接齐、兖,错峙低横,如拱如赴。东望岱岳,指顾双峰,烟霭冥蒙,如睹沧海。窃谓东邦海山之胜,雄诸四国。而魏博千里,野豁原舒,如砥如掌。兹楼跨清漕之津,据两都之会,胜奚尚耶?落成之日,陈子集朋僚,萃冠舄而往陟焉。维时秋爽气清,霜高宇净,霖敛遥林,烟沈万井。攀石橙,蹑丹梯,厉飘鸿,凌碧汉,眇远岫之如卷,睇长河之一线。陟而饮焉,命席临轩,举觞待月,揖序宾筵,秩秩楚楚,式礼罔愆,无乱樽俎。饮而乐焉,吹洞箫,击鼍鼓,扬霓曲,翻燕舞,铿金戛石,繁响激越,神融襟旷,遗落嚣纷,将凌汗漫于庄周,寄风流乎谢眺者矣。
계단을 구불구불 이어 만들어 비로소 그 꼭대기에 다다르니, 속이 비어 위로 뚫리고 사방의 난간으로 둘러싸여, 아래를 굽어보면 넓적다리가 떨린다. 창을 열어 멀리 바라보면 아득하게 수백 리가 두루 미친다. 가만히 서서 흐르는 구름을 쓰다듬으면 움직여 나는 새와 닿고, 물가 마을과 시냇가 나무가 가을 터럭까지도 분명히 갈라 보인다. 성의 동쪽 모퉁이에는 만 척의 배가 비늘처럼 꿰어 이어지고, 하늘이 맑게 개고 비가 갠 뒤에는 남쪽으로 금량의 여러 산이 보이니, 제(齊)와 연(兖)에 이어져 어긋나게 우뚝하고 낮게 가로놓여, 공손히 맞이하는 듯 달려드는 듯하다. 동쪽으로 대악(岱岳)을 바라보며 손짓하여 돌아볼 만한 두 봉우리가, 연기와 안개에 아득히 어두워 창해(滄海)를 보는 듯하다. 나는 생각하건대 동쪽 고을의 바다와 산의 빼어남이 사방의 여러 고을보다 으뜸이다. 그리고 위박(魏博)의 천 리는 들이 트이고 평원이 펼쳐져, 숫돌 같고 손바닥 같다. 이 누각은 맑은 조운(漕運)의 나루를 걸치고 두 도읍의 회합을 차지하니, 그 빼어남을 무엇이 더하랴? 낙성한 날에 진자가 벗과 동료를 모아, 관모와 신을 갖추고 함께 올랐다. 그때 가을이 상쾌하고 기운이 맑으며, 서리가 높고 하늘이 깨끗하고, 장맛비가 먼 수풀에 걷히고, 연기가 만 인정(井)에 가라앉았다. 돌계단을 붙잡고 붉은 층계를 밟아, 날아가는 기러기를 넘어 푸른 하늘을 능가하며, 먼 봉우리가 말린 듯 아득하고 큰 강이 한 줄기임을 굽어본다. 올라서 마시니, 자리를 난간에 임하게 차리고 잔을 들어 달을 기다리며, 읍하며 빈연(賓筵)의 서열을 하니 질서 정연하고 단정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고 술자리를 어지럽히지 않았다. 마시고 즐기니, 동소(洞簫)를 불고 악어 가죽 북을 치며, 예(霓)의 곡을 높이 울리고 연(燕)의 춤을 넘기니, 쇠가 쾅쾅 울리고 돌이 두드려져 번성한 소리가 격양되었다. 신기(神氣)가 녹고 가슴이 탁 트여 소란한 번잡함을 잊으니, 장주(莊周)의 한만(汗漫)을 능가하고 사조(謝朓)에게 풍류를 기탁할 만하였다.
乐而歌焉,咏古而思巢父,怀贤而仰仲连。诵白露之什,赓黄鹤之篇,被之鸣弦,赏而击节,冥思支颐交欢,舞掌歌既,客有感焉。耆曰:噫嘻!吾属滥庾生之游,罔先范老之忧;餍肥甘之腴,罔知藜藿之味;适堂宇之便,罔思蓬荜之艰。诗曰:无已太康。易谓坚冰履霜,胡可忘戒乎哉?陈子闻而叹日:山可薪者,无完肤之材;泽可钓者,寡巨鳞之鱼。吾东郡滨于漕流,困供荐而削,坐驰驱而敝,征赋告迭,丰歉相代,匪予弗敬之堪,予何能措吾民于光岳之安乎?客曰:不然,吾固睹若敏矣,绥奠穷黎,匡祐亨豫。子之心,持颠拯溺,宣郁烛幽;子之政,起衰振靡,倒峡回澜;子之文,砭蒙启瞆,雨化云集。子之教。是故民苏而士变,道立而治兴,吾其谁归哉?曰:是非吾所能,敢请事斯语耳。
즐겁게 노래하니, 옛것을 읊어 소보(巢父)를 생각하고, 어진 이를 그려 중련(仲連)을 우러렀다. 백로(白露)의 시(什)를 읽고 황학(黃鶴)의 편을 이으며, 울리는 현금(絃琴)에 입혀 감상하고 절(節)을 쳤다. 깊이 생각하며 턱을 괴어 서로 즐기고, 손바닥 쳐 춤추며 노래를 마치니, 객이 감회가 있었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아! 우리 무리가 외람되이 유생(庾生)의 유람에 끼었으되, 범노(范老)의 근심을 먼저 하지 못하였고, 기름지고 단 살찐 맛에 배부르되 여곡(藜藿)의 맛을 모르며, 당우(堂宇)의 편리함에 맞추되 봉비(蓬蓽)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지나치게 태평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고, 《주역》에서는 ‘서리를 밟으면 견빙(堅氷)’이라 하였으니, 어찌 경계함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자가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산에서 나무를 할 수 있으면 온전한 껍질의 재목이 없고, 못에서 고기를 낚을 수 있으면 큰 비늘의 물고기가 적습니다. 우리 동군은 조운(漕運)의 흐름에 임하여, 공납(供)과 진천(薦)에 곤궁하여 삭감되고, 앉아서도 달리고 몰림에 피폐해지며, 징세(徵稅)가 거듭 고하여지고 풍년과 흉년이 서로 바뀝니다. 내가 삼가 감당함이 없이서야, 내가 어찌 우리 백성을 광악(光岳)의 편안함에 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대의 민첩함을 보았으니, 궁한 백성을 편안히 하고 바로잡아 형통한 즐거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엎드러진 것을 받치고 빠진 것을 건지며, 막힌 것을 펴고 어두운 곳을 밝혔고, 그대의 정사는 쇠한 것을 일으키고 넘어진 것을 떨치며, 협곡을 뒤집고 물결을 돌렸으며, 그대의 글은 어두운 이를 찔러 깨우고 눈먼 이를 열어, 비 내리는 교화에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대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까닭에 백성이 소생하고 선비가 변하며, 도가 세워지고 다스림이 흥하였으니, 우리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이는 내가 능한 바가 아니니, 감히 이 말을 받들어 섬기기를 청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君子曰:乐而知戒,安而虑危,有功而弗居,可以训矣。龙石子在侧,获备辑之,为楼记。
군자가 말하기를 “즐기면서도 경계할 줄 알고, 편안하면서도 위태로움을 생각하며, 공이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으니, 가르침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용석자(龍石子)가 곁에 있어 이를 두루 모아 갖추어, 누각의 기(記)를 삼았다.
《중수광악루기(重修光岳樓記)》
余早岁通籍东郡,为入都要津,往来至止,即闻光岳楼之胜,与射书台并传,心志之有年。癸酉冬,余守登郡,甫及岁,奉天子命,量移于兹,周览层台,诚巨观也。楼之创始修废,备载乘碣閒无烦更仆述。惟是风雨飘飖,石欹木烂,日就倾圯,地处四术之冲,行者危之。历任前守,数经议复,皆以工大费繁而止,甚则动众招尤之说入,益迟回不果。余素勇于任事,不避艰巨。来之日,窃愿举之,而庶政殷繁,不遑议。及越岁,尘案渐理,地方日有起色,且幸麦秋两稔,民食裕则工易集,修举废坠,此其时矣。爰进绅士而公议之,佥曰可。余随捐俸为倡,而邑人咸乐余之锐意兴复,鼓舞相从,争投金钱无倦色。余思事繁重,杂以吏胥,恐渔利而工多窳,因慎选一二乡大夫分司其事,即余臧获无与焉。
나는 일찍이 동군(東郡)을 통과하여 왕래하였는데, 이곳은 도읍에 드나드는 요충지라, 오가며 이르고 머물 때마다 곧 광악루의 빼어남이 사서대(射書臺)와 나란히 전해짐을 듣고, 마음에 새긴 지 여러 해였다. 계유(癸酉) 겨울에 내가 등군(登郡)을 지키다가 갓 한 해를 지나,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곳으로 옮겨 왔다. 두루 높은 대를 살펴보니 참으로 큰 볼거리였다. 누각의 창건과 수리, 폐허의 시말은 지지(乘)와 비갈(碣)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번거롭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다만 비바람에 날려 돌은 기울고 나무는 썩어, 날로 기울어 무너지려 하고, 땅은 네 갈래 길의 요충에 있어 지나는 이가 위태로워하였다. 여러 차례 전임 태수가 수리를 의논하였으나, 모두 공사가 크고 비용이 번잡하여 그쳤고, 심지어 민중을 동원하여 허물을 부른다는 말이 들어와 더욱 주저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본래 일을 맡기를 과감히 하여 간거(艱巨)함을 피하지 않았다. 온 날에 몰래 이를 들고자 하였으나, 온갖 정사가 많고 번잡하여 의논할 겨를이 없었다. 해가 지나자 쌓인 공문이 점차 풀리고 지방이 날로 기색을 차렸으며, 다행히 보리 추수가 두 번 풍년이 들어, 백성의 양식이 넉넉해지면 공역을 모으기 쉬우니, 무너지고 떨어진 것을 수리하고 일으킴이 이때이었다. 이에 신사(紳士)를 불러 함께 의논하니 모두 옳다 하였다. 나는 곧 녹봉을 내놓아 솔선하였고,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내가 뜻을 예리하게 하여 흥복(興復)함을 기뻐하여, 고무되어 서로 따르며 다투어 금전을 내놓기를 게으른 빛이 없었다. 나는 일이 무겁고 번잡하여 이리(吏胥)가 섞이면 이익을 낚아 공사가 대충 부실해질까 염려하여, 이에 신중하게 한둘의 향대부(鄕大夫)를 뽑아 그 일을 나누어 맡기니, 곧 나의 노복(臧獲)까지도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部署既就,具公牍而上闻之。时督河都御史白公,兼行抚篆,亟为嘉予。总藩阿公,且日:此余之素志也,幸为之无懈。秉臬卢公、观察朱公,司鹾胡公,咸谓不谬,都人士靡不踊跃从事。鸠工财材,备竭心力,自秋徂春,无告瘁者。二月中,余被恩命,擢任监司,筦钥河防,而工将竣,摄事者司马陈君,更砥砺勖勉,楼遂以成计。首役于乙亥九月,讫工于丙子四月,八阅月而功就。其始也,有以道旁筑舍私为言者,余力剖之,遂翻然悔,且欣然趋。亦可见任大事者,不畏难于谋始,不摇动于浮言,斯为得矣。是楼也,位耸离宫,𤷖霄矗起,或以郡多巍科,咸视此,此又惑于形家之言。官斯土者,果克雅意作人,力振文教,而贤士大夫复能善培其后,诱掖不辍,所谓父兄之教先,子弟之率谨,则英杰挺生,当代不乏人,岂尽系一楼之屹嵲哉?
포서(部署)가 이미 마련되자, 공문을 갖추어 위에 보고하였다. 그때 독하도어사(督河都御史) 백공(白公)이 겸하여 순무(巡撫)의 인(篆)을 행하매, 여러 차례 나를 가상(嘉賞)하였다. 총번(總藩) 아공(阿公)이 또한 말하기를 “이는 나의 평소 뜻이니, 다행히 해이하지 말고 하라” 하였다. 병첨(秉臬) 노공(盧公), 관찰(觀察) 주공(朱公), 사추(司鹺) 호공(胡公)이 모두 그르지 않다 하니, 고을의 인사들이 용약하여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다. 공인과 재물·재목을 모음에 마음과 힘을 다 다하여, 가을부터 봄에 이르기까지 지쳤다고 고하는 자가 없었다. 이월 중에 내가 은명(恩命)을 입어 감사(監司)로 승진하여 하방(河防)의 관요(管鑰)를 맡게 되었는데, 공사가 장차 준공되려 하매, 사사(攝事)하는 사마(司馬) 진군(陳君)이 더욱 갈고 닦아 힘쓰니, 누각이 이에 마침내 이루어졌다. 공역을 을해(乙亥) 구월에 시작하여 병자(丙子) 사월에 마쳐, 여덟 달을 지나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 처음에, 길가에 집을 지음[에 빗대어] 사사로이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힘써 풀이하자 마침내 번연히 뉘우치고, 또한 기쁘게 달려왔다. 이로써 또한 볼 수 있으니, 큰일을 맡는 자는 시작을 꾀함에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뜬소문에 흔들리지 않아야, 이를 얻는 것이다. 이 누각은, 위치가 이궁(離宮)에 우뚝하여 하늘을 꿰뚫고 우뚝 솟았으니, 혹은 고을에 높은 과거 급제자가 많은 것이 모두 이것을 본다 하나, 이는 또 형가(形家)의 말에 미혹된 것이다. 이 땅에 벼슬하는 자가 과연 능히 바른 뜻으로 사람을 이루고 힘써 문교(文敎)를 진흥하며, 어진 사대부가 또한 능히 그 뒤를 잘 기르고 이끌어 주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이른바 “부형(父兄)의 가르침이 앞서고 자제(子弟)의 따름이 삼감”이라는 것이니, 그러면 영걸이 우뚝 솟아나 당대에 사람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니, 어찌 다 한 누각의 우뚝함에 매이겠는가?
至于齐云、落星,侈言胜概,恐涉华脢之讥,余故不及,惟记其颠末,以志岁月。
제운(齊雲)과 낙성(落星) 같은 [누각]에 견주어 그 빼어난 경관을 과장하여 말함에 이르러서는, 화려하다는 비웃음에 걸릴까 하여, 내가 일부러 미치지 않고, 다만 그 시말(顚末)을 기록하여 세월을 기록할 따름이다.
《중수광악루비기(重修光岳樓碑記)》
太行以东,沧海以西,山之巉岩高大,兴云雨,见怪物者以十数,泰岳最胜。泰岳以西,山势中断,崩崺平衍,跨州连郡,轮蹄四达,殷阗辐辏之区以十数,东郡最胜。郡城。距泰岳二百五十里,东接齐、兖,西通邢、魏,南则漕运之河,自左偏来,挟连樯万艘,以达京畿。其中多古迹名地,有楼归然起于城郭闾阎阛暗之中。盘磴悬梯,耸倚重霄,奔星蜿虹,髣髴出入。棂槛俯吹行云,倒睨飞鸟,日观天门,隐隐步相接也。而襟带枕腋之交,四顾秋毫,泱漭,周延于数百里之外。夫东之为郡,撼清漕之津,据都邑之会,而四达形胜,一光岳楼悉取之。然则于寰宇之中有东郡,于东郡之中有光岳楼。楼之系重于东郡,此与有泰岳于山左之国,天之下,地之上也,有辨乎?
태행(太行)의 동쪽, 창해(滄海)의 서쪽에, 산이 험준하고 높고 커서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괴물이 나타나는 곳이 십수 개로 헤아려지나, 태악(泰岳)이 가장 빼어나다. 태악의 서쪽에 산세가 중간에 끊어져 무너져 내리고 평탄하게 이어지며, 주를 걸치고 군을 잇고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사방으로 닿아, 무성히 붐비고 바퀴살처럼 모이는 구역이 십수 개로 헤아려지나, 동군(東郡)이 가장 빼어나다. 군성(郡城)은 태악에서 이백오십 리를 두고, 동쪽으로 제(齊)와 연(兖)에 잇고 서쪽으로 형(邢)과 위(魏)에 통하며, 남쪽은 조운(漕運)의 강이 왼편으로부터 와서 잇달은 돛대 만 척을 끌어 경기(京畿)에 이른다. 그 가운데 옛 자취와 이름난 땅이 많아, 누각 하나가 우뚝하게 성곽과 여염(閭閻)·환회(闤闠)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구불구불한 돌계단과 매달린 사다리가 겹겹의 하늘에 우뚝 기대고, 달리는 별과 굽이치는 무지개가 황홀하게 드나드는 듯하다. 창살과 난간이 아래로 흐르는 구름을 불고 거꾸로 나는 새를 내려다보며, 일관(日觀)과 천문(天門)이 어렴풋이 걸음이 서로 닿는 듯하다. 그리고 옷깃과 띠, 베개와 겨드랑이처럼 맞물린 자리를 사방으로 돌아보면 가을 터럭까지도 넓고 아득하여, 수백 리 밖에 두루 미친다. 무릇 동군이 됨이란, 맑은 조운의 나루를 흔들고 도읍의 회합을 차지하여, 사방으로 닿는 형승(形勝)을 광악루 하나가 모두 취하였다. 그런즉 천하 가운데 동군이 있고, 동군 가운데 광악루가 있다. 누각이 동군에 매인 무게는, 산좌(山左)의 나라에 태악이 있는 것과 같이 하늘 아래 땅 위의 것이니, 분별이 있겠는가?
曰:无辨。
말하기를 “분별이 없다” 하였다.
于是东郡之人士原任灌县知县蒋亮、监利县知县任士珑,锐然议修之,曰:兹楼以泰岳名,泰岳不可仆,兹楼不可毁,无兹楼,是无东郡也。楼距初建之岁,历年多所,听其圮且坏,是昭东郡士大夫之不能也。乃以其事请于有司。当是时,今河道观察蔡公学颐为东郡守,具状白大府及诸宪司,又倡为之劝,敛钱鸠工,经始乾隆二十年七月,落成于二十一年六月。役以夫计,凡若千,银以两计,凡若干。檐楹户牖,悉如其旧,益完以新,凡皆蔡公及东郡有司诸人士之力也。滋阳牛运震闻其事而壮之。往余三十年前尝一过斯楼,及是,蔡公以书属余纪其事。余惟斯楼其崇四复,凡十有一丈,制不可谓不壮。楼之役,郡人士襄事者数十人,费累千百计,志不可谓不坚。制之壮,志之坚,则保之不可以不久。
이에 동군의 인사로, 원임(原任) 관현지현(灌縣知縣) 장량(蔣亮)과 감리현지현(監利縣知縣) 임사롱(任士瓏)이, 결연하게 수리를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누각은 태악으로 이름하였으니, 태악이 쓰러질 수 없듯 이 누각도 무너뜨릴 수 없고, 이 누각이 없으면 이는 곧 동군이 없는 것이다. 누각이 처음 세워진 해로부터 지난 해가 많은데, 그 무너지고 상함을 내버려 두면, 이는 동군 사대부의 능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일을 관청에 청하였다. 이 무렵에, 지금의 하도관찰(河道觀察) 채공(蔡公) 학이(學頤)가 동군의 태수로 있어, 상태를 갖추어 대부(大府)와 여러 헌사(憲司)에 알리고, 또 솔선하여 이를 권장하니, 돈을 거두고 공인을 모았다. 건륭 20년 칠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1년 유월에 낙성하였다. 역(役)은 부(夫)로 헤아려 무릇 약 천[명]이요, 은은 냥(兩)으로 헤아려 무릇 약 천[냥]이었다. 처마·기둥·문·창이 모두 그 옛것과 같되 더욱 새로이 온전하게 하니, 무릇 모두 채공과 동군 관청 여러 인사의 힘이다. 자양(滋陽)의 우운진(牛運震)이 그 일을 듣고 장하게 여겼다. 지난날 내가 삼십 년 전에 일찍이 한번 이 누각을 지났는데, 이때에 이르러 채공이 편지로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누각은 높이가 네 겹을 거듭하여 모두 십일 길이니, 그 제도가 웅장하지 않다 할 수 없다. 누각의 공역에, 고을 인사로 일을 도운 자가 수십 명이요, 비용이 천백에 누적되니, 그 뜻이 굳지 않다 할 수 없다. 제도의 웅장함과 뜻의 굳건함이라면, 그것을 보전함이 오래지 않을 수 없다.
夫雀鼠之角触,罘罳制之,风雨之飘激,甃石拒之,水火之不虞,恒隶戒之。然楼之设,不过以岁计,而楼之毁,亦可以世待也。保之之难何如哉?古者吏治与民事合,而后城郭宫室峙以不敝。国之育楼,所以望云物,察氛祥,节物候,料民事也。东郡为微子遗封,颛顼高阳氏临莅之故地,贤有司守兹土,登兹楼,察民疾苦而噢咻之,视其劳役而休息之。俯瞰商货之殷辏,思以宣其滞;远览河漕之曲折,思以畅其流。如是则民安富,民安富,则士和附,士和附,则本末之力赡,公私之事举。然则光岳一楼,以东郡亿万人守之,墙壁日益坚,栋宇日益峻,虽谓斯楼永永无壤,更千万年雀鼠风雨,与泰岱、东岳终古俱不敝可也,以此保之,何有哉?蔡公曰:然,遂书以俾东郡人。
무릇 참새와 쥐가 뿔처럼 닿고 찌름은 부사(罘罳)로 막고, 비바람의 날리고 격함은 벽돌과 돌로 막으며, 물과 불의 뜻밖의 일은 늘 하속(隸)에게 경계하게 한다. 그러나 누각의 세워짐은 겨우 해로 헤아릴 뿐이고, 누각의 무너짐은 또한 세(世)로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을 보전함의 어려움은 어떠한가? 옛적에는 관리의 다스림과 백성의 일이 합한 뒤에야, 성곽과 궁실이 우뚝 서서 해이지 않았다. 나라가 누각을 기르는 까닭은, 구름의 기운을 바라보고, 기이함과 상서로움을 살피며, 절기와 물후(物候)를 조절하고, 백성의 일을 헤아리기 위함이다. 동군은 미자(微子)가 남긴 봉지(封地)이요,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가 임하여 다스린 옛 땅이니, 어진 유사(有司)가 이 땅을 지키고 이 누각에 올라,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펴 어루만지고, 그 노역을 보아 쉬게 한다. 아래로 상인과 물화(貨物)가 무성히 모임을 굽어보며 그 막힘을 풀기를 생각하고, 멀리 하조(河漕)의 굽이굽이를 바라보며 그 흐름을 통하게 하기를 생각한다. 이와 같으면 백성이 편안하고 부유해지고, 백성이 편안하고 부유해지면 선비가 화합하여 붙고, 선비가 화합하여 붙으면 본말(本末)의 힘이 넉넉해지고 공사(公私)의 일이 일어난다. 그런즉 광악 한 누각을 동군의 억만 사람으로 지키면, 담벽이 날로 더욱 견고해지고 마룻대가 날로 더욱 높아지니, 비록 이 누각이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고, 천만 년을 지나 참새와 쥐와 비바람이 [있어도] 태대(泰岱)·동악(東岳)과 함께 예부터 끝까지 상하지 않는다 이를 만하다. 이것으로써 그것을 보전하니, 무엇이 [어려우랴]? 채공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여, 마침내 써서 동군 사람에게 주었다.
《북유일기(北游日記)》
十九曰到东昌府通济桥闸。东昌旧治在巢陵,宋淳化三年,河决城圮,乃移治孝武渡西,即今治也。城中鼓楼五层,名光岳楼。屠隆登光岳楼诗:万里风尘连海岱,千家烟火接淮徐。城外鲁仲连台,或云即射书处。肇域志云:府西北一十五里有古聊城。史记:田单攻聊城不下,鲁连为书约之矢,以射城中者也。韩慕庐有怀堂诗稿有鲁仲连射书处,自注云:有碑在聊城东门下。聊墄,春秋聊摄地。元裕之诗:杏花春酒记聊城。其东北有摄城。过东柳行墩,到永通闸。
십구일에 동창부(東昌府) 통제교갑(通濟橋閘)에 이르렀다. 동창의 옛 치소(治所)는 소릉(巢陵)에 있었는데, 송 순화(淳化) 3년에 하(河)가 터져 성이 무너지매, 이에 치소를 효무제(孝武渡) 서쪽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성 안의 고루(鼓樓)는 다섯 층으로 광악루라 이름한다. 도륭(屠隆)의 등광악루시(登光岳樓詩): “만 리 풍진(風塵)이 바다와 태산에 잇닿고, 천 가의 연기와 불빛이 회(淮)와 서(徐)에 이어진다.” 성 밖에 노중련대(魯仲連臺)가 있으니 혹은 곧 사서(射書)한 곳이라 한다. 《조역지(肇域志)》에 이르기를 “부(府) 서북쪽 십오 리에 옛 랴오청(聊城)이 있다” 하였다. 《사기(史記)》에 전단(田單)이 랴오청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노련(魯連)이 글을 써서 화살에 매어 성 안으로 쏘았다 하였다. 한모려(韓慕廬)의 《유회당시고(有懷堂詩稿)》에 “노중련사서처(魯仲連射書處)”가 있어, 스스로 주(注)하기를 “비가 랴오청 동문 아래에 있다” 하였다. 랴오성(聊墄)은 춘추의 랴오섭(聊攝) 땅이다. 원유지(元裕之)의 시: “살구꽃 봄술로 랴오청을 기억한다.” 그 동북쪽에 섭성(攝城)이 있다. 동유행(東柳行)의 둔대를 지나 영통갑(永通閘)에 이르렀다.
《대명일통명승지(大明一統名勝志)》
城中有望岳楼,以可眺望泰岳而名。台基高广数丈,楼作四层,矗立云表,雄胜甲于齐鲁。今名光岳楼。
성 안에 망악루(望岳樓)가 있으니, 태악(泰岳)을 바라볼 수 있어 이름하였다. 대지(臺基)의 높이와 너비가 몇 길이요, 누각은 네 층으로 지어 구름 밖에 우뚝 솟아, 그 웅장한 빼어남이 제(齊)와 노(魯)에서 으뜸이다. 지금은 광악루라 이름한다.
《고금도서집성·직방전(古今圖書集成·職方典)》
光岳楼 在府城中,创始莫考,其台高数丈,楼四叠而上,盘互玲珑,缥缈云表,雄胜甲于中原。成化间知府杨能修,万历间莫与齐重修,知府陈儒、侍郎许成名、主事梁玺各有记。
광악루는 부성(府城) 안에 있으니, 처음 지어짐을 상고할 수 없다. 그 대가 몇 길 높이요, 누각이 네 겹으로 쌓아 오르며, 구불구불 이어져 투명하게 맑고, 구름 밖에 아득하여, 그 웅장한 빼어남이 중원(中原)에서 으뜸이다. 성화 연간에 지부 양능이 수리하였고, 만력 연간에 막여제가 중수하였으며, 지부 진유, 시랑(侍郞) 허성명, 주사(主事) 양새(梁璽)가 각각 기(記)를 지었다.
옛 사진
1936년
1936년, 중국영조학사(中國營造學社)가 유치평(劉致平)과 막종강(莫宗江)을 랴오청에 파견하여 조사하고 사진을 찍게 하였다. 임주(林洙)가 편찬한 《중국고건축도전(中國古建築圖典)》 제3권에 광악루의 옛 사진 한 폭이 수록되었는데, 그림 제목은 “산둥 랴오청 여목루(山東聊城餘木樓)”로 되어 있다. 조사 시기와 인원은 《광악루와 산섬회관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보라.
1947년
《랴오청시지(聊城市志)》 채색 페이지에 실린 1947년의 옛 사진은 고루둥다제(古樓東大街)와 길가의 가옥, 광악루를 기록하고 있으며, 원래의 촬영자는 알 수 없다. 이미지의 제목은 산둥 지정(地情) 문서에 보존된 지방지 페이지를 보라.
참고 자료
- 판징화, 《중수동창광악루기》 비문 고석(考釋), 《산둥도서관학간》 2016년 제2기.
- 《징항운하 랴오청권(京杭運河聊城卷)》 ‘고건축’, 산둥 지정 자료 데이터베이스.
- 《요성현지》 권수(卷首) ‘순행면휼신한(巡幸蠲恤宸翰)’, 건륭제가 광악루에 오른 시를 수록하였다.
- 《랴오청시지(聊城市志)》 ‘고건축’, 산둥 지정 문서.
- 《랴오청지구지(聊城地區志)》 제15편 ‘군사·랴오청 방위전’, 랴오청 지구 지방 사지(史志) 자료 데이터베이스.
- 둥화, 《우뚝한 광악루, 육백오십 년》, 《제로완보(齊魯晚報)》 2024년 6월 12일 ‘인문제로(人文齊魯)’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