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각

천일각은 저장성 닝보의 월호(月湖) 서쪽에 있으며, 범흠(范欽)이 명 가정 연간에 지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사가 장서루이다. 이 글은 황종희(黃宗羲)·전조망(全祖望)·완원(阮元) 등의 원문으로 범씨의 책 모으기와 수서(守書) 제도, 그리고 청대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징서(徵書)를 이야기하고, 또 《천일각장서사지(天一閣藏書史志)》와 근대 옛 사진을 결합하여 청 말기의 전란으로 인한 실서(失書), 민국 시기의 도서(盜書), 1933년의 중수(重修) 및 항전 시기의 이서(移書) 경과를 정리하였다.

시대
명나라
지역
저장
위치
저장성 닝보시 해서구
1960년대 옛 천일각 서문의 옛 모습
1960년대 옛 천일각 서문의 옛 모습

소개

명 가정 연간에 여러 지방에서 벼슬하던 범흠(范欽)이 벼슬을 버리고 닝보로 돌아왔다. 그는 재임 중 끊임없이 전적을 사들였고, 특히 쉽게 볼 수 없는 경전 주해와 고향 지방의 시문에 유의하였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책을 만나면 쑤저우의 장서가 왕세정(王世貞) 집안과 서로 서목을 대조하여 베껴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을 한곳에 모아 보존하기 위해 범흠은 월호(月湖) 서쪽의 자택 안에 2층 장서루를 짓고, 서책을 두는 장(櫥)을 누 위에 배치하였다. 누각 앞에는 못을 파고 둘레에 대나무와 나무를 심었으며, 뒤에 수집한 비판(碑版)[1] 가운데서 원나라 서예가 게희사(揭傒斯)가 쓴 「천일지(天一池)」 석각을 발견하자, 범씨는 이에 「천일(天一)」로 서루를 이름하였다.

범흠이 죽은 뒤 범씨 집안은 재산을 나눌 때 장서를 나누지 않고, 온전한 서각(書閣)과 만금(萬金)을 두 몫으로 나누었다. 책을 지키고자 하는 한 방(房)이 서각을 물려받았고, 둘째 아들은 금을 받아 떠났다. 전조망(全祖望)은 뒤에 「지금 금은 이미 다하였으나 책은 오히려 남아 있다」라고 썼다. 어느 한 방도 혼자 누각을 열어 책을 누 아래로 내리거나 전당 잡혀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범씨 후손은 각문(閣門)과 서장(書櫥)의 열쇠를 각 방에 나누어 맡기고, 각 방의 자손이 모두 모여야만 자물쇠를 열 수 있게 하였다. 멋대로 누각에 오르거나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가거나 책을 빌려 누각 밖으로 내보내는 자는 모두 가족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강희 12년(1673), 학자 황종희(黃宗羲)가 닝보에 이르자 범씨 후손 범우중(范友仲)이 「금기를 깨고」 그를 데리고 누에 올라 모든 서장을 열어 보였다. 황종희는 이 파례를 《천일각장서기(天一閣藏書記)》에 기록하였고, 이 일족 규칙이 실제로 운용된 한 장면을 남기기도 하였다.

건륭 38년(1773), 조정이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을 위해 각지에 도서를 징수하자, 범흠의 8세손 범무주(范懋柱)가 누각에서 육백삼십팔 종을 바쳤다. 조정은 원래 베껴 쓴 뒤 돌려주기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무더기의 책이 천일각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건륭제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두 부의 전도(戰圖)를 하사하고, 항저우 직조(織造)[2] 인저(寅著)에게 명하여 닝보에 가서 서루와 서장을 측량하여 살피게 하였다. 이후 지어진 일곱 곳의 황실 장서각이 천일각의 형제(形制)를 참조하였고, 범씨의 서루도 이로 인해 닝보의 사가 장서처에서 전국에 이름난 장서루가 되었다. 가경 연간에 저장 순무(巡撫) 완원(阮元)이 또 범씨 후손에게 명하여 장(櫥)을 나누어 장서를 점검하고, 십 권의 서목을 엮어 가경 13년(1808)에 새겨 펴냈다.

19세기 이후 전쟁과 절도가 잇달아 범씨가 여러 대에 걸쳐 지켜 온 수서(守書) 질서를 파괴하였다. 도광 21년(1841), 영국군이 닝보를 점령한 뒤 천일각에 들어가 《일통지(一統志)》 등 지리서 수십 종을 빼앗아 갔다. 함풍 11년(1861), 태평군이 닝보에 들어오자 누각을 지키던 범씨 후손이 피하여 달아났고, 부근의 떠돌이 백성이 서루의 뒷벽을 헐어 누각의 책을 훔쳐 내니, 어떤 것은 선교사의 손에 들어가고 어떤 것은 폐지 값으로 제지 공방에 팔려 나갔으며, 범씨는 일 뒤에 그 가운데 일부를 되사 올 방도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1914년에는 상하이의 책 장수가 또 설계위(薛繼渭)를 고용하여 서루에 잠입시켜, 미리 정해 둔 서목대로 적어도 천 종을 훔쳐 갔다. 당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설계위는 누각 안에 십여 일 숨어 있으며 검은 대추로 허기를 채웠고, 범씨가 발견했을 때는 대량의 선본(善本)[3]이 이미 상하이로 운반된 뒤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뒤에 장원제(張元濟) 등이 사들여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함분루(涵芬樓)에 보관하였으나,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폭격할 때 동방도서관(東方圖書館)과 함께 불타 버렸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 누각의 옛 소장은 범흠 시대의 칠만여 권에서 일만 사오천 권으로 줄었고, 서루 또한 범씨의 재력이 쇠락하여 안정된 수선 재원을 잃었다.

1933년 9월 18일, 강한 폭풍이 닝보를 덮쳐 보서루(寶書樓) 동쪽 담장 한 귀퉁이가 기울어 무너졌다. 범씨 후손은 이미 스스로 복구할 힘이 없었으므로, 인현(鄞縣) 문헌위원회가 10월 1일에 회의를 열어 사회의 모금으로 수리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삼 주간의 준비를 거쳐 중수천일각위원회(重修天一閣委員會)가 10월 24일에 성립하였고, 위원회의 소재지는 닝보 중산공원 안의 인현 문헌위원회에 두었다. 위원회에는 모두 스물다섯 명의 위원이 있었고, 인현 현장 진보린(陳寶麟)이 주석을 맡았으며, 엽겸량(葉謙諒)·풍정군(馮貞群)·임소개(林紹楷)·진현개(陳賢凱)가 총무·교제·공정과 경제를 나누어 맡았고, 구성원 가운데는 별도로 여섯 명의 범씨 후예가 있었다. 위원회는 천일각의 옛 모습을 회복하고 규모를 넓히고자 하였으므로, 모금은 무너진 담장을 고치는 데만 쓰이지 않고 정원을 정비하고 존경각(尊經閣)을 옮겨 지으며 흩어져 나간 누각의 책을 찾아 사들이는 데도 쓰였다.

1934년 3월 18일, 위원회는 먼저 장서를 옮겨 내기로 결정하고, 책 상자마다 인현 정부·위원회·범씨의 세 갈래 봉첨(封簽)을 함께 붙이도록 요구하였다. 6월 1일, 보서루 위의 구천여 책 전적이 서판(書版)·첩석(帖石)과 함께 열다섯 개의 나무 상자에 나누어 담기기 시작하여 10일까지 모두 범씨 이곡당(詒穀堂)으로 옮겨졌고, 범씨 종로(宗老)와 공안국 순사가 밤낮으로 지켰다. 장인들이 기왓장을 모두 벗겨 낸 뒤에야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담장이 무너져 내려 많은 목재·석재·벽돌 재료를 바꾸어야 함을 발견하였다. 공정은 이에 썩은 기둥과 마루를 갈고, 벽돌 바닥을 다시 깔며 기와를 뒤집어 덮고, 앞뒤의 가산(假山)·돌길과 연못을 정비하였다. 보서루는 12월 17일에 완공되었고, 진보린·풍정군·엽겸량 및 범씨 위원 등이 20일에 함께 모여 검수하였다. 1935년 1월 10일, 장서가 이곡당에서 모두 누 위로 돌아왔다. 위원회는 그 뒤 또 닝보 부학(府學)의 존경각을 서루 북쪽으로 옮기고, 명주비림(明州碑林)과 천진재(千晉齋)를 설치하여, 이번 긴급 수리가 천일각 주변의 건축과 정원 구도를 계속 바꾸어 놓게 하였다.

중수가 완료된 지 두 해 뒤 전면 항전이 발발하자, 위원회는 막 누각으로 돌아온 진본(珍本)을 다시 옮겨 낼 수밖에 없었다. 1937년 8월, 위원회는 「외침이 절박하여 문화 기관이 더욱 위험이 많다」는 이유로, 먼저 명대의 방지(方志)·등과록(登科錄) 등을 세 상자에 담아 옮겨 내었다. 1939년에는 저장성 교육청과 저장도서관의 협조 아래, 세 차례의 장서 합계 스무세 상자 구천팔십 책을 범씨 후손 범소남(范召南)이 따라다니며 보호하면서 저장 남부의 룽취안(龍泉)으로 운반하였다. 1941년 4월 닝보가 함락되었을 때 주요 진본은 이미 누각을 떠난 뒤였고, 같은 해 6월에 중수천일각위원회는 돈과 문서·열쇠와 기구를 범씨에게 넘겨주어 사실상 활동을 멈추었으며, 범씨 후손 범영생(范盈泩)이 누각 동쪽의 작은 집에 살며 텅 빈 누각을 지키고, 노점을 펴고 누각 뒤에서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룽취안·리수이(麗水)도 뒤에 전쟁의 위협을 받게 되자, 장서는 또 1942년 8월부터 1943년 1월 사이에 저장도서관 선본을 따라 칭위안(慶元) 위상(淤上)으로 옮겨졌다. 항전 승리 뒤 이 책들은 먼저 항저우로 운반되어 돌아왔고, 1946년 12월 25일에 이르러서야 천일각으로 돌아왔다. 마애민(馬涯民)은 뒤에 기록하기를, 누각으로 돌아올 때 겨우 방지 몇 종이 모자랐을 뿐이라 하였다.

역사 문헌

《용상기구시(甬上耆舊詩)》

兵部右侍郎范公钦,字尧卿,号东明。以进士出知随州,有治行,迁工部员外郎。时大工频起,武定侯郭勋为督,其势张甚。公以事忤之,勋谮于上,下公狱,杖之阙下。出知袁州。相嵩,其郡人也。嵩子世蕃欲取宣化公宇,公不可。世蕃怒,欲斥之,嵩曰:是抗郭武定者,踣之适高其名。遂得寝。稍迁按察副使,备兵九江。历广西、福建、云南、陕西诸藩臬,进副都御史,巡抚南赣诸郡。擒剧贼李文彪,平其穴。疏请筑城程乡之濠居村,设一通判,以消豫章、闽粤之奸。复攻大盗冯天爵,斩之。迁兵部右侍郎,解组归。时郡中东沙张公、竹墟屠公亦以事废,与公并里居,投闲啸咏,主一时文柄,人称为东海三司马。而公筑居在两湖深处,舍径窅曲,林木翳然,不知在城市中。性喜藏书,于舍中起天一阁,尽购海内异本,列为四部。尤善收说经诸书及先辈诗文集未传世者。与吴门王凤洲家岁以书目取较,各钞所未见相易,故浙东藏书家以范氏天一阁为第一。卒年八十三。所著天一阁集、抚掌集。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범공 흠(范公欽)은 자가 요경(堯卿)이요 호가 동명(東明)이다. 진사로 나아가 수주(隨州)의 지주(知州)가 되어 치적(治行)이 있었고,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으로 옮겼다. 그때 큰 공사가 빈번히 일어나 무정후(武定侯) 곽훈(郭勳)이 감독이 되었는데 그 세력이 매우 뻗쳤다. 공이 일로 그를 거스르니 곽훈이 윗사람에게 참소하여 공을 옥에 내리고 궐하(闕下)에서 곤장을 쳤다. 나아가 원주(袁州)의 지주가 되었다. 재상 엄숭(嵩)은 그 고을 사람이다. 엄숭의 아들 세번(世蕃)이 선화(宣化)의 관아를 취하려 하였으나 공이 옳지 않다 하였다. 세번이 노하여 물리치고자 하니 엄숭이 말하기를 「이는 곽무정(郭武定)을 거스른 자이니, 그를 넘어뜨리면 마땅히 그 명성을 높일 뿐이다」라 하여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다. 조금 뒤 안찰부사(按察副使)로 옮겨 구강(九江)에 군비를 갖추었다. 광시(廣西)·복건(福建)·운남(雲南)·섬서(陝西)의 여러 번처(藩臬)를 지내고 부도어사(副都御史)로 올라 남간(南贛) 여러 고을을 순무(巡撫)하였다. 큰 도적 이원표(李文彪)를 사로잡아 그 소굴을 평정하였다. 상소하여 정향(程鄉)의 호거촌(濠居村)에 성을 쌓고 통판(通判) 한 명을 두어 예장(豫章)·민월(閩粵)의 간악한 자를 없앨 것을 청하였다. 다시 큰 도적 풍천작(馮天爵)을 쳐서 베었다. 병부우시랑으로 옮기고 벼슬띠를 풀고 돌아왔다. 그때 고을의 동사(東沙) 장공(張公)과 죽허(竹墟) 도공(屠公)도 또한 일로 폐(廢)하여, 공과 함께 고향에 살며 한가하게 휘파람 불고 읊조리니 한 시대의 문장의 주도권을 쥐어, 사람들이 일러 동해삼사마(東海三司馬)라 하였다. 공은 집을 두 호수 깊은 곳에 지었는데, 집의 오솔길이 아득히 굽어 있고 수목이 그늘지게 우거져 도시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성정이 책 모으기를 좋아하여 집 안에 천일각을 일으키고 해내(海內)의 진귀한 판본을 다 사들여 사부(四部)로 나열하였다. 특히 경전을 풀이한 여러 책과 선대의 시문집 가운데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모으는 데 뛰어났다. 오문(吳門)의 왕봉주(王鳳洲) 집안과 해마다 서목으로 서로 견주어 각기 보지 못한 것을 베껴 바꾸었으므로, 절동(浙東)의 장서가는 범씨 천일각을 으뜸으로 삼았다. 죽을 때 나이 여든셋이었다. 지은 것으로 천일각집(天一閣集)·무장집(撫掌集)이 있다.

公天一阁所藏书最有法,至今百余年,卷帙完善。适余选里中耆旧诗,公曾孙光燮为余扫阁,尽开四部书使纵观,因得郑荥阳、黄南山、谢廷兰、魏松云诸先生集诗,录入选中,俱前此选家所未见者,其有功吾乡文献为甚大矣。

공의 천일각 소장서는 법도가 가장 있어, 지금까지 백여 년 동안 권짝(卷帙)이 완전하고 훌륭하다. 마침 내가 고을의 기구(耆舊) 시를 뽑는데, 공의 증손 광섭(光燮)이 나를 위해 누각을 쓸고 사부(四部)의 책을 모두 열어 마음껏 보게 하매, 이에 정형양(鄭滎陽)·황남산(黃南山)·사정란(謝廷蘭)·위송운(魏松雲) 여러 선생의 시집을 얻어 뽑아 선(選)에 실었는데, 모두 이전의 선가(選家)가 보지 못한 것이니, 우리 고향 문헌에 그 공이 심히 크다.

《甬上耆旧诗》卷十七“兵部右侍郎范公钦”,清胡文学编 (『용상기구시』 권 17 「병부우시랑 범공 흠」, 청 호문학 편)

《황이주선생천일각장서기(黃梨洲先生天一閣藏書記)》

天一阁书,范司马所藏也。从嘉靖至今,盖已百五十年矣。司马殁后,封闭甚严。癸丑,余至甬上,范友仲破戒引余登楼,悉发其藏。余取其流通未广者,抄为书目,凡经、史、地志、类书,坊间易得者,及时人之集、三式之书,皆不在此列。余之无力,殆与东里少时伯仲,犹冀以暇日握管怀铅,拣卷小书短者抄之。友仲曰:“诺。”荏苒七年,未蹈前言。然余之书目,遂为好事流传。昆山徐健庵使其门生誊写去者,不知凡几。友仲之子左垣,乃并前所未列者,重定一书目,介吾友王文三求为藏书记。

천일각의 책은 범사마(范司馬)가 모은 것이다. 가정(嘉靖)으로부터 지금까지 대개 이미 백오십 년이 되었다. 사마가 죽은 뒤 봉폐(封閉)가 매우 엄하였다. 계축(癸丑)에 내가 용상(甬上)에 이르니 범우중(范友仲)이 금기를 깨고 나를 데리고 누에 올라 그 소장을 모두 펼쳐 보였다. 나는 그 유통이 넓지 않은 것을 취하여 베껴 서목을 만들었는데, 무릇 경(經)·사(史)·지지(地志)·유서(類書)로서 서점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과, 당대 사람의 문집과 삼식(三式)의 책은 모두 이 가운데 들지 않았다. 나의 힘 없음이 대개 동리(東里)의 어렸을 때와 견줄 만하여, 오히려 한가한 날에 붓을 잡고 연필을 품어 권(卷)이 작고 책이 짧은 것을 골라 베끼기를 바랐다. 우중이 말하기를 「그러하겠다」라 하였다. 어느덧 칠 년이 지나 앞의 말을 밟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의 서목은 마침내 호사(好事)하는 이들에게 전해졌다. 곤산(昆山)의 서건암(徐健庵)이 그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베껴 가게 한 것이 모두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우중의 아들 좌원(左垣)이 이에 이전에 나열하지 않은 것을 아울러 다시 한 서목을 정하고, 내 벗 왕문삼(王文三)을 통하여 장서기(藏書記)를 지어 달라 청하였다.

近来书籍之厄,不必兵火,无力者既不能聚,聚者亦以无力而散,故所在空虚。屈指大江以南,以藏书名者不过三四家。千顷斋之书,余宗兄比部明立所聚,自庚午讫辛巳,余往南中,未尝不借其书观也。今闻虞稷好事过于其父,无由一见之。曹秋岳倦圃之书,累约观之而未果,据秋岳所数,亦无甚异也。余门人自昆山来者,多言健庵所积之富,亦未寓目。三家之外,即数范氏。韩宣子聘鲁,观书于太史氏,见《易象》与《鲁春秋》,曰:“周礼尽在鲁矣。”范氏能世其家,礼不在范氏乎?幸勿等之云烟过眼,世世子孙如护目睛,则震川覆护之言,又未必不然也。

근래 서적의 화(厄)는 반드시 병화(兵火)일 필요가 없으니, 힘 없는 자는 이미 모으지 못하고, 모은 자도 또한 힘이 없음으로 흩어지므로, 곳곳이 빈터가 되었다. 손가락을 굽혀 대강(大江) 이남에 장서로 이름난 것은 서너 집을 넘지 않는다. 천경재(千頃齋)의 책은 우리 종형(宗兄) 비부(比部) 명립(明立)이 모은 것으로, 경오(庚午)에서 신사(辛巳)에 이르기까지 내가 남중(南中)에 가서는 일찍이 그 책을 빌려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듣건대 우직(虞稷)이 호사(好事)함이 그 아비를 지난다 하되 볼 길이 없다. 조추악(曹秋岳) 권포(倦圃)의 책은 여러 차례 보기를 약속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추악이 헤아린 바에 의하면 또한 심히 다른 바가 없다. 나의 문인(門人)으로 곤산에서 온 자들은 건암이 쌓은 것이 넉넉하다고 많이 말하되 또한 눈에 두지 못하였다. 세 집 밖에는 곧 범씨를 헤아린다. 한선자(韓宣子)가 노(魯)에 빈(聘)하여 태사씨(太史氏)에게서 책을 보고 《역상(易象)》과 《노춘추(魯春秋)》를 보고 말하기를 「주례(周禮)가 다 노나라에 있다」라 하였다. 범씨가 능히 그 집을 대대로 이으면 예(禮)가 범씨에 있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지나가는 연기와 구름과 같이 여기지 말고 대대로 자손이 눈동자처럼 보호한다면, 진천(震川)의 덮어 보호한다는 말이 또한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南雷集》卷二《天一阁藏书记》,清黄宗羲撰,康熙十八年(1679) (『남뢰집』 권 2 「천일각장서기」, 청 황종희 찬, 강희 18년(1679))

《전사산선생천일각장서기(全謝山先生天一閣藏書記)》

南雷黄先生记天一阁书目,自数生平所见,四库落落如置诸掌,予更何以益之?但是阁肇始于明嘉靖间,而阁中之书不自嘉靖始,固城西丰氏万卷楼旧物也。丰氏为清敏公之裔,吾乡南宋四姓之一,而名德以丰为最。清敏之子安常。安常子治,监仓扬州,死于金难,高宗锡以恩恤。治子谊,官吏部,以文名。谊子有俊,以讲学与象山、慈湖最相善,亦官吏部。有俊子云昭,官广西经略。云昭子稌,稌子昌传,并以学行为时师表。而云昭群从,曰芑、曰𦶜,皆有名。盖万卷楼之储,实自元祐以来启之。自吏部以后,迁居绍兴。其后至庚六迁居奉化,庚子茂四迁居定海。茂孙寅初,明建文中官教谕。寅初子庆,眷念先畴,欲归葬父于鄞,而岁久,其祖茔无知者,旁皇甬上。或告之曰:“城西大卿桥以南紫清观,吉地也。”庆乃卜之,遇丰之革,私自喜曰:“符吾姓矣。”是日适读元延祐《四明志》云:“紫清观者,宋丰尚书故园也。”庆大喜,即呈于官,请赎之,并为访观中旧籍,得其附观圃地三十余亩,为邻近所据者,尽清出之,遂葬其亲,而以其余治宅。庆喜三百年故居之无恙也,作十咏以志之。而于是元祐以来之图书,由甬上而绍兴,而奉化,而定海者,复归甬上。庆官河南布政,庆子耘官教授,耘子熙官学士,即以谏“大礼”拜杖遣戍者也。丰氏自清敏后,代有闻人,故其聚书之多,亦莫与比。

남뢰(南雷) 황 선생이 천일각 서목을 기(記)하여 스스로 평생 본 바를 헤아리니, 사고(四庫)가 분명하여 손바닥에 놓은 듯하니, 내가 더 무엇으로 이를 보태겠는가? 다만 이 누각은 명 가정 연간에 비로소 시작되었으나, 누각 안의 책은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 서쪽 풍씨(豊氏) 만권루(萬卷樓)의 옛 물건이다. 풍씨는 청민공(淸敏公)의 후예로, 우리 고향 남송의 네 성씨 가운데 하나이며, 명덕(名德)은 풍씨가 으뜸이다. 청민의 아들은 안상(安常)이다. 안상의 아들 치(治)는 양주(揚州)의 창고를 감독하다가 금(金)의 난에 죽으매 고종이 은혜로 구휼하였다. 치의 아들 의(誼)는 이부(吏部)에 벼슬하여 문장으로 이름났다. 의의 아들 유준(有俊)은 강학(講學)으로 상산(象山)·자호(慈湖)와 가장 서로 친하였고, 또한 이부에 벼슬하였다. 유준의 아들 운소(雲昭)는 광서 경략(廣西經略)에 벼슬하였다. 운소의 아들 도(稌), 도의 아들 창전(昌傳)은 함께 학행(學行)으로 시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그리고 운소의 종제(從弟)들로 기(芑)·(𦶜)라 하는 이들이 있어 모두 이름이 있었다. 대개 만권루의 쌓아둠은 실로 원우(元祐) 이래로 시작된 것이다. 이부(吏部) 이후로 사흥(紹興)으로 옮겨 살았다. 그 뒤 경육(庚六)에 이르러 봉화(奉化)로 옮겨 살고, 경자(庚子) 무사(茂四)에 정해(定海)로 옮겨 살았다. 무(茂)의 손자 인초(寅初)는 명 건문(建文) 연간에 교유(敎諭) 벼슬을 하였다. 인초의 아들 경(慶)은 선대의 밭을 그리워하여 아비를 영(鄞)에 돌아와 장사지내고자 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그 조상의 묘를 아는 이가 없어 용상(甬上)에서 방황하였다. 어떤 이가 그에게 말하기를 「성 서쪽 대경교(大卿橋) 이남의 자청관(紫淸觀)은 길지(吉地)이다」라 하였다. 경이 이에 점치니 풍(豐)에서 혁(革)으로 가는 괘를 만나 사사로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성씨에 부합한다」라 하였다. 이날 마침 원 연우(延祐) 《사명지(四明志)》를 읽으니 이르기를 「자청관은 송나라 풍상서(豊尙書)의 옛 정원이다」라 하였다. 경이 크게 기뻐하며 곧 관(官)에 아뢰어 속(贖)하기를 청하고, 또 이를 위해 관(觀) 안의 옛 전적을 찾아 그 관에 딸린 포전(圃地) 삼십여 무(畝)로서 이웃에게 점거된 것을 얻어 모두 말끔히 내어놓게 하고, 마침내 그 부모를 장사지내고, 그 나머지로 집을 마련하였다. 경이 삼백 년 된 옛 집터가 무고함을 기뻐하여 십영(十詠)을 지어 이를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원우 이래의 도서가 용상에서 사흥으로, 사흥에서 봉화로, 봉화에서 정해로 갔던 것이 다시 용상으로 돌아왔다. 경은 하남 포정(布政)에 벼슬하고, 경의 아들 윤(耘)은 교수(敎授)에 벼슬하고, 윤의 아들 희(熙)는 학사(學士)에 벼슬하였으니 곧 「대례(大禮)」를 간(諫)하여 곤장을 받고 변방에 귀양 간 자이다. 풍씨는 청민 이후로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 책 모은 것이 많음도 또한 견줄 이가 없었다.

迨熙子道生晚得心疾,潦倒于书淫墨癖之中,丧失其家殆尽,而楼上之书,凡宋椠与写本为门生辈窃去者,几十之六。其后又遭大火,所存无几。范侍郎钦素好购书,先时尝从道生钞书,且求其作藏书记,至是以其幸存之余,归于是阁,又稍从弇州互钞以增益之,虽未能复丰氏之旧,然亦雄视浙东焉。

이윽고 희(熙)의 아들 도생(道生)이 만년에 마음의 병을 얻어, 서음묵벽(書淫墨癖) 가운데서 몹시 기운 끝에 그 집을 거의 다 잃었고, 누 위의 책은 무릇 송간(宋椠)과 사본(寫本)으로 문생(門生) 무리에게 훔쳐 나간 것이 거의 십분의 육이었다. 그 뒤 또 큰 불을 만나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범시랑(范侍郎) 흠(欽)은 평소 책 사들이기를 좋아하여, 앞서 일찍이 도생에게서 책을 베꼈고 또 그에게 장서기를 지어 달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다행히 남은 나머지가 이 누각에 돌아왔고, 또 조금씩 언주(弇州)와 서로 베껴 이를 늘렸으니, 비록 풍씨의 옛 모습을 회복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러나 또한 절동(浙東)을 웅시(雄視)하였다.

初,道生自以家有储书,故谬作《河图石本》《鲁诗石本》《大学石本》,则以为清敏得之秘府;谬作《朝鲜尚书》《日本尚书》,则以为庆得之译馆。贻笑儒林,欺罔后学,皆此数万卷书为之厉也。然则读书而不善,反不如专己守陋之徒,尚可帖然相安于无事。吾每登是阁,披览之余,不禁重有感也。

처음에 도생은 스스로 집에 쌓아둔 책이 있다고 여겨, 이런 까닭에 그릇되게 《하도석본(河圖石本)》·《노시석본(魯詩石本)》·《대학석본(大學石本)》을 지어 곧 청민(淸敏)이 비부(秘府)에서 얻은 것으로 삼았고, 그릇되게 《조선상서(朝鮮尙書)》·《일본상서(日本尙書)》를 지어 곧 경(慶)이 역관(譯館)에서 얻은 것으로 삼았다. 유림(儒林)에 웃음거리를 남기고 뒤의 배우는 이를 속인 것은 모두 이 수만 권의 책이 그 재앙이 된 것이다. 그런즉 책을 읽고도 선하지 못하면, 도리어 제 스스로 고집하고 누추함을 지키는 무리만 못하니, 그들은 오히려 편안히 서로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다. 내가 이 누각에 오를 때마다 펼쳐 보는 나머지에, 삼가 깊이 느끼는 바가 있음을 금하지 못한다.

吾闻侍郎二子方析产时,以为书不可分,乃别出万金,欲书者受书,否则受金,其次子欣然受金而去。今金已尽而书尚存,其优劣何如也?自易代以来,亦稍有阙佚,然犹存其十之八,四方好事,时来借钞。闽人林佶尝见其目,而嫌其不博,不知是固丰氏之余耳。且以吾所闻,林佶之博亦仅矣。

내가 듣건대 시랑(侍郎)의 두 아들이 바야흐로 재산을 나눌 때, 책은 나눌 수 없다고 여겨 이에 따로 만금(萬金)을 내어, 책을 원하는 자는 책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금을 받게 하매, 그 둘째 아들이 기쁘게 금을 받고 떠났다. 지금 금은 이미 다하였으나 책은 오히려 남아 있으니, 그 우열이 어떠한가? 왕조가 바뀐 이래로 또한 조금씩 결손되고 흩어진 것이 있었으나, 그러나 오히려 그 십분의 팔이 남아 있어, 사방의 호사(好事)가들이 때때로 와서 베껴 간다. 민(閩) 사람 임길(林佶)이 일찍이 그 서목을 보고 넓지 못함을 싫어하였는데, 이것이 진실로 풍씨의 나머지일 뿐임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이 내가 들은 바로는 임길의 넓음도 또한 겨우 그 정도이다.

《鲒埼亭集》卷十七《天一阁藏书记》,清全祖望撰 (『길기정집』 권 17 「천일각장서기」, 청 전조망 찬)

《어제문연각기(御製文淵閣記)》

阁之制,一如范氏天一阁,而其详则见于御园文源阁之记。

누각의 형제(形制)는 모두 범씨 천일각과 같고, 그 자세한 것은 어원(御園) 문원각(文源閣)의 기(記)에 보인다.

《钦定日下旧闻考》卷十二《御制文渊阁记》,清乾隆帝撰,乾隆四十一年(1776) (『흠정일하구문고』 권 12 「어제문연각기」, 청 건륭제 찬, 건륭 41년(1776))

《전죽정선생천일각비목서(錢竹汀先生天一閣碑目序)》

四明范侍郎天一阁藏书,名重海内久矣,其藏弆碑刻尤富,顾世无知之者。癸卯夏,予游天台,道出鄞,老友李汇川始为予言之,亟叩主人,启香厨而出之,浩如烟海。未遑竟读。今年予复至鄞,适海盐张芑堂以摹石鼓文寓范氏,而侍郎之八世孙苇舟亦耽嗜法书,三人者晨夕过从,嗜好略相似。因言:天一石刻之富,不减欧、赵,而未有目录传诸世,岂非阙事?乃相约撰次之。拂尘祛蠹,手披目览,几及十日,去其重复者,自三代讫宋、元,凡七百二十余通,以时代前后为次,并记撰书人姓名,俾后来有考。明碑亦有字画可喜者,以近不著录,仿欧、赵之例也。余尝读《弇州续稿》中答范司马小简,有书籍互相借钞之约。今检圉令赵君碑,背面有侍郎手书“凤洲送”三字,风流好事,令人叹慕不置。顾弇山园书画,不五十年尽归它姓,而范氏所藏,阅三百年,手泽无恙,此则后嗣之多贤,尤足深羡者矣。明代好金石者,惟都、杨、郭、赵四家,较其目录,皆不及范氏之富。若于司直辈道听涂说,徒供覆瓿耳。此书出,将与欧、赵、洪、陈并传。苇舟可谓有功于前人,而考证精审,俾先贤搜罗之苦心,不终湮没,则予与芑堂不无助焉。乾隆五十二年,岁在丁未六月十九日,竹汀居士钱大昕序。

사명(四明) 범시랑(范侍郎) 천일각의 장서는 이름이 해내(海內)에 높은 지 오래되었고, 그 모아둔 비각(碑刻)이 더욱 넉넉하나, 돌아보건대 세상에 아는 이가 없었다. 계묘(癸卯) 여름에 내가 천태(天台)를 유람하며 길이 영(鄞)을 지났는데, 오랜 벗 이회천(李匯川)이 비로소 나를 위해 이를 말하여, 서둘러 주인을 두드려 향장(香廚)을 열어 이를 내니 드넓기가 연기와 바다와 같아, 다 읽을 겨를이 없었다. 올해 내가 다시 영(鄞)에 이르매, 마침 해염(海鹽)의 장기당(張芑堂)이 석고문(石鼓文)을 모사(摹)하러 범씨에 머물고 있고, 시랑의 팔세손 위주(葦舟)도 또한 법서(法書)에 깊이 빠져 있어, 세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며 기호(嗜好)가 대략 서로 비슷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천일(天一)의 석각의 넉넉함은 구양(歐)·조(趙)에 줄지 않는데, 아직 목록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어찌 결손된 일이 아니겠는가?」라 하고, 이에 서로 약속하여 찬차(撰次)하였다. 먼지를 털고 좀벌레를 쫓아 손으로 펴고 눈으로 살펴 거의 열흘에 이르러, 그 중복되는 것을 덜어내어 삼대(三代)에서 송·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칠백이십여 통(通)을, 시대의 전후로 차례로 하고, 아울러 글을 짓고 쓴 사람의 성명을 기록하여 뒷날에 고증할 바가 있게 하였다. 명(明)의 비에도 글획이 좋을 만한 것이 있으나 가까움으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구양·조의 예를 모방한 것이다. 내가 일찍이 《언주속고(弇州續稿)》 가운데 범사마(范司馬)에게 답한 짧은 편지를 읽으니, 서적을 서로 빌려 베낄 약속이 있었다. 지금 어령(圉令) 조군(趙君)의 비를 살피니 뒷면에 시랑이 손으로 쓴 「봉주가 보냄(鳳洲送)」 세 글자가 있으니, 풍류와 호사(好事)가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고 흠모하여 놓지 못하게 한다. 돌아보건대 언산원(弇山園)의 서화는 오십 년이 못 되어 모두 다른 성씨에게 돌아갔으나, 범씨가 소장한 것은 삼백 년을 지나도 손때[수택(手澤)]이 무고하니, 이것이 곧 후손의 어짊이 많음이니 더욱 깊이 부러워할 만하다. 명대에 금석(金石)을 좋아한 이는 오직 도(都)·양(楊)·곽(郭)·조(趙) 네 집인데, 그 목록을 견주면 모두 범씨의 넉넉함에 미치지 못한다. 만일 우사직(于司直) 무리의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은 다만 항아리를 덮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이 책이 나오면 장차 구양·조·홍(洪)·진(陳)과 나란히 전해질 것이다. 위주는 앞사람에게 공이 있다고 말할 만하고, 고증(考證)이 정밀하고 신중하여 앞선 어진 이들이 모으고 찾은 고심(苦心)이 끝내 묻히지 않게 하였으니, 곧 나와 기당(芑堂)도 돕지 않은 바가 아니다. 건륭 52년, 해가 정미(丁未) 유월 십구일, 죽정거사(竹汀居士) 전대흔(錢大昕) 서(序).

《潜研堂文集》卷三十八《天一阁碑目序》,清钱大昕撰,乾隆五十二年(1787) (『잠연당문집』 권 38 「천일각비목서」, 청 전대흔 찬, 건륭 52년(1787))

《닝보범씨천일각서목서(寧波范氏天一閣書目序)》

海内藏书之家最久者,今惟宁波范氏天一阁岿然独存。其藏书在阁之上,阁通六间为一,而以书厨间之,其下乃分六间,取天一生水,地六成之之义。乾隆间,诏建七阁,参用其式,且多写其书入四库,赐以《图书集成》,亦至显荣矣。余自督学至今,数至阁中翻所藏书。其金石拓本,当钱辛楣先生修《鄞县志》时,即编之为目,惜书目未编。余于嘉庆八九年间,命范氏后人登阁,分厨写编之,成目录一十卷。十三年秋,以督水师复来宁波,与宁绍台道陈君廷杰言及之。陈君请观其目,遂属府学汪教授本校其书目、金石目,并刻之。刻既成,请序焉。余闻明范司马所藏书,本之于丰氏。此阁构于月湖之西,宅之东,墙圃周回,林木荫翳,阁前略有池石,与阛阓相远,宽闲静閟,不使持烟火者入其中,其能久一也。

해내(海內)에서 장서하는 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지금 오직 닝보(寧波) 범씨 천일각이 우뚝이 홀로 남았다. 그 장서는 누각의 위에 있는데, 누각은 여섯 칸을 통하여 하나로 하고 서장(書廚)으로써 그 사이를 나누었으며, 그 아래는 이에 여섯 칸으로 나누었으니, 하늘의 하나가 물을 낳고 땅의 여섯이 이를 이룬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건륭 연간에 조서(詔)로 일곱 누각을 지을 때 그 형식을 참고로 썼고, 또 그 책을 많이 베껴 사고(四庫)에 넣었으며, 《도서집성(圖書集成)》을 하사하였으니 또한 지극히 현영(顯榮)하였다. 내가 독학(督學)으로 있은 이래 지금까지 여러 차례 누각 안에 이르러 소장된 책을 뒤졌다. 그 금석(金石) 탁본은 전신미(錢辛楣) 선생이 《영현지(鄞縣志)》를 고칠 때 곧 이를 엮어 목록을 만들었으나, 아쉽게도 서목(書目)은 아직 엮지 않았다. 내가 가경 팔구 년(1803~1804) 사이에 범씨 후손에게 명하여 누각에 올라, 서장을 나누어 베껴 엮게 하매 목록 십 권을 이루었다. 십삼 년 가을에 수군을 감독하러 다시 닝보에 와서, 영소대도(寧紹台道) 진군(陳君) 정걸(廷杰)과 이를 말하게 되었다. 진군이 그 목록을 보기를 청하매, 이에 부학(府學)의 왕(汪) 교수에게 맡겨 그 서목과 금석목을 교감(校勘)하고 아울러 새겼다. 새김이 이미 이루어지자 서(序)를 청하였다. 내가 듣건대 명(明)의 범사마(范司馬)가 소장한 책은 풍씨(豊氏)에게 근본하였다. 이 누각은 월호(月湖)의 서쪽, 집의 동쪽에 지어졌는데, 담장과 포전(圃)이 두루 돌고 수목이 그늘지게 우거졌으며, 누각 앞에 대략 못과 돌이 있어 저자(闤闠)와 서로 멀고, 너그럽고 한가하며 고요하고 그윽하여, 불을 지닌 자를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능히 오래가는 첫째 이유이다.

《天一阁书目》卷首《宁波范氏天一阁书目序》,清阮元撰,嘉庆十三年(1808) (『천일각서목』 권두 「닝보 범씨 천일각 서목서」, 청 완원 찬, 가경 13년(1808))

又司马没后,封闭甚严,继乃子孙各房相约为例,凡阁厨锁钥,分房掌之,禁以书下阁梯,非各房子孙齐至,不开锁。子孙无故开门入阁者,罚不与祭三次;私领亲友入阁及擅开厨者,罚不与祭一年;擅将书借出者,罚不与祭三年;因而典鬻者,永摈逐不与祭。其例严密如此,所以能久二也。

또 사마(司馬)가 죽은 뒤 봉폐(封閉)가 매우 엄하였고, 이어 이에 자손 각 방(房)이 서로 약속하여 규례로 삼되, 무릇 누각의 서장 자물쇠와 열쇠는 방을 나누어 맡고, 책을 가지고 누각의 사다리를 내려오는 것을 금지하며, 각 방의 자손이 모두 함께 이르지 않으면 자물쇠를 열지 않았다. 자손으로서 까닭 없이 문을 열고 누각에 들어간 자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함 세 번을 벌하고, 사사로이 친구와 벗을 데리고 누각에 들어간 자와 멋대로 서장을 연 자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함 일 년을 벌하고, 멋대로 책을 빌려 낸 자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함 삼 년을 벌하고, 이로 인하여 전당 잡히고 판 자는 영원히 물리쳐 내쫓아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규례가 엄밀하기가 이와 같으니, 이것이 능히 오래가는 둘째 이유이다.

《天一阁书目》卷首《宁波范氏天一阁书目序》,清阮元撰,嘉庆十三年(1808) (『천일각서목』 권두 「닝보 범씨 천일각 서목서」, 청 완원 찬, 가경 13년(1808))

《전사산선생천일각비목기(全謝山先生天一閣碑目記)》

阁之初建也,凿一池于其下,环植竹木,然尚未署名也。及搜碑版,忽得吴道士龙虎山天一池石刻,元揭文安公所书,而有记于其阴,大喜,以为适与是阁凿池之意相合,因即以名阁。

누각을 처음 지을 때, 그 아래에 못 하나를 파고 두루 대나무와 나무를 심었으나, 그러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비판(碑版)을 수습하다가 문득 오도사(吳道士)의 용호산(龍虎山) 천일지(天一池) 석각을 얻었는데, 원(元)의 게문안공(揭文安公)이 쓴 것이요 그 뒷면에 기(記)가 있어, 크게 기뻐하며 이 누각에 못을 판 뜻과 마침 서로 맞는다 여겨, 이에 곧 이것으로 누각을 이름하였다.

《天一阁见存书目》卷首《全谢山先生天一阁碑目记》,清全祖望撰 (『천일각견존서목』 권두 「전사산선생 천일각 비목기」, 청 전조망 찬)

옛 사진

1920~1930년대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편찬한 《중국문화사적(中國文化史蹟)》 제4집에 수록된 천일각 사진은 원 안의 못과 돌, 수목 및 건축의 한 귀퉁이를 기록하고 있다.

1934년 10월경

린주(林洙)가 편찬한 《중국고건축도전(中國古建築圖典)》에는 별도로 보서루(寶書樓)와 원 안의 태호석(太湖石)을 담은 세 폭의 조사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책에는 구체적인 촬영 날짜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중국영조학사 활동 연표에 의하면, 1934년 10월 량쓰청(梁思成)·린후이인(林徽因)·류즈핑(劉致平)이 저장(浙江)으로 고찰을 갔는데 그 노선이 분명히 닝보를 지났으므로, 이 세 사진은 대략 1934년 10월에 촬영된 것이다.

1933년~1960년대

1934년의 검서입궤(檢書入匱), 보서루 검서, 장서 이장 및 수익(修葺) 착공의 다섯 사진은 원래 중수천일각위원회가 편찬한 《수익천일각기념책(修葺天一閣紀念冊)》(1934년, 국가도서관 소장)에 실렸다. 그 가운데 세 사진은 천일각박물관 공식 위챗이 공개한 영상을 채용하였고, 두 폭의 「보서루 검서 사진」은 국가도서관 스캔본에서 가져왔다. 나머지 수선 옛 사진은 박물관이 2019년에 개최한 「고각기억 — 천일각 근현대 역사 영상전」에서 볼 수 있다.

1933년 9월 태풍이 지나간 뒤 보서루 동쪽 담장이 기울어 무너져, 벽체와 지붕과 목구조가 밖으로 드러났다.

6월 1일, 중수천일각위원회는 책을 점검하여 상자에 넣고 보서루에서 책을 점검하였다. 6월 10일, 누각의 장서가 범씨 이곡당(詒穀堂)으로 옮겨 보관되고, 보서루는 지붕을 뜯어내고 목구조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장인들은 또 원 안의 구조물을 정비하였다. 원래 닝보 부학(府學)에 있던 존경각(尊經閣)도 이 단계에 천일각으로 옮겨 들어왔다.

수선이 완료된 뒤의 사진은 보서루, 천일지(天一池) 및 주변 정원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1960년대의 사진은 뒤에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천일각 서문(西門)을 기록하고 있다.

참고 자료