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만력(萬曆) 연간, 전중(滇中, 운남 일대)의 사신(士紳)들이 무당산(武當山) 태화궁의 규제(規制)를 모방하여 동을 녹여 전각을 짓고 진무(眞武)[1]를 모시고자, 운남 순무(巡撫) 진용빈(陳用賓)에게 그 일을 주관해 주기를 청하였다. 진용빈은 본토의 관원과 신사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여러 곳을 답사하였는데, 환취궁(環翠宮) 왼쪽에서 등나무 덩굴을 헤쳤을 때 한 마리의 색깔 고운 꿩이 홀연히 숲속에서 날아오르자, 무리는 이로써 명봉산(鳴鳳山) 위의 궁터를 정하였다. 진용빈은 또 검국공(黔國公)[2] 목창조(沐昌祚)를 청하여 와서 재차 살펴보게 하니, 목창조 또한 이곳이 궁을 세우기에 알맞다고 여겼다.
궁터가 정해지자 공역에 참여한 문무 관원들이 각각 재물을 내었다. 순안(巡按)[3]은 봉록의 곡식을 내놓고, 지방 군무를 담당한 관원은 돈을 내놓았으며, 포정(布政)·안찰(按察) 각 사(司)와 부·주·현의 관원, 그리고 참장(參將)·유격(游擊)·수비(守備) 등 무관들은 품계에 따라 봉록을 내놓았다. 장인들은 먼저 향배(向背)를 정하고 규모를 측량하여 영조(營造)할 위치를 표시한 뒤, 목재와 돌, 회(灰)와 흙, 그리고 단야(鍛冶)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재료와 인부를 나누어 맡기며, 공사를 감독할 장정(章程)을 세웠다. 공사는 정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에 준공되니, 전후로 꼭 한 해였다. 궁원(宮院)은 동전(銅殿)을 중심으로 하고, 경전을 간직하는 법장(法藏), 뜰의 층계, 종을 거는 종가(鐘架), 찾아오는 손님이 묵을 빈려(賓廬), 겹겹의 문(重門)과 두른 담장(周垣)을 갖추었다.
원래의 동전은 뒤에 계족산(鷄足山) 천주산(天柱山) 사관봉(四觀峰) 꼭대기로 옮겨졌고, 그곳 또한 동전으로 인해 금정사(金頂寺)라 불리게 되었다. 이 이전에 대해서는, 숭정 10년(1637)의 순안 장봉핵(張鳳翮)이 주관하였다는 설과, 숭정 14년(1641)의 검국공 목천파(沐天波)가 주관하였다는 설이 있다. 강희 9년에서 10년(1670~1671)에 운남을 지키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가 명봉산에서 동전을 다시 주조하였다. 청대의 문인 장구월(張九鉞)은 산길을 따라 차례로 일천문(一天門)·이천문(二天門)·삼천문(三天門)을 지나 산꼭대기의 태화궁에 올랐다. 이 궁관은 당시 동와사(銅瓦寺)라고도 불렸는데, 진무상(眞武像), 구사(龜蛇), 담장과 기둥, 발(帘)과 난간, 궤석(几席)과 계단이 모두 동으로 주조되었다.
함풍(咸豐) 7년(1857), 운남 회민(回民) 의군이 처음으로 쿤밍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단련(團練) 우두머리 양춘화(楊春和)가 부대를 이끌고 태화궁에 들어가 주둔하였는데, 처음에는 오히려 보호하다가 뒤에는 전각을 헐어 갔다. 이듬해 사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무장 세력이 사면에서 태화궁을 포위하였고, 초구일에 여러 궁(宮)과 누대(樓臺), 전각(殿閣), 단실(丹室)과 도당(道堂)이 불타 없어지고 성상(聖像)이 손상되었으며, 도중(道衆) 가운데 절반은 살아 피하고 나머지 절반은 죽음을 당하였다. 전황이 다소 수그러든 뒤, 태화궁 주지 이원룡(李元龍)·계명추(桂明秋)는 쿤밍에 물러나 있던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郎) 황종(黃琮), 참장(參將) 시응귀(施應貴)와 본토 신사들에게 모연을 청하여 진무상을 보주(補鑄)하고 객당(客堂)을 다시 지었다. 동치(同治) 5년(1866)부터 도중·상점·회관과 관신(官紳)들이 또 잇달아 재물을 내어 정락궁(淨樂宮)·산문(山門)·궁루(宮樓)·고루(鼓樓) 등 건물을 수복하였다. 도중들은 또 삼원(三元)·환취(環翠) 두 궁을 계속 수복하고자 하였으나, 광서(光緒) 16년(1890)에 이르도록 아직 착공하지 못하였다.
역사 문헌
《곤명현지(昆明縣志)》
鸣凤山,在昆明县东北二十里。云南府志:距金马山三里,旧名鹦鹉山,明巡抚陈用宾改今名,且称其山光灵爽,境物葳蕤,九龙奔朝,双凤翔舞,皆纪实也。上有太和宫诸胜。
명봉산은 곤명현 동북쪽 이십 리에 있다. 《운남부지(雲南府志)》에 이르기를, 금마산(金馬山)에서 삼 리 떨어져 있고, 옛 이름은 앵무산(鸚鵡山)인데, 명(明)의 순무 진용빈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또 그 산의 빛이 신령스럽고 상쾌하며, 경계의 사물이 무성하고, 아홉 용이 달려와 조회(朝)하는 듯하고 한 쌍의 봉이 날아 춤춘다고 일컬었으니, 모두 실제를 기록한 것이다. 그 위에 태화궁의 여러 명승(名勝)이 있다.
金马山西北距敷泽门二十里,鸣凤山为太和宫,一曰铜瓦寺。范铜为瓦,覆寺三楹,环之砖城,规制宏丽。始建于明巡抚陈用宾,以祀北极上帝。其后崇祯十年,巡按张凤翮移之鸡足山,康熙九年乃重铸焉。宫之右为环翠宫,为霞绮宫。其自太和宫还而西,至韭菜园侧,为福国寺。
금마산에서 서북으로 부택문(敷澤門)까지 이십 리이고, 명봉산에는 태화궁이 있으니, 다른 이름은 동와사(銅瓦寺)이다. 동을 틀에 부어 기와를 만들어 절 세 칸을 덮고, 벽돌 성으로 둘러쌌으니, 규모와 제도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처음 세운 것은 명의 순무 진용빈이며, 북극상제(北極上帝)를 제사하기 위함이다. 그 뒤 숭정 10년에 순안 장봉핵이 이를 계족산으로 옮겼고, 강희 9년에 이르러 다시 주조하였다. 궁의 오른쪽은 환취궁(環翠宮)이요, 하기궁(霞綺宮)이다. 태화궁에서 돌아 서쪽으로 구채원(韭菜園) 곁에 이르면 복국사(福國寺)이다.
《정건태화궁기명(鼎建太和宮記銘)》
恭惟玄帝天乙之精,乘玄枵当帝座,迹最著于太和。贞观而还,代能尊祀。我成祖文皇帝穆有遐思,式廓其制,千古让隆焉。予尝阅《大岳志略》:“稽首飏言曰:至矣哉,文皇帝神道设教之意乎。”及抚滇之九年,滇人士有言于予曰:“远方冠掖瞻慕圣容,拟稍仿太和规度冶金为殿,以昭假玄穹。积诚已久,第难其所以为地,子大夫盍谋诸。”予闻而喜,喜其知所慕,可以道德齐礼之大机也。《易》不云乎?圣人以神道设教而天下服,服之说者柔其血气,心知而皈,诸道之谓。然柔人邪气,牖人真知,莫神于帝矣。武当垂训,其词甚严,令人见者辄毛骨竦然,思所以改过而迁善,直与《大诰》律例幽明相表里,而潜消迨之。予䌷绎帝训,至于“吃着国王水土,终身不得忘恩。有此发肤身体,须当孝养双亲”,肃容发念,愿含生负气之伦,悉皈心帝命,信受奉行。庶几亲见无极上道,沦于人之肌肤,洽于人之骨髓乎。此予夙昔之愿也。今佩此入滇,滇人能以帝像顾諟为图,予敢爱夫心力。居旬日,乡缙绅中丞朱公即其事告予,予幸可资定志,偕卜胜城东,相度山原间几一舍许,无当者,延伫环望,真气英英,连蜷环翠宫左,扪萝视之,适彩雉从中盘起,玉局宛然,无亦光岳之閟有待欤。中丞朱公曰:“胜在是矣。”予重兹举,再延黔国公沐世老胥之曰:“胜在不疑已。”乃偕黔国佐费须帝尊严,直指公则捐廪,镇府督理公则捐赀,司道郡县、条游备而下则捐俸,各有差,乃穆卜天元一气之辰,而以启字告向背,是景广轮,是规营表正也。甄梓是鸠,髬垩是简,工作集也。绳墨是虔,厉锻是取,财用庀也。物事是班,教护是敦,章程课也。始事竣,事俱以王正之月,甫一载而缮完,奕奕乎,翼翼乎,激日曜而纳光者,中严之厂殿也。拥云英而封阒者,鸿秘之法藏也。青阳开而鳞城者,庭唐之浩级也。应晴曀而訇鞳者,列虡之镛贲也。渊雷声而竦敕者,竭款之宾庐也。森天阔而偊旅肃者,扞启之重门也。通坤轴而循走惧者,蹛缭之周垣也。挥太微、标天柱,跧伏而昂骧者,旋共之辅弼也。邻绛阙、接殊庭,遹皇而肸赫者,混辟之元始也。是役也,天作其奇,地呈其秘,人綦其图,三资合而若待,以成厥胜,然藉匪玄功之翔洽而幽赞也,亦曷克臻厥成矣。夫通国之精诚,凛重元而积之历禩,历禩之精诚合三资而奉之,今兹是谓定志,是谓谋同,于以灵承神依,质之大岳璇宫规制,固一一合者。凡诸人士试思一水一土,孰非皇家之毛,一孔一窍,尽出双亲之里。登宝构,瞻帝容,绎帝训,其濯而心,涤而虑。为臣忠,必纯其衷,为子孝,必完其量。暗室屋漏,恍如陟降,则气和于意,而应感于神。隤祉函蒙,必且阴骘行,且消阳九之阨,臻大有之祥,扫欃枪之妖,洗银河之甲。雨旸时若,干戈载戢,荒服奠安,皇图巩固。若诸挟愿而祈者,祓而禳者,其应如影响者,又第二义矣。似此崇报,庶几文皇帝设神教之深意。而帝与山灵相为悠久,予之愿其少纾矣乎,敬砻石以铭。铭曰:元黄既剖,大道难醇。帝实念之,眷兹下民。爰显太和,于缠翼轸,岂其井参,而殊厥闵。林林总总,业缮精诚。覃尔萌庶,迄于弁缨。咸向臣言,美谐广愿。幸采群情,藉而攸劝。臣谨稽首,北望玉皇。虚左以待,气珥瑶光。呵护閟灵,俶开佑圣。大罗清都,万真叶庆。谓我求者,奚啻人求。何蕲鄯阐,中有十洲。人谋鬼谋,敢为臣力。奉天扶化,亦臣之职。庀徒揆日,各有司存。圣颜咫尺,恍叩帝阍。待从有臣,香案有吏。丹刻翚飞,武当可二。象设孔辟,众志合宁。莫民护国,亿万斯龄。
공손히 생각하건대 현제(玄帝)는 천을(天乙)의 정(精)이시어, 현효(玄枵)를 타고 제좌(帝座)에 해당하시니, 자적(迹)이 태화(太和)에서 가장 드러났다. 정관(貞觀) 이래로 대대로 능히 받들어 제사하였다. 우리 성조문황제(成祖文皇帝)께서 멀리 생각하시어 그 제도를 크게 넓히셨으니, 천고(千古)에 융성함을 양보하였다. 내가 일찍이 《대악지략(大嶽志略)》을 읽어 보니 “머리 조아려 말을 펴어 이르기를, 지극하도다, 문황제(文皇帝)께서 신도(神道)로 교(敎)를 베푸신 뜻이여”라고 하였다. 운남(滇)을 다스린 지 아홉 해에 이르러, 운남의 인사(人士)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먼 곳의 관예(冠掖, 선비)들이 성용(聖容)을 우러러 사모하여, 태화(太和)의 규도(規度)를 조금 모방하여 금(金)을 녹여 전각을 만들고, 이로써 현궁(玄穹)에 밝게 감응하고자 합니다. 정성을 쌓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다만 그 터로 삼을 곳이 어렵사오니, 자대부(子大夫)께서 어찌 이를 도모하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하였는데, 그들이 사모할 바를 앎을 기뻐하였으니, 도덕(道德)으로 예(禮)를 가지런히 하는 큰 기틀이라 할 만하다. 《역(易)》에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성인이 신도(神道)로써 교를 베푸니 천하가 복종한다고. 복종한다는 말은 그 혈기(血氣)를 부드럽게 하고, 마음으로 알아 귀의(歸依)함이니, 여러 도(道)를 이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사기(邪氣)를 부드럽게 하고 사람의 참된 앎을 열어 줌은 황제(帝)보다 신(神)한 것이 없다. 무당(武當)에서 내려주신 훈(訓)은 그 말씀이 매우 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문득 털과 뼈가 송두리째 떨리게 하여, 허물을 고치고 선으로 옮겨갈 것을 생각하게 하니, 곧 《대고(大誥)》와 율례(律例)가 유명(幽明)으로 서로 겉과 속이 되어, 몰래 [재앙을] 없애 준다. 내가 제(帝)의 훈을 주역(䌷繹)하여 이르기를, “임금의 물과 흙을 먹고 자라면 한평생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요, 이 터럭과 살과 몸이 있으면 마땅히 부모를 효도하여 봉양해야 한다”에 이르니, 엄숙한 얼굴로 뜻을 내어, 생명을 품고 기(氣)를 지닌 무리가 모두 제(帝)의 명에 마음을 귀의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기를 바랐다. 바라건대 몸소 무극상도(無極上道)가 사람의 살갗에 스며들고 사람의 골수에 화함을 보고자 함이었다. 이것이 나의 평소의 소원이다. 이제 이것을 품고 운남에 들어오니, 운남 사람이 능히 제상(帝像)을 돌아보고 바로잡음을 도모하매, 내 어찌 그 심력(心力)을 아끼겠는가. 열흘을 지내니, 고을의 진신(縉紳) 중승(中丞) 주공(朱公)이 그 일을 나에게 알려, 나는 다행히 이로써 뜻을 정할 수 있었다. 함께 성 동쪽의 뛰어난 곳을 점쳐, 산과 들 사이를 살피기를 거의 한 숙(舍, 삼십 리) 남짓 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오래 서서 두루 바라보니, 참된 기운(眞氣)이 빛나게 환취궁 왼쪽에 휘감겨 있어, 덩굴을 만지며 살펴보니, 마침 색채 고운 꿩이 그 가운데서 빙 돌아 일어나고, 옥국(玉局)이 완연하니, 이 또한 광악(光岳)의 감추어진 [영기]가 기다림이 있음이 아니겠는가. 중승 주공이 말하기를 “명승이 이에 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거사를 중히 여겨, 다시 검국공 목세로(沐世老)를 맞아 함께 살피니 이르기를 “명승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검국공과 함께 비용을 보태 제(帝)의 존엄을 받들고자 하니, 직지공(直指公, 순안)은 곡식을 내놓고, 진부(鎭府)의 독리공(督理公)은 재물을 내놓고, 사도(司道)·군현(郡縣)과 조유비(條游備) 이하는 봉록을 내놓으니, 각기 등차가 있었다. 이에 삼가 천원일기(天元一氣)의 날을 점치고, 이로써 계자(啓字)로 향배(向背)를 고하니, 이에 그늘과 넓이를 재고, 이에 경영의 표준을 바로잡았다. 재목을 가려 모으고, 회(灰)와 흙을 가려 뽑으니, 공역(工作)이 모였다. 먹줄을 경건히 하고 갈고 담금질함을 취하니, 재용(財用)이 갖추어졌다. 물사(物事)를 나누어 맡기고 가르치고 보살핌을 도타이 하니, 장정(章程)의 과정이다. 일을 시작하고 마침을 모두 왕정(王正, 정월)의 달로 하여, 겨우 한 해 만에 고쳐 완성하니, 빛나도다, 삼가도다. 해의 빛을 격발하여 광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운데 엄숙한 큰 전각이요, 구름 꽃을 품고 조용히 닫힌 것은 크고 깊은 법장(法藏)이요, 봄빛이 열리어 비늘처럼 이어진 성은 뜰과 당(唐)의 넓은 층계요, 맑음과 흐림에 응하여 우렁차게 울리는 것은 열거(列虡)의 큰 종이요, 깊은 곳의 우레 소리에 떨며 삼가는 것은 정성을 다하는 빈려(賓廬)요, 하늘처럼 높고 넓어 줄지어 엄숙한 것은 막아 여는 겹겹의 문이요, 곤축(坤軸)을 통하여 두루 다님에 경외하는 것은 빙 둘러싼 두른 담장이다. 태미(太微)를 휘두르고 천주(天柱)를 표(標)하여, 웅크렸다가 높이 날아오르는 것은 두루 함께하는 보필(輔弼)이요, 강궐(絳闕)에 이웃하고 뛰어난 뜰에 이어져, 숭(崇)히 흥하고 빛나는 것은 혼(混)히 베푸는 원시(元始)이다. 이 역사(役事)는, 하늘이 그 기묘함을 일으키고 땅이 그 신비를 드러내고 사람이 그 도모를 다하니, 세 가지 자(資)가 합하여 마치 기다린 듯하여 그 명승을 이루었으나, 그러나 현공(玄功)의 널리 화합하고 그윽하게 보좌함을 빌리지 않았던들, 또 어찌 능히 그 완성에 이르렀겠는가. 무릇 온 나라의 정성(精誠)이 중원(重元)을 삼가 우러러 여러 대(歷禩)에 쌓이고, 여러 대의 정성이 세 가지 자를 합하여 이를 받드니, 지금 이를 두고 뜻을 정하였다 하고, 이를 두고 도모가 같았다 한다. 이로써 신령을 받들고 신이 의지함에, 이를 대악(大岳, 무당산)의 선궁(璇宮) 규제(規制)에 견주어도 진실로 하나하나 합하는 것이다. 무릇 여러 인사들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한 물과 한 흙이 어느 것이 황가(皇家)의 터럭이 아니며, 한 구멍 한 구멍이 모두 부모의 [몸] 안에서 난 것이 아니겠는가. 보구(寶構)에 올라, 제(帝)의 용모를 우러르고, 제의 훈을 이어 생각하매, 그 마음을 씻고 생각을 씻어라. 신하로서 충(忠)함은 반드시 그 속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식으로서 효(孝)함은 반드시 그 분량을 온전히 하라. 어두운 방과 지붕 새는 곳에서도 황홀히 [신이] 오르내림과 같으면, 기(氣)가 뜻에 화하고 감응이 신(神)에 미칠 것이다. [복이] 내리어 덮고 감싸면, 반드시 또 은덕(陰隲)이 행하여지고, 또 양구(陽九)의 액운을 없애고, 대유(大有)의 상서에 이르며, 참창(欃槍)의 요기(妖氣)를 쓸고, 은하(銀河)의 병란을 씻을 것이다. 비와 개임이 때에 맞고, 창과 과(戈)가 갈무리되며, 황복(荒服)이 편안하고, 황도(皇圖)가 굳건하리라. 만약 여러 소원을 품고 비는 자, 불결을 씻고 재앙을 물리치는 자의, 그 응(應)이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은 것은 또 둘째의 뜻이다. 이와 같이 숭고히 보답함은, 바라건대 문황제께서 신교(神敎)를 베푸신 깊은 뜻이리라. 제(帝)와 산의 신령이 서로 유구(悠久)하고, 나의 소원이 그 조금이나마 풀리리라. 삼가 돌을 다듬어 명(銘)한다. 명에 이르기를: 원황(元黃, 천지)이 이미 갈라지매, 큰 도(大道)가 순수함이 어려워라. 황제(帝)께서 참으로 이를 생각하시어, 이 아래 백성을 돌보시도다. 이에 태화(太和)를 나타내시니, 별자리 익진(翼軫)에 닿았도다. 어찌 정삼(井參)의 [분야]라 하여, 그 가엾이 여김을 달리하리오. 많고 많은 [백성들]이, 일에 정성을 닦도다. 그 백성에게 미치어, 변영(弁纓)에 이르도록. 모두 신하에게 말하기를, 아름답게 넓은 소원과 조화되었다 하도다. 다행히 여러 사람의 뜻을 취하여, 이로써 권면할 바가 되도다. 신(臣)은 삼가 머리 조아려, 북쪽으로 옥황(玉皇)을 우러르도다. 왼쪽을 비워 기다리니, 기운이 요광(瑤光)을 띠도다. 보호하고 신령을 감추시어, 비로소 성(聖)을 도우심을 여시도다. 대라(大羅)의 맑은 도성(淸都)에, 만 진(萬眞)이 함께 경사하도다. 나의 구함이라 함은, 어찌 사람이 구함만이리오. 어찌 선천(鄯闡)을 구하리오, 그 가운데 십주(十洲)가 있도다. 사람의 도모와 귀신의 도모, 감히 신하의 힘을 다하리. 하늘을 받들고 교화를 도움은, 또한 신하의 직분이로다. 무리를 갖추고 날을 헤아림은, 각기 맡은 바가 있도다. 성안(聖顔)이 지척(咫尺)이매, 황홀히 제(帝)의 문을 두드리도다. 시종에는 신하가 있고, 향안(香案)에는 관리가 있도다. 붉은 조각이 꿩 날듯하니, 무당(武當)에 견줄 만도다. 상(像)을 세움이 크게 밝고, 뭇 뜻이 합하여 편안도다. 백성을 보듬고 나라를 지켜, 억만 년 이 나이로다.
万历甲辰岁春王正月谷旦。
만력(萬曆) 갑진(甲辰)년 봄 왕정(王正) 정월 곡단(穀旦, 길일).
钦差巡抚云南兼建昌毕节等处地方赞理军务、兼督川贵兵饷、都察院御史、兼兵部右侍郎资德大夫正治上卿晋江陈用宾谨撰。
흠차순무운남(欽差巡撫雲南) 겸 건창(建昌)·필절(畢節) 등 처지방 찬리군무(贊理軍務), 겸 독천귀병상(督川貴兵餉), 도찰원어사(都察院御史), 겸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자덕대부(資德大夫) 정치상경(正治上卿), 진강(晉江) 진용빈(陳用賓) 삼가 짓다.
《속운남통지고(續雲南通志稿)》
太和宫在城东二十里鸣凤山,一名金殿。明巡抚陈用宾建。铸铜为殿,环以砖城。崇祯十年,巡按张凤翮移之鸡足山。国朝康熙九年重铸,咸丰八年毁。同治、光绪间续修。
태화궁은 성 동쪽 이십 리 명봉산에 있으니, 다른 이름은 금전(金殿)이다. 명의 순무 진용빈이 세웠다. 동을 부어 전각을 만들고, 벽돌 성으로 둘러쌌다. 숭정 10년에 순안 장봉핵이 이를 계족산으로 옮겼다. 국조(國朝, 청) 강희 9년에 다시 주조하고, 함풍 8년에 소실되었으며, 동치·광서 연간에 잇달아 수리하였다.
《계족산지(鷄足山志)》
金顶寺在天柱山四观峰,古有方塔一座,今毁。弘治间,有僧建庵其上。至嘉靖年,郡人李元阳建普光殿。万历己未,直指潘澽建观风阁。天启丁卯,直指朱泰祯建天长阁。崇祯丁丑,直指张凤翮建善雨亭,筑罗城上,立四观楼。己卯,直指涂必泓建景星亭。辛巳,黔国沐天波移云南省城太和宫金殿来山,废普光殿并塔,就其址以立金殿。
금정사(金頂寺)는 천주산(天柱山) 사관봉(四觀峰)에 있으니, 옛날에 네모난 탑 한 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무너졌다. 홍치(弘治) 연간에 한 승려가 그 위에 암자를 세웠다.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고을 사람 이원양(李元陽)이 보광전(普光殿)을 세웠다. 만력(萬曆) 기미(己未)에 직지(直指) 반거(潘澽)가 관풍각(觀風閣)을 세웠다. 천계(天啓) 정묘(丁卯)에 직지 주태정(朱泰禎)이 천장각(天長閣)을 세웠다. 숭정(崇禎) 정축(丁丑)에 직지 장봉핵이 선우정(善雨亭)을 세우고, 나성(羅城) 위에 쌓아 사관루(四觀樓)를 세웠다. 기묘(己卯)에 직지 도필홍(涂必泓)이 경성정(景星亭)을 세웠다. 신사(辛巳)에 검국(黔國) 목천파가 운남성성(雲南省城) 태화궁의 금전을 이 산으로 옮겨 와서, 보광전과 탑을 헐고 그 터에 금전을 세웠다.
顺治甲午,因殿宇颓废,合山耆宿同僧自玉重修,因观风阁旧址为佛殿,废天长阁为伽蓝殿,废阿难殿为藏经阁,废善雨亭为卧龙轩,废景星亭为碑亭,后有土主殿,前有灵官殿。康熙三十年,殿阁俱灾,惟铜殿独存。三十一年,总督范承勋、提督诺穆图重建天一阁于观风台旧址。僧慧酪、福峙募姚安土官高奣映、子映厚重修殿庑。过道山门,山顶风厉,冬春之间,积雪不消,而寺居其上,孤耸寒寂,非有志者不能久居也。
순치(順治) 갑오(甲午)에 전우(殿宇)가 무너지고 쇠함으로 인하여, 온 산의 기숙(耆宿)이 승려 자옥(自玉)과 함께 중수하니, 관풍각의 옛 터를 인하여 불전(佛殿)으로 하고, 천장각을 헐어 가람전(伽藍殿)으로 하고, 아난전(阿難殿)을 헐어 장경각(藏經閣)으로 하고, 선우정을 헐어 와룡헌(臥龍軒)으로 하고, 경성정을 헐어 비정(碑亭)으로 하였으며, 뒤에는 토주전(土主殿)이 있고 앞에는 영관전(靈官殿)이 있다. 강희 30년에 전각이 모두 재화를 입어 오직 동전만 홀로 남았다. 31년에 총독 범승훈(范承勳)·제독 낙목도(諾穆圖)가 관풍대(觀風臺)의 옛 터에 천일각(天一閣)을 다시 세웠다. 승려 혜락(慧酪)·복시(福峙)가 요안(姚安)의 토관(土官) 고옹영(高奣映)과 [그의] 아들 영후(映厚)에게 모연하여 전우(殿廡)를 중수하였다. 산문(山門)을 지나면, 산꼭대기는 바람이 사납고 겨울과 봄 사이에 쌓인 눈이 녹지 않으며, 절이 그 위에 있어 외롭게 솟아 춥고 고요하니, 뜻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살 수 없다.
金殿在四观峰顶,铜铸为殿,外以金装,梁柱窗壁,备极精巧。此殿原在云南省城鹦鹉庵太和宫,崇祯辛巳,黔国公沐天波移建峰顶,因名此寺为金顶寺。
금전은 사관봉 꼭대기에 있으니, 동을 부어 전각을 만들고 겉을 금으로 장식하여, 들보와 기둥, 창과 벽이 극도로 정교함을 갖추었다. 이 전각은 원래 운남성성 앵무암(鸚鵡庵) 태화궁에 있었는데, 숭정 신사(辛巳)에 검국공 목천파가 옮겨 봉우리 꼭대기에 세웠으므로, 이로 인해 이 절을 금정사라 이름하였다.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
其名之重,以张代巡凤翮同乡,命其住持绝顶迦叶殿,而沐府又以中和山铜殿移而畀之,故声誉赫然。
그 이름이 중대해진 것은, 장(張) 대순(代巡) 봉핵(翮)이 [그와] 동향(同鄕)이므로 그에게 꼭대기의 가섭전(迦葉殿) 주지를 맡겼고, 목부(沐府)가 또한 중화산(中和山)의 동전을 옮겨 이를 주었으므로, 그러므로 명성이 혁혁하였다.
《유동와사기(游銅瓦寺記)》
出滇城东郊,循盘龙江东北行,平田绮错,残柳亏映。至小村,策蹇乱流以渡,十里而遥为鹦鹉山,或曰山形如鹦鹉,故名。或曰以产鹦鹉。山萃然起于苍莽之中,北控陲商、南蹑金马,与玉案、碧鸡争雄,长若狎齐盟然,未至里许,旭日晃漾,金光赫奕,射山谷欲动。仆夫指曰:“此铜瓦寺也。”由山南折西北麓,绝壁杰立数千仞,黮黕无寸肤,怪石如狮象,上下狞逐,欲啮人,左崖悬一线石关,曰一天门,磴而上,踵顶摩错老树怪竹,轇轕森映,凡三百余磴,得二天门。欲少憩,壁下横风冲突,万马奔蹴,黝然虚黑,不敢驻足,又历四五百磴,闯然谽衍,仰见白日,曰三天门。平地二百亩,太和宫峙焉。宫势瑰丽,周廊层阿绝顶,翼然耸出,则铜瓦寺也。
전성(滇城, 쿤밍) 동쪽 교외로 나가, 반룡강(盤龍江)을 따라 동북으로 가니, 평평한 들에 [논밭이] 비단처럼 어우러지고 시들은 버들이 그늘을 드리웠다. 작은 마을에 이르러, 나귀를 몰아 물살을 가르며 건너니, 십 리쯤 멀리 앵무산이 있는데, 혹 이르기를 산 형세가 앵무새와 같아서 이름하였다 하고, 혹 이르기를 앵무새가 나기 때문이라 한다. 산이 우뚝하니 창망(蒼莽)한 가운데서 솟아, 북으로는 척상(陲商)을 누르고 남으로는 금마(金馬)를 밟으며, 옥안(玉案)·벽계(碧鷄)와 웅을 다투어, 마치 오랫동안 동맹을 익숙히 한 듯하다. 일 리쯤 미치지 못한 곳에서, 떠오르는 해가 일렁이고 금빛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 산골짜기를 비추어 흔들릴 듯하였다. 심부름꾼이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이 동와사입니다”라고 하였다. 산 남쪽에서 서북쪽 기슭으로 꺾어 오르니, 절벽이 우뚝 솟아 수천 인(仞)이요, 캄캄하여 한 치의 [흙] 살도 없으며, 괴상한 돌이 사자와 코끼리 같아, 위아래로 사납게 쫓아 사람을 물려 하고, 왼쪽 절벽에 한 줄기 돌관(石關)이 걸려 있어 일천문(一天門)이라 한다. 돌계단으로 오르니, 발뒤꿈치와 정수리가 스치는 늙은 나무와 괴상한 대나무가 어지러이 울창하게 비치매, 무릇 삼백여 단에 이천문(二天門)을 얻었다. 조금 쉬고자 하였으나, 벼랑 아래 가로누운 바람이 세차게 부딪혀 만 마리 말이 달려 차는 듯, 칠흑같이 어둡고 허하여 감히 발을 멈추지 못하였다. 다시 사오백 단을 지나니, 활짝 넓고 트이어 우러러 밝은 해를 보니 삼천문(三天門)이라 한다. 평지가 이백 무(畝)에 태화궁이 우뚝 서 있다. 궁의 형세가 아름답고 화려하여, 두루 미는 회랑이 겹겹의 굽이를 돌아 꼭대기에 날개처럼 솟아난 것이 곧 동와사이다.
寺祀真武,自神像、侍从、龟蛇及墙柱、帘槛、几席、阶城、瓴甋之属,皆笼铜为之。阶下铜幡竿十余丈,亭亭特立。
절에는 진무(真武)를 모시니, 신상(神像)·시종(侍從)·구사(龜蛇)와 담장·기둥, 발(帘)·난간, 궤석(几席)·계단·성곽, 수막새(瓴甋) 따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을 부어 만들었다. 계단 아래에는 동으로 만든 당간(幡竿)이 십여 길로, 우뚝 홀로 서 있다.
读旧碑,为明初建,以山似均州太和,建宫于上,为祈祷所,不载铜瓦之始。道士出迎,年九十余,询之,云:吴逆踞滇时所易。尝怪古奸雄僭窃之徒,诛求杀戮,草菅人命。惧天降罚,乃遁于浮屠老子之教,斩山以为窟,笼金以为像,九层之台,黄金之液,曾不之惜,如魏太武、唐武后之金佛,刘鋹之铁塔,杨吴之大铁炉,莫可枚举。吴逆以釜底游魂,拒命抗讨,鲸呿豨突,剉人如羊豕,而庄头之箕敛,彝汉之科派,剥二十四郡之脂膏,以饱欲壑,天怒人怨,莫此为尤。而崇鬼神之宫,范铜至五百余万之多,为前古所未有。日率伪属熏拜讽诵,自谓可以欺天邀神,不知王师一至,草薙禽狝,虽铜城铁垒,立见销灼。向之金题玉槛,荡然无复灰烟。呜呼!彼侈泰以祈福也,何为者哉!何为者哉!存而不毁,非独彰国家威德之远,亦使千古之悖逆者有所慑。
옛 비석을 읽어 보니, [궁은] 명 초에 세워졌고, 산이 균주(均州)의 태화(太和)와 비슷하므로 그 위에 궁을 세워 기도하는 곳으로 삼았다 하되, 동와(銅瓦)의 시초는 싣지 않았다. 도사가 나와 맞이하니 나이가 구십여 세라, 그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오역(吳逆, 오삼계)이 운남을 깔고 앉았을 때 바꾼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괴이하게 여겼던 바, 옛 간웅(奸雄)으로 참람(僭竊)한 무리는 죽이고 거두어들이며 사람 목숨을 풀포기처럼 여겼다. 하늘이 벌을 내릴까 두려워, 이에 부처와 노자(老子)의 교(敎)에 도망하여, 산을 깎아 굴을 만들고 금을 부어 상을 만들어, 아홉 층의 대(臺)와 황금의 물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으니, 위(魏) 태무(太武)·당(唐) 무후(武后)의 금불(金佛), 유장(劉鋹)의 철탑(鐵塔), 양오(楊吳)의 큰 쇠 화로 같은 것은 다 열거할 수 없다. 오역은 솥 아래의 떠도는 혼백으로 명을 거역하고 토벌에 항거하여, 고래처럼 입을 벌리고 멧돼지처럼 돌진하며, 사람을 베기를 양과 돼지같이 하고, 장두(莊頭)의 거둬들임과 이(彝)·한(漢)의 부역 징발로, 스물네 군(郡)의 지고(脂膏)를 착취하여 욕심의 골짜기를 채웠으니, 하늘의 진노와 사람의 원망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귀신을 높이는 궁을 [세우고], 동을 부은 것이 오백여 만에 이르렀으니, 이는 예로부터 없던 일이다. 날마다 가짜 무리를 거느리고 향을 피워 절하고 [경을] 읽으며, 스스로 이로써 하늘을 속이고 신을 맞을 수 있다 하였으나, 왕사(王師)가 한번 이르자 풀을 베고 새를 사냥하듯 하여, 비록 동으로 만든 성과 쇠로 만든 보루라도 곧 녹아 타버림을 보았다. 지난날의 금빛 기둥머리와 옥 난간이 싹쓸이되어 다시 재와 연기조차 없었다. 아! 저들이 사치하고 오만하여 복을 빌었음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무엇 때문이었는가! 남겨 두고 부수지 않음은, 다만 국가의 위덕(威德)이 먼 것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고의 패역(悖逆)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할 바가 있게 함이다.
道士饭余松棚下,俯视西南诸山,夕阳动荡,云压归鸟之背,滇海风帆点缀,胸次心殊乐之,乞取败帚扫廓壁,纪游之年月,乃去。
도사가 소나무 천막 아래에서 나에게 밥을 먹이고, 굽어보니 서남쪽 여러 산에 석양이 일렁이고, 구름이 돌아가는 새의 등을 누르며, 전해(滇海)에 돛단배가 수를 놓았다. 가슴속이 매우 이를 즐거워하여, 헤진 빗자루를 얻어 회랑의 벽을 쓸고, 유람한 연월을 기록하고서 떠났다.
《역차수개태화궁비기(歷次修蓋太和宮碑記)》
盖闻可创之事,莫为之前,虽美弗彰。可继之事,莫为之后,虽盛弗传。滇南苴兰会垣东门外,距城十五里许,有山曰鸣凤,又俗名鹦鹉山。前明万历壬寅年,道士徐正元叩请云南巡抚军门陈公用宾,会同黔国公沐公昌祚,右都督沐公睿,御史刘公会于山之巅,仿照湖广武当山七十二峰之中峰修筑紫禁城,冶铜为殿,铸供真武祖师金身。名其宫曰“太和”,亦仿照武当山中峰宫名也。其时并建三元、环翠二宫,所供圣神仙佛,各有专司,瞻拜者历历可溯,而其殿宇,概以“太和宫”统之。其地左挹华山之秀,金马腾辉;右临昆海之滨,碧鸡焕彩,洵为滇南一胜境也。乡人称之或曰金殿,或曰金顶,任其信口而出耳。我国朝康熙己卯年,有道教法师钦奉谕旨,为替度道者沈妙章,由江南迎请道教藏经入宫,添盖藏经楼藏之。其余各宫之布置周密,各处之庄严辉煌,真如洞天福地。入其宫者,不啻山阴道上,应接不暇。丛林称极盛焉。无如年深日久,文昌殿、魁星殿、王帅殿倾塌不堪,有省城善士张耀,募捐重修,焕然一新。其庙内古规,每逢祖师圣诞及祈晴祷雨、禳灾迓福之时,文武各官亲临拈香,无不灵应如响。至咸丰六年丁巳而后叠遭兵燹,七年练目杨春和驻扎于此,始犹保护,继则拆毁。
대개 들은 바, 창시할 만한 일은 그 전에 이루어 주는 이가 없으면 비록 아름다워도 드러나지 않고, 이을 만한 일은 그 뒤에 잇는 이가 없으면 비록 성대하여도 전해지지 않는다. 전남(滇南) 거란(苴蘭) 회원(會垣, 운남성성) 동문 밖, 성에서 십오 리쯤 되는 곳에 명봉(鳴鳳)이라는 산이 있으니, 또 속칭 앵무산(鸚鵡山)이다. 전대 명(明) 만력 임인(壬寅)년에 도사 서정원(徐正元)이 엎드려 운남 순무 군문(軍門) 진공(陳公) 용빈(用賓)에게 청하니, 검국공 목공(沐公) 창조(昌祚), 우도독(右都督) 목공(沐公) 예(睿), 어사(御史) 유공(劉公)과 함께 산 꼭대기에 모여, 호광(湖廣) 무당산 칠십이 봉우리의 가운데 봉우리를 모방하여 자금성(紫禁城)을 쌓아 올리고, 동을 녹여 전각을 만들어 진무조사(真武祖師)의 금신(金身)을 부어 모셨다. 그 궁의 이름을 “태화(太和)”라 하니, 이 또한 무당산 중봉(中峰)의 궁 이름을 모방한 것이다. 그때 아울러 삼원(三元)·환취(環翠) 두 궁을 세웠으니, 모신 성신(聖神)과 선불(仙佛)이 각기 맡은 바가 있어, 우러러 절하는 이들이 낱낱이 거슬러 살필 수 있으나, 그 전각들을 대략 “태화궁”으로 통칭하였다. 그 땅은 왼쪽으로 화산(華山)의 빼어남을 끌어들여 금마(金馬)가 빛을 날리고, 오른쪽으로 곤해(昆海)의 물가에 임하여 벽계(碧鷄)가 채색을 빛내니, 참으로 전남의 한 경승(勝境)이다. 향리 사람들이 이를 부르기를 혹은 금전(金殿)이라 하고 혹은 금정(金頂)이라 하니,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입에서 내는 것이다. 우리 국조(國朝, 청) 강희 기묘(己卯)년에 도교 법사(法師)로서 칙으로 어지(諭旨)를 받들어, 대도(替度)할 도자(道者) 심묘장(沈妙章)을 위하여, 강남으로부터 도교의 장경(藏經)을 모셔다 궁에 들이고, 장경루(藏經樓)를 더 지어 이를 간직하였다. 그 나머지 각 궁의 배치는 주밀(周密)하고, 곳곳의 장엄(莊嚴)은 휘황하여, 참으로 동천복지(洞天福地)와 같았다. 그 궁에 들어가는 이는 마치 산음(山陰)의 길 위와 같아 응접할 겨를이 없었으니, 총림(叢林)이 극성(極盛)하다 일컬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세월이 깊고 오래되어, 문창전(文昌殿)·괴성전(魁星殿)·왕수전(王帥殿)이 기울어 무너져 견딜 수 없게 되니, 성성(省城)의 선사(善士) 장요(張耀)가 모연하여 중수하니 번연히 새로워졌다. 그 묘(廟) 안의 옛 규정으로는, 조사의 성탄(聖誕)과 기청(祈晴)·도우(禱雨)·양재(禳災)·액복(迓福)할 때마다 문무 각 관원이 몸소 와서 향을 집어 [올리니], 영험한 응답이 메아리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함풍 6년 정사(丁巳) 이후로 거듭 병화(兵燹)를 당하고, 7년에 연목(練目) 양춘화가 이곳에 주둔하니, 처음에는 오히려 보호하다가 뒤에는 헐어 부쉈다.
八年四月被贼四面围攻,至初九日攻破。所有诸宫、楼台、殿阁、丹室、道堂尽行烧毁,圣像亦遭损坏。道众逃生者半,殉难者亦半。名胜之区,变为瓦砾之场矣。嗣军务松,住持李元龙、桂明秋,目击心伤,恳请在籍兵部左侍郎黄公琮、参将施公应贵,绅士官鏸李炘、缪志鲁、邹泽、简宗杰、张耀等募捐补铸真武金身供奉,并建太和本宫客堂楼房。同治五年,李秀、李藻、宛荣、黄玉龙仝住持李元龙,募捐修建净乐宫殿宇三楹,山门三间。又善士李秀、张耀、李富捐赀修建灵山圣母殿三间,并新塑圣母金身,朱天君、邱祖、吕祖、观音真官、土地各像,及修补二天门牌坊。光绪二年,善士李承霖,捐赀修建紫禁城上鼓楼三间,潘国元捐赀修建五福殿三间,并装严圣像。光绪三年,住持李元龙见朝山人众,无处栖止,商请省号布铺、盐铺、芦茶铺、古庭庵、龙华会、同会城官绅士庶人等,捐资新建净乐宫左右宫楼十二间。杨经、周崇信庄严佛龛三间。其时开化镇蔡公标、临元镇何公秀林、协镇衔解公连科,暨绅耆冯义、王会等捐赀庄严真武金身及侍坐四尊。善士李彩、马沅、杨安、陶世贵、栗世魁等,修饰七星旗、龟蛇二将。上下清油行仝城乡内外各善信人等,每月捐油赀,供点天灯。谢荣清修补三天门、王帅殿,及庄严金身。云南粮储道松公林,修补刘元帅殿。中衡参府岑公有富,修补魁星楼。其余传茶之处有殿宇者,系传茶会修建。自光绪六年,又有善士李国宝、冯义、潘国元、张联森、高尚志、顾英、欧谦吉、吕彬、王绍恒、吴昇等与助善同人,启建賩会一轮,至十年二月賩竣,将抽获功德,建盖紫禁城外左右鼓楼二座,头天门牌坊一座。内有太华寺賩会捐来银壹百两,如数归开支项下报用,彩画圣父母大殿,修补玉阶栏杆,并土地殿。又于光绪十二年,前届办賩善士李国宝、冯义等,添约善士杨淮、黄嘉兴、马士杰、施永盛、吕彬、刘口等,同海源寺复启賩会一轮,分得抽获功德,修盖雷神殿六间,众善信捐赀修塑神像十八尊。此自咸丰六年后,截至光绪十六年二月止,历次修理,约略记其梗概,而先行叙出者,盖恐日久遗失,而没入之善也。至其中不无遗漏,留待后来阖宫工程全完,一同补叙,且此次系就太和一宫而言。至于三元、环翠二宫工程浩大,需费甚钜,尚未一篑伊始,惟冀十方宰官善信,或量力而捐助,集腋成裘;或解囊而布施,告成全功。俾三宫大制克复,则庶几前人创始之规不废,而美愈彰。后人继起之功不朽,而盛愈传矣。是为记。
8년 사월에 도적이 사면에서 포위 공격하여, 초구일에 이르러 함락되었다. 모든 여러 궁(宮)·누대(樓臺)·전각(殿閣)·단실(丹室)·도당(道堂)이 모조리 불타 없어지고, 성상(聖像) 또한 손상을 입었다. 도중(道衆)은 살아 피한 자가 절반이요, 순난(殉難)한 자도 절반이었다. 명승의 구역이 기왓장과 자갈의 벌판으로 변하였다. 이어 군무(軍務)가 느슨해지자, 주지 이원룡·계명추가 눈으로 보고 마음 아파하며, 재적(在籍)의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郎) 황공(黃公) 종(琮), 참장(參將) 시공(施公) 응귀(應貴), 신사(紳士) 관혜(官鏸)·이흔(李炘)·무지로(繆志魯)·추택(鄒澤)·간종걸(簡宗傑)·장요(張耀) 등에게 모연을 간청하여 진무의 금신을 보주(補鑄)하여 봉양하고, 아울러 태화 본궁의 객당(客堂) 누방(樓房)을 세웠다. 동치 5년에 이수(李秀)·이조(李藻)·완영(宛榮)·황옥룡(黃玉龍)이 주지 이원룡과 함께 모연하여 정락궁의 전우(殿宇) 세 칸과 산문(山門) 세 칸을 수축하였다. 또 선사 이수·장요·이부(李富)가 재물을 내놓아 영산성모전(靈山聖母殿) 세 칸을 수축하고, 아울러 성모의 금신과 주천군(朱天君)·구조(邱祖)·여조(呂祖)·관음진관(觀音眞官)·토지(土地) 각 상(像)을 새로 빚었으며, 이천문(二天門)의 패방(牌坊)을 수보(修補)하였다. 광서 2년에 선사 이승림(李承霖)이 재물을 내놓아 자금성 위의 고루(鼓樓) 세 칸을 수축하고, 반국원(潘國元)이 재물을 내놓아 오복전(五福殿) 세 칸을 수축하며, 아울러 성상을 장엄(莊嚴)하였다. 광서 3년에 주지 이원룡이 조산(朝山)하는 사람들이 많아 머무를 곳이 없음을 보고, 성의 상호(商號)인 포포(布鋪)·염포(鹽鋪)·노다포(蘆茶鋪)·고정암(古庭庵)·용화회(龍華會)와, 함께 회성(會城)의 관신사서(官紳士庶) 등에게 상의하여 청하여, 자금을 내놓아 정락궁 좌우의 궁루(宮樓) 십이 칸을 새로 지었다. 양경(楊經)·주숭신(周崇信)이 불감(佛龕) 세 칸을 장엄하였다. 그때 개화진(開化鎭) 채공(蔡公) 표(標), 임원진(臨元鎭) 하공(何公) 수림(秀林), 협진함(協鎭銜) 해공(解公) 연과(連科), 및 신기(紳耆) 풍의(馮義)·왕회(王會) 등이 재물을 내놓아 진무의 금신과 시좌(侍坐) 네 존(尊)을 장엄하였다. 선사 이채(李彩)·마원(馬沅)·양안(楊安)·도세귀(陶世貴)·율세괴(栗世魁) 등이 칠성기(七星旗)·구사(龜蛇) 두 장수를 수식(修飾)하였다. 상하청유행(上下淸油行)이 성과 향 안팎의 각 선신(善信) 등과 함께, 매달 기름값을 내놓아 천등(天燈)을 켜는 데 바쳤다. 사영청(謝榮淸)이 삼천문(三天門)·왕수전을 수보하고, 아울러 금신을 장엄하였다. 운남양저도(雲南糧儲道) 송공(松公) 임(林)이 유원수전(劉元帥殿)을 수보하였다. 중형참부(中衡參府) 잠공(岑公) 유부(有富)가 괴성루(魁星樓)를 수보하였다. 그 나머지 전다(傳茶)하는 곳에 전우(殿宇)가 있는 것은 전다회(傳茶會)가 수축한 것이다. 광서 6년부터 또 선사 이국보(李國寶)·풍의·반국원·장련삼(張聯森)·고상지(高尚志)·고영(顧英)·구겸길(歐謙吉)·여빈(呂彬)·왕소항(王紹恒)·오승(吳昇) 등이 조선(助善) 동인(同人)과 함께 잠회(賩會) 한 차례를 일으켜 세우니, 10년 이월에 잠(賩)이 마쳐져, 뽑아 얻은 공덕으로 자금성 밖 좌우의 고루 두 좌와 두천문(頭天門) 패방 한 좌를 지었다. 그 가운데 태화사(太華寺) 잠회가 보내 온 은 일백 냥은 그 수대로 개지(開支) 항목 아래에 돌려 씀을 보고하고, 성부모(聖父母) 대전에 채화(彩畵)하고, 옥 계단의 난간과 토지전(土地殿)을 수보하였다. 또 광서 12년에 이전 차례의 잠(賩)을 주관한 선사 이국보·풍의 등이 선사 양회(楊淮)·황가흥(黃嘉興)·마사걸(馬士杰)·시영성(施永盛)·여빈·유(劉)□ 등을 더 청하여, 해원사(海源寺)와 함께 다시 잠회 한 차례를 일으켜, 나누어 얻은 공덕으로 뇌신전(雷神殿) 여섯 칸을 수축하고, 여러 선신이 재물을 내놓아 신상(神像) 십팔 존을 수리하여 빚었다. 이는 함풍 6년 이후로부터 광서 16년 이월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수리를 대략 그 개괄을 기록한 것이요, 먼저 서술하여 낸 것은 대개 날이 오래되어 잃어버려 그 선(善)이 묻힐까 염려함이다. 그 가운데 빠뜨린 것이 없지 않으니, 뒷날 온 궁의 공정이 모두 완료되기를 남겨 두어 함께 보충하여 서술할 것이며, 또 이번은 태화 한 궁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삼원·환취 두 궁의 공정은 웅대하여 드는 비용이 매우 큰데, 아직 한 삼태기(一簣)도 시작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바라건대 시방(十方)의 재관(宰官)과 선신들이, 혹은 힘을 헤아려 기부하여 털을 모아 곳(裘)을 이루거나, 혹은 주머니를 풀어 보시하여 온전한 공을 이루기를 고(告)하기를 [바란다]. 세 궁의 큰 규모가 능히 회복되면, 바라건대 앞사람이 처음 만든 규모가 폐하지 않아 아름다움이 더욱 드러나고, 뒷사람이 이어 일으킨 공이 썩지 않아 성대함이 더욱 전해지리라. 이로써 기(記)를 삼는다.
前任湖北筠州知州舒藻撰文,内阁中书舍人李相书。
전임 호북(湖北) 균주(筠州) 지주(知州) 서조(舒藻)가 글을 짓고, 내각중서사인(內閣中書舍人) 이상(李相)이 쓰다.
大清光绪十六年四月初五日,太和宫住持李元龙率徒李明清,孙李智洪、曹智慧、杨智聪,重孙陈理金、王理森、王理宾,同波罗堡、小坝堡阖村管事人等仝立石,镌石李承麟。
대청(大清) 광서 16년 사월 초닷새, 태화궁 주지 이원룡이 제자 이명청(李明清)을 거느리고, 손자 [대의 도사] 이지홍(李智洪)·조지혜(曹智慧)·양지총(楊智聰), 증손 [대의 도사] 진이금(陳理金)·왕이삼(王理森)·왕이빈(王理賓)과, 함께 파라보(波羅堡)·소패보(小壩堡) 온 마을의 관사(管事) 등이 함께 돌을 세우고, 이승린(李承麟)이 돌을 새기다.
《운남통지(雲南通志)》
三月三日,谒真武庙于西山罗汉寺,或东之鸣凤山金殿,或先期赴易隆、中和,山行两日程;或负香之襄阳,谒武当山,往返数月。
삼월 초삼일에는 서산(西山) 나한사(羅漢寺)의 진무묘(眞武廟)에 참배하거나, 혹은 동쪽의 명봉산 금전에 [가거나], 혹은 미리 역융(易隆)·중화(中和)로 떠나 산길로 이틀의 길이요; 혹은 향을 지고 양양(襄陽)에 가서 무당산에 참배하니, 왕복이 여러 달이다.
《운남통지고(雲南通志稿)》
迎仙桥旧云南通志:在城东北二十里鸣凤山麓。明万历二十七年,巡抚陈用宾建。
영선교(迎仙橋) — 옛 《운남통지》: 성 동북쪽 이십 리 명봉산 기슭에 있다. 명 만력 27년에 순무 진용빈이 세웠다.
《춘융당집(春融堂集)》
朱乌南交地,偏崇北极祠。虚危昭法象,元武动旌旗。衾冕威灵壮,风雷陟降迟。松林环翠外,金碧耀罘罳。
주오(朱烏)가 남쪽으로 교차하는 땅에, 치우쳐 북극(北極)의 사당을 높이도다. 허위(虛危)의 별자리가 법상(法象)을 밝히고, 현무(元武)가 깃발을 움직이도다. 금면(衾冕)의 위령(威靈)이 웅장하고, 풍뢰(風雷) 속에 오르내림이 더디도다. 소나무 숲이 환취(環翠) 밖을 두르고, 금벽(金碧)이 부사(罘罳)에 빛나도다.
옛 사진
1911년
윌리엄 에드거 게일(William Edgar Geil)이 지은 《중국십팔성부(中國十八省府)》(Eighteen Capitals of China)가 1911년에 금전 정면의 옛 모습을 실었다.
1920~1922년
“La Pagode du Cuivre”라고 제목 붙은 태화궁 엽서 한 장이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인쇄 발행되어, 금전 정면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20세기 상반기
약 20세기 상반기에 량쓰청(梁思成) 등이 태화궁, 금전, 난간과 계단을 촬영하였다. 이 사진들은 뒤에 린주(林洙)가 편찬한 《중국고건축도전(中國古建築圖典)》 제2권과 제4권에 수록되었다.
참고 자료
- 소제홍(蕭霽虹), 《“남전복신(南滇福神)”: 운남의 진무(眞武) 신앙과 숭사(崇祀) 연구》, 《홍도(弘道)》 2017년 제1기, 제230—2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